#275
뾰족한 가시가 날아다니는 듯한 긴장감이 흘러넘쳤다. 두 손을 꽉 모아 쥔 채 숨을 죽이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칼리온은 입술을 움찔거리기만 할 뿐 복잡한 머릿속 시선이 시계추처럼 그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던 그때, 칼리온이 경직된 표정으로 말했다.
“실은 예전에 본 적이 있습니다. …그 금빛 날개를.”
칼리온이 그 마물의 본모습을 봤을 리는 없다. 그럼 대체 뭐지? 혹시나 하는 눈빛으로 유피테르를 흘끔 쳐다봤지만, 그 또한 모르는 눈치였다. 이내 칼리온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래 전 사고에서 절 구해 주셨잖습니까. 바다에 빠져 의식이 몽롱해지던 그때, 저를 건져 올린 당신의 모습을 봤습니다.”
예전에 칼리온이 말했었다. 어릴 적에 사고로 죽을 뻔했었다고. 다행히 칼리온은 유피테르가 구해준 덕분에 살았지만, 그의 동생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칼리온은 그날을 회상하는 듯 지그시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당시엔 생사를 헤매고 있어 환상이라도 봤나 싶었지만… 꿈이 아니었군요.”
설마 그때 자신을 구하러 온 유피테르의 날개를 봤을 줄은 짐작도 못했다. 유피테르도 칼리온이 그 상황을 기억할 줄 미처 몰랐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얼마간 침묵이 흐른 뒤 칼리온은 유피테르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째서 당신 같은 분께서 인간 행세를 하고 계신 겁니까?”
꿈에도 모를 것이다. 에브게니아 1세가 유피테르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그리고 카르사 제국을 세운 선황의 진짜 정체가 무엇인지. 어쩌면 진실을 숨기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야 칼리온은 미노스 황제처럼 되길 누구보다 걱정하고 있었으니까.
‘있지. 태오. 나도 언젠가 아버지처럼 될까? 내게도 에브게니아의 피가 흐르잖아.’
만약 미노스뿐만 아니라 에브게니아가…. 아니, 카르사 제국의 핏줄이 처음부터 잘못되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웬만한 일에도 끄떡없는 칼리온일지라도 충격받겠지. 하지만 장차 나라를 이끌어 나갈 태자라면 이겨 내야 할 터였다.
유피테르를 대신해서 칼리온에게 전부 털어놓았다. 잘못된 역사를 하나씩 바로잡아 줄수록 칼리온의 얼굴은 굳어 갔고, 끝내 제국의 역사를 시작한 선황이 소멸되었다는 소식엔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예…?”
“더 이상 이 세계에 그는 없어요.”
순식간에 얼이 빠진 칼리온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각기 다른 감정이 그의 눈동자를 스쳐 지나갔다. 살짝 떨리는 손으로 쓸어내린 얼굴은 한층 창백해져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칼리온은 완전히 진이 빠진 표정으로 유피테르에게 물었다.
“진실에 대해 아는 사람이… 저 말고 또 누가 있죠?”
“선대 에브게니아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네.”
“이걸 아버지께서도 모르셨다니….”
섣불리 믿지 못하는 듯했다. 몇 번이고 고개를 내젓던 칼리온은 급기야 의심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의심이 스스로를 향한 것인지, 거짓으로 점철된 카르사 제국을 향한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이 모든 진실을 부정하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혼란스러워하는 칼리온을 가만히 바라보던 유피테르는 이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렴 이젠 상관없네. 더는 황실과 얽히고 싶지 않으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유피테르는 무표정하게 칼리온을 내려다보았다. 냉랭하게 빛나는 금색 눈동자엔 일말의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봐 온 칼리온에게조차 분명한 선을 그으려는 것 같았다. 아무리 우리를 도왔다고 할지언정 그도 에브게니아의 혈통임은 틀림없으니까.
유피테르를 붙잡지도 따라가지도 못하던 그때,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기다려주세요.”
칼리온이 유피테르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뭐지?”
퍽 날카로운 어투가 칼리온에게 꽂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리온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대체 무얼 하려는 건지 몰라 일단 그들을 따라 일어났다. 애매하게 사이에 껴서 무슨 일이 일어나거든 말리려고 했다. 그런데 칼리온이 내 손이 닿기도 전에 먼저 움직였다.
“이제라도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태자 칼리온이, 유피테르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저의 선조가 그간 당신에게 저지른 무례에 깊은 사죄의 말씀을 올립니다.”
황제는 그 누구에게도 절하지 않는다. 대사제의 앞에 무릎을 꿇는 행동도 그가 따르는 신을 향한 존경의 표시일 뿐이다. 물론 칼리온이 아직 태자라고는 하지만, 곧 황제가 될 몸이다. 그런데 유피테르에게 사죄의 의미로 절을 올린다니- 결코 예사로운 일은 아니었다.
유피테르도 다소 놀란 듯 눈살을 찌푸렸다.
“결과적으로 네가 저지른 일은 아니잖나.”
“저는 에브게니아의 혈통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러니 당신의 희생으로 일군 나라에서 곧 황제가 될 제가 마땅히 사과할 일이죠.”
진중한 목소리에 유피테르는 말문을 닫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의 말마따나 모든 건 선조의 죄에 불과했다.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벌어진 일에 대해 칼리온이 책임질 필요는 없다. 하지만 칼리온은 진심으로 사죄의 뜻을 비치며 말했다.
“염치없지만,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부탁이라. 과연 용서를 빌까. 아니면, 세간에 진실을 숨겨 달라고 말할까. 나라를 끔찍하게 아끼는 칼리온이라면 정세의 안정을 위해 후자를 부탁할 것도 같았다. 유피테르가 어디 한 번 말해 보라는 듯 눈을 깜빡이자 칼리온이 침착히 말했다.
“당신에게 얽매인 계약을 제가 거둬 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죠.”
전혀 예기치 못한 부탁이었다.
‘위대한 에브게니아의 이름 아래 카르사 제국이 영원하기를.’
그 계약은 에브게니아 1세가 봉인된 유피테르를 풀어 주면서 채운 또 다른 족쇄였다. 그런데 그걸 자의로 풀어 주겠다니, 반가우면서도 의아한 결정이 아닐 수 없었다. 유피테르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칼리온을 노려보며 속을 떠보았다.
“계약이 끝난 후에 내가 제국에 무슨 짓을 할지 두렵지 않나.”
“그건 제가 짊어져야 할 책임이겠죠.”
단호한 어조에 유피테르는 픽 바람이 새듯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이윽고 그는 칼리온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이 이야길 듣고도 결심이 그대로일지 궁금하군.”
“예?”
“역대 황제들도 모르는 비밀을 자네에게만 알려 주지.”
갑작스러운 제안이 영 반갑지만은 않았는지, 칼리온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에도 유피테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 자 한 자 짓씹듯 말을 꺼냈다.
“지금껏 에브게니아엔 황위 계승으로 인한 전쟁은 한 번도 없었지. 왜인 줄 아나?”
“황권 교체가 있을 때마다 직계 계승자가 한 명만 남아 있었기 때문 아닙니까.”
“그래. 네 아비인 미노스의 형은 낙마 사고로 죽고, 동생은 사냥을 나갔다가 말벌에 쏘여 사망했지. 역대 황제들의 형제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네 선조들은 늘 이렇게 말했었지.”
유피테르는 칼리온의 뺨을 손등으로 찬찬히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신께서 나를 선택하셨다.”
귓속을 파고드는 목소리에 칼리온은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그의 휘둥그레진 눈은 두려움보다는 속내가 간파되어 당황한 듯 보였다. 그 사실을 눈치 챈 유피테르는 냉소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자네도 그리 생각했나보군.”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칼리온은 고개를 푹 떨구며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그간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시식 시종이 독을 먹고 쓰러지는 일은 이제 놀랍지도 않습니다. 선물 받은 찻잎에선 시도 때도 없이 맹독이 발견됐고, 우연히 가려다가 만 연회장에선 화재 소식이 들려왔죠.”
헛웃음을 띤 그의 입가엔 인생의 애환이 드러나 있었다.
“암살 시도가 빈번히 일어나는데도 끈질기게 살아남았습니다. 심지어 폰토스 해로 여행을 갔다가 폭풍에 휩싸인 적도 있었죠. 그 사고로 선원들은 물론이고 동생까지 전부 잃었습니다. 다행히 당신께서 구해 주셔서 저만 살아 남았….”
줄줄이 쏟아내던 칼리온이 우뚝 말을 멈췄다. 별안간 어떤 사실을 떠올렸는지, 그의 눈동자가 쉴 새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깜빡이는 불빛처럼 정신없이 돌아다니던 그의 시선은 곧 유피테르에게 닿았다.
“설마….”
마른침만 꿀꺽 삼키는 칼리온에게서 두려움이 드러났다. 갑자기 왜 그러나 의아하기도 잠시, 그 이유를 어림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 칼리온은 계속되는 암살시도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어째서 그 사고에서 칼리온만 구출된 걸까. 그리고 왜 역대 에브게니아엔 직계 계승자가 단 한 명만 존재했는가. 단순 우연이라 치부하기엔 마치 규칙처럼 반복되는 역사였다. 마치 누가 개입한 것처럼.
“이제야 안 것 같군.”
유피테르는 입가에 머금은 냉소마저 지우고선 덤덤하게 말했다.
“왕위 다툼은 나라를 약하게 만드는 원인 중 하나지. 그러니 여러 주변국은 늘 제국이 내부에서 분열되길 바라왔네. 하나, 나와 계약한 에브게니아는 그런 일말의 가능성조차 없애 달라고 했지.”
“그래서….”
“그의 바람대로 여태 제국을 이을 핏줄은 단 하나만 남겨 왔네. 아무도 의심하지 못하도록 사고로 위장해 하나씩 없애 왔지.”
뒤통수를 맞은 듯 정신이 명해졌다. 에브게니아의 만행은 내가 아는 게 끝인 줄 알았는데, 그보다 더한 게 남아 있었다. 어떻게 제국을 위해 자신의 자손을 죽여 달라 할 수 있는가. 심지어 그 잔혹한 짓을 유피테르에게 부탁했다니, 충격에 휩싸여 말도 안 나왔다.
그런데 유피테르는 오히려 무덤덤하게 칼리온에게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었다.
“알겠나. 칼리온. 네 동생과 백부를 죽인 건, 바로 나다.”
어째서 지금 모진 말을 꺼내는 걸까. 설마 칼리온이 가진 죄책감을 덜어 주려고? 아니면, 어떻게든 자신을 미워하게 만들려고? 무슨 이유든 이 자리에 유피테르를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 한 번 진실의 폭풍우 앞에 선 칼리온은 넋 나간 사람처럼 띄엄띄엄 말했다.
“그랬…군요. 줄곧… 뭔가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이 막연히 들긴 했지만…, 이런 이유였을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이라도 알았으면 됐네. 그러니 더 생각할 시간을 주지.”
냉정한 말투 속 유피테르의 진심이 느껴졌다. 자신에게 해로운 계약을 깨 준다는데도 그는 끝까지 칼리온을 생각해 주고 있었다. 우리를 도와줬기 때문일까? 어쩌면 그는 자신을 애칭으로 부르며 따르던 칼리온을 제 아들처럼 여기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막 유피테르가 자리에서 일어나 멀어지자 칼리온이 그의 등에 대고 말했다.
“아뇨. 그 사실을 알아도 제 결심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선조의 맹약을 제 손으로 깨겠습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초점이 사라져 있던 칼리온의 눈동자에 총기가 돌아왔다.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나올 줄은 몰랐는지, 유피테르는 의아한 표정으로 칼리온을 돌아보았다. 이내 유피테르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서 넌지시 물었다.
“나를 원망하지 않나?”
“예? 원망이라뇨. 애초에 원해서 벌이신 일도 아니잖습니까.”
칼리온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보다 당신을 더 자주 봐 왔습니다. 그래서 잘 압니다. 결코 원해서 피를 보실 분이 아니라는 걸.”
오늘 처음으로 칼리온의 얼굴 가득 미소가 흘렀다. 누굴 믿고 따라야 할지 결심을 끝낸 그는 오히려 후련해 보였다. 계속해서 선을 긋던 유피테르도 결국 칼리온에게 그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챈 모양이다. 체념한 듯 한숨을 푹 내쉬며 점잖이 손을 내밀었다.
“그만 일어나게. 일국의 황제가 될 자가 이러고 있으니 썩 보기 좋진 않군.”
“하하, 걱정해 주시는 건가요?”
쾌활하게 웃은 칼리온은 냉큼 유피테르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언제 그랬냐는 듯 농담을 던지는 모습이 정말로 그다웠다. 갑자기 긴장의 끈이 풀리니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섣불리 그들 사이에 끼어들지 않았다. 아직 그들끼리 풀어야할 응어리가 남아 있었으니까.
구겨진 옷을 정리한 칼리온은 한결 홀가분해진 투로 말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되죠?”
유피테르는 마법으로 단검을 만들어 칼리온에게 내밀었다.
“순수한 에브게니아의 피가 필요하네.”
“그 정도야 쉽죠.”
단검을 건네받은 칼리온은 단숨에 제 손바닥을 그었다. 아플 만도 한데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이내 예리한 상처 사이로 새빨간 피가 송골송골 돋았다. 황제가 없는 이 황실에서 유일하게 ‘순수한 에브게니아의 피’였다.
유피테르는 피가 맺힌 칼리온의 손을 잡고 나지막이 말했다.
“이제 내 말을 따라하게.”
칼리온이 선뜻 고개를 끄덕이자 유피테르는 주저 없이 주문을 읊조렸다.
“나, 칼리온 데우 에브게니아는 이 시간부로 에브게니아의 혈통에 얽힌 모든 계약을 포기하겠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숨을 훅 들이쉬었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 정말 이대로 계약이 끝나는 걸까. 유피테르가 ‘아스레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게 된 계기이자, 오랜 시간 황실을 떠나지 못했던 이유가 이제 사라진다. 유일하게 프로메테우스의 지배에서 벗어난 칼리온의 이름하에, 초대 에브게니아부터 이어진 기나긴 희생의 역사가 막을 내린다.
도무지 믿기지 않아 숨을 죽인 채 기다리고 있으니 곧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칼리온 데우 에브게니아는.”
이윽고 칼리온은 유피테르의 손을 맞잡으며 당당하게 선언했다.
“이 시간부로… 에브게니아의 혈통에 얽힌 모든 계약을 포기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