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4 (274/305)

#274

모든 일이 끝나면 마냥 후련해질 줄 알았다. 하지만 후련하긴커녕 온갖 감정이 뒤엉켜 마음 한 구석에 응어리만 남아 버렸다. 마치 오랜 장마가 끝나고 해가 떴지만, 가느다란 빗줄기는 아직 그치지 않은 것처럼 이루 말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이젠 시신과 핏자국까지도 빛이 되어 사라지고 판도라였던 유리 파편만 남았다. 이 세상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그의 유일한 유품이었다. 가만히 손에 담긴 파편을 바라보다가 유피테르에게 내밀었다.

“여기요.”

“음?”

“데우스도 이걸 유피테르가 갖고 있길 바랄 거예요.”

잠시 고민하던 유피테르는 이내 마지막 기억 조각을 받아들었다. 지긋이 파편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엔 착 가라앉은 빛이 감돌았다. 그것이 후회로 보이기도, 연민과 슬픔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먼발치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오케아노스가 다가와 넌지시 물었다.

[그를 없앤 걸 후회하시는 겁니까?]

“…아니. 이건 해야만 하는 일이었네.”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은 유피테르는 파편을 재킷 안에 넣었다. 벌써 마음의 정리를 끝낸 걸까. 아니면, 예견된 결말이기에 담담한 걸까. 그래도 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는 것 같던 그의 어깨가 한결 가벼워 보였다.

이윽고 유피테르는 오케아노스와 닉스를 번갈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자네들에게도 그간 상처를 줬다면 미안하군.”

예기치 못한 발언에 닉스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갑자기 뭐야? 미쳤어?]

“그게 사과에 대한 답인가?”

[아니… 그건 아니지만….]

당황해하는 닉스와 달리 오케아노스는 퍽 차분한 투로 답했다.

[설마요. 당신께서 과거에 무슨 일을 했든 제 충심은 변하지 않습니다.]

바다보다 맑은 눈동자가 총명하게 빛났다. 유피테르를 바라보는 표정만 봐도 얼마나 그를 아끼고 존경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와 반대로 닉스는 쉬이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데우스와 관련된 일보다 유피테르의 사과 자체가 더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한참동안 의심하는 눈초리로 흘겨보던 닉스는 끝내 한숨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됐어. 어차피 다 지난 일이잖아.]

그 말을 끝으로 닉스는 순식간에 그림자가 되어 사라졌다. 아무래도 혼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듯했다. 그 후로 오케아노스도 한 손을 가슴에 올려 정중히 인사하며 말했다.

[그럼 저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언제든 제가 필요해지시거든 불러 주시길.]

별안간 물안개가 밀려오더니 오케아노스까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갑자기 조용해지니 마치 모든 게 꿈처럼 느껴졌다. 프로메테우스와 벌인 치열한 접전도, 마침내 유피테르가 돌아온 것도 전부 현실감이 없었다.

왠지 멍해져서 허공을 바라보고만 있다가 불현듯 중요한 사실이 떠올랐다.

“히페리온….”

“음?”

“히페리온을 보러가요. 아무래도 제 눈으로 직접 봐야 될 것 같아요.”

히페리온이 괜찮다는 소릴 들었음에도 여전히 불안했다. 그 마음을 이해하는지, 유피테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이동 마법이라도 쓰나 했건만, 갑자기 눈앞에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금빛으로 찬란히 번득이는 그것은 유피테르의 날개였다. 거대한 날개가 시야를 가려 마치 오로라가 내 몸을 감싼 듯했다. 넋 놓고 구경하기도 잠시, 이대로 날아오르려나 싶어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그런데 그의 날개는 한참이 지나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왜 그래요?”

자그맣게 속삭이며 고개를 들자 유피테르가 어딘가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시선을 따라 돌아보니 마치 해가 뜨듯 언덕 너머가 점점 밝아졌다. 심지어 불빛은 빠른 속도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뭐지? 점점 가까워지는 기척에 귀를 기울이니 철커덩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갑옷으로 무장한 발소리처럼 느껴져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설마 황제의 군인가? 경계가 고조되던 그때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쪽에서 느껴집니다!”

언덕 위로 투구가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역시나 철갑옷으로 중무장한 병사들이었다. 심지어 눈대중으로 새도 족히 백 명은 넘어보였다. 곧바로 유피테르는 나를 지키려는 듯 한쪽 날개로 내 앞을 살짝 가로막았다.

앞서서 횃불을 들고 오던 병사가 그 광경을 가장 먼저 목격하곤 우뚝 멈춰 섰다.

“저, 저게 뭐야….”

겁에 질린 목소리에 수많은 병사가 유피테르를 바라보았다. 거대한 날개와 태양을 닮은 금빛에 병사들은 일제히 굳어 버렸다. 몇몇은 들고 있던 창까지 떨어뜨리고 몸을 덜덜 떨었다. 갑자기 행군이 멈추자 뒤에서 누군가 무리를 가르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러느냐.”

당당하게 병사 앞에 선 사람은 다름 아닌 칼리온 태자였다.

“…어?”

익숙한 얼굴이 튀어나와 당황한 나와 달리 칼리온은 아직 우리를 알아보지 못한 눈치였다. 경계 어린 눈빛으로 살펴보더니 횃불을 들며 “누구냐!”라고 소리쳤다. 비현실적인 광경을 보고도 정체를 물을 수 있는 것 자체가 대단한 배짱이었다.

별안간 태자를 마주친 유피테르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히페리온을 보러가는 건 잠시 미뤄야겠군.”

깊이 동감하는 바였다. 적이 아니라서 다행이지만, 곤란한 상황인 건 매한가지였다.

유피테르는 쯧 혀를 차며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눈앞의 병사들이 갑자기 병든 닭처럼 픽픽 쓰러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전부 의식을 잃어 칼리온 혼자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다급히 주변을 둘러보는 그의 표정에서 당혹감과 두려움이 짙게 묻어났다.

“무슨… 짓을 한 거지?”

지금쯤 도망칠 만도 한데, 칼리온은 제자리를 지켰다. 제 부하를 버리고 갈 수 없다는 건가. 당장이라도 칼을 뽑을 기세로 몸을 낮추는 모습이 제법 늠름했다. 물론 칼자루에 얹은 손이 파르르 떨리는 게 여기까지 보이긴 했지만.

유피테르가 날개를 거두고 성큼성큼 다가가자 칼리온의 안색이 점차 창백하게 변했다. 겁에 질려 유피테르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다. 결국 어느 정도 다가가서 멈춘 유피테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칼리온.”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리자 칼리온의 어깨가 크게 움찔거렸다. 아예 미간까지 찌푸리며 유심히 유피테르를 쳐다보던 그의 눈동자가 서서히 커졌다. 뒤늦게 정체를 알아차린 것이다.

“…아벨?”

“그래.”

“이게 무슨….”

칼리온은 꼭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입을 벌리고 유피테르를 쳐다보았다. 얼마나 놀랐는지, 그 자리에 목석이 되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빠질 듯 커다래진 눈동자는 뒤에 있던 나를 발견하곤 더더욱 커졌다.

“태오까지…. 설마 적의 마법인가?”

혼잣말을 들은 유피테르는 조용히 손을 올리며 말했다.

“믿지 못하겠거든 어쩔 수 없지.”

바닥에 누워있는 병사들처럼 칼리온도 재워 버리려고 마음먹은 것이다. 유피테르가 마법을 쓰려는 순간 칼리온이 다급하게 손을 들며 말했다.

“자, 잠깐만요. 설마 저까지 저렇게 만드시려는 건가요.”

“저렇게라는 건?”

칼리온은 불안한 눈짓으로 재빨리 바닥에 쓰러진 병사를 가리켰다. 그러자 유피테르가 살짝 턱을 치켜들며 무덤덤하게 답했다.

“그렇다면?”

“일단 평화롭게 말로 하시죠.”

애써 웃는 얼굴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 지켜보던 유피테르는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회유가 통했다고 생각했는지, 칼리온은 크게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긴 일렀다.

“황실로 돌아가지.”

“예? 하지만 이 많은 인원을 어떻게 다 데리고….”

“훈련장이면 되겠나?”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과 함께 별안간 바닥이 빛나기 시작했다. 갑자기 온몸을 휘감는 광휘에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게슴츠레 눈을 뜨니 웬 나무 벽으로 둘러싸인 공터에 서있었다. 줄 세워 놓인 목각 인형과 보란 듯이 진열되어있는 창을 보고 나서야 알아챘다. 이곳이 유피테르가 말한 황성의 훈련장이라는 걸.

“…말도 안 돼.”

칼리온은 적잖이 당황한 듯 연신 주변을 둘러보았다. 넓은 훈련장엔 기절한 병사들이 나란히 누워있었다. 유피테르가 이동 마법으로 그들까지 한 번에 옮겨 버린 것이다.

지금껏 이동 마법을 쓰기 위해선 반드시 마법진을 필요로 했다. 그런데 두 뿔이 온전해진 그는 주문도 없이 이 많은 사람을 단숨에 이동시켰다.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할 실력이었다. 새삼 대단함을 느끼면서도, 그동안 한쪽 뿔이 없어 얼마나 불편했을지 상상도 안 됐다.

실감이 나지 않아 멍하니 서있는데, 머리 위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나?”

“예? 아, 네.”

“속이 울렁거리거나….”

“저, 전혀요.”

괜찮은 걸 넘어서 이동하는지도 몰랐다. 냉큼 고개를 끄덕이자 유피테르는 자연스럽게 내 어깨를 감싸며 걸음을 옮겼다. 뒤에 칼리온이 따라오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훈련장 옆 건물로 들어갔다.

훈련을 보러 온 귀족을 위한 공간인지, 평범한 접견실처럼 꾸며져 있었다. 유피테르는 마치 제 집 안을 드나들듯 익숙하게 가선 의자에 앉았다. 얼마 후 칼리온이 미묘하게 긴장한 표정으로 들어와 맞은편에 앉았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유피테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게 묻고 싶은 게 있거든 지금 하게.”

퍽 고압적인 말투에 칼리온이 마른 침을 삼키며 말했다.

“예전부터 익히 들어왔어요. 선대 아스레인이 마법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죠. 그래서 당신이 어떤 마법을 쓰든 대마법사의 후예이니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건….”

띄엄띄엄 말을 꺼내는 목소리엔 긴장이 역력히 묻어났다.

“마법진과 주문도 없이 이정도 마법을 쓸 수 있는 건, 이미 인간의 한계를 넘었어요.”

“…….”

“게다가 그 금빛 날개까지….”

줄곧 혼란스러워하며 이곳저곳을 헤매던 시선이 겨우 유피테르에게 닿았다.

“아벨. …당신은 대체 누구죠?”

마침내 칼리온이 비밀의 문 앞에 도달했다. 유피테르는 칼리온에게 있어서 아버지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어릴 때부터 지켜봐 왔기에 칼리온은 그를 대부로 여긴다고 했다. 그런데 하나뿐인 내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생각지도 못한 존재라고 하니, 그 충격은 이로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나도 유피테르의 정체를 알았을 때 기함을 토했으니까.

손에 땀을 쥘 정도의 긴장감이 맴돌았다.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는 나조차도 숨을 함부로 내쉴 수가 없었다. 오직 유피테르만이 팽팽한 줄을 가지고 놀듯 여유로웠다.

한동안 칼리온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피테르가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자네에겐 예전부터 나쁜 버릇이 있었지.”

“무슨….”

“모든 걸 눈치 챘으면서도 괜히 떠보곤 하지 않았나.”

제대로 정곡을 찔렸는지, 칼리온은 어찌할 줄을 몰랐다. 늘 미소로 무장하고 있던 그가 이토록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유피테르는 멈추지 않고 칼리온을 몰아세웠다.

“지금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어느새 유피테르의 몸에서 흘러나온 마력이 방안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말해보게.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나.”

압도적인 힘에 밀린 칼리온은 마치 궁지에 몰린 쥐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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