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1 (271/305)

#271

빛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푸른 불꽃이 피어올랐다. 태울 거리 하나 없는 벌판에서도 불꽃은 마치 메마른 겨울의 산불처럼 강렬한 기세로 일렁거렸다. 꺼지지 않는 불꽃은 전능한 신의 상징이요, 인간의 역사를 비춰 온 등불이다. 그러나 실상은 숱한 생명을 태워 만들어진 영광일 뿐이다.

모든 것을 집어 삼킬 기세로 퍼지던 불길은 끝내 영원한 나무까지도 불사르고 말았다.

“히페리온!”

그의 머리카락이 끝에서부터 하얗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웃을 때마다 나뭇결처럼 주름이 지던 얼굴엔 점차 창백해졌고, 따스한 햇볕 같은 눈빛은 서서히 희미해졌다. 신력에 삼켜져 싱그러운 녹음이 시들어가는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안 돼….”

한 차례 폭풍이 지나간 후, 히페리온은 힘없이 쓰러졌다. 그의 머리가 바닥에 닿기 직전에 다급히 두 손을 뻗어 끌어안았다. 그대로 조심스럽게 바닥에 눕히자 핏기 없는 얼굴이 유독 눈에 띠었다.

거짓말이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지그시 감은 눈은 미동조차 없었다. 치자 꽃향기는 여전히 한창인데, 그 꽃을 함께 보자고 약속한 사람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현실을 부정하며 떨리는 손으로 그의 뺨을 쓸었다. 차가운 살갗을 만지는 순간 불에라도 덴 듯이 손을 거둬들였다.

그때 갑자기 어깨 위로 손이 척 올라왔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이카로스가 곁을 지키고 있었다. 뒤늦게 히페리온의 상태를 확인한 그는 당황한 듯 물었다.

[다치신 겁니까?]

“저를 감싸다가….”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가 죽었을 것이라고 믿고 싶지 않다. 다시금 손을 뻗어 조심스레 히페리온의 가슴께에 얹었다. 그러자 손끝에 희미한 마력이 느껴졌다. 잔잔한 물결이 나뭇잎을 건드리듯 작지만, 분명한 그의 기운이었다. 아직 코어까지는 신력이 침범하지 않은 것이다.

희망이 있다. 일단 놈에게서 멀어지기만 한다면…!

문득 고개를 들자 저 멀리 끊임없이 충돌하는 빛이 보였다. 검은 연기가 범람하는 빛을 막으려 고전하고 있었다. 닉스 혼자서 신전에 있는 신력까지 전부 흡수한 프로메테우스를 상대하긴 힘들 것이다.

“이카로스.”

그의 옷자락을 바짝 붙잡고 가만한 소리로 속삭였다.

“히페리온을 데리고 어서 이 산을 떠나요.”

[함께 가시죠.]

“아뇨. 여기 있을게요. 닉스 혼자는 힘들 거예요.”

이카로스는 선뜻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했다. 이 수라장에 혼자 두고 가라는 말이 얼마나 이기적인지 알고 있지만, 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이대로 있다간 히페리온까지 잃고 말 것이다.

“부탁이에요.”

간곡한 청에 결국 이카로스는 히페리온을 부축하며 일어섰다. 하늘로 날아오르기 전, 이카로스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서 복잡한 감정이 읽혀 애써 미소를 지으며 그를 보냈다.

저녁 하늘을 가로지르는 붉은 날개를 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아그누스. 오케아노스를 불러와 줘.”

명령에 대답하듯 그림자가 조용히 일렁거렸다. 이윽고 시선을 돌리자 활활 타오르는 푸른 불길 사이로 전전하는 닉스가 보였다. 방금 전까지의 여유는 완전히 사라지고, 공격을 막는 데만 급급해했다. 하지만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도 닉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끊임없이 기회를 노리고, 또 노릴 뿐.

그 와중에도 신력은 계속해서 프로메테우스에게 몰려오고 있었다. 신앙심이 사라지거나, 신이 소멸해야만 이 지겨운 싸움이 끝날 것이다. 무수히 뻗어오는 빛줄기에 절망하던 그때였다.

“…헤메라 님.”

왠지 모르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뇌리에 박혔다. 곧 떨리는 음성의 주인이 테세스임을 알아챘다. 그뿐이 아니었다. 테세스를 시작으로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다양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아니, 헤메라를 향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염원엔 강력한 힘이 있다고 하던가. 그들의 소망을 담은 빛이 내게 스며들고 있었다. 어쩌면 이 힘으로 프로메테우스의 공격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목에 걸고 있던 정화석을 빼내자 갇혀 있던 신력이 단번에 밀려나왔다.

“윽…!”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신력을 버티지 못해 몸이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두 다리는 후들거리고, 손은 더욱 격렬하게 떨렸다. 심지어 사람들의 기도가 계속 머릿속으로 비집고 들어와 누군가 쉴 새 없이 속삭이는 것 같았다.

부서질 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비틀거리는데, 쿵!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얼른 고개를 들자 절벽에 무참히 박힌 닉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 앞에 창을 들고 서있는 프로메테우스의 뒷모습엔 자비 따위 없었다.

“닉스!”

급히 닉스를 향해 달려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내가 단신으로 나타나자 프로메테우스는 한쪽 눈썹을 슬쩍 올리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 그래. 유흥이 이리도 쉽게 사라지면 안 되지.

이윽고 허공에서 다시 한 번 화살비가 내렸다. 지체 없이 신력으로 결계를 만들어내자 놈의 입꼬리가 샐쭉 올라갔다. 반뜩이는 눈은 꼭 재밌는 구경거리를 발견한 아이와 같았다. 어디 한 번 버텨보라는 듯 빗줄기는 더욱 굵어졌다.

그 사이 의식이 돌아온 닉스가 반쯤 잠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헤메라…?]

뒤를 돌아보니 닉스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함께 싸우던 이카로스가 사라졌으니, 한계까지 몰린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설상가상 닉스의 기진맥진한 모습이 방금 전 쓰러졌던 히페리온과 겹쳐 보여 더는 미룰 수 없었다.

“이 틈에 도망쳐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닉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내가 어떻게 널 두고 가겠어.]

“전 괜찮아요. 그러니까 어서요.”

머지않았다. 아스레인이 곧 봉인을 풀고 돌아올 거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그때까지, 더 이상 아무도 다쳐선 안 된다. 비록 저쪽 세계에서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냈지만.

“이 세계에선… 아무도 잃고 싶지 않아요.”

진심 어린 호소에 닉스가 혼란스러운 듯 여러 번 눈을 깜빡거렸다. 그 순간 쩍 하는 소리와 함께 결계가 깨지고 말았다. 바로 결계를 펼치려했지만 그보다도 먼저 놈의 신력이 내 팔을 속박했다. 벗어나려 몸부림칠수록 손목을 묶은 힘이 점점 강해져 살갗을 파고들었다.

[헤메라!]

곧바로 닉스가 나를 구하려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날카로운 창날이 정확히 내 목 앞에 놓여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닉스는 프로메테우스 주변을 메운 검은 연기를 스스로 거둘 수밖에 없었다.

바닥으로 끌어당기는 힘에 털썩 무릎을 꿇자 프로메테우스는 기분 좋은 미소를 흘렸다.

- 참으로 눈물겨운 희생이로구나.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 고개를 숙이니 뾰족한 창이 턱을 억지로 들어올렸다. 독기 어린 시선으로 노려봤지만, 그마저도 프로메테우스의 유흥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아예 신력으로 내 입까지 틀어막은 그는 내게만 들릴 목소리로 나지막이 속삭였다.

- 네가 그랬었지. 내게 너의 미래만은 보이지 않는다고.

퍽 담백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떠올랐다.

- 그 말이 맞다.

웬일로 순순히 사실을 인정하는 거지? 내가 패배했기 때문인가.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가만히 내 표정을 훑어보던 프로메테우스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 하지만 네가 이 코카서스에 오는 순간, 혜안이 무엇을 보여주었는지 아느냐.

은밀한 목소리는 선악과를 먹으라고 종용하는 뱀의 속삭임처럼 들렸다.

- 네 죽음이다.

“……!!”

- 난 네가 죽는 모습을 봤다. 헤메라.

저건 거짓말이다. 지금껏 그래왔듯 내 정신을 부수기 위해 꾸며낸 말이다. 그렇게 나 자신을 세뇌시키려 했건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진정되질 않았다. 왠지 모르게 그의 냉랭한 목소리가 정말 진실을 말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 잘 가라.

이게… 마지막인가. 정말로? 이렇게 모든 게 허무하게 끝나는 건가. 하늘 높이 올라가는 창을 차마 보지 못하고 질끈 눈을 감았다. 쉭, 허공을 가르는 매서운 소리에 체념한 순간이었다.

굳게 눈을 감아 캄캄한 시야로 번쩍 빛이 스쳐지나갔다. 곧바로 눈을 떠보니 비현실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온통 금빛으로 물든 하늘에 주변이 대낮처럼 환해져있었고, 그 중심엔 거대한 빛기둥이 솟구치고 있었다.

이건 프로메테우스의 신력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욱 순도 높고 정제된 힘.

“설마…….”

어느새 내 몸을 속박하던 신력이 말끔히 사라졌다. 심지어 당장 나를 죽일 기세였던 프로메테우스마저 거대한 힘에 휘말려 저만치 나가떨어져 있었다. 갑자기 자유로워지니 도망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넋 놓고 앉아있었다.

그때 누군가 내 뒷덜미를 잡고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뭘 구경하고 있나.]

소스라치게 놀라며 돌아보다가 무심한 물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오케아노스 님!”

[웬 그림자 마물이 부르기에 따라왔더니, 때마침 잘 온 것 같구나.]

물빛 머리카락 뒤로 검은 늑대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나를 발견하자마자 반가운 듯 꼬리를 흔들며 쪼르르 달려왔다. 대견한 일을 해준 아그누스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문득 검게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고 아차 싶었다.

“닉스…!”

옆을 돌아보니 닉스가 다친 허리를 잡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괜찮아요?” 서둘러 다가가 부축하며 묻자 닉스는 할 말이 많은 듯 입술만 움찔거렸다. 그러다 결국 한숨을 길게 내뱉으며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너야말로 다친 데 없어?]

“네. 멀쩡해요.”

[……다행이다.]

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상황이 정리되니 그제야 주변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저건 대체 뭐죠?”

무심코 빛기둥을 쳐다보았다가 일순 시력을 잃을 뻔했다. 아마 오케아노스가 장벽을 쳐주지 않았더라면, 나나 닉스도 프로메테우스처럼 저 멀리 떨어져나갔을 것이다. 손바닥을 펼쳐 눈부신 빛을 가리고 흘끔 오케아노스를 바라보았다.

“오케아노스님이 하신 건가요?”

[설마.]

단호히 고개를 저은 오케아노스는 이내 황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보면 모르겠나.]

그의 눈짓을 따라 다시 빛기둥을 쳐다보았다. 잠시 후, 빛줄기 사이로 길쭉한 검은 실루엣이 보였다. 점차 눈이 환한 빛에 익숙해지니 흐릿하기만 했던 인영이 뚜렷해졌다. 천천히 걸어 나오는 이의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한 순간 숨이 딱 멎는 듯했다.

유유히 휘날리는 긴 머리카락과 하늘 높이 솟은 두 개의 뿔.

[마침내 완전한 그분께서 오신 거다.]

그곳에 있는 자는 태양이자 유일한 존재, ‘유피테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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