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0 (270/305)

#270

형제. 우애가 느껴지는 그 단어에서 이토록 거부감이 느껴지긴 처음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들에겐 터무니없는 헛소리로 들릴 것이다. 역시나 닉스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형제?]

냉소로 일그러진 얼굴엔 짙은 경멸이 묻어났다. 아무래도 프로메테우스의 말을 적의 도발쯤으로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수많은 사건의 흑막이 동족이자 형제라 하면, 어느 누가 쉽게 믿을 수 있을까.

일촉즉발의 긴장이 감도는데, 이카로스가 내게 나지막이 물었다.

[설마 저자가 그분께서 말씀하신 존재입니까?]

그 말을 듣고 뒤늦게 예전 일을 떠올렸다. 이카로스는 이미 ‘다섯 번째 기둥’에 대해 귀띔을 들은 적이 있었지. 긍정의 뜻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이카로스는 길게 탄식했다. 예상하고 있었는데도 그 정체에 대해선 쉬이 납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닉스가 인상을 험상궂게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그게 뭔 헛소리야?]

[예전에 그분께서 제게 ‘최후의 기둥’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신 적 있습니다.]

[잠깐. 그 이야기는….]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듯 생각에 잠겨있던 닉스가 갑자기 눈을 희번뜩이며 나를 쳐다보았다.

[예전에 네가 아코니툼 일을 꺼내면서 했던 말 아니야?]

그랬었지. 애석하게도 그때 늪에 있었던 자가 마물이 아니냐고 먼저 짐작했던 것도 닉스였다. 그 덕분에 마물이 신력으로 연명하고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은 했지만, 설마 그가 선황일 줄은 아무도 몰랐다.

한동안 망설이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네. 아스레인이 만들어낸 다섯 번째 기둥은 바로 저자예요.”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 흥미로운 눈빛으로 우리를 구경하는 프로메테우스와 눈이 마주쳤다. 제 이야기를 하는 걸 알고 있었던 그는 귀족식 인사를 하듯 가슴에 손을 얹으며 웃었다. 여유로운 그와 달리 마침내 진실을 다다른 닉스는 상당히 혼란스러워했다.

[아니, 잠깐. 그러니까 빈번이 나를 방해하고 죽이려든 놈이 마물이라는 거야?]

“…네.”

[그것도 나처럼 아스레인이 만들어 낸 기둥이고?]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고개만 끄덕이자 닉스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당혹스러운 건 그뿐이 아니었다. 모든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히페리온에겐 수심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충격에 삼켜진 일대는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아무도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그때 분노에 가득 차 빠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동족을 배신하고도 떳떳하게 나타나다니, 배짱 한 번 좋네.]

살벌하게 타오르는 눈빛이 프로메테우스를 쏘아보았다. 어느새 닉스의 주변에서는 평소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방대한 검은 마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프로메테우스는 강렬한 살의를 온몸으로 받아내면서도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 난 마물을 배신한 적 없어. 단지 균형을 이루란 사명을 다할 뿐이지.

[균형?]

- 그래. 두 종족의 균형은 비로소 하나의 압도적인 군림에서 나오지. 그리고 난 완전한 세계를 위해 아버지께서 만들어 낸 존재다. 그러니 이것이 진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나.

살짝 턱을 치켜들며 내리 깔보는 프로메테우스의 눈빛에서 당당한 위세가 드러났다. 그 태도가 영 아니꼬웠는지, 닉스는 인상을 찌푸리고선 경멸에 가까운 조소를 보냈다.

[내가 너 같은 놈들을 많이 봐서 아주 잘 알지. 다들 말은 번지르르하게 하는데, 막상 까 보면 전부 억설이고 궤변이었거든.]

픽 바람이 새듯 웃은 닉스는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렸다.

[네가 나의 형제라니, 이게 마물의 수치가 아니고 뭐겠어.]

마물의 수치. 제대로 자존심을 긁는 말에 프로메테우스의 웃는 얼굴에 금이 갔다. 그대로 여유마저 잃어버린 것일까. 끝내 프로메테우스는 웃음기가 완전히 메말라 버린 표정으로 닉스를 응시하며 말했다.

- 어느 쪽이 수치인지는 끝을 봐야 아는 법이지.

[좋네. 안 그래도 네 덕분에 코어가 말끔해져서 새로 태어난 것 같거든.]

닉스는 호쾌히 대답하며 긴 손톱으로 제 입술을 쓸었다.

[버릇을 뜯어 고쳐야겠구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 것아.]

그 순간 양쪽에서 엄청난 힘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먼저 기회를 엿본 건 닉스였다. 바닥을 휩쓸며 달려간 어둠이 곧 파도처럼 솟아올라 프로메테우스를 덮쳤다. 평범한 적이었다면 거기서 승패가 결정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프로메테우스였다. 바로 결계를 펼쳐 마력을 막아 낸 그는 숨 돌릴 틈 없이 닉스를 공격했다.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화살비에 일대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무차별적인 공격에 휘말릴 뻔한 순간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카로스의 날개였다. 이윽고 그가 날개로 돌풍을 일으키자 이쪽으로 날아오던 화살이 반대편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 후 이카로스는 나를 히페리온 곁에 데려다주며 말했다.

[이쪽은 위험하니 어르신과 함께 계시죠.]

“이카로스는요?”

[혼자서는 힘들 겁니다.]

그 말만 남기고 이카로스는 망설임 없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마침 닉스의 맹공격을 피해 공중에 떠있던 프로메테우스가 뒤늦게 이카로스를 발견했다. 곧바로 창을 만들어 대응하려 했지만, 창공에선 이카로스의 속도를 따라올 자가 없었다.

프로메테우스의 창을 맨손으로 잡은 이카로스는 붉은 날개를 활짝 펼쳤다. 순간 앙상한 뼈만 남은 그의 마지막 날개가 태양을 가렸다. 이윽고 이카로스는 날렵하게 날개를 휘둘러 프로메테우스를 사정없이 내리꽂았다.

쾅! 마치 운석이 충돌하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무참히 돌바닥에 떨어진 프로메테우스의 위로 기다렸다는 듯 검은 연기가 서렸다. 지상에서 그가 떨어지기만을 노리던 닉스의 수였다.

[웬일이야? 네가 나를 다 돕고.]

닉스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올려다보자 이카로스는 무심하게 툭 내뱉었다.

[제 눈에 대한 복수를 했을 뿐입니다.]

[흥, 재미없는 놈.]

못마땅한 듯 입술을 비죽인 닉스는 다시금 부서진 바위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얘는 기절한 거야, 뭐야.]

계획대로라면 프로메테우스가 그곳에 마력으로 묶여 있어야 할 터였다. 하지만 검은 연기가 서서히 걷히며 드러난 광경은 예상과 사뭇 달랐다. 그의 몸에 표피처럼 둘러싸인 신력 때문에 마력이 닿지도 못한 것이다. 계획이 통하지 않자 닉스는 옅게 혀를 차며 싫증을 냈다.

[아~ 더럽게 질기네.]

웬만한 방법으로는 놈에게 타격을 줄 수 없다.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닉스는 다시금 마력을 가다듬었다.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의 양은 현저히 줄었으나, 농도는 숨이 막힐 정도로 짙었다. 나를 상대할 땐 한없이 여유롭던 프로메테우스마저 진지하게 태세를 가다듬었다.

황량한 공터에 깊은 적막이 흘렀다. 그리고 저 멀리 산새가 날아오르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전투가 시작되었다. 닉스는 자유자재로 검은 연기를 움직여 맹렬하게 쏟아지는 신력을 받아쳤다. 지상에서는 그에게 당할 자가 없다는 말이 사실이었나. 점점 해까지 저무는 지금, 그림자가 넓어진 이곳은 온전히 그의 영역이었다.

[왜, 벌써 한계인가?]

호각을 다투는 싸움에 닉스의 눈동자가 선혈처럼 붉어졌다. 그렇게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공방이 길게 이어졌다. 땅거미가 밀려드는 하늘에서 두 힘이 부딪쳐 빛이 번쩍일 때마다 똑똑히 보았다. 프로메테우스가 밀리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다시 한 번 기회가 찾아왔다. 프로메테우스가 닉스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하늘로 날아오른 것이다. 방심한 틈을 놓치지 않고 이카로스가 그의 뒤를 잡았다. 황금빛으로 물든 노을에 붉은 날개가 드리운 순간이었다.

[속죄해라.]

낮게 읊조린 이카로스가 재차 그를 땅으로 추락시켰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던 프로메테우스는 곧바로 지상을 살폈다. 닉스가 어디 있는지 찾으려는 시선에선 다급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태양은 이미 능선 너머로 넘어갔고, 검은 연기가 땅을 뒤덮어 닉스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프로메테우스가 땅 위에 착지하려는 순간 어둠 속에서 선홍색 눈동자가 오롯이 빛났다.

[잡았다.]

저항할 새도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닉스의 마력이 프로메테우스의 사지를 포박했다. 그림자는 닉스가 가진 힘의 근원이었고, 밤은 그가 태어난 시간이었다. 제아무리 신에 가까운 자라고 한들 당해낼 방법이 없었다.

결국 프로메테우스는 거센 힘에 의해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느긋한 걸음걸이로 다가간 닉스는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러곤 장난을 치듯 긴 손톱으로 놈의 뺨을 쿡쿡 찌르며 말했다.

[이제 누가 수치인지 알겠어?]

- …….

[넌 그가 만들어 낸 유일한 실패작이야.]

실패작. 또박또박 내뱉는 단어에 놈의 하늘색 눈이 뎅그러니 커졌다. 점점 일그러지는 얼굴에 화라도 내나 싶었건만, 그는 별안간 어깨를 떨며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쩌렁쩌렁 울리는 웃음소리는 어딘가 공허하게만 들렸다.

이내 웃음을 거둔 그는 고개를 툭 떨구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 어쩔 수 없구나. 아버지께서 깨어날 때까지 놀아 주려 했건만….

퍼뜩 새하얀 빛을 발하는 눈은 광기로 물들어있었다.

- 여기서 전부 없애 주마.

불길한 낌새에 닉스가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 프로메테우스의 몸에서 걷잡을 수 없는 신력이 뿜어져 나왔다. 그야말로 화산이 폭발하는 듯했다. 어느 정도 떨어져있는데도 불과하고 엄청난 열기가 살갗으로 느껴졌다. 단 몇 초만 늦었더라도, 닉스는 신력에 불타 재가 되었을 것이다.

닉스가 무사해 안심하기도 잠시, 길게 꼬리를 그으며 날아오는 새하얀 유성을 발견했다.

“저건 대체….”

여러 개의 빛이 대륙 곳곳에서 날아와 그에게 흡수되고 있었다. 멍하니 보고 있다가 뒤늦게 알아차렸다. 프로메테우스가 카르사 제국에 널리 퍼진 신력을 전부 끌어 모으고 있다.

어느새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채가 어둠을 완전히 몰아냈다. 한계를 모르고 몸집을 키워나가던 빛은 끝내 범람하고 말았다. 저 괴물 같은 신력에 닿는 순간 마물은 결코 성치 못할 것이다.

“도망쳐요!!”

그리 외치면서 정작 내가 도망치지 못했다. 해일처럼 덮쳐 오는 빛에 무력하게 눈을 감은 순간이었다. 따스한 손길이 내 어깨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점막이 타들어 갈 것 같은 빛에 앞은 보이지 않았지만, 물씬 풍겨 오는 치자 꽃향기에 알아챘다.

나를 지키려 끌어안은 것이 히페리온이라는 사실을.

***

“끄아아악!”

거리마다 비명이 난무했다. 짐승의 탈을 쓴 헤카테가 마을을 습격한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민들은 이를 전부 마물의 소행이라 확신했다. 그래서 토벌대를 늘여 마을을 지키겠다는 황제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습격은 줄지 않았다.

여전히 마을은 불타고, 신민들은 무참히 죽어 나갔다. 이가 빠진 창과 칼로는 계속해서 재생되는 헤카테를 상대할 수 없었다. 그렇게 습격의 불길은 점차 황실과 가까운 마을까지 번졌다.

“도와주세요! 제 동생이…!”

간절한 외침에 누군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부상자가 있는 겁니까?”

갑자기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들어오자 소녀는 당황해서 굳어 버리고 말았다.

“그, 그게.”

소녀가 말을 더듬자 사내는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윽고 흙먼지가 묻은 후드를 벗으니 수려한 외모가 드러났다.

“진정하고 말해 보렴.”

진중한 눈빛과 차분한 목소리에 소녀는 안심한 듯 입을 열었다.

“저… 동생이 심부름을 가선 안 돌아와요.”

“어떻게 생겼는데?”

“약간 주근깨가 있고 저와 같은 초록색 눈이에요. 갈색 머리를 양갈래로 땋고….”

한창 설명하고 있는데,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맥을 뚝 끊었다.

“걔는 막사에 있어.”

힉! 화들짝 놀란 소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겁에 질린 눈동자에 비친 것은 붓꽃을 닮은 보라색 머리카락이었다. 검을 찬 사내와 달리 그는 소녀의 긴장을 풀어 줄 생각이 조금도 없는 모양이다. 귀찮다는 기색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턱짓으로 길목을 가리켰다.

“니 동생 막사에 있다고. 저쪽 길을 따라서 가 봐.”

소녀는 아주 작게 “감사합니다.” 중얼거리곤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왔다. 잔뜩 움츠린 소녀의 뒷모습이 마음에 걸렸는지, 검을 찬 사내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이리스. 겁에 질린 아이한테 좀 더 부드럽게 대해 줄 순 없는 겁니까?”

그러자 보라색 머리칼을 가진 남자, 아이리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 건 너나 해. 세잔.”

진심이 가득 담긴 말에 세잔은 포기한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헤카테의 습격을 받았다는 마을에 며칠 앞서 도착한 아이리스가 아직도 세잔보다 사람들에게 신뢰를 사지 못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남의 평판 따위 신경 쓰지 않는 아이리스는 이번에도 제 할 말만 했다.

“진은 어디 갔어?”

“약초가 부족해서 학교에서 조달해 온다고 했습니다.”

“망했네. 걔가 주고 간 약, 거의 다 썼는데….”

아이리스는 허리춤에 묶은 병을 흘끔 내려다보았다. 상처에 뿌리면 좋다고 해서 진이 직접 만들어주고 간 물약이었다. 그런데 환자가 워낙 많다 보니 벌써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아이리스가 초조하게 뚜껑을 두드리는데, 이번엔 세잔이 자리에서 일어나 물었다.

“휘브리스는요?”

“이쪽에 합류하자마자 불려 나갔어. 환자를 옮길 사람이 필요하다나.”

바로 어제 마을에 도착한 휘브리스마저 바로 일꾼으로 쓰다니,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다. 그나마 이곳은 그들의 도움으로 헤카테로부터 안전해졌다. 하지만 다른 마을은 여전히 불안에 떨고 있을 것이다. 그 점이 못내 답답했던 아이리스는 질끈 눈을 감았다가 뜨며 말했다.

“이거 끝나긴 하는 거냐?”

세잔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답을 알 리가 만무했다. 세잔은 제 고향이 무사한 걸 확인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오는 길에 폐허가 된 마을을 마주쳤을 뿐이다. 그나마 그들에게 남은 희망이라곤 하나뿐이었다.

“태오 형을 믿는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믿고 있어. …믿고는 있는데, 불안하잖아.”

아이리스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휘브에게서 소식을 들어 태오가 코카서스 산으로 갔다는 건 알게 되었지만, 오히려 그게 문제였다. 결계로 둘러싸인 산꼭대기와 황제의 군대가 그쪽으로 몰려갔다는 소문이 아이리스를 한없이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때 문밖에서 또 다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세, 세잔 님!”

다급한 목소리에 세잔과 아이리스는 곧바로 집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마을에 침입한 회색의 맹수와 마주쳤다. 이마에 눈이 하나만 박힌 짐승은 돼지를 닮은 코로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세잔은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칼자루를 쥐었다. 이윽고 검을 뽑아들려는 순간, 헤카테가 힘없이 쓰러졌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송곳니를 드러내던 짐승은 순식간에 돌무더기로 변했다. 처음 헤카테의 실체를 마주한 마을 사람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마물이 아니잖아.”

“웬 돌덩이가….”

살아있는 생물이, 심지어 제 친구와 가족의 목숨을 앗아간 짐승이 갑자기 돌이 되니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 누구도 섣불리 돌덩이에게 가까이 다가가진 못했다. 하지만 의심 어린 웅성거림은 불처럼 빠르게 번져나가 급기야 홀로 우뚝 서있는 황실에 닿았다.

“하지만 폐하께서 마물이라고 하셨는데?”

그 목소리를 들은 아이리스는 생각했다. 이건 기회라고. 그래서 곧바로 헤카테에게 다가가 돌무더기를 파헤쳤다. 역시나 눈이 있던 머리 쪽에 자그마한 유리 조각이 있었다. 태오는 이를 ‘판도라’라고 불렀다.

“이걸 보세요.”

아이리스는 유리조각을 마을 사람들에게 보이며 말했다.

“이건 신력으로 이루어진 코어입니다.”

“신력?”

뜻밖의 고백에 마을 사람들은 더욱 당황해했다. 몇몇은 아이리스가 말도 안 되는 소릴 한다고 의심했다. 유독 신앙심이 깊은 신도들이었다. 반응이 반반으로 갈리기 시작하자 이번엔 세잔이 직접 나섰다.

“그간 마을을 습격한 건 마물이 아니라, 신력으로 만들어 낸 인공체입니다.”

아마 평소였다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직접 보았다. 살아있는 생명이 아무것도 아닌 돌로 변하는 순간을. 심지어 마을을 위해 헌신한 세잔과 아이리스가 말하니 의심은 확신으로 번졌다.

“신께서… 우릴 버리신 건가?”

웅성거림은 도무지 잦아들지 않았다.

그때 아이리스의 손에 들린 판도라에서 새하얀 빛이 흘러나왔다. 신력을 담은 빛은 곧 하늘 높이 솟아오르더니 코카서스 산으로 향했다. 잠시 후, 엄청난 양의 빛이 대륙 곳곳에서부터 뻗어 나갔다. 놀랍게도 그것들은 전부 코카서스 산으로 모이고 있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산꼭대기는 마치 태양을 품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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