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9 (269/305)

#269

신력을 막아 주던 결계는 끝내 쓸모를 잃었다. 적이 드나들 수 있는 방공호는 더 이상 나를 지켜주지 못한다. 유일한 퇴로는 안개로 막혀 있고, 허허벌판에 몸을 숨길 곳은 없었으며, 아스레인은 여전히 금빛 구체에 갇혀 있었다.

결국 내가 살기 위해서 싸워야 한다. 저 찬란하게 빛나는 괴물과.

힘의 차이는 압도적이지만, 승산은 있다. 그의 이름을 불러 잠들어 있는 데우스를 깨우면 된다. 다만 데우스가 육체의 자유를 빼앗을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그때 일격을 가하려면 최대한 거리를 좁혀야 한다.

“무모한 발악인지는… 두고 봐야 알겠죠.”

바닥에 꽂은 검을 지지대 삼아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서 있는 게 고작이었다. 그럼에도 물러서지 않고 칼자루를 두 손으로 쥐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 모습을 가만 지켜보던 선황은 퍽 거만한 조소를 흘렸다.

- 그걸로 상대할 생각인가?

서서히 허공에 떠오른 그는 자연스레 태양을 등지고 섰다. 새하얀 옷자락 뒤로 펼쳐진 빛줄기가 꼭 후광처럼 보였다. 성서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위용에 그만 압도되어 버렸다. 이윽고 그는 잔뜩 긴장해 있는 나를 업신여기듯 내려다보며 말했다.

- 신의의 검을 만든 게 누구인지 잊은 건 아니겠지.

“어차피 검은 저를 선택했어요.”

비록 벤테온의 성물이었을지라도 지금 검의 주인은 나다. 게다가 내 힘으로 만들어 낸 칼날이 그의 팔까지 잘라 냈다. 그 말은 즉, 거죽을 뚫고 코어를 부수는 게 충분히 가능하단 소리였다. 과연 하늘에서 내려올 줄 모르는 저 새를 지상으로 끌어내릴 수 있을까. 아니, 날개를 잘라서라도 끌어내려야만 한다.

조용히 전투태세를 취하자 선황은 한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 그래. 좋다.

창백하리만치 하얀 그의 손끝에 불길한 빛이 떠올랐다.

- 어디 한 번 버텨 봐라. 나의 계획에서 벗어난 유일한 인간이여!

웅장한 목소리가 일대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 순간 빛이 하늘 높이 솟아오르더니 펑! 하고 폭발했다. 사방으로 터져나간 신력에 뒤덮여 하늘은 온통 순백으로 물들었다. 마치 하늘이 반으로 갈라지는 종말의 표징을 보는 듯했다.

당황하기도 잠시, 신력으로 만든 화살이 장대비처럼 머리 위로 떨어졌다. 곧바로 몸을 숙이고 칼을 가로로 들어 화살을 막아냈다. 온몸으로 버티고 있는데도 튕겨 내는 힘에 팔꿈치서부터 온몸이 저릿했다. 결국 반동을 이기지 못해 무릎을 털썩 꿇자 호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방금 전의 기세는 어디로 갔느냐.

화살은 한층 매서운 기세로 나를 집어삼키려 날아왔다. 아무래도 선황은 내 힘이 바닥이 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 같았다. 이대로 소모전으로 간다면 죽음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어떻게든 유리한 상황으로 끌고 가야한다.

그때 빗발치는 화살 너머로 아스레인의 결계가 보였다. 저기다. 신력이 들어오지 못하는 결계 안이라면, 움직임이 자유로워져 반격을 노릴 수 있을 터였다. 더 생각할 것 없이 그림자에 대고 소리쳤다.

“아그누스!”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매가 거대한 날개를 펼쳐 화살 비를 막아 주었다. 검은 연기가 놈의 시야를 가리는 틈에 곧바로 결계로 뛰어갔다. 최대한 뻗은 손이 결계에 닿으려는 그때였다. 휙, 예리한 창이 눈앞을 가로질러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팔뚝이 타들어 가는 고통이 불쑥 밀려왔다.

“으윽…!”

오른팔을 들어보니 찢긴 소매에서 피가 스멀스멀 묻어났다. 갑자기 날아온 창날에 살갗이 찢겨나간 것이다. 너무 갑작스럽게 당한 나머지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멍하니 상처를 보고만 있으니 저 멀리서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 똑같이 되갚아 주려고 했건만, 아쉽게 됐구나.

일순 등골이 오싹해져 불규칙적인 호흡마저 우뚝 멈췄다. 그의 말 그대로였다. 아주 조금만 늦었어도 팔이 잘려 나갈 뻔했다. 다행히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그보다 더한 두려움이 밀려왔다. 나는 그저 놈의 장난감일 뿐이라는 생각이 일시에 엄습했다.

결계 주변에는 창이 울타리처럼 촘촘하게 꽂혀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었다. 당장 다른 대안을 떠올려야하는데, 머릿속이 휑뎅그렁하게 비어 버렸다. 끝인 건가…. 그리 단념하는 찰나 낮게 깔린 목소리가 귀를 비집고 들어왔다.

- 말하지 않았나. 이 순간을 영원히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후회…?”

지금 후회라고 했나. 그 순간 싸늘하게 식은 손끝에서부터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주먹을 꽉 쥐자 상처가 벌어져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그 아픔이 도리어 멍한 정신을 일깨웠다.

내가 후회하고 있다고? 무슨 소릴.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제아무리 완벽한 존재라도 이성을 잃으면 생각이 단순해지기 마련이다. 그건 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니 나를 제거하기 위해 땅에 내려온 순간을 노리자. 그림자를 붙잡아 단 1초라도 발을 묶어 두는 거다.

- 신을 배반한 죄는 죽음으로 갚도록 해라.

프로메테우스가 다시 손을 올리자 빛의 구체가 떠올랐다. 점점 거대해지는 형체를 바라보니 저절로 입 안이 바짝 말라 왔다. 저 신력에 닿으면 저항도 못하고 죽고 말겠지. 그럼에도 망설임은 없었다.

“착각하지 말아요.”

꼿꼿하게 고개를 들고 말하니 그의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이내 서슬 퍼런 눈빛이 내게 꽂혔다. 뼛속까지 한기가 도는 듯했으나 애써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은 나 같은 평범한 인간이랑 다를 바 없어요.”

- …뭐?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필요로 해 주니 기뻤겠죠. 모두가 입을 모아 칭송하니까 정말 신이라도 된 기분이었을 거예요. 하지만 아니에요. 당신은 신의 행세를 하는 비겁자일 뿐이죠.”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공터에 무거운 적막이 흘렀다. 당장 공격을 퍼부을 줄 알았던 선황은 생각보다 차분한 태도로 일관했다. 심지어 거대한 빛의 구체도 거두고 지상으로 내려왔다.

작전이 실패한 건가? 예상과 다른 반응에 걱정하던 차, 나를 노려보는 눈동자를 마주하곤 생각을 바꿨다. 푸른빛으로 이글거리는 두 눈엔 방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짙은 살의가 묻어났다.

- 좋을 대로 지껄여라. 어차피 입을 놀릴 수 있는 것도 지금이 마지막일 테니까.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는 그의 손엔 어느새 길쭉한 창이 들려 있었다. 단숨에 심장을 꿰뚫을 정도로 예리한 칼날이 번뜩였다. 그러나 나의 관심은 오직 그림자에 있었다. 놈의 그림자가 내게 닿기만 하면 된다. 그럼 형세는 순식간에 내게 유리한 쪽으로 바뀐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그럼 왜 그때 뿔을 돌려주지 않고 도망쳤던 거죠?”

아주 조금만 더 가까이 오면 된다.

“아스레인이…. 아니, 세상이 당신을 버릴까 두려웠나요?”

마침내 길게 드리운 그림자가 발치까지 다가왔다. 지금이다. 곧바로 그림자를 밟아 움직임을 속박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선황의 모습이 뭔가 이상했다. 신력은 분명 느껴지는데, 왠지 흐릿한 것이 꼭 신기루처럼 보였다.

잠깐. 신기루…?

“…망할.”

환각이다. 하지만 그걸 깨달았을 땐 이미 너무 늦어 있었다. 창을 들고 있는 그의 모습은 자욱한 안개가 되어 사라졌다. 그 후 사방으로 흩어진 안개 사이로 메마른 목소리가 울렸다.

- 무슨 수작인진 몰라도 시도는 나쁘지 않았다고 해 두지.

뿌연 시야에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어디지? 앞인가, 뒤인가. 아니면, 위인가? 확신이 서지 않던 그때 등 뒤에서 신력이 느껴졌다. 당장 뒤를 돌아보자 창이 나를 향해 날을 세운 채 공중에 떠 있었다.

그 뒤로 보이는 건, 승리의 미소를 지은 프로메테우스였다.

- 이 세계의 유일한 신은 나다. …헤메라.

죽음을 예감한 그때였다.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온 손이 내 허리를 낚아채 공중으로 도약했다. 순식간에 안개 낀 공터에서 벗어나 안전한 장소로 내려왔다. 다리가 후들거려 비틀거리자 단단한 손이 나를 붙잡았다. 한껏 예민해진 나머지 거칠게 팔을 쳐 내며 옆을 돌아보자 서로 다른 색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괜찮으십니까?]

“이, 이카로스…?”

[팔을 다치셨군요.]

찢어진 소매를 걷어 내고 상처를 살피는 눈길이 심상찮았다. 하지만 나로선 갑자기 나타난 그 때문에 당황을 금치 못할 뿐이었다. 이카로스가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 일부러 부르지 않았는데…. 심지어 세 쌍의 날개 뒤로 또 다른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그 아이의 상처는 내가 보마.]

히페리온이었다. 뜻밖의 상황에 말문이 막혀 눈만 끔뻑였다. 내가 꿈을 꾸는 건가. 멍한 와중에도 히페리온은 아랑곳 않고 내 팔에 묻은 피를 닦아 주었다. 이내 부드러운 잎사귀로 상처를 덮자 열기로 홧홧하던 피부가 서서히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붕대 대신 잎을 두르고 질긴 줄기로 단단히 묶으니 지혈까지 완벽하게 마무리되었다.

“…고마워요. 히페리온.”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히페리온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마력의 파동이 심상치 않아서 왔는데, 늦지 않아 다행이구나.]

그래서 이카로스까지 온 거였구나. 그들은 누구보다 아스레인의 마력에 민감한 존재이니 그럴 만도 했다. 별안간 든든한 아군이 생겨 안심되는 한편,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야 프로메테우스가 다른 마물을 맞대면하기는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최대한 그들을 마주치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그나마 호전적이지 않은 히페리온과 이카로스만 와서 다행인가. 그리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쾅! 기다렸다는 듯 엄청난 굉음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대지가 요동쳐 제자리에서 비틀거리자 히페리온이 곧장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죠?”

휘둥그레 뜬 눈으로 돌아보니 검은 연기가 사방에 자욱하게 깔렸다. 분명 신력으로 만든 화살과 창이 우악스럽게 꽂혀 있던 대지는 어느새 짙은 어둠에 물들어 있었다. 그 위에 우아하게 서 있는 사내를 보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잠깐. 저건….

[이거 완전 지옥이 따로 없네~]

길게 늘어지는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절로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연기가 걷히자 검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닉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느긋하게 주위를 둘러보던 붉은 눈동자가 이내 나를 발견하곤 살짝 커졌다.

[안녕, 헤메라.]

“닉스! 여긴 어떻게 온 거예요?”

[내가 말했잖아~ 위험하면 도우러 오겠다고.]

닉스가 눈짓으로 내 팔을 가리켰다. 그제야 내 손목에 그의 거미줄로 만든 팔찌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나도 모르는 사이 끊임없이 닉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던 것이다.

[뭐, 나 말고도 온 마물이 많은 것 같지만.]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는 닉스의 뒤로 움푹 팬 땅이 보였다. 설마 오자마자 프로메테우스를 공격하고 본 건가. 그럼 놈은 지금 어떻게 된 거지? 아직 그쪽엔 연기가 사라지지 않아 섣불리 다가가진 못하고 멀리서 기웃거리기만 했다.

그러자 닉스가 느릿한 걸음걸이로 다가오며 말을 건넸다.

[근데 영감은 어디 가고 너 혼자 있어?]

“아스레인은… 뿔의 봉인을 풀러 갔어요.”

뿔이란 단어에 이카로스와 히페리온의 시선까지 전부 내게로 쏠렸다. 그래서 조용히 금빛 구체를 가리켰다. 무수한 폭발 속에서도 홀로 견고한 결계를. 어느새 웃음기가 싹 사라진 닉스가 진지한 어조로 물었다.

[뭐? 지금 저 안에 있는 거야?]

“네….”

[그럼 널 공격한 놈은 뭐고?]

사실대로 말하려다가 일순 말문이 막혔다.

대체 어떤 식으로 운을 떼야 할까. 바로 저기에 숙적이 있다. 그 마물의 뿔을 자르고, 형제들을 배신한 것도 모자라, 인간과 마물 위에 군림하여 세계를 마음대로 조종하려는 존재가 있다. 그런데 그게 당신들과 같은 존재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머뭇거리던 차, 저 멀리서 여유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게 누구야. 반가운 얼굴들 아닌가.

검은 안개 사이로 유유히 걸어 나오는 프로메테우스는 생채기 하나 없이 멀끔한 모습이었다. 이정도 기습으로는 상처도 낼 수 없는 건가. 갑작스러운 선황의 등장으로 일대는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그 자리에 유일하게 선황만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 아무리 그래도 첫인사치고는 너무 과격하지 않나?

초승달처럼 눈을 휘며 웃자 닉스가 대놓고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말을 섞고 싶지도 않은 눈치였다. 히페리온과 이카로스까지 본능적으로 그가 적임을 알고 있었다. 마치 뾰족한 돌조각이 떠다니는 듯 날카로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길고 긴 고요 끝에 프로메테우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 너무 그렇게들 쳐다보진 말지.

그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칼날 같이 날카로웠다.

- 우린 피를 나눈 형제잖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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