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아스레인은 흠칫 뒤를 돌아보았다. 안개 사이로 나타난 나를 발견하자 금색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차츰 화색이 돌던 얼굴은 금세 불안한 빛으로 물들었다. 내가 혹시 안개로 만들어 낸 환상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듯했다. 그래서 여전히 굳어 있는 그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가 품에 폭 안겼다.
온몸을 휘감은 그윽한 창포 향기에 목이 메여 저절로 목소리가 떨렸다.
“저예요.”
너른 등에 팔을 두르며 속삭이자 그의 어깨가 움찔했다. 이내 커다란 손이 내 뒷머리를 어루만졌다. 바람이 불면 사라질 신기루를 대하듯 조심스럽고도 섬세한 손길이었다. 그 후로도 아스레인은 조용히 나를 꽉 끌어안고만 있었다. 어떤 말도 필요 없었다. 그저 서로의 체온이 백 마디의 안부보다 더 고맙게 느껴졌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애정 어린 눈길이 따사로운 햇빛처럼 내게 들이비추었다.
“다친 데 없어요?”
“음. 자네는 괜찮나?”
“그럼요. 많은 사람들이 절 도와줬어요.”
무표정하던 그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웃는 모습을 보니 그제야 한시름 덜었다. 그래도 다친 곳이 있나 살펴보다가 뒤늦게 폐허가 된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오기 직전까지도 치열한 접전이 이루어졌는지, 곳곳이 움푹 패고 바위는 처참하게 부서져 있었다. 그 아수라장에서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한 아스레인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잠깐. 그럼 프로메테우스는 어디에 있는 거지?
“그 자는 어디 있어요?”
다급하게 묻자 세로로 찢어진 동공이 폐허가 된 공터를 향했다. 부서진 바위 사이로 흐릿하게 사람의 인영이 보였다. 이윽고 안개가 걷히자 흙먼지 하나 묻지 않은 하얀 옷자락이 드러났다.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사람은 선황, 프로메테우스였다.
“잠시 묶어두었으나 언제 속박을 깨고 나올지 모르네.”
선황의 양손은 바닥에서 튀어나온 두 개의 사슬로 묶여있었다. 잠시 의식을 잃었는지, 힘을 모으고 있는 건지,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그럼에도 어떤 공격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듯 견고한 신력이 그를 둘러싸 지키고 있었다.
지금이 기회다.
“아스레인.”
손에 쥐고 있던 마석을 내밀자 아스레인의 표정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빠르게 흔들리는 동공은 오만 가지 감정으로 얽혀있었다. 심지어 마석조차 주인을 찾아 기쁜 듯 두려울 정도로 환한 광휘를 발하고 있었다.
“이건….”
“그간 찾아다녔던 뿔이에요.”
드디어 그에게 빼앗겼던 뿔을 돌려준다. 지금까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하지만 마냥 기쁘지만은 못했다. 이 뒤로 불어올 후폭풍이, 저 능선너머로 드리운 먹구름이 우리에게 빠르게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곧바로 가져가리란 예상과 달리 아스레인은 가만히 마석을 보고만 있었다. 수심이 깊은 얼굴은 어쩐지 넋이 나가 보이기까지 했다. 처음으로 그의 눈빛에 드리운 두려움이란 감정을 읽곤 나지막이 말했다.
“그리 달가운 과거는 아닐 거예요. 하지만 잊지 말아요. 절대 아스레인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갑작스런 당부의 말에 아스레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불길한 낌새를 느꼈는지 마석을 가져가려는 손이 주춤거렸다. 그래서 그의 손을 덥석 잡으며 흔들리는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전 언제까지고 아스레인의 편이에요. 알죠?”
여느 때와 같이 환한 미소를 짓자 아스레인의 얼굴에 깃든 그림자가 서서히 사라져갔다. “그래.” 차분한 어조로 대답한 아스레인은 마석을 건네받았다. 그의 손끝이 닿자마자 마석은 더욱더 찬연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이윽고 둥그런 마석 주변에 먼지보다도 작은 글자가 나타났다. 뿔의 힘을 봉인한 주문이었다.
“꽤나 귀찮은 방법으로 봉인해놨군.”
“풀 수는 있는 건가요?”
아스레인은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가능은 하다만, 내가 결계 안으로 직접 들어가야 하네.”
“아…….”
내가 마석을 손에 넣기 위해 과거로 갔을 때와 비슷한 느낌인 건가. 결계를 깨려거든, 또 한 번 과거를 직접 마주해야한다니. 참으로 그다운 악질적인 방법이었다. 아직 진실을 모르는 아스레인은 그저 나와 다시 떨어져야한다는 점이 거슬리는 눈치였다.
“그 사이 자네는 다른 곳에 가있는 게 좋겠네. 아니면, 차라리 내 저택에….”
“아니에요. 여기 있을게요.”
선황이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데, 무방비해진 아스레인을 두고 갈 수는 없었다. 단호하게 의사를 밝혔는데도 아스레인은 선뜻 응하지 못했다. 이곳에 혼자 남을 내가 못내 걱정되는 모양이다. 끝내 아스레인은 내 주변으로 견고한 결계를 만들며 말했다.
“그럼 이 안에만 있게. 그는 결코 들어오지 못할 걸세.”
“걱정 말고 다녀와요. 기다릴게요.”
살며시 눈웃음을 짓자 아스레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석을 꽉 쥐었다. 어느새 금빛 눈동자에는 망설임 따윈 사라지고 굳은 결의만 남아있었다. 그대로 한 걸음씩 멀어지던 아스레인이 대뜸 내 이름을 불렀다. “태오.” 다정한 목소리에 미소로 답하자 아스레인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고맙네.”
“…아스레인.”
“이 생애 자네를 만날 수 있어 다행이야.”
정중히 인사를 건네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시 만나는 그때는 잃어버린 기억을 떠올린 후겠지. 과연 또 다시 내게 고맙다는 말을 해줄까? 과거를 찾아줘서 고맙다고, 지금처럼 웃어줄까? 이제와 후회해봤자 아무 소용없지만 자꾸만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 사이 아스레인은 결계로 들어갈 준비를 마쳤다. 마침내 그가 주문을 읊자 돌풍이 일어나며 마석을 끈처럼 묶고 있었던 결계가 팽창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결계는 아스레인을 삼킬 만큼 커졌다. 이윽고 각막을 태울 정도로 밝은 빛이 터져 나와 질끈 눈을 감았다. 겨우 시야가 돌아왔을 땐 이미 아스레인은 사라지고, 거대한 금색 구체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괜찮을 거야.”
바짝 마른 입술을 깨물며 초조한 마음을 달랬다. 그때 바위 쪽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끽, 끼긱. 무언가 엇갈리는 듯 한 저 소리는 일전 신전에서 들었었다. 억지로 사슬을 부수려고 할 때 나는 소음이었다.
“저건…!”
곧바로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다시금 쇠가 끌리는 소음이 들리더니 바위틈에서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실루엣이 보였다. 하필이면 지금 선황이 깨어난 것이다. 아니, 설마 아스레인이 봉인을 부수기 위한 틈만을 노렸던 것인가.
- 결국 찾아왔구나. …재앙의 씨앗을.
낮게 깔린 목소리를 들으니 온몸에 찬물을 끼얹은 듯 소름이 끼쳤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선황은 하늘빛 눈동자를 흉흉하게 빛내며 나를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사슬로 묶인 팔을 살짝 흔들며 중얼거렸다.
- 네가 이 세계에 처음 왔을 때 죽였어야했는데.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그에게서 여전히 여유가 느껴졌다. 잠시 후, 선황은 가볍게 사슬을 끊어내고 퍽 우아하게 차림새를 정리했다. 아무렇지 않게 아스레인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모습에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자 선황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어떻게 속박을 풀었냐고 묻고 싶은 건가?
성큼성큼 결계로 다가오는 걸음걸이엔 망설임이 없었다.
- 애초에 의식을 잃지도 않았다. 그저 네놈이 곧 이곳에 올 걸 알고 속박을 당해준 거지. 그래야 그가 마음 편히 널 두고 가지 않겠나.
“처음부터 제가 목적이었나요?”
- 그야 널 죽이면 그는 머지않아 자멸할 테니까.
매서운 살의를 내뿜으며 다가오던 선황은 이내 나를 보호하는 결계를 보곤 미간을 찌푸렸다. 곧바로 신력으로 만들어진 창이 날아왔지만, 결계는 흠집하나 나지 않고 창을 튕겨냈다. 견고한 결계에 선황은 불쾌한 듯 미간을 구기며 혀를 찼다.
- 쓸데없는 짓을 했군.
끝내 결계를 부술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선황의 눈길이 금빛 구체로 향했다. 이대로 구체를 부수기라도 한다면 그 안에 있는 아스레인이 어찌될지 모른다. 아스레인은 결코 결계 밖을 벗어나지 말라고 했지만…… 최악의 경우엔 내가 나설 수밖에 없다.
조용히 숨을 죽이고 선황의 행동을 눈으로 좇았다. 수상한 낌새가 보이면 바로 공격을 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금빛 구체 앞에 다다른 그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저 거대한 구체를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뭐하는 거죠?”
- 왜.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불안한가?
슬그머니 올라가는 입꼬리는 이 상황을 즐기는 듯 보였다.
이상한 일이다. 당장 마석의 봉인을 푸는 걸 방해할 수 있는데도 막지 않다니, 왜지? 아스레인이 본래의 힘을 되찾으면 선황은 반드시 소멸할 것이다. 그런데 초조함 따위 느껴지지 않으니 다른 꿍꿍이가 있다고 밖엔 생각할 수 없었다.
짧은 침묵 끝에 선황이 입을 열었다.
- 그와 함께했던 매 순간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해.
잔잔하게 울리는 목소리는 행복한 과거를 회상하듯 들떠있었다.
- 그는 내가 제일 잘 알아. 너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오랜 시간을 함께 했으니.
선황은 금빛 구체의 표면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 결국 아버지는 날 선택하실 거다.
자신감으로 가득 찬 눈빛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결계로 막혀있는데도 충분히 느껴졌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압도적인 신력으로 나를 죽일 수 있을 거라고.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당장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다.
“글쎄요.”
마치 제 소유물을 다루는 것처럼 아스레인이 들어있는 구체를 쓰다듬는 손길을 어떻게든 떨어뜨려버리고 싶었다.
“실은 아직도 불안하죠? 아스레인이 당신을 버릴까봐.”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지런한 손이 우뚝 멈췄다.
“그러니까 계속 스스로에게 세뇌하듯 말하는 거잖아요.”
- 네까짓 게 뭘 안다고.
솟구치는 분노를 참지 못한 그는 결계를 향해 신력을 퍼부었다. 쾅! 엄청난 굉음이 들렸지만, 이번에도 결계는 끄떡없었다. 이정도면 아스레인이 깨어날 때까지 충분히 버틸 수 있다. 그리 안도하기도 잠시, 선황이 별안간 내가 있는 결계 앞으로 다가왔다.
한참동안 결계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하늘색 눈동자가 살며시 커졌다.
- 이런.
나지막이 내뱉은 한 마디는 탄식에 가까운 환호성이었다.
- 웬일로 이런 실수를 다 하시고.
실수라니? 불안한 낌새가 닥쳐오던 그때, 선황은 손을 들어 노크하듯 결계를 두드렸다. 툭툭. 완벽히 외부와 차단시켜주는 벽처럼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그 후로도 그는 몇 번이고 결계를 두드렸다. 툭툭. 툭. 그 소리가 꼭 등 뒤로 몰래 다가오는 발소리처럼 느껴졌다.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느끼던 찰나였다. 싸늘하게 굳어있던 그의 얼굴에 돌연 소름끼치는 미소가 맺혔다.
- 잡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손이 결계를 뚫고 들어왔다. 불쑥 다가오는 손을 피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목을 붙잡혔다. 곧바로 팔을 떼어내려고 바르작거렸지만, 그 우악스러운 힘을 당해낼 길이 없었다.
“어떻……게….”
기도가 막혀 떨리는 목소리가 간신히 새어나갔다. 그러자 그는 냉소를 흘리며 답했다.
- 결계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이 ‘마물’이더구나.
“……!!”
- 뭐, 나야 잘 된 일이지. 그는 내가 마물이라는 걸 몰랐을 테니까.
제대로 허를 찔렸다. 어떻게든 벗어나려 그의 손을 할퀴어댔지만,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나를 구하기 위해 튀어나온 아그누스도 신력에 무참히 떨어져 나갔다. 설상가상 산소가 부족해져 정신은 서서히 아득해졌다. 흐릿해지는 시야로 보이는 그의 얼굴엔 자애로운 미소가 그득했다.
- 감히 나를 능멸하려 들다니….
본능적으로 느꼈다. 의식을 잃는 순간 다신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아주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더 이상 허우적거리던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진즉 사고가 멈춘 머릿속은 겨울날의 밤처럼 빠른 속도로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 순간 죽어가는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하늘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 이대로 최후를 맞이하거라.
시리도록 푸른색에 번뜩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신의의 검! 꺼져가는 의식을 붙잡고 겨우 손을 움직여 로브 속에 있는 푸른 정화석을 움켜쥐었다. 반으로 쪼개진 돌이 칼자루로 변한 순간, 있는 힘껏 놈을 향해 휘둘렀다. 휙-! 허공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커헉….”
갑자기 숨통이 트여 칼을 바닥에 꽂은 채 거친 숨을 내쉬었다. 머리는 어지럽고 속은 메스꺼우며 입안에선 비릿한 쇠 냄새가 났다.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는 공포감에 후들거리는 다리는 도무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윽고 시야가 돌아오니, 길게 찢어진 하얀 옷자락과 함께 저 멀리 나동그라진 것이 보였다.
그건 다름 아닌 프로메테우스의 팔이었다. 신의의 검이 그의 팔을 자른 것이다. 화들짝 놀란 나와 달리 선황은 아무렇지 않게 잘려나간 팔을 주워들었다. 심지어 신력으로 접합하기까지 불과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 무의미한 발악을 하는구나.
마치 기계를 고치듯 아무런 고통도 감정도 없는 행위였다. 뜯겨 나간 팔을 태연하게 붙이는 아스레인처럼 그 또한 이미 생물의 범주를 벗어났다. 그러나 비현실적인 모습을 보고도 공포보다는 한줄기 희망을 느꼈다.
놈에게 신의의 검이 통한다. 그렇다면 기회만 있다면 코어도 파괴할 수 있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