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
지독하게 내려앉은 어둠을 더듬으며 마을을 떠났다. 의지할 데라곤 한 줌의 야광화와 빛나는 마석뿐이었다. 그럼에도 거침없이 나아가 해가 뜰 무렵에는 태자의 마법진이 있는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단숨에 대륙을 가로지를 순 있었지만, 문제는 코카서스 산으로 향하는 험난한 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수상한 움직임이 보이거든 바로 보고하도록.”
“예!”
중무장한 병사들이 코카서스 산자락에 진을 치고 있었다. 오직 황실의 군에게만 허락된 독수리 문양이 그들의 갑옷에 새겨져 있었다. 일전에 태자가 ‘조만간 황제가 직접 군을 이끌고 코카서스 산으로 간다.’고 말했었지. 막사가 열에 맞춰 분치되어 있는 걸 보니 이곳에 온 지 꽤 오래된 모양이다.
나무 뒤에 숨을 죽이고 앉아 주변 상황을 살폈다. 눈대중으로 봐도 족히 100명이 넘는 중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게다가 2인 1조로 편성된 병사들이 계속해서 산 일대를 순찰했다. 이대로라면 코카서스 산으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가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역시 해가 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나. 땅거미가 내려앉거든 시야가 좁아질 테니, 병사들도 하늘을 올려다보긴 고사하고 지상을 둘러보기도 바쁠 것이다. 그러니 정면으로 돌파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머리 위로 넘어가면 된다.
“아그누스.”
천천히 바닥을 쓸며 부르자 짙은 그림자가 대답하듯 아른거렸다. 아그누스라면 무사히 하늘을 날아 나를 코카서스 산중턱에 데려가줄 것이다.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니 서서히 날이 어둑해졌다. 완연한 밤이 되자 단장이 횃불을 들고 막사를 돌아다니며 말했다.
“경계를 늦추지 말고 주변을 밝히도록 해라.”
단장의 엄숙한 명령에 병사들이 일제히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잠시 시선이 분산된 틈을 타 산자락을 내려와 아그누스를 소환했다. 이윽고 검은 연기가 휘날리며 거대한 매가 눈앞에 나타났다. 훌쩍 등에 올라타자 아그누스는 곧바로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잠….”
잠깐, 이라 말하고 싶었으나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아그누스는 단 몇 초 만에 황제의 진영을 지나쳐 산중턱에 착지했다. 얼마나 놀랐는지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서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은은하게 보이는 야영지의 불빛은 방금 전과 다름없었다.
“안 들킨 것 같네….”
고맙다는 의미로 머리를 쓸어 주자 아그누스는 안심한 듯 날개를 털며 그림자로 돌아갔다. 그 덕분에 무사히 진영을 넘어왔으니, 이제 아스레인과 데우스가 있는 곳으로 가기만 하면 된다.
이젠 거의 시들어 버린 야광화 랜턴을 들고 조용히 사방을 비춰 보았다. 길옆은 바로 낭떠러지였고, 앞은 안개가 자욱하게 껴 있었다.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아스레인이 쳐 둔 결계였다.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잔뜩 긴장한 채로 결계 안으로 들어가려던 그때였다.
“…쉿.”
바람이 빠지는 소리와 함께 목에 날카로운 것이 닿았다. 섬뜩하게 끼쳐 오는 살의에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떨리는 숨을 내쉬며 천천히 시선을 내리자 야광화가 뿜어 내는 빛에 반사되어 검신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간 그대로 경동맥이 찔리고 말 것이다.
대체 누구지? 아무런 인기척도 없이 다가온 걸 보니, 고도로 훈련된 것 같은데…. 설마 황제 쪽 사람인가. 그렇다면 더더욱 태연하게 굴어야 한다. 애써 두려움을 억누르고 천천히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누구시죠?”
일부러 뻔뻔하게 물었으나 사방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심지어 등 뒤에 있으니 상대가 여자인지, 남자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키자 목울대 위의 칼날이 울렁거렸다.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날 죽일 수 있다. 그런데 칼로 위협만 하는 걸 보면, 아직 내 정체를 모르는 것 같다. 지금은 일단 얌전히 굴어서 화를 잠재우고 빈틈을 노리는 쪽이 최선이다. 조용히 잔머리를 굴리는 그때, 거친 손길이 내 후드를 잡아 벗겨 냈다.
“윽…!”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자 예리한 칼날이 바짝 목에 닿았다. 그 탓에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으니, 등 뒤에 서있던 그가 서서히 내 앞으로 돌아왔다. 후드 그림자에 가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예상과 달리 나와 체격이 비슷했다.
이런 사람이 훈련된 병사라고? 뭔가 이상하단 걸 느낄 즈음, 그가 랜턴 불빛으로 내 얼굴을 비춰보았다. 얼굴까지 드러났으니 이제 어찌 되려나. 팽팽한 긴장감 속에 숨을 죽이던 그때, 그가 별안간 칼을 거두며 입을 열었다.
“태오 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그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올 줄은 몰랐으니까. 휘둥그레 뜬 눈으로 쳐다보자 그는 서둘러 후드를 벗어 얼굴을 드러냈다. 내 목에 칼을 댄 사람은 다름 아닌 태자의 보좌관이었다.
“세핀, 맞죠?”
“예. …설마 태오 님께서 여기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건 저도….”
여전히 칼이 닿아 있는 것 같은 목을 어루만지며 세핀을 흘겨보았다. 그도 적잖이 놀랐는지, 단검을 품에 넣으면서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영락없이 잡혀 가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같은 편이었다니. 안심하는 한편 의아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어째서 코카서스 산에 계시는 거예요?”
“태자 전하께서 저를 보내셨습니다.”
“아….”
황제가 갑자기 병력을 코카서스 산으로 이끌었으니 수상할 만도 하지. 태자로선 반드시 그 이유를 알고 싶었을 것이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이유에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엔 세핀이 물었다.
“그러는 태오 님께서는 이 위험한 곳에 무슨 일이십니까.”
“자세한 사정은 말할 수 없지만, …산 정상으로 가야 해요.”
애매한 대답에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오히려 수상한 쪽은 나인가. 하지만 칼리온도 아니고 세핀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곤란한 처지에 놓여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자 세핀은 그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그러더니 대뜸 위로 향하는 길로 걸음을 돌리며 말했다.
“저를 따라오시죠. 곧 순찰대가 이쪽까지 올 겁니다.”
“네? 하지만 그 앞은….”
결계라고 말하려했지만, 세핀은 아무렇지 않게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뭐야. 여기까진 괜찮은 건가? 성큼성큼 앞서가는 세핀을 서둘러 따라갔다. 랜턴 불빛이 약해 앞이 잘 보이지 않을 텐데도, 그의 걸음걸이엔 망설임이 없었다. 어째 코카서스 산의 지리를 훤히 꿰뚫고 있는 느낌이다.
이곳에 먼저 와서 둘러봤다면 아예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만, 자꾸만 수상쩍은 낌새가 느껴졌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의 반응을 떠보는 질문을 툭툭 던졌다.
“전하께선 지금 어디 계세요?”
“황궁에 계십니다. 여러모로 바쁜 시기니까요.”
당연히 바쁘겠지. 황권을 빼앗을 기회를 노리고 있으니, 아마 잠까지 줄여 가며 일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태자에게 필요한 건, 다른 무엇도 아닌 믿을 수 있는 보좌관일 테다. 그런데 그 보좌관이 코카서스 산의 동태를 살피고 있으니 이상하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잠시 멍하니 멈춰서 있으니 세핀이 걸음을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너무 빨리 갔나 보군요.”
“아, 아니에요.”
내가 너무 예민한 건가. 오히려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 황제를 미행하라고 보낸 걸지도 모르겠다. 아무 이유 없이 같은 편을 의심하고 싶지 않았기에 한층 경계를 누그러뜨리며 물었다.
“근데 세핀 님은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요?”
앞에 황제의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데, 혼자 조용히 침입한 게 마냥 대단하게 느껴졌다. 아까 기척도 없이 내 뒤를 잡은 것도 그렇고. 역시 황태자의 보좌관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호기심에 눈을 빛내며 쳐다보자 세핀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저들은 폐하의 군대잖습니까.”
“네. 그러니까요.”
“그들이 태자 전하를 보좌하는 저를 막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 말에 일순 웃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황제의 군이 태자의 최측근인 세핀을 막을 이유가 없다고? 요 근래 태자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황제는 황위를 빼앗길 위기에 놓였다. 당연히 태자의 보좌관인 세핀 또한 황제의 적대 대상일 테다. 그러니 예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세핀을 순순히 들여보내 줄 리 없었다.
“요즘 황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잖아요.”
알아야만 했다. 태자의 눈과 귀가 되어 주는 세핀이 상황을 모르는 게 말이 안 된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세핀은 꼭 현재 황궁이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아예 모르는 눈치였다. 그게 가능한 경우는 단 하나뿐이다.
“한동안 산에만 처박혀 있으면 모를 수도 있겠네요.”
저 세핀은 가짜다.
“연기는 그만하지 그래요?”
비아냥대는 투로 말하자 세핀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내 그 미간의 주름이 억지로 웃음을 참다가 생겼다는 걸 깨달았다. 아하하!! 호탕하게 웃은 세핀의 눈동자가 곧 시리도록 푸른 하늘색으로 물들어갔다.
어느새 세핀은 사라지고, 새하얀 옷을 입은 선황이 안개 속에 서 있었다.
- 이런, 그새 반란이라도 일어난 건가?
지긋이 내려다보는 눈빛이 여전히 여유롭기 짝이 없었다. 내가 아스레인의 뿔을 되찾아왔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어떻게 아직도 태연할 수가 있지. 불쾌한 낯짝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서슴없이 악의를 드러냈다.
“몰라도 돼요. 어차피 당신이 살아서 이 산을 빠져나갈 일은 없을 테니까.”
- 제법 맹랑한 소릴 지껄이는구나.
선황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냉소를 지었다.
- 태자를 너무 믿지 마라. 그 아이도 결국 에브게니아의 핏줄이니까.
“누굴 믿고 누굴 믿지 않을지는, 제가 알아서 해요.”
- 신의 충고이거늘.
“쓸데없는 참견이겠죠.”
어차피 선황의 본체는 아스레인에게 묶여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건 신력이 만들어 낸 환상에 불과하다. 지금 내 발목을 잡는 것은 그의 힘이 아니라 내 머릿속의 두려움이다.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앞으로 걸어 나가자 예상대로 선황은 나를 가로막지 못했다.
- 정말 이대로 가려는 건가?
그저 안개 속에서 끊임없이 나타나 말을 걸었다.
“왜요. 이제 와서 두려워졌나요?”
- 두려워 할 사람은 짐이 아니라 너지.
마치 신기루처럼 안개 곳곳에서 그의 얼굴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 그가 진실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구나.
끊임없이 속삭이는 목소리가 잎을 갉아먹는 벌레의 소음처럼 느껴졌다. 사각사각. 속닥속닥. 애써 무시하려고 해도 머릿속에 기어 들어오는 소리까지 지워 낼 순 없었다. 그때 갑자기 바람이 훅 불어오더니 싸늘한 안개가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 그토록 증오하던 자가 자신이 만든 피조물이란 걸 알아도 괜찮을까?
귓가에 대고 직접 말하는 듯해 팔을 거칠게 휘둘렀다. 안개는 금방 흩어졌지만, 이미 그의 말이 깊이 파고들고 말았다.
괜찮겠냐고? 당연히 안 괜찮겠지. 죽도록 증오하던 이가 제 자식이라는 걸 알면, 누군들 동요하고 말 것이다. 어쩌면 스스로의 탓으로 돌릴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래도….
“이 기억은 온전히 아스레인의 것이에요.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아스레인이 짊어져야 할 과거죠.”
오케아노스가 해 준 말을 되새기며 단호하게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데 뒤이어 돌아온 건 탄식이 섞인 한숨이었다.
- 저런, 넌 그를 진정 사랑하지 않는구나.
“…네?”
- 짐은 누구보다 그를 사랑했기에 기꺼이 기억을 거둬 간 거다.
허.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새어나갔다. 사랑했다고? 그게 사랑이라고? 제자리에 멈춰 서서 고개를 들자 또 다시 선황의 형상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는 마치 너그러운 신처럼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사랑해 마지않는 마물들이 죽어간 이유가 자신 때문이란 걸 알면, 버티지 못할 테니까.
“착각하지 마세요. 이건 모두 당신의 잘못이지, 아스레인의 탓이 아니에요.”
- 글쎄. 그도 그렇게 생각할지 의문이구나.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흘리는 미소가 퍽 여유로웠다. 아스레인을 잘 알고 있으니까 저리도 자신 있게 확언할 수 있는 거겠지. 애석하게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마 아스레인이라면 당신을 탓하기보다 자책하겠죠.”
내가 아는 그 사람은 안쓰러울 정도로 모든 책임을 짊어지려 했다. 그러니 제 심장과도 같은 뿔을 내어주고, 그대로 봉인되었다가 깨어난 후에도 망가진 세계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했다. 한때는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그 이유를 안다.
아스레인이 그만큼 이 세계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그가 사랑하는 세계를 구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것을.
“하지만 당신의 의도대로 무너지진 않을 거예요. 아스레인은 당신처럼 나약한 사람이 아니니까.”
주먹을 꽉 쥐자 손안에 들린 마석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발하고 있었다. 이윽고 안개를 걷어 내며 앞으로 나아가니 선황은 더 이상 앞길을 가로막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내 등 뒤에 달라붙었다.
-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을 들어 본 적 있나?
“…….”
- 오랜 세월을 지내오며 알게 됐지. 그때 아버지께선 나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는 걸.
“…….”
- 지금도 그는 나를 죽이지 못할 거다.
정말로 그렇다 해도 상관없다. 끝을 맺는 건, 데우스와 나니까.
- 이 순간을 영원히 후회하게 될 것이다. 헤메라.
그 말을 끝으로 마침내 안개 속에서 빠져나왔다. 서서히 선명해지는 시야로 흩날리는 금빛이 들어왔다. 하늘 위로 높이 솟은 뿔, 햇빛처럼 흘러내리는 금색 머리카락. 아아, 그 사람이다. 오랜만에 보는 그의 모습에 왈칵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아스….”
목청을 높여 부르려다가 일순 말문이 막혔다.
‘이 순간을 영원히 후회하게 될 것이다.’
신탁을 내리는 듯한 그 목소리가 겨우 다잡은 결심을 또 다시 갈아먹으려고 한다. 그래서 마석을 기도하듯 두 손으로 부여잡고 심호흡을 가다듬었다. 후회할지도 몰라. 아니, 물론 후회하겠지. 하지만 두렵지 않다. 아스레인이라면 반드시 과거를 딛고 앞으로 나아가리란 확신이 있으니까.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올곧은 뒷모습을 향해 외쳤다.
“아스레인!!”
아마도 이 이름을 부르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