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6 (266/305)

#266

균형을 이루기 위해 태어난 존재는 끝내 창조주를 배신하고 세계를 파멸의 길로 이끌었다. 제 부모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일은 현실에서도 설화에서도 지겨울 정도로 많이 들었다. 하지만 그게 아스레인과 데우스의 이야기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카르사의 선황이 그 마물이 만들어 낸 마지막 기둥일 줄, 대체 누가 알았겠느냔 말이다.

“왜…?”

한숨을 내뱉듯 중얼거려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데우스는 점점 더 멀리 떠나가고, 금빛 마물은 제자리에 죽은 듯 누워 있었다. 어느 한쪽으로 다가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저 끔찍한 진실에 묶여 멍청하게 서있을 뿐.

그래. 예전엔 선황이 마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아코니툼의 정화석을 가져가며 너무도 자연스럽게 마물과 대화했기에 설마, 하는 의심이 들었었다. 하지만 그가 카르사의 열두 신과 동일한 존재임을 알게 된 후부터 마물일지도 모른단 가능성은 완전히 접어 두었다.

너무 안일한 생각이었다. 의심하고, 또 의심했어야 했는데….

과거에서 쫓겨나듯 나오니 다 무너져 가는 선실에 나만 남아 있었다. 결계가 되었던 그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두려울 정도로 엄청난 마력을 내뿜는 마석만 남아 있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 마물의 뿔을 드디어 손에 넣었다. 그런데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지금껏 진실을 마주하고 수도 없이 후회했다. 하지만 이번만큼 간절히 내막을 모르던 때로 돌아가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파르르 떨리는 손을 뻗어 바닥에 떨어진 마석을 주웠다. 창백하게 빛나는 마석은 그것이 짊어진 죄의 무게만큼이나 무거웠다.

이것이 프로메테우스가 신에게서 빼앗은 불. 그리고 이 불의 주인은-

“유피테르.”

그 이름을 입에 담자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여태 수십 번도 더 불러 왔지만, 전혀 새롭게 느껴졌다. 한때는 제국을 세운 선황이자 숙적의 이름이었던 것이 이제야 제 주인을 찾았다. 금빛 태양을 닮은 그 마물이야말로 유피테르란 이름에 어울리는 유일무이한 존재다.

마침내 진짜 이름을 알아내 기쁜 한편, 여전히 복잡 미묘한 감정에 얽매어 있었다.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걸까? 뿔에 깃든 기억을 되찾은 순간 아스레인이 느낄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걱정이 되는 건 그가 짊어질 죄책감이다. 반드시 제거해야 할 상대가 자신이 만든 피조물이자 ‘아들’이라니, 아스레인이 자책하지 않을 리 없었다. 분명히 제 잘못이라고 하겠지. 내게는 오랜 과거부터 얽혀 온 그들의 관계에 끼어들 자격 따위 없었다.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지독한 딜레마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그때였다. 쿵! 무언가 문에 부딪치는 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쿵쿵! 잠긴 문을 뚫고 안으로 들어오려는 듯 몇 번 더 굉음이 들렸다.

마석을 지키려 몸을 웅크리면서 문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누구세요?”

넌지시 물었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 사이에도 계속 덜컥거리던 문은 더 이상 괴력을 버티지 못하고 통째로 뜯겨 나갔다. 그러자 무식하게 문을 부순 이의 모습이 드러났다. 죽은 산호가 겹겹이 싸인 구체는 어디가 머리고 다리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마물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그 심장은 신력으로 움직이는 헤카테였다.

“그자가 보냈나?”

이번에도 헤카테는 말하지 않았다. 지성이 없어서 그런지 문을 열고 들어와서도 제자리에 돌처럼 굳어 있었다. 그런 헤카테가 유일하게 반응하는 물질이 있었으니, 바로 마석이었다. 내 품 안에서 빛나는 마석을 보자마자 놈은 입을 쩍 벌리며 달려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날 새도 없이 얼른 몸을 옆으로 날렸다.

쾅! 먹잇감을 놓친 헤카테는 그대로 벽을 들이박았다. 목제 벽에 단단히 꽂혀 쉬이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이때다 싶어 도망치려는데, 예상과 달리 헤카테는 제 몸을 바퀴처럼 굴려 빠져나왔다.

“망할.”

결국 싸우는 수밖에 없나. 자세를 바꿔 아그누스를 부르려는데, 갑자기 등 뒤로 오한이 느껴졌다. 그 순간 물로 된 화살이 날아와 정확히 헤카테를 관통했다. 흠 잡을 데 없는 실력에 놀라 뒤를 돌아보자 잔뜩 일그러진 얼굴과 마주쳤다.

[대체 이게 무슨 소란이냐.]

결계가 무너지는 파동을 느낀 오케아노스가 몸소 당도했다. 난장판이 된 선실을 둘러보는 시선이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뒤이어 내게 닿은 눈빛은 어서 설명하라고 말하는 듯했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오케아노스에게 마석을 내밀었다.

[그건…?]

“뿔의 힘이 담긴 마석이에요.”

일순 오케아노스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말도 안 돼.]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적잖이 당황한 오케아노스는 마석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신력으로 봉인해 두었다면 필시 느꼈을 터인데, 어찌 여태까지 몰랐단 말이냐.]

“뿔을 숨겨 둔 건, 신력이 아니라 마력이었거든요.”

[…마력?]

“그러니 전하의 마력과 융화되어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던 거죠.”

보기 좋게 허를 찔렸다. 만에 하나 미리 알아차렸다고 한들, 신력이 없었다면 결계를 부수지도 못했겠지만. 왠지 체계적으로 짜인 판을 순서대로 진행하고 있단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마석을 손에 쥔 채 가만히 서있으니 오케아노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뭘 고민하고 있는 게냐. 어서 그분께 가지 않고.]

“전…모르겠어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뭐?]

“이 안에 담긴 과거를 봤어요. 아스레인이…. 아니, 이 세상 사람들 전부가 잊은 기억 말이에요.”

그 마물은 균형의 시초가 될 마지막 기둥을 세웠으나 처참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심지어 그는 창조주의 이름을 빌려 신을 자칭하고 마물을 배척했다. 균형은 오로지 압도적인 군림만으로 실현할 수 있다는 그릇된 신념하에 자신만을 위한 세상을 만든 것이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된다면, 전하께서도 고민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마냥 숨기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점은 안다. 그러나 밀물처럼 한꺼번에 몰려오는 진실에 혼란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괴로운 심정을 하소연했으나 오케아노스는 퍽 의연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럴 리가. 고민하는 시간이 아깝구나.]

오케아노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내게 다가왔다.

[잃어버린 기억이 얼마나 고통스럽든 온전히 그분의 것이다. 되찾은 기억을 다시 지우든, 영원히 가지고 있든 선택은 그분께서 하시겠지. 네가 고민할 문제가 아니다.]

“그건 그렇지만….”

[게다가 네가 말하지 않았느냐.]

이윽고 내 어깨에 손을 올린 오케아노스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뿔로써 오랜 갈등을 끝낼 수 있다고.]

“…네.”

[그것이 그분의 뜻이라면 지금 여기서 망설일 이유 따윈 없지.]

조곤조곤 일러 주는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레인과 헤어지던 날, 약속했다. 반드시 진실을 찾아오겠다고. 내가 여기서 머뭇거려 봤자 이미 지나간 과거는 바뀌지 않는다. 그러니 이는 갈등을 끝내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할 고난일 뿐이다.

“전하의 말씀이 맞아요. 이젠… 끝내야죠.”

복잡한 마음을 다잡으며 결의에 찬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줄곧 무표정이었던 오케아노스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난생 처음 보는 그의 진심 어린 미소에 놀라기도 잠시, 범선 밖에서 또 다시 굉음이 들려왔다.

쿵. 쿵. 바닥이 요동치는 듯 울리는 소리에 문밖을 바라보았다. 배 안엔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 너머에 도사리는 힘을 느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거대한 힘이었다.

“신력이에요!”

그 말에 오케아노스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이윽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왕궁 주변에 쳐진 결계 밖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산호 덩어리가 떠있었다. 그것들은 마치 운석이 떨어지듯 끊임없이 결계를 부수려 들었다.

당황한 나와 달리 오케아노스는 퍽 덤덤한 투로 말했다.

[아까 선실에서 봤던 거군.]

“네. 신력으로 움직이는 인공체예요. 그게 이렇게나 많이 몰려 올 줄은 몰랐는데….”

전부 이 마석을 노리고 달려드는 건가? 아직 오케아노스의 결계는 굳건했지만, 그리 오래 버티진 못할 것 같았다. 너른 바다를 가득 메울 만한 양의 헤카테에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저걸 어떻게 다 상대할지 고민하던 차, 오케아노스가 넌지시 손짓을 했다.

[네일로스 경.]

[예! 전하.]

[태오와 함께 온 인간을 무사히 뭍으로 데려다주거라.]

잠깐. 나와 휘브를 이대로 보내주겠다고? 그럼 저 헤카테들은 어쩔 셈인 거지. 명령을 받은 네일로스가 휘브를 데려간 사이, 곧바로 오케아노스에게 말했다.

[전하. 감히 능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혼자서 이 많은 헤카테를 상대하시긴 힘드실 거예요. 일전에 닉스도 고전을 했었고….]

[짐을 걱정하는 건가?]

퍽 냉랭하게 말을 끊는 탓에 나도 모르게 흡, 숨을 멈추며 옆을 돌아보았다. 자신을 얕봤다고 생각해 화가 났을 줄 알았다. 하지만 결계 너머를 바라보는 오케아노스의 눈은 여느 때보다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슬그머니 올라간 입꼬리에선 은근한 흥분이 느껴졌다.

[얼마 만에 능력을 제대로 써 보는지 모르겠구나.]

“그래도….”

[그리고 혼자라니. 짐의 자랑스러운 군대는 그리 약하지 않아.]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왕궁을 지키는 병사들이 결계 밖으로 나가 헤카테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지금껏 헤카테를 상대해 본 적이 없을 텐데도, 병사들은 놀라우리만치 빠르게 코어를 부숴 나갔다. 일격에 벌의 목을 따는 말벌과 같은 모습에 일순 할 말을 잃었다. 그러자 오케아노스는 냉소를 지으며 눈짓으로 반대편을 가리켰다.

[같잖은 걱정은 됐으니 어서 가 보거라.]

어느새 네일로스가 휘브를 데리고 나와 있었다. 아직 의식을 되찾지 못했는지, 휘브는 물로 된 거북이 위에 얌전히 누워 있었다. 황급히 휘브에게 가려다가 멈춰 서서 오케아노스에게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나를 흘끗 내려다본 오케아노스는 이내 등을 돌리며 말했다.

[지금 그분의 곁엔 누구보다 네가 필요할 것이다.]

“…맡겨 주세요.”

결코 마음을 열지 않던 오케아노스마저 이젠 나를 믿고 있다. 그 막중한 책임감을 끌어안고 휘브와 함께 뭍으로 나왔다.

그날부로 대체 며칠이 흘렀는지, 하늘은 처음 바다에 빠졌을 때와 같이 어두컴컴했다.

마을에서 밤을 지내고 가면 좋겠지만, 마석을 손에 넣은 이상 한시가 급했다. 헤카테는 마석을 빼앗으려 맹렬하게 나를 추격할 것이다. 그러니 믿을 만한 사람에게 휘브를 맡기고 떠나야한다. 잠시 고민하던 그때 의외의 인물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다. 확신이 서자마자 아그누스의 등에 휘브를 태우고 걸음을 돌렸다. 해안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도착하니 익숙한 건물이 보였다. 대문 앞에서 휘브를 부축한 채로 끙끙거리자 한 사내가 횃불을 들고 걸어 나왔다.

“누구시죠? 오늘 손님이 오신단 얘긴 못 들었는데.”

낯익은 얼굴을 보자마자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튀어나왔다. 그때와 같이 단정한 차림새로 나타난 사내는 보호소 테티스의 연구원 윈터였다.

“윈터 씨. 오랜만이에요.”

후드를 벗고 얼굴을 드러내자 윈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 이게 얼마만입니까.”

“그러게요. 잘 지내셨어요?”

“물론이죠. 그날 교수님과 함께 다녀가신 이후로 바다가 잠잠해져서 일거리도 줄었습니다.”

윈터는 활짝 웃다 말고 뒤늦게 내 옆에 있는 휘브를 발견했다.

“이분은…?”

“제 친구인데, 바다에 빠져서 의식을 잃었어요.”

“예?!”

화들짝 놀란 윈터는 냉큼 휘브의 팔을 어깨에 이고 본관 안으로 들어갔다. 그 후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휘브를 손님방으로 데려가 상태를 진찰했다. 다행히 별 문제는 없는지, 윈터는 놀란 가슴을 다독이며 말했다.

“맥박은 정상이에요. 이정도면 하루 안에 깨어나실 거예요.”

“다행이네요.”

이내 윈터는 두툼한 이불을 가져다가 정성스럽게 휘브에게 덮어 주었다. 다친 마물을 돌보듯 섬세하게 환자를 대하는 모습을 보며 재차 확신했다. 윈터라면 휘브를 맡겨도 안심이다.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다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갑자기 찾아온 것도 염치없지만,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윈터가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기에 냉큼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다면 제 친구가 깨어날 때까지만 돌봐 주실 수 있으세요?”

“아, 그럼요. 이 어두운 밤에 의식 없는 분을 내칠 수는 없죠.”

“감사합니다.”

선뜻 부탁에 응해 준 덕분에 겨우 한시름 놓았다.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휘브의 머리를 쓸어 주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오래 시간을 끌었다간 헤카테가 보호소까지 침입하고 말 것이다.

“그럼 전 이만 가 봐야겠어요.”

“벌써요?”

“혹시 그가 깨어나면 안겔루스로 돌아가라고 전해 주세요.”

다시 후드를 뒤집어쓰자 윈터는 걱정하는 투로 물었다.

“이 시간에 어딜 가시는 겁니까?”

“…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삼가자 윈터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문까지 배웅하려고 하기에 괜찮다며 한사코 거절하곤 혼자 걸음을 돌렸다. 휘브를 두고 가는 게 못내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방을 나서기 직전, 휘브의 곁에 있는 윈터를 넌지시 불렀다.

“윈터 씨. 한동안은 바다 근처에 가지 마세요.”

“예?”

“또 다시 폭풍우가 칠 거예요.”

그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조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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