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
이아페는 보란 듯이 대륙의 중심 도시로 성장했다. 많은 사람들이 아이페를 낙원이라 불렀으며, 모두가 이아페에서 살고 싶어 했다. 그렇게 몇 년간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나를 찬양하는 소리에 팔려서 도시 뒤편에서 들려오는 삐걱거리는 소음을 듣지 못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마을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자신의 죽음이 예견된 날, 다른 사람이 대신 죽으면 삶이 연장된다는 낭설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대부분 사람들은 무시하고 넘겼다. 하지만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에게 그 속설은 실낱같은 희망이었나 보다.
이 평화롭고 조용한 도시에서 처음으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우습게도 이웃을 죽인 인간의 미래가 달라졌다. 점지대로라면 그날 지병으로 죽었어야 하는데 신의 장난인지 정말로 운명이 바뀐 것이다.
그래 봤자 하루였다. 만 하루를 더 살았을 뿐인데, 소문은 발이 달린 듯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그때 처음으로 후회란 걸 했다. 완벽해야 할 점지가 틀려서? 아니, 내가 만들어 둔 완벽한 낙원이 그딴 인간 하나 때문에 뒤틀렸다는 게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유피테르 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혼란스러워 나를 찾아온 이들에게 태연하게 말했다.
“그자는 신의 순리를 배반한 자다. 가문 대대로 천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소란은 차차 잠들어 가는 듯했다. 하지만 곧 죽을 인간에겐 천벌이니 순리니 하는 것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었다. 밤만 되면 기이한 사건이 끊이질 않았다. 혼자 죽을 수 없다며 이웃을 살해하고, 심지어 제 반려자를 죽이는 경우도 허다했다. 어떻게든 하루를 더 살아 보겠다며 마을 전체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결국 마을에 번진 불을 끄려다가 여럿 희생되었다. 그중엔 내가 처음 이아페에 왔을 때 웃으며 반겨 줬던 여관 부부도 포함되어 있었다. 싸늘한 주검이 된 그들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다시금 의구심을 품었다.
무엇이 그들을 절망으로 이끌었나. 미래를 아는 자에겐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는 줄 알았다. 혜안 덕분에 이아페가 이토록 발전할 수 있었던 건데…. 설마 이게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혜안의 금기를 깬 형벌인가?
뒤늦게 손을 써 보려고 했지만, 이미 망가진 운명을 되돌릴 수 없었다. 태우지 못한 시체가 쌓이니 알 수 없는 역병이 돌고, 불한당에게 약탈당해 길거리에 나앉는 이들은 더욱 많아졌다. 어두운 길거리엔 사체 썩는 냄새와 지푸라기 타는 냄새가 섞여 지독했다.
그렇게 혜안이 점지한 최후의 미래는- 이아페의 멸망이었다.
“이대로는 안 돼….”
그래. 아버지라면 분명 이아페를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을 알 것이다.
수중에 쌓인 금은보화는 버려 두고, 여관 주인이 내게 제물로 바친 황소만 데리고 마을을 떠났다. 아수라가 된 이아페와 달리 코카서스 산은 몇 년 전과 다름없이 평화로웠다.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꼭대기로 올라가는데, 이상하게도 마물들이 근처로 다가오지 않았다. 심지어 어린 마물들은 하나둘씩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이유를 몰라 머뭇거리던 차, 어디선가 육중한 발소리가 들렸다.
[감히 누가 신성한 영역에 발을 들이는가.]
그르릉- 위협적인 울음소리에 대지가 요동쳤다. 이윽고 거대한 날개가 수풀을 뚫고 나타나 쓰러진 어린 마물을 감싸 안았다. 마치 나를 외부인 취급하는 태도에 자못 당황하고 말았다. 설마 그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건가. 서둘러 후드를 벗고 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
[너는….]
천천히 커지는 눈동자에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버지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많이 달라졌던가. 나와 그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하는 듯 했다. 그래도 여전히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시겠지.
조심스럽게 이아페에서 벌어지는 일을 설명하려는데, 그보다 먼저 긴 한숨이 내려앉았다.
[이제야 네 힘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느냐.]
아버지는 이미 모든 일을 다 아는 눈치였다. 속내를 꿰뚫은 눈빛이 두렵지 않다면 거짓이겠지. 아버지의 말대로 이번 이아페의 일은 전적으로 내 잘못이다. 그렇기에 변명하려던 것도 잊고 솔직하게 입을 열었다.
[도와주세요. 아버지라면 이아페를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는 힘이 있으시잖아요.]
뉘우치면 이해해 줄 줄 알았다. 누구나 한 번쯤은 실수할 수 있으니까. 예전처럼 그의 품 안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를 내려다보는 눈동자는 볕이 닿지 않는 그늘처럼 싸늘하기만 했다.
왠지 타인을 대하는 것 같은 눈빛에 그간의 서러움을 털어놓았다.
[다 압니다.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제게 다른 형제들을 소개시켜 주지 않는 이유를….]
[그게 무슨 소린가.]
[제가 아버지의 유일한 오점이기 때문이시죠.]
죽어도 이것만큼은 인정하기 싫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완벽한 피조물은 결국 유일한 오점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가슴을 옥죄는 통증에 주먹을 꽉 쥐자 아버지가 한숨을 내쉬며 나를 불렀다.
[데우스.]
[괜히 위로 안 하셔도 돼요. 그거 아세요? 아버지, 거짓말은 정말 못하시거든요.]
자조적인 미소를 흘리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지금껏 전부 아버지를 도와 드리고 싶어서 그랬어요. 이렇게 하면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냥… 잘했다는, 그 칭찬 한 마디를 듣고 싶었는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아버지의 경고를 무시하고 산을 벗어났을 때? 아니면, 내가 이아페로 갔을 때? 그것도 아니라면, 처음 태어나서 사명을 받은 것부터 틀려먹었던 건가.
[이번엔 제가 부족했어요.]
머리를 깊이 숙인 채 주먹을 꽉 쥐었다.
[이아페의 일만 무사히 끝나면, 어떤 벌이든 달게 받을게요.]
[…….]
[소란피우지 않고 아버지 뜻대로 조용히 살게요. 그러니까… 도와주세요.]
그의 앞에서 마지막 남은 자존심까지 전부 내려놓았다. 한때는 선지자, 또 한때는 신의 아이라고 불리던 나였다. 하지만 이젠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싶지 않은 평범한 자식일 뿐이다. 잠깐의 침묵 끝에 아버지는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아페를 망가뜨린 원흉은 혜안이 아니라, 너의 그 오만함이다. 알고 있느냐.]
[…예.]
[그러니 여기서 네게 나누어 준 힘을 전부 거두겠다.]
[예?]
무어라 말을 덧붙일 새도 없었다. 내 몸에서 마력이 흔적도 없이 빠져나갔다. 정녕 이대로 사라지는 건가 싶은 그때, 내게서 흘러나가던 마력의 흐름이 우뚝 멈췄다. 정확히 육신을 유지할 정도만 남겨 둔 것이다. 이제 이 몸엔 신력밖에 남지 않았다. 이걸 마물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혼란스러워하니 아버지는 사뭇 고압적인 어조로 말했다.
[네 그릇이 힘을 담기에 충분히 커지거든 다시 돌려주마.]
정말인가? 나도 모르게 의심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이대로 조용히 나를 없애려는 건 아닐까. 사라진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허리를 숙여 내게 머리를 가까이했다.
[아버지…?]
[내 뿔을 가져가거라.]
뜻밖의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뿔을 가져가라니. 아버지에게 뿔이란 인간에게 심장이나 다름없었다. 한쪽 뿔만으로 살아갈 순 있겠지만,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쇠약해질 것이다. 뻣뻣하게 굳어만 있자 아버지는 한 번 더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가서 너에 대한 인간들의 기억을 지우고, 너의 흔적도 함께 없애거라. 나의 뿔이면 이아페 전체에 마법을 걸기엔 충분하겠지. 그럼 금기를 깨서 나타난 재앙들도 점차 사라질 것이다.]
[제가 어떻게….]
[너는 인세에서 없었던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 알겠느냐.]
나로선 거부할 수가 없었다. 조심스럽게 신력이 깃든 칼을 꺼내어 그에게 겨누었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머리를 더욱 아래로 숙이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조용히 칼을 들어 단번에 그의 뿔을 잘라냈다. 서걱,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윽고 뿔은 눈 깜짝할 사이에 금빛 마석으로 변했다.
[이것이… 그 마물의 마력….]
태양을 손에 넣으면 이런 기분일까. 순도 높은 마력이 끊임없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아름다운 광경을 홀린 듯 멍하니 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코카서스 산을 내려왔다.
얼마 후에 다시 마주한 이아페는 지옥 그 자체였다. 역병에 피부가 문드러진 환자가 길거리를 돌아다녔고,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린 개는 급기야 인간의 시체를 뜯어먹고 있었다.
그 참사를 더는 볼 수 없어 바로 마석을 하늘 높이 들어올렸다. 그러자 빛이 폭발하듯 퍼져 이아페 전체를 휘감았다. 눈에 불을 키고 싸우던 사람들은 하나둘씩 바닥에 쓰러지고, 나무껍질처럼 갈라진 환자의 피부도 멀쩡하게 돌아갔다.
그리하여 나에 대한 기억과 그간의 역사는 모두 지워졌다. 이아페의 그 누구도 ‘유피테르’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끝인가.]
씁쓸한 기분을 뒤로 한 채 코카서스 산으로 돌아갔다.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예전에 나를 피했던 마물들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넌 뭐지?] 매섭게 묻는 태도가 어째 적을 대하는 듯했다. 그러더니 여럿이서 나를 둘러싸고 숙덕거리기 시작했다.
[이상한 기운이다….] [마물이 아니야.]
마물이 아니라고? 그럴 리가.
[난 위대한 그 마물의 아들이다.]
당당하게 어깨를 펴며 말하자 마물들은 코웃음 치며 말했다.
[그 마물의 아들?] [웃기지마. 그분께서 세우신 기둥은 네 개뿐이야.]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내 심장에 쐐기를 박았다. 너희가 모르는 거라고, 난 아버지의 피조물이라고 당당히 말해야하는데 이상하게도 말문이 열리지가 않았다. 충격에 휩싸여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그들은 황홀한 표정으로 다른 형제들을 찬양했다.
[오케아노스님이나 히페리온님은 벌써 스스로의 영지를 갖고 돌보고 계시지.]
[닉스님은 우리 같은 미천한 자들도 아껴주시고.]
[가장 늦게 태어나신 이카로스님조차 어엿한 기둥이 되셨잖아.]
[정말로 그분의 피조물다워.]
맞아, 맞아. 서로 동조하며 말하던 그들은 갑자기 나를 일제히 노려보았다.
[하지만 넌 뭐야?]
[나는…….]
[그 마물께선 단 한 번도 너에 대한 얘기를 안 하셨는데?]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다. 아버지가 나의 존재를 남들에게 숨기고 있다는 걸. 의문이 들 때마다 항상 마땅한 이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넘겼다. 애써 무시하고 있었는데, 그 말을 남에게 들으니 가슴 속 깊이 묻혀있던 의심이 고개를 들었다.
정말로 아버지는 나를…… 없애려는 건 아닐까.
[잠깐. 너.]
그때 털로 뒤덮인 마물이 코를 킁킁 거리더니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우웩, 인간의 냄새잖아.] [설마 그분을 배신하고 인간에게 붙은 건가?!]
[무슨 소리야. 나는….]
[배신자.]
내가 배신자라고? 주춤 뒤로 물러나자 마물이 날개를 위협적으로 펼치며 말했다.
[그분께서 널 처단하실 거야.]
일순 눈앞에 새하얀 빛으로 점멸되었다.
[닥쳐!!]
나도 모르게 그들을 신력으로 밀쳐내고 도망치듯 정상을 향해 달렸다. 배신자, 마물을 버린 배신자!! 악에 받친 외침이 계속해서 등 뒤에 따라붙는 착각이 일었다. 겨우 정상에 도착하자 저 멀리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여전히 잠들어있는 그에게 다가가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 치들이 저보고 배신자래요.]
한쪽 뿔이 잘린 그의 머리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니죠? 아버지….]
간절하게 물으며 그에게 손을 뻗는 순간, 머릿속에 그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이아페를 망가뜨린 원흉은 혜안이 아니라, 너의 그 오만함이다.’
어째서 지금 그 말이 떠오르는 걸까.
그때부터 아버지가 했던 말들이 하나둘씩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네가 책임을 질 수 있겠느냐.’
‘지도자 행세를 하라고 너를 이아페에 보낸 게 아니다.’
전부 나를 사랑하셔서 한 말이야. 애초에 애정이 없으면 쓴 소리도 안하시잖아.
‘그러니 여기서 네게 나누어준 힘을 전부 거두겠다.’
아냐. 돌려주신다고 했어. 나의 그릇이 충분히 커지면….
‘그분께서 널 처단하실 거야!’
돌려주신다고…….
‘너에 대한 얘기를 안 하셨는데?’
사정이 있으셨겠지. 내 존재를 비밀로 한건-
‘제가 아버지의 유일한 오점이기 때문이시죠.’
……그거 말고 다른 이유가 있을까?
냉랭한 목소리가 비수가 되어 날아왔다. 어떻게든 생각을 바꾸려 나 혼자 자문자답도 해봤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점점 더 확실해지고, 더더욱 비참해질 뿐이다. 아버지는 정말로 나를 만든 걸 후회하지 않으실까?
‘너는 현세에서 없었던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
만약 이대로 날 없애려는 거라면 어떡하지…?
‘배신자!!!’
이대로 가면 그놈들이 곧 아버지에게 말할 거야. 내가 마물을 저버리고 인간의 편에 섰다고. 아버지는 어린 마물들을 끔찍이 아끼시잖아. 그러니 그들의 세치 혀에 속아 내 존재를 완전히 지워버리려고 하시겠지.
‘내가 널 잘못 만든 것 같구나.’
그래! 아버지는 분명 나를 만든 걸 후회하고 있을 거야. 그렇잖아? 산을 떠난 이후로 한 번도 칭찬 같은 걸 받은 적이 없어. 내가 싫어지신 거지. 그래서 아무한테도 나에 대해 말하지 않은 거야. 내 존재를 숨기고… 숨겨서……. 마지막에 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야.
[난… 여기서 끝내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죽고 싶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지? 도망칠까? 아니, 도망쳐봤자 아버지는 금방 나를 찾으실 거야. 오히려 배신자라는 낙인에 찍혀 오해를 풀 여지도 없겠지. 그럼…….
[죽여?]
형형하게 빛나는 눈으로 쓰러져있는 아버지를 내려다보았다. 뿔 한쪽을 잃어 나약해진 지금이라면 그를 봉인할 수 있다. 그는 내게서 모든 마력을 빼앗았다고 생각하겠지만, 내겐 새로운 힘이 있다. 그가 사기라고 부른 이 ‘신력’이.
지금뿐이다. 살아남으려거든 기회는 지금뿐이야. 아버지도 그랬잖아. 어느 한쪽이 죽는 건 자연의 순리라고. 내가 살기 위해선 남을 짓밟는 수밖에 없어. 그래서 이아페에 있는 그 인간들도 서로를 죽고 죽인 거야. 바로 내가 살기 위해서! 인간도 마물도 마찬가지야.
[죄송해요. 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어요.]
곧바로 신력을 사슬로 만들어 그의 몸에 칭칭 감았다. 영겁의 세월이 흘러도 결코 자력으로 깨어날 수 없을 것이다. 새하얀 빛에 둘러싸이는 아버지를 보니 저절로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아버지. 당신이 틀렸어요.]
나는 살아남을 것이다. 살아서 이 세계에 진정한 균형을 가져올 것이다.
[균형은 누군가 양측에 모두 군림해야만 이룰 수 있는 거예요.]
코카서스 산꼭대기의 절벽. 아버지는 항상 그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내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아버지를 봉인했다. 누구도 접근할 수 없도록 결계를 치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산을 내려왔다.
그리고 내가 태어난 그 산에서,
[내 이름은….]
마물이었을 때의 나를 버렸다.
- 유피테르.
그 후로 바다 건너에 있는 신전을 향해 떠났다. 고대 이아페는 기억에서 사라졌으니, 새로운 이아페를 세우기 위함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신의 아이나 선지자가 아니라, 인간들이 믿고 기댈 수 있는 완전한 절대자로 거듭날 것이다.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혜안과 마르지 않는 신력만 있다면, 아예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신전에 도착해서 대사제의 직위에 있는 자에게 접근했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을 쉽게 믿는 법이지. 유난히 달이 밝게 빛나는 밤에 대사제에게 새하얀 빛을 보내어 말을 전했다.
- 피 맺힌 서리가 하늘을 뒤덮어 눈앞에 어둠이 드리운다. 오직 구름을 뚫고 뻗은 손만이 태양에 닿을 수 있을지니. 그대. 설령 그림자가 집어삼킬 듯 쫓아와도 두려워하지 말라. ……불을 가져오는 자, 세상을 얻으리라.
참 우습게도 대사제는 그걸 신의 음성이라고 믿었다. 처음으로 신을 접한 대사제는 눈물을 흘리며 신의 기적을 알렸고, 소문은 바다 건너 대륙까지 전해졌다. 모두들 난세를 잠재울 영웅이 나타날 것이라며 기뻐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유독 서리가 많이 내린 겨울, 붉은 달이 뜨는 날. 신탁에 걸맞은 횃불을 들고 신전에 친히 나타나주었다. 그 모습을 본 대사제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엎드려 절하며 소리쳤다.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천자를 뵙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그 순간 새로이 시작되었다. 신의 아이이자 선황 유피테르는 인간 세상을 위협하는 그 마물의 뿔을 잘라 봉인시켰다. 그리고 다섯 개의 별이 떨어진 대륙에 카르사 제국을 세워 흐트러진 도리를 바로잡고 영원한 영광을 누렸다.
흠 잡을 곳 없는 건국설화를 만들어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위대한 카르사 제국이여, 영원하라!”
“유피테르 폐하! 만만세!”
모두가 유피테르의 이름을 외치고 있다. 마치 아버지가 코카서스 절벽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듯 황실의 단상 위에 서서 신민들을 굽어보았다. 이 얼마나 완벽한 제국인가. 언젠가 아버지께서 봉인에서 깨어나 카르사 제국을 본다면, 많이 놀라시겠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저 먼 코카서스 산을 올려다보았다. 마침 태양이 산 정상에 걸쳐 온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을 보니 문득 그날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나를 처음 만들었던, 그 날의 기억이.
‘정신이 드는가. 프로메테우스.’
‘제 이름이 프로메테우스인가요?’
‘그래.’
‘왜죠?’
‘인간 세계에 불을 가져다 줄 존재이니까.’
처음 본 태양은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다웠다. 나는 아마도. 아니, 의심할 여지없이 아버지를 사랑했다. 지금은…… 글쎄. 이따금씩 그리워지긴 한다. 나를 따스하게 안아 주던 그 품이, 나를 완벽하다고 말해 주던 그 목소리가.
‘그럼 아버지는…. 아, 아버지라고 불러도 되죠?’
‘그래.’
‘와! 아버지의 이름은 뭐예요?’
그래서 잊지 않으려고 그의 이름을 아로새겼나 보다.
‘…유피테르.’
하지만 그날은 다신 돌아오진 않겠지.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