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4 (264/305)

#264

눈을 뜨자마자 본 것은 찬란한 금빛이었다. 모든 생물은 태어날 때부터 만물의 근원인 태양을 본능적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하던가. 내겐 그가 태양이었다. 이 세상의 유일한 완전한 존재이자, 창조주. 나의 하나뿐인 아버지.

[너는 내가 만든 최후의 기둥이자 균형의 시초가 될 것이다.]

이윽고 아버지는 금빛 날개로 보잘 것 없는 나를 안아 주었다. 다리도, 팔도 없어 바닥을 길 수밖에 없는 하찮은 나를 완벽하다고 말했다. 모든 피조물 중에서도 내가 단연 으뜸이라고. 그 기대에 응하고자 길쭉한 몸을 움직여 그의 날개 죽지에 뺨을 비볐다. 그러자 아버지는 콧잔등으로 내 이마를 톡 건드리며 말했다.

[그 눈은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이지.]

[미래….]

[하지만 자만하지는 말거라. 내가 왜 네게만 그런 힘을 주었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해.]

신신당부의 말씀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전 뭘 하면 되죠?]

[나를 도와 세계의 균형을 이루어라. 그것이 너의 사명이다.]

[네! 아버지.]

그날부로 아버지는 나를 데우스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오직 그만이 나를 데우스라고 부를 수 있었다. 내게 하나뿐인 이름을 준 그의 기대에 걸맞은 피조물로 거듭나고 싶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하는 일이라면 뭐든 따라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마법 실력도, 마물을 통솔하는 권위도, 위엄 있는 말투와 행동까지도.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할 수 없는 게 있었다. 그건 외형이었다. 처음부터 뱀의 형상으로 태어난 내게 아름다운 날개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인간으로 변한 모습이나마 그와 최대한 닮으려 노력했다.

어느덧 완벽하게 변할 수 있게 되자마자 아버지에게 가장 먼저 보여 드렸다.

[어때요? 꽤 닮지 않았나요?]

신이 나서 제자리에서 빙글 돌자 아버지는 신기한 듯 눈을 깜짝였다.

[벌써 모습을 바꿀 수 있는 건가.]

[…그러면 안 되나요?]

[아니, 잘했다. 다른 형제들보다 빠르구나.]

옅은 미소를 지은 아버지는 내 머리를 퍽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처음으로 칭찬을 들었다는 희열에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어떻게 하면 더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지? 어떻게 하면 더욱 그 마음에 들 수 있을까. …그래. 사명이다. 아버지의 눈엔 내가 아직 부족해 보이겠지만, 난 다른 형제와는 달라. 나라면 맡은 바 사명을 완벽하게 이행할 수 있다.

[저, 아버지.]

부푼 기대를 안고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인간 세상에 가 봐도 되나요?]

[…갑자기?]

[균형을 이루기 위해선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 알아야 하잖아요.]

의욕으로 가득 찬 눈을 빛내자 아버지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태어난 지 한 세기도 지나지 않은 내가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겠지. 나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알기에 얌전히 대답을 기다렸다. 이윽고 아버지는 허락한다는 표시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단, 누구도 네 이름과 능력을 알아선 안 돼.]

[어째서 이름까지 숨겨야 하죠?]

[이름엔 그 주인을 속박하는 힘이 있으니까 조심해야 한다.]

그 후, 아버지는 내게 인간의 언어를 전승해 주며 말했다.

[이아페라는 도시에 가 보거라. 여러 군상을 보고 많은 것을 깨닫길 기대하마.]

기대한다고 하셨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게. 그 기대가 부담이 되기는커녕 촉진제로 느껴졌다. 그렇게 아버지의 품을 떠나 코카서스 산을 내려가며 굳게 다짐했다. 이곳에 다시 돌아오는 날에는 반드시 아버지만큼 대단한 존재가 되어 있을 거라고.

***

처음으로 마주한 인간 세계는 내가 나고 자란 자연과는 전혀 달랐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과 무리지어 생활하도록 발달한 문명이 제법 신기했다. 다행히 아버지가 전승해 준 지식 덕분에 어렵지 않게 인간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묻어 갈 수 있었다.

마침내 작은 마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한 도시에 도착했다.

“이곳이 이아페인가?”

그리 묻자 지나가는 행인이 나를 호기심어린 눈으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예. 나으리. 혹시 이아페는 처음이신 겁니까?”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럼 저희 여관에서 묵으시는 건 어떠십니까? 목욕물도 따뜻하니 좋습니다!”

이런 걸 호의라고 하던가, 호객이라고 하던가. 당분간 지낼 곳이 필요했기에 조용히 여관 주인을 따라갔다. 그 부부는 내가 대단한 부자나 귀족 도련님이라고 생각했는지, 돈도 받지 않고 극진히 대접했다. 자신들은 불린 씨앗을 먹으면서 내게는 꼬박꼬박 고기를 바치는 모습이 의아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외출하러 가는 부인에게 말했다.

“길을 걷거든 붉은 수술이 달린 마차를 조심해라.”

이정도 쯤은 괜찮으리라 생각했다. 그의 남편도 매번 길을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곤 했으니까. 밤이 되어 돌아온 부인은 내게 ‘덕분에 사고를 피했다’며 몇 번이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날부로 존경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데,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 꼭 아버지를 대하는 내 모습과 겹쳐 보였다.

그때부터 넌지시 미래를 흘리는 일이 많아졌다.

“파란 옷을 입은 사내 옆엔 앉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건너 마을에 노인이 병으로 쓰러졌다던데, 거긴 네 아비가 사는 곳 아니더냐?”

“뒷산을 지나갈 때 밤나무 아래를 잘 보거라. 네가 찾는 약초는 거기 있을 테니.”

그러다 보니 어느새 도심 전체에 소문이 났다. 이아페에 신의 사자가 나타났다고. 그들은 나를 선지자라고 부르며 추앙했고, 스스로 고기와 황금을 갖다 바쳤다. 어느새 수중엔 내로라하는 거상보다도 많은 부가 쌓였다. 내겐 하등 필요 없는 것이었기에 배고픈 자에게 고기를 나눠 주고, 구걸하는 자에게 황금을 주었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처음엔 감사하며 돌아가는가 싶더니, 그들은 다음날 다시 돌아왔다. 심지어 더 많은 이들을 데리고 왔다. 지금은 아무것도 없다고 돌려보내자 오히려 성을 내기 시작했다. 거짓말하는 거 아니냐고 의심하는 모습에 화가 나기는커녕 궁금증이 돋았다.

그들은 어째서 만족하지 못하는가. 굶주렸다 하여 세 식구가 먹을 고기를 내주었고, 가난하다하여 평생을 일해도 얻지 못할 보석을 주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인간들은 무언가를 바라고 있었다.

의문은 끝내 풀리지 않아 마을에서 유명한 현자를 찾아갔다. 인간 사이에서 성인이라 불리는 자라면 답을 알고 있지 않을까 하고. 비록 현자는 명을 다하기 직전이었지만, 인자하게 웃는 얼굴로 나를 맞이해주었다.

“나으리께서 제게 궁금한 게 있다고 들었습니다.”

노쇠한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있는 현자에게 물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게 뭔지 아는가.”

현자는 자글자글한 주름이 진 얼굴로 웃으며 답했다.

“나으리. 진정 저희에게 필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물질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더냐.”

“가족마저 믿을 수 없는 세상입니다. 그러니 저희에겐 믿고 따를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합니다. 이를테면… 신과 같은 절대자가 비천한 저희를 구원해 주시길 원합니다.”

신이라. 내게 아버지가 있듯 그들에게도 의지할 곳이 필요한 건가. 그거라면 충분히 가능하고도 남았다. 궁금증이 풀려 그만 집을 떠나려는데,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발목을 잡았다.

“나으리의 존함을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선뜻 입이 열리지 않았다. 이름을 말해선 안 된다. 그런데 현자는 퍽 간곡하게 청했다. 오래도록 풀리지 않은 문제에 대한 답을 알려 준 보답으로라면 괜찮겠지. 결국 나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대신, 앞으로 역사에 길이 남아야 할 단 하나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유피테르.”

“그것 참, 나으리와 어울리는 이름입니다.”

그 후로 이아페를 잠시 떠나 코카서스 산으로 향했다. 드디어 방법을 찾았다. 그들에게 믿을 수 있는 절대자, ‘신’을 만들어 주면 된다. 코카서스 산꼭대기에 다다르자 오늘도 무척이나 아름다운 금빛이 눈가를 스쳤다.

[아버지!]

반가운 나머지 한달음에 달려가니 아버지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데우스?]

살짝 찌푸린 미간과 나를 훑어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오랜만에 보는데 내가 반갑지 않은 건가? 예상한 반응과 사뭇 달라 나도 모르게 당황하고 말았다. 제자리에 뻣뻣하게 굳어 있자 아버지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혼내듯 물었다.

[그동안 대체 인간 세계에서 무얼 한 것이냐?]

[예?]

[알 수 없는 사기(邪氣)가 짙어졌구나.]

사기? 인간과 오래 지낸 탓인가. 나로선 내 기운이 어디가 달라졌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여전히 당신이 빚은 피조물이자 하나뿐인 막내인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의심하듯 추궁하니 억울할 뿐이었다.

[그들의 곁에서 지내며 원하는 걸 들었을 뿐이에요.]

[…원하는 것?]

분명 내가 찾아온 해답을 들으면 아버지도 반응을 달리할 것이다. 이번 일로 제대로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은근한 기대감에 부풀었다.

[인간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냈어요. 그들이 진정 바라는 걸 이뤄 준다면, 세계는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방향으로 나아갈 거예요.]

[그게 무엇이더냐.]

[믿을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하다고 했어요. 이를테면, 신과 같은 절대자죠.]

설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버지의 표정이 미묘하게 구겨졌다. 하지만 당연히 내 의견에 동조해주리라 생각했기에 굳이 그의 안색을 살피지 않았다. 오른손을 가슴에 올리며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아버지께서 직접 나서면 되는 일이잖아요. 굳이 마물의 세계에만 국한될 필요는 없어요. 인간에게도 아버지의 위대함을 알리고, 그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기시는 거예요.]

긍정적인 반응을 기다렸건만, 예상과는 정반대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건 불가능해.]

[…예?]

[인간에겐 인간만의 규칙이 있지. 깊게 개입하면 도리어 망가질 수도 있다.]

그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분명한 부정의 표시였으나, 쉬이 믿지 못하고 반문했다.

[하지만 아버지. 우리에게는 당신이 있지만… 인간에겐 아무도 없잖아요.]

[데우스. 그들에게도 ‘신’은 존재한다. 그러니 신을 모시는 사제와 신전이 대륙 곳곳에 퍼져 있지. 비록 아무도 신의 현신을 본 적 없지만, 그 믿음만 굳건하면 되는 것 아니겠나.]

[결국 신이란 이름의 허상일 뿐이죠. 인간이 굶어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다고요.]

자고로 신이란 세상을 돌봐야 하는 것 아닌가. 아버지가 마물을 보살피듯 인간에게도 그런 존재가 필요하다. 그래서 인간 앞에 똑같이 나서달라는 것인데, 어째서 아버지는 내 말을 이해해 주지 않는 걸까.

그러나 아버지는 오히려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단지 인간만의 문제라고 생각하나? 매순간 저 숲과 바다, 지하와 사막에서 굶어서 죽는 마물들도 많다는 걸 왜 모르나. 그건 자연의 순리지, 우리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다.]

[그런….]

그런 건 내가 생각하는 균형이 아니다. 아버지도 모두가 행복한 세계를 만들려는 게 아니었나? 그걸 위해 나와 같은 기둥을 만들어 무너지는 세계를 받치려는 게 아니었냔 말이다.

그동안 이아페에 있으면서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내가 혜안으로 미래를 점지할 때마다 그들의 불행이 줄어드는 것을. 최악의 경우를 피해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니까 나는….

[아버지께서 하지 않으신다면, 저라도 그들의 힘이 되겠어요.]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었다. 내가 그토록 사랑하고 존경하던 아버지가 나와 다른 신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설마 내가 강하게 나올 줄은 몰랐는지, 아버지는 험상궂게 인상을 찌푸렸다.

[함부로 능력을 쓰지 마라.]

[균형을 지키기 위해 제게 주신 힘 아닌가요?]

[강한 힘을 가진 자는 그만한 책임을 질 줄 알아야한다. 네가 책임을 질 수 있겠느냐.]

[설마 저를 믿지 못하시는 거예요?]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굳게 다물어진 입을 보니 가슴이 옥죄는 듯했다. 정말로 나를 믿지 못해서 그런 건가? …정말로? 길게 이어지는 침묵을 참다못해 울먹이는 목소리로 토로했다.

[저는 누구보다 혜안을 잘 쓸 수 있어요. 그러니 인간들도 절 믿고 따르고….]

[아니.]

단호한 어투가 내 말을 끊어냈다.

[지도자 행세를 하라고 너를 이아페에 보낸 게 아니다.]

[…아버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겠구나. 당분간 혼자 조용히 지내거라.]

나를 내려다보는 눈동자에 실망의 빛이 선명하게 서렸다. 그토록 싸늘한 표정은 난생 처음이었다. 그 얼굴과 마주하자마자 쿵,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당장 무릎을 꿇으며 가지 말아 달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무심하게 등을 돌려 멀어졌다. 절대로 뒤돌아보지 않는 뒷모습이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제가… 가장 완벽한 피조물이라고 했으면서….]

이대로 혼자 남겨지는 건가. 얼마나 오랫동안 자숙하면 다시 나를 받아 줄까. 저토록 매정하게 가 버렸는데, 언젠가 돌아오기는 할까? 설마 버려지는 건가? 그럼 나를 대신해 새로운 기둥을 만들고, 내 자리에 다른 피조물이 차지한다. 그럼 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아니야. 아버지께서 그럴 리가 없어.]

스스로를 위로하며 그 자리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기다렸다. 하지만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 무려 1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시간을 센 적이 없다. 영생을 사는 자에게 시간만큼 덧없는 게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하루하루가 괴로웠다. 멍하니 아버지가 서있던 자리만 바라보는 그때였다.

“도와주세요….”

어디선가 인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아페에 있는 그들이 계속 나를 부르고 있던 것이다. 내가 오지 않으면 이 도시는 망할 것이라고 절망했다. 병을 고쳐 달라고 빌고 제 가족의 안전을 기도했다. 내가 필요하다고 불렀다. 아니, 유피테르의 이름을 목 놓아 외쳤다.

함부로 개입했다간 더 큰 화를 초래하리란 말이 거슬렸지만, 결국 부름에 응하고 말았다.

“아아, 신이시여! 드디어 당신의 사자를 다시 보내주셨군요.”

이아페에 도착하자마자 인간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이젠 전부 괜찮을 거라고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오열하는 울음소리 사이가 머릿속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은 뒷전으로 사라지고, 내가 그들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지배했다.

그날부로 혜안이 보여 준 미래를 필요한 이들에게 전부 알려 주었다. 이따금씩 죽음을 점지받은 이들이 말썽을 부리긴 했지만, 금세 사람들로 하여금 평화를 되찾았다. 그리하여 이아페는 전례 없는 부흥을 누렸다.

유피테르의 이름을 향해 영광을 돌리는 이들을 보며 확신했다. 나는 결코 틀리지 않았다. 언젠가 아버지도 나를 이해해 줄 것이고, 역시 내 자식이라며 칭찬해 주는 날이 올 것이다.

***

그러던 어느 날 밤. 창밖으로 금색 빛이 다가왔다. 창문을 그대로 통과해 들어온 빛은 어느새 인간의 형상을 만들었다. 너무도 동경해 마지않는 아버지였다. 그가 먼저 나를 찾아온 게 기뻐서 얼굴에 완연히 화색이 돌았다.

[아버지. 여긴 어쩐 일….]

[데우스. 조용히 지내라고 했을 텐데.]

여전히 화가 나 있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입술을 비죽거렸다.

[그 말을 하시려고 오신 거예요?]

하지만 전처럼 주눅 들진 않았다.

[강한 힘을 가진 자는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오히려 당당하게 한 걸음 앞으로 나가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책임이 두려워 숨어 있기만 하는 건 아무 변화도 이끌어 낼 수 없어요. 그보다 중요한 건, 이 능력을 필요한 자들에게 나눠 줄 줄 알아야 한다는 거죠.]

언제까지고 지켜만 보긴 싫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인간들이 있고, 나는 그들을 위해 능력을 쓸 수 있다. 마물에겐 아버지가, 인간에겐 내가 있는 거다. 그게 진정한 균형 아닌가.

[전 계속 인간을 위해 혜안을 쓸 거예요. 그게 어떤 대가를 낳더라도 후회하지 않아요.]

[그동안 혼자 생각한 결론이 그건가.]

[네.]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버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눈을 질끈 감으며 마른세수를 하는 그의 얼굴엔 짙은 후회가 묻어났다.

[내 잘못이다.]

[예?]

[내가 너를 잘못 만든 것 같구나.]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목소리엔 일말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버지와 자식이 아닌, 애정 따윈 느껴지지 않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였다. 그 칼날 같은 말을 삼키자 목구멍에서부터 가슴 속까지 온통 난도질을 당하는 듯했다. 너덜너덜해진 심장을 부여잡아도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피를 거둬들일 수 없었다.

그 충격에 결국 해서는 안 되는 말을 입에 담아버렸다.

[사실 인간이 도태되길 기다리시는 거죠?]

[…뭐?]

[제겐 마물의 세계가 도래하길 기다리시는 걸로밖에 안 보여요.]

아니야. 이렇게 말할 생각은 없었어.

[당신도 결국 마물이니까. 세계의 균형 따위는 전부 허울 좋은 구실이잖아요.]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억지로 올린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이미 고장 난 머리로는 감정표현 하나 제대로 하지 못했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웃고만 있으니, 아버지는 단념한 듯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어디 한 번 네 뜻대로 해 보거라.]

[…….]

[당장은 널 어찌 하지 않겠다. 하지만 반드시 후회하는 순간이 올 거다.]

그 말을 끝으로 아버지는 사라졌다. 방 안을 환하게 비추는 금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 온몸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를 향한 애증인가, 버려졌다는 슬픔인가.

어두운 방 안에 홀로 남아 멍하니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하얀 빛이 새어 들어왔다. 달빛인가 하고 창밖을 봤지만, 하늘은 온통 구름만 가득했다. 그러다 뒤늦게 그 빛이 내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뭐지?”

조용히 손바닥을 펼치자 조그마한 빛이 떠올랐다. 이윽고 그 안에서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전에도 들었던 그것은 인간이 신을 향해 기도하는 소리였다. 그러니 이 순백의 빛은 인간의 집념이 모인 집합체였다. 그게 마력이 아닌 새로운 힘을 만들어 낸 것이다.

아버지가 말한 사기(邪氣)가 이거였나. 하지만 이건 요사스러운 기운 따위가 아니다. 살고자 하는 희망이자, 이 시대를 진정한 균형으로 이끌어 갈 힘이다. 그래. 신력! 나는 신의 힘을 손에 넣은 것이다.

“나는 틀리지 않았어….”

그러니 이 힘으로 내가 맞고 당신이 틀리다는 걸 증명해 보이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