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기라고 했던가. 그렇게 생각했기에 당연히 아스레인의 뿔을 신전에 숨겼을 줄 알았다. 신전이라면 유피테르의 신력으로 봉인된 물건이 있어도 의심받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보란 듯이 예상이 빗나가 버렸다. 유피테르는 오히려 당당하게 마물의 영역에, 그것도 요새라 불리는 오케아노스의 왕국에 뿔을 숨겨 놓았다.
아직 확인한 건 아니지만, 본능이 소리치고 있다. 진실이 그곳에 있노라고.
[왜 그러나.]
갑자기 말이 없어지자 오케아노스가 나를 수상하게 여기는 듯했다. 단지 감만으로 단언할 순 없었기에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했다.
“잠깐 영지를 돌아다녀도 될까요?”
[도움이 필요한가?]
“아뇨. 혼자서도 괜찮아요.”
[…그러도록 해라.]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접견실 밖으로 나갔다. 문 앞에서 기다리던 네일로스가 깜짝 놀라 무어라 말하는 것 같은데,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자세한 사정은 오케아노스에게 들으라는 말만 남기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왕궁을 빠져나오자 주변에 처참하게 부서져 있는 범선이 보였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아마 그날부로 침몰한 배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녹조류가 가득 낀 잔해 사이를 지나다가 유독 형체가 온전한 배를 발견했다. 갑판 위에서 물결을 따라 독수리의 깃발이 흔들리고 있었다.
“…에브게니아의 배.”
확실히 다른 난파선에 비해 이상하리만치 멀쩡했다. 그땐 단지 오케아노스의 결계 덕분에 보존이 잘되었다고만 생각했다. 에브게니아 소유의 배가 어쩌다 침몰된 건지, 어째서 황실에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는지 미처 의심하지 못했다.
정말로 공작이 일부러 침몰시켰다면, 반드시 수상쩍은 이유와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갑판 위에 올라서 퍼렇게 앉은 이끼를 떼어 내고 문을 열었다. 끼이익- 기괴한 소리와 함께 배 안으로 들어가니 긴 복도가 이어졌다. 여기서 신력이 느껴질까 싶어 숨을 죽이고 집중했지만, 아무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방을 메운 오케아노스의 마력 때문인 듯했다.
아쉬운 대로 어디부터 찾아볼까 고민하다가 문득 배에서 있었던 일이 뇌리에 떠올랐다. 그때 세이렌을 피해 배에 숨어들었다가 우연히 어느 방에 들어갔고, 그 안에서 붉은 벨벳 천으로 가려진 그림을 발견했었다.
“그게… 복도 끝 방이었나?”
기억에 의존해 조심스럽게 복도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낡은 목제바닥이 삐걱삐걱 비명을 질렀다. 이윽고 계단 아래쪽으로 살짝 열린 문이 보였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미처 문을 닫고 떠나지 못해 아직까지 열려 있던 것이다.
방 안의 풍경도 그대로였다. 덩그러니 놓인 원형 테이블과 의자, 내가 몸을 숨겼던 벨벳 천. 그리고 커튼이 가리고 있던 금색 액자 속의 그림까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조용히 고개를 올리자 작품에 그려진 네 명의 인물이 보였다. 정중앙을 장식한 세 명의 에브게니아 핏줄과 구석으로 밀려나 창가에 서있는 아스레인. 예전엔 평범한 초상화라 여겼지만, 이제는 안다. …이 그림이 얼마나 기괴한지를.
과거 에브게니아 공작은 봉인되어 있는 아스레인을 찾아와 거래를 제안했다. 신력에 묶인 봉인을 풀어 줄 테니 자신을 황제로 만들어 달라고. 더 이상 세계가 망가지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던 아스레인은 끝내 에브게니아의 손을 잡았다.
그 이야길 처음 들었을 당시엔 에브게니아 공작을 향한 분노만 가득했다. 그런데 이제 와 생각해보니 정작 화를 입어야할 배후는 따로 있었다. 예전에 내가 ‘공작이 어떻게 봉인된 위치를 찾은 거죠?’라고 묻자 아스레인이 이렇게 대답했었다.
‘신탁이 이끌었다고 했네. 그러곤 내게 신력에 묶인 봉인을 풀어 주겠다고 했지.’
또 신탁이다. 결국 아스레인을 계약으로써 영원히 제국에 묶이도록 만든 자는 유피테르였다. 시오니 에브게니아니… 지금껏 꼭두각시의 이름만 바뀌었을 뿐, 처음부터 제국을 지배하는 자는 단 한 명이다.
“유피테르 카르사….”
왜 아스레인을 가만두지 못하는 걸까. 단지 그가 숙적인 ‘그 마물’이라서? 그래서 뿔을 빼앗고, 봉인으로 자유까지 거둬 갔으며, 인간과의 계약으로 영원히 억압하려는 건가? 이젠 유피테르의 그간 행적이 적을 향한 증오 때문이 아닌 과한 집착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대체 왜….”
최대한 전쟁을 피하려는 아스레인에게 계속해서 도발을 하는지 모르겠다.
찝찝한 기분을 잠시 묻어두고 다시 그림을 살폈다. 그림 속 네 명의 사내를 하나씩 찬찬히 훑어보았다. 이쪽을 바라보는 세 명 모두 에브게니아의 혈통을 자랑하듯 하늘색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유일하게 다른 색을 가진 한 명은 홀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동시간대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잠깐.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단어의 조합 아닌가. 네 명의 사내, 하늘빛, 시간을 거스르는 자. 왠지 귀에 익은 단어를 중얼거리다가 퍼뜩 신탁을 떠올렸다. 마치 번개에 맞은 듯 멍해져서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신탁의 문장을 소리 내어 말했다.
“길 잃은 목자는 심연으로 떨어지고, 마침내 네 명의 사내와 다시 마주하게 되리라.”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림 속 인물을 마주했다. 아스레인을 포함해 정확히 넷이었다. 게다가 당당하게 나를 바라보는 눈은 전부 하늘색이었다. 에브게니아 공작으로부터 시작된 계약이 죄라 생각한다면-
“…죄로 물든 하늘빛에 현혹되지 말라.”
지금 이 순간은 신탁이 점지한 미래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럼 가장 중요한 건 마지막 문장이다.
“오직 시간을 거스르는 자만이 심연을 벗어날 열쇠를 쥐고 있다.”
시간을 거스르는 자. 그림 속 세월에 구애받지 않는 존재는 단 한 명이었다. 긴 싸움을 끝낼 하나의 열쇠이자, 잘린 그 마물의 뿔이 숨겨진 장소. 그곳은 바로 그림 속 아스레인이 위치한 자리였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럽게 아스레인에게 손을 뻗었다. 아직 닿지도 않았는데, 긴장감에 손이 파르르 떨렸다.
“진정해야해. 진정.”
가쁜 호흡을 내뱉으며 똑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이윽고 용기를 내어 그림 위로 손을 얹은 순간이었다.
키잉-! 무언가가 팽창하는 소리와 함께 그림이 내 손을 밀어냈다. 전기가 오른 듯 저릿저릿한 손끝에 느껴진 감각은 무려 신력이 아니라 마력이었다. 그것도 아스레인과 불쾌하리만치 비슷한 마물의 마력.
“…뭐지?”
침착하게 생각하자. 이곳엔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결계가 쳐져 있다. 그걸 만든 힘은 다름 아닌 마력이다. 그리고 견고한 결계를 부수기 위해선 상쇄할 만한 힘이 필요하다. 예전 레톤의 신전에서 신력으로 만들어진 결계에 아스레인의 마력이 닿으니 구조가 전부 드러났었다.
그러니 이번엔 신력을 쏟아 마력으로 만들어진 결계를 부수는 거다.
“할 수 있어. …해야만 해.”
덜덜 떨리는 손을 기도하듯 모아 쥐고 눈을 질끈 감았다. 이내 온 신력을 한 손에 모아 망설임 없이 그림을 향해 뻗었다. 마력과 신력이 충돌하는 순간, 쿠궁! 천장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대지가 크게 요동쳤다.
“윽!”
결계의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튕겨 나와 그대로 쓰러졌다. 실패인가? 실망하며 눈을 떴다가 완전히 뒤바뀐 주변 풍경에 일순 입이 떡 벌어졌다. 무너진 천장과 바닥, 그리고 기둥에까지 온통 새하얀 글씨가 뒤덮여 있었다.
그림 속 아스레인에게서 시작된 순백의 글자는 전부 고대 이아페의 언어였다.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최대한 글자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뒤로 물러섰다. 그러곤 읽을 수 있는 글자만 빠르게 훑어보았다. 서로 얽히고설켜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끝내 알아냈다. 그건 지금껏 유피테르가 내린 신탁들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글자에 깃든 힘이 전부 마력이라는 사실이다.
“…왜 마력인 거지? 아니, 그보다 어떻게 유피테르한테 마물의 기운이….”
일순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지만, 더는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이 모든 불안은 결계 너머의 진실이 풀어 줄 것이다.
힘겹게 떨림을 잠재우고 정화석에서 신의의 검을 꺼내 들었다. 칼끝이 바닥에 닿자마자 결계를 이룬 글자로부터 파직 스파크가 튀었다. 만만찮은 힘을 느껴 저절로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반드시 일격에 결계를 깨야한다.
“흐압!”
큰 소리로 기합을 넣으며 단숨에 칼끝을 세워 그림에 찔러 넣었다. 그 순간 검이 꽂힌 부분에서부터 결계가 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내 와장창하며 박살난 결계 틈새로부터 엄청난 빛이 흘러나왔다. 눈을 질끈 감으면서도 끝까지 칼자루를 놓지 않고 버텼다.
얼마나 지났을까.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천천히 눈을 떴다. 결계를 부수는데 성공했나 싶어 주위를 둘러보는데, 웬 녹음이 우거져 있었다. 분명 수 초 전까지만 해도 선실 안에 있었는데 여긴 대체 어디란 말인가.
“강제로 공간이 이동된 건가…?”
곧장 내 몸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괜찮은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걸음을 옮겨 나갔다. 흔하디흔한 나무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들꽃으로는 어느 숲인지 특정 지을 수 없었다.
무작정 걸어가다 보면 뭐라도 마주치겠지 싶어 걸어가는데, 저 멀리 인기척이 느껴졌다. 반가운 마음에 냉큼 달려갔다가 익숙한 뒷모습을 보곤 우뚝 멈춰 섰다. 부드럽게 휘날리는 금색 머리카락을 보자마자 저절로 심장이 시큰거렸다.
“아, 아스레인…?”
나지막이 중얼거리자 아스레인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리운 얼굴에 화색이 돌던 것도 잠시,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그는 내가 아는 아스레인과 한참 달랐다. 감정 없는 표정은 마치 조각상에 숨만 불어넣은 듯 보였다. 나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그가 아니었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걱정스레 물어보며 다가갔지만, 아스레인은 영 생뚱맞은 대답을 했다.
[거기 있었구나.]
“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섬칫 놀라 뒤를 돌아보니 앳된 소년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회색 머리카락과 하늘색 눈동자를 가진 소년을 보자마자 온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떻게 데우스가 여기에 있는 거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입술만 움찔거렸다. 그런데 데우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와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무심코 그를 좇아 고개를 돌렸다가 마주친 광경에 내 눈을 의심했다.
[한참 찾았잖나.]
[죄송해요.]
아스레인이 데우스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고 있었다. 심지어 데우스는 그 손길이 익숙한 듯 애교 섞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상기된 뺨과 초롱초롱한 눈빛은 누가 봐도 아스레인을 향한 애정이 가득 묻어났다. 이내 데우스는 한껏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실은 숲에서 길 잃은 인간을 발견했거든요.]
[이번에도 길을 안내해 준 건가.]
[그러려고 했는데, 절 보자마자 도망갔어요. 뱀의 모습이 그들 눈에는 무섭게 보이나 봐요.]
이게… 뭐지? 지금 내가 뭘 보고 있는 거냔 말이다. 아스레인과 데우스는 여태 제대로 말 한 번 섞어 본 적도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그들은 누구보다 친근한 관계로 보였다.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서 있던 그때, 아스레인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괘념치 마라. 넌 내가 만든 아이들 중 가장 완벽하니까.]
[네! 아버지.]
……뭐?
***
그곳엔 낮이나 밤은 없었다. 서로를 죽일 기세로 날려드는 힘은 단 한순간도 끊이지 않았다. 치열한 공방은 결코 닿을 수 없는 평행선을 보는 듯했다. 어느새 폐허가 된 코카서스 산의 바위에 올라선 유피테르가 넌지시 물었다.
- 언제까지 무의미한 싸움을 할 거지?
그 와중에도 날라드는 마력을 튕겨내며 퍽 여유로운 미소를 흘렸다.
- 이쯤이면 알 텐데? 이대로 평생을 싸워도 이 승부의 결말은 나지 않아.
“…….”
- 아니면, 그 아이가 뿔을 찾아 가져오기까지 계속할 생각인가?
유피테르의 입에서 ‘그 아이’가 언급되자 아스레인이 일순 표정을 굳혔다. 매섭게 빛나는 금색 눈동자에선 숨 막힐 듯 짙은 마력이 풍겨져 나왔다. 이윽고 아스레인은 단숨에 유피테르가 서 있는 바위를 파괴해 버렸다. 인간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것도 모자라 뼛가루도 남기지 못할 위력의 마법이었다.
하지만 아스레인과 호각을 이루는 유피테르는 달랐다. 휙, 날렵하게 마법을 피하며 공중에 날아오르자 새하얀 옷자락이 새의 날개처럼 휘날렸다. 가볍게 땅에 착지한 유피테르는 회색 머리카락을 어깨 너머로 넘기며 말했다.
- 옛정을 생각해서 충고 하나 해 줄까?
매혹적인 호선을 그린 입술 사이로 끝이 갈라진 뱀의 혀가 보였다.
- 그 아이가 영원히 뿔을 찾지 못하길 기도하는 게 좋을 거야.
의미심장한 말에 아스레인은 못마땅한 듯 한쪽 눈썹을 쌜긋 올리며 물었다.
“이제 와 죽음이 두려워졌나?”
- 아니, 난 당신을 위해 하는 말이야.
입을 살짝 가린 채 키득거리던 유피테르는 하늘빛 눈동자를 호기롭게 빛냈다.
“과연 당신이 잘린 뿔에 봉인된 기억을 감당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