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
풍덩. 맑은 물소리와 함께 어두컴컴한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나마 달빛이라도 있던 밖과 달리 바다 속은 한 줄기 빛조차 없었다. 사방이 암흑으로 파묻혀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귀는 먹먹하고 눈은 침침하니 꼭 지하 동굴에 갇힌 것만 같았다.
두려움이 앞섰지만, 휘브를 찾는 걸 포기할 순 없었다. 기척이 느껴질까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던 그때 저 멀리 희미한 불빛이 떠올랐다. 어두운 숲길에서 반딧불을 따라가듯 빛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희끄무레한 시야가 선명해질 즈음, 그 빛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시리도록 푸르게 발광하는 해파리가 은하수처럼 떼를 지어 지나가고 있었다. 장엄한 자연에 압도되어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그 뒤로 낯선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혹시라도 공격할까 봐 긴장해 있는 내게 그림자가 먼저 말을 걸었다.
[역시 너로군.]
나를 아는 듯한 어투였다. 이윽고 해파리가 만들어 낸 장막을 걷어 내고 나타난 마물은 바로 노령의 세이렌이었다. 네일로스라고 불렸던가. 오케아노스를 바로 곁에서 보좌하는 자로 기억하고 있다. 그의 주름진 눈가에는 여전히 거북손과 따개비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느낌에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전하께서 널 데리고 오라고 명하셨다.]
이방인을 대하는 네일로스의 태도는 해수보다도 차가웠다. 본능적으로 대답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괜히 물만 먹었다. 콜록, 작게 기침하자 네일로스는 한심하게 여기는 표정으로 말했다.
[변명은 나중에 들을 테니 얌전히 따라오도록.]
그 후 네일로스가 가볍게 손짓하자 해파리 떼가 내 주변을 둥그렇게 둘러쌌다. 뭘 할지 몰라 당황하기도 잠시, 해파리들이 나를 데리고 해류를 뚫고 나가기 시작했다. 그들 덕분에 어두운 바다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고 네일로스를 따라갈 수 있었다.
얼마나 앞으로 나아갔을까. 둥그런 구릉을 지나자 환하게 빛나는 성이 나타났다. 거북이를 타고 용궁에 도착한 토끼의 기분이 이런 걸까. 죽어서 하얗게 변한 산호를 겹겹이 엮어 만든 성벽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마침내 마력으로 만들어진 결계를 지나자 숨이 탁 트였다.
“하아, 이제야 좀 살겠네….”
젖은 머리카락을 털어 내고 축축해진 옷자락에 물기를 짜냈다. 주르륵- 바닥에 떨어지는 물만 한 바가지였다. 그럼에도 찝찝해서 옷이 구겨질 때까지 짜내고 있으니 네일로스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쓸데없이 손이 많이 가는구나.]
네일로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왼손에 쥔 지팡이로 바닥을 쿵 내리찍었다. 그러자 마법처럼 온몸에 달라붙어 있던 수분이 말끔하게 날아갔다. 마구잡이로 구겨져 있던 옷도 꼭 새 것처럼 깨끗해져 있었다. 역시 오케아노스의 보좌관이라는 건가.
“감사합니다. 네일로스 님.”
[됐다. 그런 누추한 꼴을 전하께 보여드릴 수는 없으니.]
고개를 천천히 내저은 네일로스는 앞서 왕궁으로 향했다. 문을 지키고 있던 병사는 네일로스를 보고 정중히 길을 내어주는 한편, 그 뒤에 따라가는 나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경계 어린 시선은 왕궁 복도를 지나는 내내 끊이지 않았다.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보는 마물들은 네일로스만 없었다면 당장이라도 나를 물어뜯을 기세였다. 화가 튈까 섣불리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점점 걸음만 빨라졌다.
가시밭길을 걷던 중, 네일로스가 어느 방에 멈춰 섰다. 문 앞에 서 있던 하인들은 네일로스를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인사하며 문을 열었다. 그 안엔 죽은 산호를 깎아 만든 의자와 테이블, 그리고 바다에서만 나는 온갖 진귀한 광물로 장식되어 있었다.
네일로스는 방 안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전하께 네가 왔다고 말씀드릴 테니, 여기서 얌전히 기다려라.]
“저 혼자요?”
[설마. 이들이 널 감시할 거다.]
감시…라. 나름 오케아노스에게 몸을 내어준 사건으로 인해 신뢰를 산 줄 알았건만, 턱도 없었나 보다. 네일로스는 하인들에게 무어라 속삭이곤 이내 매정하게 떠났다. 결국 대접이라는 이름의 감시에 둘러싸여 접견실에 얌전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별안간 문을 벌컥 열렸다.
[소문이 진짜였네?]
노크도 없이 접견실에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세이렌이었다. 나란히 들어온 세 명의 세이렌은 기다란 손톱으로 입술을 쓸며 웃었다. 그 유혹적인 자태를 보자마자 과거의 기억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이게 누구야~ 우리 귀염둥이잖아.]
잊을 리가 없지. 처음 왕궁에 왔을 때 나를 씻기고 꾸민 그 짓궂은 마물들을.
“오랜만이에요. 스틱스, 디오네. 그리고 칼리로에.”
[어머. 우리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니 감동인 걸.]
[사실 돌아오고 싶었던 거야. 그렇지?]
콧소리가 섞인 웃음소리까지 변한 게 하나 없다. 아무 소동 없이 왔다면 꽤나 반가웠겠지만, 그들이 바다 위에서 한 일 때문에 거짓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그 셋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제 친구를 돌려주시겠어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네.]
세이렌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능청스럽게 시치미를 뗐다. 휘브를 홀려서 데려가 놓고 모르는 척하다니, 그들의 소위가 더더욱 괘씸했다. 그래도 웬만해서 말로 해결하려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은 그냥 제가 걱정돼서 온 거예요. 영역을 함부로 침범한 죗값을 치러야 한다면, 제가 받을게요. 그러니까….”
[침범?]
말허리를 가볍게 자르고 끼어든 스틱스는 제 뺨에 붙은 흑요석 자개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넌 엄연히 전하의 손님이야. 그러니 우리가 너를 어떻게 벌하겠니?]
“그럼 제 친구는 어째서 가만 두지 않으시는 거죠?”
[그 인간은 손님이 아니니까. 전하께서도 너와 함께 온 인간에 대해선 일언반구 안 하셨어.]
천진난만하게 웃는 얼굴엔 일말의 죄책감도 없었다. 인간을 홀리고 질릴 때까지 가지고 노는 일이 단지 장난인 세이렌들에게 설득은 무의미했다. 결국 반만 남은 정화석을 질끈 움켜쥐며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정 안 된다면, 무력으로라도 데려가겠어요.”
[후후, 아직 사리분별이 안 되나 보구나?]
생글 웃고 있던 스틱스의 얼굴이 삽시간에 싸늘해졌다.
[감히 전하의 궁전에서 인간이 힘을 쓰겠다니.]
새파란 입술 아래 상어를 닮은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났다. 스틱스가 살의를 드러내자 곁에 있던 디오네와 칼리로에도 곧장 손톱을 세웠다. 머릿수로는 현저히 부족한 상황에다가 스틱스의 말마따나 오케아노스의 결계로 인해 그보다 강하지 않으면 마력을 쓸 수 없다. 하지만 신력이라면 가능하겠지.
조용히 벤테온의 검을 꺼내려는데, 또 다시 문이 벌컥 열렸다.
[장난은 그쯤 해 두거라.]
겨울바람처럼 싸늘한 목소리가 장내를 휩쓸었다. 일순 공기가 얼어붙어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 떨었다. 뻣뻣하게 굳은 목을 억지로 돌려 보니 문 앞에 그가 서있었다. 바다의 주인, 오케아노스가 직접 접견실로 당도한 것이다.
[전하…!]
세이렌들은 곧바로 몸을 낮추며 존경을 표했다. 모두가 머리를 숙인 와중에 홀로 꼿꼿하게 서 있는 오케아노스의 자태는 실로 고고했다. 보랏빛 산호 왕관은 위용을 나타내듯 하늘 높이 솟아 있었고, 얇은 베일은 감히 용안을 보지 못하도록 얼굴을 살짝 가리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날 줄 몰라 돌처럼 굳어있던 나도 서둘러 정중한 인사를 건넸다.
“오케아노스 전하를 뵙습니다.”
다소곳이 숙인 머리로 날아와 꽂히는 시선이 느껴졌다. 무력을 쓰려는 게 들켰으니 당장이라도 내쫓기려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참 침묵을 지키던 오케아노스가 이내 차분하게 말했다.
[고개를 들어도 좋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자 나를 내려다보는 위압적인 눈빛과 마주쳤다.
[어째 네가 있는 곳마다 소동이 끊이질 않는구나.]
살짝 찌푸린 미간에서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기색이 물씬 풍겨 왔다. 시스템과 이목구비가 똑같아 익숙한가 하다가도, 저 냉랭한 물빛 눈동자를 보고 있자면 심장까지 얼어붙는 듯했다.
꽤 오래도록 나를 지그시 노려보던 오케아노스는 이내 네일로스에게 말했다.
[아무도 근처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해라.]
[예. 전하.]
그 후 네일로스는 세이렌을 데리고 접견실 밖으로 나갔다. 쿵. 무거운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접견실은 적막으로 휩싸였다. 안 그래도 어색한 오케아노스와 단 둘이 남으니 금방이라도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연신 눈치를 살피자 오케아노스는 옅게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누가 잡아먹기라도 한다더냐.]
“…죄송합니다.”
오케아노스는 느긋하게 내 앞을 지나 의자에 앉았다. 퍽 우아하게 다리를 꼬며 고개를 꼿꼿이 들고 있는 모습이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것처럼 보였다. 애써 긴장감을 삼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저와 함께 온 인간은 정말 아무 죄가 없습니다.”
[세이렌이 데려온 그 인간 말인가.]
“네. 단지 제가 걱정되어 따라온 것뿐이지,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그걸 판단하는 건 네가 아니라 짐이지.]
“오케아노스 님!”
다급한 마음에 눈을 부릅뜨며 말하자 물빛 눈동자에 서슬 퍼런 한기가 서렸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언성을 높이느냐.]
낮으면서도 단호한 목소리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오케아노스의 화를 돋워 봤자 휘브만 위험해질 뿐이었다. 잔뜩 주눅 들어 있으니 살갗에 따갑게 감겨들던 위협이 한층 누그러들었다. 잠시 턱을 괸 채 고민하던 오케아노스는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인간이라면 왕궁에 오기 전에 이미 의식을 잃어 진즉 시종을 붙여 두었다. 다친 곳은 없으니 안심하도록 해라.]
“저, 정말입니까?”
[그럼 지금 짐이 농을 하는 걸로 보이나.]
“아뇨. 아닙니다.”
황급히 손사래를 치자 오케아노스는 한결 풀어진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이곳을 떠날 때 돌려주마.]
“감사합니다. 전하.”
휘브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들으니 긴장이 일시에 탁 풀렸다. 의자에 털썩 앉아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 냈다. 하지만 안심하기도 잠시, 오케아노스는 차갑기 그지없는 어투로 말했다.
[그보다 또다시 영지에 허락도 없이 들어오다니,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구나.]
“그 점은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긴히 찾을 게 있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찾을 거?]
“그게….”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몰라 바짝 마른 입술만 깨물었다. 여러 사건이 뒤섞여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하는데, 오케아노스가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저 먼 대륙에서 벌어진 일과 관계가 있는 건가?]
“…알고 계셨어요?”
[코카서스 산에서 그분의 마력이 느껴지는 걸, 내 모를 리 있겠나.]
산꼭대기에서 일어나는 일을 아는 이상 지금까지의 일을 설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한 채, 유피테르와 관련된 주요한 이야기만 꺼냈다. 신으로 일컬어지는 그가 모든 갈등의 시작점이라고.
곧장 불같이 화를 낼 줄 알았던 오케아노스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인 걸까? 의외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드디어 전쟁인가….]
“네?”
[군을 데리고 제국을 치면 끝나는 일 아니더냐.]
오케아노스의 결론이 가장 일어나선 안 되는 방향으로 치달아 버렸다. 그러고 보니 오케아노스는 언제나 아스레인에게 그랬다. 인간과 칼을 맞대는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당황스러우리만치 호전적인 반응에 단호하게 말했다.
“아뇨. 아스레인은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혼자 상대하고 있는 거예요.”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단언하자 푸르게 타오르던 오케아노스의 눈빛이 단숨에 식어 버렸다. 흥미를 잃은 표정은 따분함을 넘어서 실망한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이 왠지 신기해서 나도 모르게 속내를 그대로 털어놓았다.
“생각보다 놀라지 않으시네요.”
[그게 무슨 소린가.]
“아스레인이 싸우고 있다고 말하면 당연히 걱정하실 줄 알았어요.”
[걱정을 왜 하나. 그분께서 패배할 리 없을 터인데.]
아. 아스레인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나라고 아스레인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다. 그 싸움이 길어질수록 인간과 마물 사이의 갈등이 깊어질까 걱정이다. 물론 오케아노스에겐 오히려 그게 호재로 작용하게 되겠지만.
완전히 맥이 풀려 심드렁한 낯빛이 된 오케아노스는 나를 훑어보며 물었다.
[그래서 너는 이곳에 무슨 볼일인가.]
“여기에 그 오랜 갈등을 끝낼 수 있는 물건이 묻혀 있는 것 같아서요.”
살짝 눈썹을 치켜세운 그에게 다시금 호기심이 서렸다.
[그게 뭐지?]
“아스레인의 뿔이… 이곳에 있는 것 같아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비스듬히 턱을 괴고 앉아있던 오케아노스가 몸을 바로 세웠다. 삽시간에 어두워진 안색에 내 말을 의심하는 빛이 드러났다. 그 반응을 충분히 이해하기에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지금껏 얻은 단서가 전부 이 심해를 가리키고 있어요.”
[그럼… 짐이 지금까지 그 사실을 몰랐다는 건가?]
“당연히 모르실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당장이라도 나를 죽일 듯 매서운 눈빛이 날아왔다. 분노의 화살이 갑자기 나를 향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아스레인의 뿔이 제 영지에 있다는데, 일부러 자신을 모함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다.
“지금 전하를 탓하자는 게 아닙니다. 아스레인도 끝끝내 찾지 못했으니까요.”
맹렬하게 타오르던 눈이 이내 혼란스러운 빛을 띠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을 유지하던 오케아노스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바쁘게 바닥을 이리저리 휘젓는 시선이, 그의 머릿속이 얼마나 빠르게 돌아가는 지 보여 주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짐작 가는 곳이 없는 모양이다. 험상궂게 찌푸려진 인상이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내 오케아노스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서 찾았나?]
“아뇨. 그걸 찾으려다가 세이렌의 장난에 휘말렸어요. 갑자기 밀려오는 파도에 배가 난파될 뻔해서….”
난파된 배. 불현듯 머릿속으로 어떤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분명 오케아노스의 왕궁 근처에는 낡은 배가 무수히 놓여 있었다. 내게 왕궁을 구경시켜 주던 스틱스는 그걸 ‘자랑스러운 전리품’이라고 설명했다. 영지를 침입한 인간의 배를 오케아노스가 직접 권능을 행해 무너뜨린 거라고.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서진 범선 중에서도 유독 멀쩡하던 배가 있었다. 그건 황실 소유의 범선이었다. 원래라면 진즉 바닷물에 부식되어야 할 배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멀쩡히 보존되어 있었다. 물결에 휘날리는 독수리의 깃발까지도 전부 그대로였다.
그때도 뭔가 이상하다 생각했다. 만약 오케아노스가 황실의 배를 침몰시켰다면. 그로 인해 황실에 관련된 사람이 여럿 죽었더라면, 불행하게도 오케아노스는 에브게니아의 공격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너무도 평온했다. 어느 역사서에도 그들의 전쟁 같은 건 쓰여 있지 않았다. 그 말은 즉 에브게니아가 조용히 넘어간 것이다. 왜지? 아무리 에브게니아 왕조가 친 마물적인 행보를 보였다고 하더라도, 황실 소유물을 건드린 오케아노스를 공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 순간 이 모순적인 상황을 가능케 만드는 단 하나의 가설이 떠올랐다.
“설마….”
만약 황실의 배를 오케아노스가 침몰시킨 게 아니라면 어떨까. ‘어떠한 이유’로 황실이 그들의 범선을 일부러 침몰시킨 거라면, 상황은 아예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