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1 (261/305)

#261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을 한참동안 헤치고 나갔다. 말의 고삐에 매단 야광화가 서서히 생명력을 다해 갈 즈음,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염분을 가득 머금은 바다 냄새에 휘브는 말머리를 돌려 비탈진 언덕배기로 올라갔다. 꼭대기에 다다르자 저 멀리 반듯한 수평선이 보였다.

“바다다…!”

새벽 바다의 풍경에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어둡기만 하던 하늘은 점차 짙푸른 색으로 물들고, 시리도록 차가운 바다는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며 넘실넘실 출렁였다. 그 앞에 벽을 지어 만들어진 곳이 항구 도시, 페르가몬이다.

“예전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네요.”

“여기를 왔었어요?”

“네. 학교에서 답사 차 왔었어요.”

그때도 참 조용할 날이 없었는데. 조용히 과거를 회상하다가 어슴푸레 밝아지는 하늘을 뒤로하고 언덕을 넘어갔다. 마침내 도착한 항구 도시의 분위기는 걱정과는 사뭇 달랐다. 본디 항구의 아침은 일찍 시작된다지만, 이곳은 대낮이나 다름없었다.

“늦으면 오늘 수당은 없을 줄 알아!”

“예!”

여긴 헤카테의 습격이 없었나? 언제 헤카테가 나타날지 몰라 숨죽여 지내는 다른 마을과 다르게 항구 도시는 활기차고 시끌벅적했다. 말에서 내려 멀거니 마을을 둘러보는데, 갑자기 뒤에서 까칠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이봐. 걸리적거리게 길 막지 말고 비켜.”

뒤를 돌아보니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짊어진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서둘러 말을 끌고 길가로 빠지자 사내는 부리부리한 눈썹을 치켜세우며 우리를 못마땅하게 흘겨보고 지나갔다. 그의 뒤로도 꽤 많은 짐꾼이 오고 갔다. 벌써부터 출항을 준비하는 듯했다.

뒤늦게 그들을 따라 가 보니 거대한 선박이 항만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었다. 그 앞에 팔짱을 끼고 선 중년이 선원과 짐꾼을 향해 소리쳤다.

“빨리 빨리 움직여!”

기합이 가득 찬 걸걸한 목소리는 꼭 배의 기적 소리처럼 들렸다. 값비싼 가죽옷이나 강렬한 인상을 보아하니 그가 배의 주인인 모양이다. 선장이라면 페르가몬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리라 확신했다.

“안녕하세요. 선장님.”

선뜻 말을 걸자 오랜 세월 바닷바람을 맞아 거칠어진 눈이 나를 쏘아보았다.

“나한테 무슨 볼일인가.”

“이렇게 멋진 배를 보고 그냥 지나갈 수가 있어야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칭찬을 하니 호랑이 같던 선장의 표정이 살짝 누그러들었다.

“뭐, 조금 낡긴 해도 내 평생을 함께한 선박이지.”

“이만 한 배를 운전하시다니… 저로선 엄두도 못 낼 일이겠네요.”

“하하! 너처럼 비실비실한 놈은 뱃일하기 힘들긴 하지.”

선장은 호탕하게 웃으며 내 등을 탁 소리 나게 때렸다. 등짝이 다 얼얼했지만 선장을 따라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경계가 한층 줄어든 걸 확인하곤 슬그머니 본론을 꺼냈다.

“요새 여긴 괜찮은가 봐요?”

“아아, 요 몇 달간 바다가 예전처럼 잠잠해졌거든.”

“다행이네요. 다른 마을은 요즘 들어 어수선하던데….”

“왜? 축제라도 하나?”

심드렁하게 물어보는 선장에게 비밀을 얘기하듯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웬 짐승이 마을 곳곳을 습격한다네요.”

“짐승?”

“네. 마물이고 사람이고 전부 공격한다던데, 혹시 들은 거 없으세요?”

심각한 소식에 선장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잠시 고민하는 듯 덥수룩한 수염을 어루만지더니, 이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몰라.”

“…네?”

“뱃사람들은 그런 거에 관심 없어. 우리는 바다만 얌전하면 되거든.”

선장은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뭔가를 더 물어보려던 차, 선장의 시선이 내 어깨 너머를 향했다. 이윽고 배로 올라가는 짐꾼을 향해 난데없이 고래고래 소리쳤다.

“야! 그걸 왜 거기다가 실어!!”

엄청난 성량에 흠칫 움츠리자 선장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젊은이. 내가 좀 바빠서 말이야.”

그러곤 인사할 새도 없이 배를 향해 뛰어 올라갔다. 바쁜 사람을 방해할 수 없으니 얌전히 걸음을 돌려 휘브에게 돌아갔다. 그 사이 말에게 물을 주고 있던 휘브가 넌지시 물었다.

“뭐 좀 들었어요?”

“아뇨. 별 소득 없었어요.”

항구 소식에 가장 빠삭할 선장이 모른다고 했다. 진지한 얼굴에 거짓말하는 기색은 없었다. 게다가 한 번이라도 헤카테가 페르가몬에 쳐들어왔다면 모를 리가 없다. 그 말은 즉, 이 근처에 헤카테가 나타나지 않은 거다.

왜지? 바다에 도사리는 오케아노스의 마력이 두려워서라고 하기엔, 다른 마물이 지내는 서식지에도 헤카테가 불쑥 나타나곤 했다. 하지만 오케아노스 연안만은 잠잠했다. 마치 태풍의 눈처럼.

정말 이곳에 모든 것을 끝낼 열쇠가 있기 때문인가?

“일단 여관으로 가서 배를 구하죠.”

말고삐를 쥐고 마을로 걸음을 옮기자 휘브가 성큼 옆으로 다가왔다.

“배는 왜요?”

“바다로 나가서 찾아야 해요.”

“아니, 어디에 있을 줄 알고 무작정 배를 타고 나갑니까?”

백 번 맞는 말이다. 카르사 대륙만큼이나 넓은 바다를 배로 둘러본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지. 하지만 내게는 이정표가 있다. 유피테르는 아스레인의 뿔을 봉인하기 위해 신력을 썼을 테고, 제 아무리 희미하다고 해도 내게는 느껴질 것이다.

“너무 위험해요.”

“알아요. 각오하고 왔어요.”

“예전에 듣기론, 베테랑 선원도 오케아노스 바다에선 맥도 못 추린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요즘은 나름 잠잠해졌다는데요?”

여관으로 향하는 내내 괜찮다고 해도 휘브는 쉬이 마음을 놓지 못했다. 두려울 것 없는 그에게도 험난한 바다란 공포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걱정해 주는 그에게 미안하지만, 이제 와 걸음을 돌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여관에 도착해서 말고삐를 기둥에 묶으며 나지막이 휘브를 불렀다.

“휘브리스.”

이윽고 불신으로 가득한 눈빛이 나를 향했다. 어떻게 하면 걱정을 덜어 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안겔루스 대학 입구에 있는 기둥에 뭐라 쓰여 있는지 알아요?”

대뜸 퀴즈를 내자 휘브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내 모르겠다고 대답하는 그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라는 자는 구할 것이고, 구하는 자는 얻을 것이다.”

처음 이 문장을 접한 곳은 아스레인의 책이었다. 그게 안겔루스 대학이 내세운 슬로건이라는 사실을 깨닫곤 대단한 학구열이라고만 생각해 넘겼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단지 그 의미만을 품고 있는 아닌 것 같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얻을 거예요. 그걸 위해 여기에 왔으니까.”

그건 이 세계에 넘어온 내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이 아닐까.

***

또 다시 밤이 되었다. 해가 뜨기도 전부터 북적거리던 거리는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창밖으로 보이는 항만엔 아무도 없었다. 어두운 밤바다를 고작 랜턴에 의지해서 항해하기가 그만큼 위험하단 뜻이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출발해야만 했다.

로브로 얼굴을 단단히 가리곤 조용히 뒤를 돌아보았다. 구석에 깔린 모포 위에 휘브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바다에 나갈 때 꼭 깨워 달라고 했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그를 데려갈 생각이 없었다.

“…잘 자요.”

테이블 위에 금방 돌아오겠다는 쪽지만 남겨 두고 조용히 여관방을 나섰다. 랜턴을 들고 항만으로 나가니 일을 마치고 돌아온 배가 일렬로 줄지어 있었다. 그중 가장 끄트머리에 있는 낡은 배를 찾아 갔다. 주인 없는 배이니 마음대로 쓰라는 여관 주인의 말을 믿고 뭍에 묶인 줄을 풀었다.

그 후 낑낑거리며 줄을 당기는데, 갑자기 옆에서 손이 불쑥 튀어나와 줄을 낚아챘다.

“그래서야 언제 타겠어요?”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곧장 뒤를 돌아보니 휘브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깨워 달라고 했는데 혼자 가 버리는 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내가 워낙 잠귀가 밝아서요.”

능숙하게 줄을 당겨 배를 끌어온 휘브가 먼저 올라탔다. 그러곤 내게 손을 뻗으며 어서 타라는 듯 눈짓했다. 마치 내가 그에게 초대받은 느낌이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그의 손을 잡고 갑판을 밟아 돛단배에 탔다. 끼익, 낡은 선체가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자, 출발합니다~”

자연스럽게 노까지 찾아든 휘브는 천천히 바다로 나아갔다. 한 눈에 봐도 노질이 서툴렀지만, 나보단 훨씬 나았기에 얌전히 갑판에 기대어 앉았다. 이제와 돌아가라고 할 수도 없는 판국이었다.

왠지 여행을 가는 것처럼 신이 난 휘브를 조용히 노려보며 말했다.

“진짜로 다칠 수도 있어요.”

“운이 좋아서 그런가? 지금까지 크게 다쳐 본 적은 잘 없네요.”

“유피테르한테 몸을 빼앗겨 죽기 직전까지 갔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에이, 그건 딱 한 번이잖습니까.”

부질없는 실랑이였다. 한숨을 내쉬며 잔잔하게 파도치는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 정도 뭍에서 멀어지니 사방에 물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에 걸린 달과 내 손에 들린 랜턴만이 유일한 빛이었다.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던 휘브가 작게 하품하며 물었다.

“이 망망대해에 뭐가 보이긴 해요?”

“이제부터 찾아야죠.”

그리 말하며 배 난간을 붙잡고 천천히 일어났다. 고요한 바다 위에서 믿을 거라곤 내 감각뿐이 없었다. 지그시 눈을 감고 바다에 묻힌 신력의 흐름을 느꼈다.

예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바다를 유영하는 마물과 오케아노스의 마력이 두꺼운 벽처럼 가로막고 있었다. 특히 오케아노스의 궁전으로 다가갈수록 마력은 점점 더 촘촘해졌다. 쉽사리 감을 잡지 못하고 헤매던 그때였다.

쿵. 묵직한 소음에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뭔가 했더니, 휘브가 잡고 있던 노가 선체로 떨어지면서 난 소리였다. 힘이 빠진 건가. 노를 젓는 게 예사 일이 아님을 알기에 선뜻 다가가서 말했다.

“휘브. 잠깐 쉬고 있어도 괜찮아요.”

어깨에 손을 올리는 순간, 휘브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무슨 노랫소리 같은 거 들리지 않습니까?”

“네? 아무것도 안 들리는데요.”

“저쪽에서….”

어쩐지 텅 비어 보이는 눈동자가 바다 너머를 향했다. 희미하게 올라간 입꼬리하며 풀어진 표정이 꼭 황홀한 광경을 마주한 사람 같았다. 뭔가 이상하단 걸 느끼는 순간, 휘브가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건…!!”

선원의 노래, 오케아노스 찬가였다.

“휘브! 날 봐요.”

곧바로 그의 뺨을 붙잡고 억지로 고개를 돌려 나를 보게 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노랫소리에 홀린 눈빛은 수면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윽고 바다가 오케아노스 찬가에 답하듯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다급하게 배를 붙잡고 주변을 둘러보니 수면 아래로 날렵한 실루엣이 보였다.

배를 중심으로 빙빙 돌고 있는 세 명의 마물을 보자마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세이렌! 그만해. 이 사람은 내 친구야!”

아무리 목청이 터져라 소리쳐도 노랫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그 사이 파도는 우리를 잡아먹을 것처럼 달려들었고, 거칠어진 바다에 낡은 배는 속절없이 출렁거렸다. 금방이라도 휘브가 배에서 떨어질 것만 같아 붙잡으려는 순간이었다.

쾅! 거센 파도가 뱃전에 부딪쳤다. 마치 암초에 걸린 듯 엄청난 충격에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엎어진 내 위로 물보라가 덮쳐 와 로브는 물론이고 옷 안까지 싹 젖어 버렸다.

그러길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바다가 서서히 잠잠해졌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내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무겁게 달라붙은 로브를 벗어던지고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힘겹게 난간을 붙잡고 바다를 내려다보자 세이렌의 그림자가 사라져 있었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휘브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괜찮아요?”

그러나 내 앞엔 아무도 없었다. 그가 앉아있던 자리엔 창백한 달빛만이 남아 있었다.

“휘브리스!!”

휘브가 사라졌다. 곧바로 망망대해에 대고 그를 불러 봤지만, 돌아오는 건 싸늘한 바닷바람뿐이었다. 만약 파도에 쓸려간 사고였다면 금방 떠오를 텐데, 바다는 잔인하리만치 고요했다.

필시 세이렌이 데려간 것이다.

휘브를 구하기 위해 배 난간을 붙잡고 상체를 기울였다. 바다로 뛰어들려는 순간 구름이 달을 가려 사위가 온통 칠흑 속으로 빠졌다. 그나마 생명줄과 같던 랜턴 불빛은 꺼진 지 오래였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시커먼 바다를 보니 본능적인 공포가 피어올랐다.

“…구해야 돼….”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저 심연에 들어가면 다시는 물 밖으로 빠져나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추위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난간을 붙잡은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대로 돌처럼 굳어 있는데, 컴컴한 수면에 달을 닮은 은빛이 아른아른 비쳤다. 달빛인가 하고 고개를 들자 허공에 은색의 실들이 하늘하늘 흔들렸다. 이윽고 투명한 베일이 흩날리는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단 하나의 이름을 읊조렸다.

“…시스템.”

- 무엇을 두려워하는 겁니까.

차분한 목소리가 등줄기를 느릿하게 훑는 것만 같았다.

- 심연 같은 바다를? 아니면, 이 아래 묻혀 있는 진실을?

뒤를 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그저 난간에 의지하여 서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난… 이럴 때마다 나타나는 네가 제일 무서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직한 웃음소리가 귓등을 스쳤다. 이내 바람보다 가벼운 손이 내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곳에서부터 이로 말할 수 없는 한기가 몰려와 나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아니, 한기가 아니라 시스템의 기운인가.

- 결코 태오 님께 위해를 가하지 않으리란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젠 모르겠어.”

- 진심이십니까?

은밀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퍽 우아해서 도리어 꺼림칙했다. 어느새 곁에 다가온 시스템은 천천히 허리를 숙여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의 얼굴을 노려보자 고운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었다.

- 제가 태오 님의 속마음을 모를 것 같습니까?

“그…”

- 이 세상에서 당신에 대해 제일 잘 아는 존재는 바로 접니다.

시스템의 가느다란 입꼬리가 싱긋 올라갔다. 자신만만한 태도가 재수 없어도 부정할 길은 없었다. 위험한 일이 닥치면 나도 모르게 ‘시스템이 말리지 않는 걸 보면 괜찮아.’라고 생각해 버렸으니까.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시스템은 조심스럽게 내 뺨을 그러쥐며 말했다.

- 그러니 언제나처럼 저를 믿고 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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