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
갑자기 아는 얼굴이 튀어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떻게든 모르는 척 하려고 했는데, 대뜸 휘브리스를 마주치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라비린토스에 있는 거 아니었어? 왜 여기에, 심지어 아멜리 기사단에게 잡혀 있냔 말이다.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자 기사가 나를 의심스럽게 쳐다보며 말했다.
“그 멍청한 표정은 뭐지?”
“아, 아뇨. 막사가 너무 아늑해 보여서….”
“뭐라고?”
“아닙니다.”
하하, 하. 어색하게 웃으며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휘브를 아는 척 해 봤자 피차 좋을 거 없다. 이미 한참 늦은 감이 있지만, 최대한 휘브 쪽으로 눈길도 두지 않았다. 그때 휘브를 감시하던 기사가 뒤늦게 인기척을 느끼고 이쪽을 돌아보았다.
“저놈은 또 뭐야?”
“마물을 풀어 준 것 같더라고. 단장님 말씀으로는 예전에 아멜리 백작님을 모시던 하인이었다는데?”
“쯧, 무슨 마물보다 사람을 더 많이 잡냐.”
기사는 대놓고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무 기둥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일단 단장님 오실 때까지 여기 같이 두지.”
“만약 둘이 한 패면 어쩌려고?”
“아, 그런가?”
잠시 고민하던 기사는 나를 데리고 나무로 걸어갔다. 바로 근처에 다가가도 휘브는 무언가를 골똘히 궁리하느라, 새로운 포로가 왔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대로 내게 관심을 두지 않길 바랐으나 기사가 휘브를 툭 불렀다.
“어이.”
그제야 휘브는 고개를 들어 기사를 쳐다보았다.
“아는 얼굴이냐?”
뜬금없는 질문에 휘브는 심드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뭔 아는 얼굴….”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품에 귀찮음이 역력했다. 대충 넘어갈 심산으로 나를 흘겨본 휘브는 이내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어.”
그 짧은 한 마디에 모든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휘브도 설마 내가 잡혀 올 줄은 몰랐겠지. 쉴 새 없이 흔들리는 동공에 반가움과 당혹감이 뒤섞였다. 순식간에 하얗게 질린 얼굴은 누가 봐도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기사는 의심하는 눈초리로 열심히 나와 휘브리스를 번갈아가며 보다가 픽 웃었다.
“역시 너네 아는 사이 맞지?”
“예? 저 사람이랑 제가요?”
“어쭙잖은 연기하지 마라. 딱 봐도 아는 눈치잖아!”
확신에 찬 말투에도 아랑곳없이 뻔뻔하게 굴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이자 기사는 약이 바짝 오른 듯 미간을 험상궂게 찌푸렸다. 아예 한 술 더 떠서 나를 올려다보는 휘브를 향해 퉁명스럽게 말했다.
“뭘 그렇게 쳐다보세요? 기분 나쁘게.”
불쾌한 눈빛으로 훑어보자 휘브는 한쪽 눈썹을 슬쩍 올렸다. 눈치 빠른 그라면 바로 장단에 맞춰줄 것이다. 예상대로 휘브는 입꼬리를 얄밉게 샐쭉 올리며 맞받아쳤다.
“뭐, 이딴 비실비실한 놈이 있나 싶어서 쳐다봤습니다.”
“뭐라고요?”
“어후, 장난이었는데. 무섭네~”
어째 이때다 싶어서 놀리는 것 같긴 하지만. 부릅뜬 눈으로 노려보자 휘브도 지지 않고 나를 똑바로 쏘아보았다. 어느 한 쪽도 물러서지 않을 기세에 도리어 기사가 당황해했다. 나와 휘브를 흘끗 쳐다보더니 어물쩍 우리 사이로 끼어들었다.
“이봐. 너희끼리 싸우면 어쩌잔 거야.”
“기사님께서 괜한 오해를 하시니까요.”
일부러 불편한 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전 이런 사람이랑 엮이기 싫어요. 애초에 같은 편이었다면, 이미 저쪽이 잡힌 순간 저한테 도망치라고 언질을 주지 않았을까요? 굳이 둘씩이나 잡힐 필요는 없었겠죠.”
또박또박 따져대니 두 기사의 눈빛이 점점 아리송하게 변했다. ‘정말 둘이 모르는 사이인가?’하는 생각이 얼핏 낯빛에 스쳤다. 그때 나를 포박했던 기사가 두 기사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귓등으로도 듣지 마. 이거 완전 입만 산 놈이야.”
쳇. 거의 다 잡은 물고기였는데. 이윽고 노련한 기사가 내 팔을 거칠게 잡고선 휘브 옆에 던지듯 앉혔다. 딱딱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니 저절로 윽 소리가 튀어나왔다. 눈살을 찌푸리며 올려다보자 기사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아무튼 단장님이 오실 때까지 여기 얌전히 있어라.”
허리춤에 찬 칼을 툭툭 두드리는 태도가 퍽 위협적이었다. 아무튼 휘브와 가까운 곳에 앉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기사들이 잠시 우리에게서 관심을 뗀 틈을 노려 휘브에게 말을 걸었다.
“괜찮아요?”
“예에. 형님은요? 아까 꽤 아파 보이던데.”
“좀 욱신거리긴 한데… 금방 괜찮아지겠죠.”
다르곤 신전에서 헤어지고 나서 얼마만이지. 오랜만에 마주친 휘브의 표정은 전보다 훨씬 밝아보였다. 그간 마음속 깊이 가지고 있던 고민은 어느 정도 사라진 모양이다. 하지만 재회의 기쁨을 만끽하기에는 장소나 상황이 최악이었다.
“그보다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거예요?”
“라비린토스에서 돌아오다가 길을 잘못 들었습니다. 그러는 형님은요?”
“마물을 구하려다가….”
말을 채 끝내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기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조용히 해! 네 놈들은 지금 붙잡힌 처지란 걸 모르겠나?”
신경질적인 어투에 일단 한 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얌전히 입을 다물자 기사는 혀를 끌끌 차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쯧, 하여간 이놈이나 저놈이나 주제 파악을 못하는 군.”
“이게 다 백작님께서 너그러워서가 아니겠나.”
무어라 떠들어 대는 기사를 무시하고 조용히 사방을 살폈다. 좌우간 이곳을 벗어나야한다. 이대로 저택에 끌려갔다간 레트반과 다른 메이드들까지 곤란해진다. 게다가 도망친 우리를 쫓아다니다 보면, 마물을 포획하는 속도도 자연스럽게 느려지겠지.
나뭇잎 나비를 이용해 수풀 쪽으로 유인하면 최소한 둘은 갈 것이다. 그럼 나와 휘브 둘이서 기사 하나를 상대하면 된다. 그 정도는 코풀기보다 쉽다. 문제는 손이 묶였다는 건데….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눈만 뒤룩 굴리는데, 옆에서 휘브가 자꾸만 꿈질거렸다.
“…뭐 해요?”
머리를 살짝 뒤로 젖히고 쳐다보니 휘브가 주머니칼로 밧줄을 끊고 있었다. 등 뒤가 보이지도 않을 텐데, 밧줄을 살살 끊어 내는 손길이 퍽 능숙했다. 필시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탁! 마지막으로 얽혀 있던 줄을 끊어 낸 휘브는 회심의 미소를 그렸다.
지금이다.
“이쪽이야.”
머릿속으로 나뭇잎 나비를 그리며 중얼거리자 바람이 선들 불어왔다. 바람을 타고 날아온 나뭇잎 세 쌍이 내 무릎에 앉았다. 평범하게 보이는 나뭇잎은 이내 날갯짓을 하며 공중에 떠올랐다.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나비를 보는 휘브리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뭐죠?”
“그들 보고 유인해 달라고 부탁할게요.”
“그들?”
구구절절 설명할 틈이 없다. 곧바로 나비들을 향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기사들을 숲으로 유인해 줘. 잡히진 말고.”
[걱정하지 마.] [숲에서 우릴 잡을 수 있는 자는 없어.] [아, 어르신 빼고!]
나비들은 꺄르르 웃으며 쏜살같이 숲으로 날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풀에서 부스럭 소리가 들렸다. 마치 살아있는 무언가가 지나가는 듯 소리는 점점 빨라졌다. 수상한 낌새를 느낀 기사는 일제히 수풀을 쳐다보며 경계 태세를 취했다.
“누구냐!”
날카로운 외침에도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바스락, 바스락. 근처까지 다가왔던 기척은 또 다시 빠르게 멀어졌다. 누가 들어도 ‘살아있는 마물이 인기척을 느끼고 도망치는’ 소리였다. 재빨리 정비를 마친 노련한 기사가 휘브를 감시하던 기사에게 말했다.
“우리가 따라갈 테니, 넌 여기서 쟤네 감시하고 있어.”
“알았어.”
두 기사가 서둘러 소리를 따라갔다. 얼마나 급했는지, 숲에 찍힌 발자국이 없다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한 듯했다.
계획대로 두 명의 기사가 나뭇잎 나비를 쫓아 사라졌다. 이제 남은 기사는 하나.
뒤로 묶인 손을 움직여 휘브의 옷자락을 끌었다. 이윽고 조용히 눈짓을 보내자 휘브는 대답 대신 고개를 까딱 끄덕였다. 기사가 잠깐 방심한 사이, 휘브가 벌떡 일어나 뒤에서 기사의 목을 졸랐다.
“으윽, 뭐냐…!”
기사는 팔꿈치를 휘둘러 저항하려 했지만, 휘브의 체격을 당해 낼 수 없었다. 한참을 허우적거리던 기사는 이내 의식을 잃고 축 늘어졌다. 힘없이 바닥에 쓰러지는 모습에 놀라자 휘브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안 죽었습니다. 잠깐 기절한 거지.”
“생각보다 몸을 잘 쓰시네요.”
“그럼 허우대만 쓸데없이 멀쩡한 줄 알았어요?”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거리는 그를 보니 저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곧이어 휘브는 내 손을 묶은 밧줄을 조심스럽게 풀어 주며 물었다.
“그보다 아까 그… 나비들은 뭐였습니까?”
“비실비실한 저를 도와주는 친구들이요.”
아까 들었던 말을 잊지 않고 언급하자 휘브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비실비실한 놈이라. 틀린 말은 아니지. 말없이 지그시 쳐다보니 휘브는 식은땀을 흘리며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하하… 은근히 뒤끝 있는 성격이시네.”
“왠지 이때다 싶어서 말하는 것 같아서요.”
“형님이야 말로 연기가 아니라 진짜 같던데요~”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 휘브는 밧줄을 깔끔하게 끊어냈다.
“다 됐다.”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며 일어난 그는 씩 웃으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제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말고 휘브에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어서 와요.”
대뜸 인사하니 휘브는 칼을 정리하다말고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조용히 눈만 깜빡거리는 게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것도 잠시, 휘브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 주었다.
“다녀왔습니다.”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나자마자 바로 몬테나 숲을 떠났다. 들길을 지나 아멜리 백작 영토 끝자락에 있는 마을로 들어섰다. 혹시 아멜리의 기사가 여기에도 있을까 싶어 인적이 드문 골목길만 골라서 이동했다. 휘브는 척척 앞서 나가는 나를 신기한 듯 쳐다보며 말했다.
“어떻게 길을 이렇게 잘 알아요?”
“예전에 여기서 잡심부름하면서 일했었으니까요.”
“아….”
하인으로 일하던 시절, 마을 일대를 자주 돌아다닌 보람이 있었다. 아스레인과 처음 만났던 서점을 지나 드디어 구석진 여관에 도착했다. 여관 주인은 우리가 허름한 옷차림의 모험가라고 생각했는지, 별 의심 없이 방을 내주었다.
2층에 있는 여관방에 들어가자마자 긴장이 툭 풀렸다. 곧바로 거적때기가 된 로브를 벗고 침대에 앉는 나와 달리 휘브는 개운하게 기지개를 쭉 펴며 말했다.
“하아, 이거 꽤나 재밌는데요?”
“전 죽을 맛이었어요.”
“그러게 운동 좀 하셨어야지.”
비실이.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예리하게 째려보자 휘브는 두 손을 살짝 올리며 농담이었다고 변명했다. 순진한 척 하는 표정이 얄밉기 짝이 없었다.
이후 침대 옆 테이블에 놓인 종이에다가 짧은 메모를 남겼다. 수신인은 아직 저택에 남아있을 아이리스였다. 당장 돌아갈 수 없으니, 아이리스에게 짤막하게나마 상황을 알려야만 했다. 먼저 돌아가라는 말까지 잊지 않고 써서 나뭇잎 나비에게 전령을 부탁했다.
[너, 우리를 너무 부려먹는 거 아냐?]
“미안….”
[이번만이라고. 알겠어?]
앙칼지게 말한 나비는 손톱만 한 쪽지를 가지고 창밖으로 날아갔다.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그 모습을 바라보던 휘브가 대뜸 입을 열었다.
“그거 다시 봐도 신기하네요. 마물이죠?”
“네. 히페리온이라는 마물의 일부분이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마물이에요.”
“마물을 원하는 대로 길들이는 게 가능하구나….”
휘브는 흥미롭다는 듯 턱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정확히는 사육보다는 교감이지만, 설명하자면 먼 길을 돌아야하기에 그냥 그러려니 넘겼다.
“라비린토스는 별 일 없었어요?”
‘딱히 없었습니다만. 그 말은 왠지 별 일 있어야 한다는 걸로 들리네요.“
“그런 건 아니고… 마을을 습격하는 헤카테를 사람들이 마물로 오해하고 있어요. 그래서 황제는 마을을 지키기 위해선 마물을 토벌해도 된다고 명령했죠.”
“아~ 왠지 기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마물을 찾아다니더라니.”
이제야 깨달았는지, 휘브는 탄식을 흘리며 말했다.
“제가 갔던 곳은 다행히 괜찮았습니다. 아무래도 그때 그 나무 덕분인 것 같네요.”
성물인가….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다른 곳에도 성물을 둬서 충분히 지켜줄 수 있었을 텐데. 지금도 내가 신경 쓰지 못한 곳에서는 싸움이 일어나고 있겠지. 분한 마음에 꽉 쥔 주먹이 가늘게 떨렸다.
이 무의미한 싸움을 끝내는 방법은 하루라도 빨리 이름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데우스의 신탁을 아무리 곱씹어도 마땅히 떠오르는 장소가 없었다. 마음이 다급해지면 눈앞에 있는 것도 보이지 않는다던가. 그게 지금 딱 내 상황이었다.
“하아….”
한껏 침울해진 내 곁에 어느새 휘브가 다가와 앉았다.
“교수님은 어디로 가셨습니까?”
“제게 뭘 좀 찾아달라고 부탁하셔서 혼자 돌아다니고 있어요.”
“어디 있는 건데요?”
“그게… 정확히 몰라요.”
피곤한 얼굴을 쓸어내리며 다시금 데우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신탁. 그리고 수수께끼와 같은 말. 안 그래도 뒤죽박죽인 머릿속이 더욱 복잡하게 헝클어졌다.
“카르사 대륙에는 없대요. 하지만 이 제국 안에는 있다고….”
답답한 마음에 생각을 그대로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 말을 듣고 한동안 고민하던 휘브가 넌지시 말했다.
“으음, 바다에 있나?”
“네?”
“맞잖아요. 대륙은 아니지만, 영해라면 제국의 것이죠.”
일순 뒤통수를 맞은 듯 머리가 얼얼해졌다.
왜 지금까지 당연한 생각을 하지 못한 걸까. 대륙은 아니지만, 제국 안에 있다. 그럼 제국의 영토에 맞닿은 바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위치가 바다라고 생각하면, 데우스가 내린 신탁과도 맥락이 통한다.
“길 잃은 목자는 심연으로 떨어지고, 그 바다가 심연이라면….”
열쇠는 바다에 있다. 그것도 심연이라 불릴 만큼 아주 깊은 바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