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8 (258/305)

#258

앳된 소년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온몸에 오한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데우스는 내 눈앞에서 유피테르에게 흡수되지 않았나. 다시 그와 만나게 되는 날은 애석하게도 데우스가 죽는 순간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보란 듯이 밝은 빛이 되어 내게 말을 거니, 마치 죽은 사람과 마주한 듯 소름이 끼쳤다.

“…뭐예요? 당신.”

경계의 빛이 서린 어투로 묻자 데우스는 엷은 웃음을 흘렸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무척이나 많겠죠?]

“당연한 소리를….”

[물론 태오가 이 음성을 들을 때쯤엔, 나는 이미 흡수된 후겠지만.]

그 말에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 탄식을 흘렸다. 지금 이건 데우스 본인이 말하는 게 아니라, 과거 데우스가 정화석에 남겨 놓은 전언이었다. 언젠가 정화석이 깨지거나 충격을 받으면 저절로 튀어나오도록 설계해 둔 것인가.

혼자서 고민하는 사이, 데우스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거짓말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나’를 속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요.]

예상이 틀리지 않아 안도하는 한편, 갑작스럽게 의심이 불쑥 솟아올랐다. 만약 지금의 전언마저 유피테르와 담합한 결과물이라면 어떡하지. 그들이 원하는 대로 나를 움직이려 하는 술수라면? 데우스를 믿기로 하고서 막상 선택의 기로에 놓이니 또 다시 마음이 흔들렸다.

[아니, 사과할 건 이뿐만이 아니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던 데우스는 이내 조용해졌다. 정적에 사로잡힌 몬테나 숲은 바람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는 것인가. 길게 이어지는 침묵에 서서히 불안해지던 차, 빛이 희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태오.]

데우스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선 그답지 않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난 모든 걸 기억하고 있어요.]

뭐? 예기치 못한 고백에 뒤통수를 맞은 듯 멍해졌다.

데우스는 유피테르가 황제에 즉위하면서 생겨난 존재라고 했다. 그래서 황제가 되기 전의 기억은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런데 모든 걸 기억하고 있다니,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의심까지 들었다. 그러자 데우스는 마치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쐐기를 박았다.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잊은 적 없어요. ‘내’가 누구였는지, 어쩌다 그의 뿔을 잘랐는지, 그리고… 뿔을 어디에 숨겨 두었는지도 전부 알고 있어요.]

누군가 내 머릿속에 손을 넣고 휘저은 게 아닐까. 마구잡이로 엉망이 되어 버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째서 지금까지 말해주지 않은 걸까. 그것도 계획의 일부였다고 할 셈인가. 매번 아무것도 없는 곳을 열심히 파헤치는 내가 얼마나 멍청하게 보였을까.

[하지만 태오를 우습게 여겨 속인 건 절대 아니에요.]

“…그렇겠죠.”

[내겐 당신이 여러 신전을 오가며 뿔을 찾는 과정이 꼭 필요했어요.]

“모든 건 대의를 위해서니까.”

내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을 걸 알면서도 혼잣말하듯 추임새를 넣었다.

참 웃긴 일이다. 그토록 자신은 유피테르와 다른 존재라고 말했으면서, 그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한 사람이다. 유피테르는 뿔이 어디 있는지 알면서도 황제에게 찾도록 시켰고, 데우스는 모든 기억을 가지고 있으면서 내게 말하지 않았다. 서로 목표만 다를 뿐, 나나 황제나 똑같은 처지였다.

한때 도구로 쓰이는 황제를 조금이라도 불쌍하게 여겼던 내가 떠올라 실소가 터져 나왔다. 누가 누구를 불쌍히 여긴단 말인가. 허탈한 웃음을 흘린 뒷맛은 씁쓸하기 짝이 없었다.

[이제와 말해 봤자 부질없는 변명으로 들리겠죠. 그래도 확신이 있어서 말할 수 있었어요.]

천천히 다가온 빛은 방금 전과 달리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태오라면 내게 실망하고 배신감을 느끼더라도 멈추지 않을 거라고.]

…이걸 믿어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대체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신뢰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우습게도 그 말대로다. 여기서 멈출 생각은 추호도 없다. 설령 이용당했다고 한들 최종적인 목표는 데우스와 같으니까.

배신감과 씁쓸함이 스쳐 지나간 머릿속은 곧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그래. 조만간 이 세상에서 사라질 그보다 더 힘든 사람이 있을까. 지금은 사사로운 감정을 배제하고, 가장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거다.

“애초에 내게 다른 선택지가 없잖아….”

냉정함을 되찾고 나니 기다렸다는 듯 데우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모든 걸 끝낼 열쇠는 이 카르사 대륙에는 없어요. 하지만 제국 안에 있죠.]

대륙에는 없으나, 제국에는 있다고? 수수께끼와 같은 말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도무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자 데우스는 마치 이 상황을 예견이라도 한 듯한 태도로 말했다.

[자, 마지막 신탁이에요. 태오. 내가 줄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예요.]

“데우스. 잠시만…!”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요.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친구.]

그 말을 끝으로 정화석에서 흘러나온 빛이 폭죽처럼 부서졌다. 반짝거리며 떠다니던 빛은 이내 한데 모여 어느 형상을 만들어 냈다. 구불거리는 선으로 길게 이어진 그것은 고대 이아페의 언어로 쓰인 문장이었다.

‘길 잃은 목자는 심연으로 떨어지고, 마침내 네 명의 사내와 다시 마주하게 되리라. 죄로 물든 하늘빛에 현혹되지 말라. 오직 시간을 거스르는 자만이 심연을 벗어날 열쇠를 쥐고 있다.’

이것이 데우스가 내린 최후의 신탁인가. 결코 잊지 않으려 같은 문장을 몇 번이고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그런데도 역시 신탁답게 단번에 이해할 수는 없었다. 길 잃은 목자는 누구이며, 심연은 어디고, 또 네 명의 사내는 누구란 말인가.

그 사이 빛으로 된 글자는 서서히 옅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신의의 검을 품은 정화석이 완전히 부서지지 않아 다행이었다. 아쉬운 대로 반으로 쪼개진 정화석을 목에 걸고 다시 아멜리 저택으로 돌아가려던 그때였다.

“저…아무….”

바람을 타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바로 몸을 숨기려는데, 그만 바닥에 있던 나뭇가지를 밟고 말았다. 딱!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자마자 대화 소리가 끊겼다. 제발 기분 탓으로 넘겨 주길 빌었지만 상황은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거기 누구냐!”

망할. 눈을 질끈 감으며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도망쳐 봤자 괜히 일만 크게 만들겠지. 얌전히 제자리에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수풀을 헤치고 중무장한 장정 다섯이 뛰어왔다. 그들의 가슴에 박힌 백합 문양에 탄식을 참을 수가 없었다.

“순순히 투항하면, 목숨은 살려주겠다.”

가장 앞서서 칼을 뽑은 기사가 호기롭게 말했다. 두 손을 천천히 들어 보이며 싸울 의지가 전혀 없다는 걸 증명했다. 수중에 무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기사는 쉬이 경계를 거두지 않았다. 이내 기사는 어깨 너머를 돌아보며 말했다.

“단장님. 어떻게 할까요?”

역시 있었구나. 아멜리의 기사 단장. 백작 다음으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을 하필 몬테나 숲에서 만나버렸다. 이윽고 나무 사이로 팔랑이는 꿩의 꽁지깃이 보였다. 그건 기사 단장만이 달고 있는 투구 장식이었다.

“일단 포박해서….”

그리 말하며 걸어오던 기사 단장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흠칫 놀랐다. 그것도 잠시, 놀라움은 곧 흥미로움으로 변했다. 한눈에 나를 알아봤음이 틀림없었다. 한 손을 들어 부하의 검을 물린 단장은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며 말했다.

“이게 누구야. 백작님의 은혜를 입고 도망친 놈 아니더냐.”

“오랜만입니다. 단장님.”

“설마 네놈을 여기서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 잘난 교수님께 버림이라도 받은 게냐?”

정말 말 한 번 곱게 하는 경우가 없구나. 나를 무시하듯 내려다보는 눈빛부터 기분 나쁘게 씰룩이는 입꼬리까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괜히 말을 섞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고 있자 단장은 업신여기는 투로 내뱉었다.

“너덜거리는 옷차림을 보아하니 어지간히 궁하게 살았나 보구나. 하지만 꿈도 꾸지 마라. 너 같은 배은망덕한 놈을 아멜리 백작님께서 다시 써 주시진 않을 테니까.”

“그 저택으로 돌아갈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허. 꼴에 자존심만 내세우는구나.”

당당한 태도가 꽤나 신경에 거슬렸는지, 두터운 눈썹이 날카롭게 올라갔다. 그땐 일자리도 목숨도 잃을까 빌빌 기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차라리 마법사라면 몰라도, 검밖에 쓸 줄 모르는 기사는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그래도 일부러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지.

얌전히 시선을 내리깔자 기사 단장이 콧방귀를 뀌며 물었다.

“그럼 어째서 여기 있는 건가?”

“그건….”

적당한 변명거리를 생각하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빠릿빠릿한 목소리가 들렸다.

“단장님! 여기 찢긴 그물과 깃털이 있습니다!”

아, 맞다. 현장을 미처 치우지 못했지. 아차 싶어 미간을 찌푸리자 단장은 호기롭게 눈을 빛냈다. 이내 단장이 손짓하자 기사는 곧바로 바닥에 떨어진 잔해를 가지고 다가왔다. 그물에 희미하게 묻은 피와 몸부림치다가 떨어진 깃털들. 누가 봐도 마물의 흔적이었다.

“호오….”

단장은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훑어보았다. 약점을 잡았다는 표정이 얄미울 따름이었다. 일단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할까. 어차피 목격자나 직접적인 증거도 없는데. 그리 생각하며 천연덕스럽게 입을 열려는데, 단장이 입꼬리를 씰룩이며 물었다.

“설마 너도 몬테나 숲의 마물을 구하러 온 건가?”

잠깐. 너도… 라니?

“저 말고도 또 누가 여기 있는 겁니까?”

대체 누가 황명을 거스르고 마물을 지키려드느냔 말이다. 내가 알기로 형벌을 감수하면서까지 일을 강행할 사람은 전부 다른 곳에 있는데…. 마치 추궁하는 듯한 눈초리로 대하자 단장의 옆을 지키던 기사가 버럭 호통을 쳤다.

“무엄하긴. 묻는 말에만 대답해라!”

충성심이 대단하기도 하지. 한 번만 더 물어보면 목에 칼이라도 휘두를 기세였기에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웬일로 단장이 내 편을 들어주었다.

“괜찮다. 예전부터 입만 산 놈이었으니까.”

이윽고 단장은 큰 선심이라도 쓰는 것처럼 우쭐대며 말했다.

“웬 놈이 너처럼 마물을 구하려다가 붙잡혔다.”

“그게 무슨….”

“우리가 힘들게 붙잡아 놓은 것을 전부 방생했지.”

덫에 걸린 마물들을 풀어 준 건가. 나야 고맙지만, 그쪽은 지금 제법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것이다. 이번 일은 아멜리 백작의 단독 명령이 아니라 무려 황제가 개입한 사건이다. 자칫 반역죄로 투옥이라도 된다면 나로서도 손 쓸 도리가 없다.

잠시 고민하자 단장은 턱짓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놈 동료가 아니더냐.”

“전 여기 혼자 왔습니다.”

“그 말을 지금 나보고 믿으라는 겐가?”

“사실입니다. 저는 단지 소문을 듣고 왔을 뿐입니다.”

굳어있는 내 표정을 샅샅이 뜯어보는 눈빛이 예리하기 짝이 없었다. 내 말을 믿어 주리란 생각은 조금도 안 한다. 아직까지 기사 단장의 머릿속에 박힌 내 유약한 이미지를 이용할 심산이었다.

긴장한 기색으로 흘끔 눈치를 살피자 단장은 대놓고 비웃음을 흘렸다.

“뭐, 네놈이 그리 간 큰 짓을 벌였다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짧은 고민 끝에 단안을 내렸다.

“일단 포박해서 막사로 데려가라. 나는 여기서 좀 더 둘러볼 테니.”

“넵!”

군기가 바짝 든 기사는 금세 내 팔을 등 뒤로 둘러 포박했다. 라비린토스에서 납치된 후로 또 묶이는 일이 생길 줄은 몰랐는데. 두 명의 기사에게 포위당해 양 손의 자유를 잃은 채 막사로 향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동안 단장이 곁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고작 기사 둘을 상대로 몰래 결박을 끊고 도망가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그보다 마물을 방생하다가 도리어 붙잡힌 정체 모를 사람을 구해줘야만 했다.

“아그누스.”

숲길을 걸어가다 말고 나지막이 중얼거리자 발밑의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앞서 걸어가는 기사들은 다행히 기이한 그림자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혹시 아이리스 쪽에 무슨 일이 생기거든 바로 도와줘. 이쪽은 알아서 할게.”

아이리스에게 지금 상황을 전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바로 앞에서 감시가 도사리니 방법이 없었다. 말이 끝나자마자 이리저리 흔들리던 그림자가 우뚝 멈췄다. 그와 동시에 기사 하나가 나를 휙 돌아보며 신경질을 부렸다.

“뭘 그리 중얼거리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쯧, 네 놈 때문에 백작님께서 곤란해지신다면 내가 용서치 않을 거다.”

불쑥 으름장을 놓는 탓에 더는 말할 수도 없었다. 입 다물고 수풀을 헤쳐 나가니 마침내 나무 사이로 막사에 보였다. 달리 특별한 점 없는 막사에 안심하기도 잠시, 갑자기 귀걸이가 공명하기 시작했다.

“…뭐지…?”

이상한 일이다. 근방에 아스레인의 마석이 있지 않는 이상 공명하는 일은 없는데. 열심히 주위를 둘러보아도 딱히 눈에 띄는 물건은 없었다. 뭔가 이상하다 싶은 그때였다. 막사 쪽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일단 내 말 좀 들어보세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막사 옆 나무에 포박되어있는 사람이 보였다. 후드를 쓰고 있어 제대로 보이진 않지만, 뭔가 항의하고 있는 듯했다. 그 앞에 팔짱을 끼고 선 기사는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내게 백 번을 말해도 소용없다니까.”

“아~ 그럼 백작님 좀 뵙게 해 주십쇼.”

저 능글맞은 목소리와 말투. 왜 이렇게 익숙하지? 인상을 찌푸리고 목을 쭉 빼어 후드 속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마침 바람이 불어 검은 후드 아래로 숨어있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아주 잘 익은 밀 색이 꼭 지푸라기 같은 것이…….

“…어?”

설마 하는 순간, 기사가 그의 후드를 휙 벗겼다. 그러자 곱실거리는 머리카락 아래로 시원하게 뻗은 눈매가 드러났다. 녹색 눈동자에 입꼬리를 난 흉터를 보자마자 당혹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단단히 오해하고 계시다니까요?”

휘브리스가 왜 여기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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