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
저 멀리 새벽빛이 밝아 왔다. 약속한 시간은 동이 틀 무렵. 곧바로 기숙사 앞에서 아이리스를 만나 마차에 올라탔다. 따라오는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후에야 안심하고 후드를 벗었다. 내 안색이 썩 좋지 않았던 건지, 아이리스가 걱정스레 물었다.
“잠은 좀 잤어?”
“으음, 아뇨. 신경이 쓰여서 제대로 못 잤어요. 한 1시간 정도…?”
“지금이라도 눈 좀 붙이지 그래.”
“괜찮아요. 어차피 잠도 안 오고.”
그 짧은 대화를 끝으로 마차 안은 침묵에 갇혔다. 평소라면 시답잖은 농담이라도 주고받겠지만, 더 이상 내게 그럴 여유가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마차가 어서 아멜리 백작가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얼마나 왔을까.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아이리스가 분위기를 풀려는 듯 입을 열었다.
“근데 웬일로 교수님은 어디 가고 혼자 왔냐?”
“따로… 할일이 있으셔서 잠시 떨어져 다니기로 했어요.”
“흐음. 어지간히 중요한 일인가 보네.”
심드렁한 낯빛을 보며 혼자 초조한 마음을 삭였다. 지금도 코카서스 산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먹구름이 자욱하게 낀 산꼭대기는 마치 현세와 분리된 별세상처럼 느껴졌다.
혹시 코카서스 산이 보일까 조그만 창문 밖을 내다보는데, 아이리스가 불쑥 말했다.
“아, 맞다. 그 소식은 들었어?”
“무슨 소식이요?”
“황제가 코카서스 산을 전면 봉쇄했어.”
뜻밖의 소식에 나도 모르게 어깨를 흠칫 떨었다. 다행히 창밖을 보고 있던 아이리스는 내 반응을 보지 못하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원래도 황실이 관리하는 곳이긴 했지만, 뭔가 이상하단 말이지.”
“…어떤 점이요?”
“며칠 전부터 산 주변에 결계가 쳐져 있더라고. 맨 처음엔 잘못 봤나 싶었는데, 아무리 봐도 맞는 것 같아.”
역시 아이리스인가. 코카서스 산 주변에 둘러진 결계를 단숨에 알아차리다니.
“혹시 그거 헤카테랑 관련 있는 거 아니냐?”
묻는 말에 답하지 않자 아이리스가 뒤늦게 나를 돌아봤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내 표정을 보고 심상찮은 낌새를 느꼈는지, 그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뭐야. 뭔데.”
이미 대부분의 진실을 알고있는 아이리스에게까지 복잡하게 숨길 이유가 없었기에 순순히 털어놓았다. 엘렉트 신전에서 있었던 일들과 코카서스 산에서 일어나고 있을 상황까지 전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이리스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
쿵! 그의 머리가 천장에 닿아 차체가 덜컹 흔들렸다.
“괜찮아요?”
“어, 어….”
꽤 아프게 부딪쳤는데도 아이리스는 다시 의자에 앉아 머리만 문질렀다. 방금 한 이야기가 꽤나 충격적이었는지, 그는 한참동안 멍하니 있다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래서… 헤카테가 날뛰기 시작한 거였구나.”
뒤룩뒤룩 굴러가는 회색빛 눈동자가 무척 혼란스러워 보였다. 이내 아이리스는 중요한 사실이 떠오른 듯 탄식을 내뱉으며 말했다.
“근데 그 사람 혼자서 괜찮은 거야? 아무리 마법 실력이 좋다지만, 평범한 상대가 아니잖아.”
“그러니까 어서 유피테르를 제거할 방법을 찾아야죠.”
“방법이 있어?”
“그의 진짜 이름을 찾는 거예요.”
아스레인은 내게 뒤를 맡긴다고 했다. 그건 유피테르의 이름을 찾는 일이기도 했지만, 그가 아껴 마지않는 세상을 지켜 달라는 부탁이기도 했다. 아스레인이 자신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지키려던 균형을, 유피테르가 마음대로 부수게 둘 순 없었다.
“일단 급한 불부터 끄죠.”
내내 평지를 달리던 마차는 곧 언덕으로 들어섰다. 창밖을 내다보니 저 멀리 웅장한 저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순결을 나타내는 백합을 상징으로 하는 가문, 아멜리 백작가다. 이렇게 다시 돌아올 줄은 몰랐던 터라 반갑기보단 영 떨떠름했다.
어두운 표정으로 점점 가까워지는 저택을 바라보던 그때였다.
“야. 저거… 헤카테 아니냐?”
아이리스가 다급하게 반대편 창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홱 고개를 돌리자 헤카테 무리에게 포위된 세 명의 메이드가 보였다. 아멜리 백작가의 사용인이 분명하다. 곧바로 주먹을 쥐고 마부가 있는 쪽 벽을 쿵쿵 두드리자 마차가 언덕 중턱에 멈춰 섰다.
서둘러 마차에서 내려 언덕 위쪽의 상황을 살폈다.
“수가 꽤 많네요.”
메이드를 둘러싼 헤카테는 모두 다섯 마리. 하이에나 정도 되는 크기로 지금까지 봤던 개체 중에 제일 작았지만, 섣불리 덮쳤다가는 오히려 헤카테를 자극하고 말 것이다.
잠시 주춤하는 사이, 바로 옆에서 술렁거리는 마력이 느껴졌다. 아이리스의 마법이었다. 그가 마안을 손에 들고 기도문을 중얼거리자 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헤카테는 내가 묶어 둘 테니까 넌 저 사람들을 구해.”
“네!”
아이리스만 믿고 바로 메이드에게로 달려갔다.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마치 순풍을 만난 돛처럼 빠르게 치고 나갔다. 이내 거센 바람이 보이지 않는 밧줄이 되어 헤카테의 몸을 칭칭 둘렀다. 그들이 마법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사이, 나는 메이드에게 다급하게 손짓했다.
“어서 저택 안으로 피하세요!”
혼비백산이 되어 언덕을 뛰어올라가는 메이드들의 뒤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티오?”
“레트반 누님!”
“네가 어떻게 여기에….”
레트반은 목석처럼 우두커니 서서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순간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가, 뒤에서 들리는 괴상한 울음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언제 헤카테가 마법을 끊어 낼지 모른다.
성큼성큼 다가가 레트반의 손목을 붙잡아 언덕 위로 끌었다.
“그건 나중에 설명할 테니 모두를 데리고 저택 안으로 들어가세요.”
“어, 어….”
얼떨결에 언덕 위로 올라가던 레트반이 돌연 멈춰 서서 말했다.
“잠깐. 무기도 없이 괜찮겠어?”
“제 걱정은 말고 어서요!”
다급한 마음에 언성을 높이자 레트반이 화들짝 놀라 저택으로 뛰어 들어갔다. 레트반을 끝으로 모든 하인이 무사히 저택 안으로 피했다. 텅 빈 언덕을 본 후에야 한시름 놓으며 아이리스 쪽 상황을 살폈다. 여전히 바람 마법은 헤카테의 발을 묶고 있었지만, 금방이라도 깨질듯 위태로워 보였다.
얼른 다가가자 아이리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얼마 못 버텨. 마법이 풀리는 순간 도망칠 거야.”
“괜찮아요. 그 전에 잡으면 되니까.”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림자 위에 손을 올리며 속삭였다.
“부탁해. 모두를 지켜야 해.”
헤카테 다섯 마리를 처리하기 위해선 늑대의 형상으로는 힘들겠지. 압도적인 힘과 몸체를 가졌으면서도 한 놈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빠른 존재가 필요하다. 모든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마력을 쏟아 붙자 그림자가 꿈틀거리더니 아그누스가 나타났다.
무려 거대한 검은 곰의 형태로.
우렁찬 포효에 공기가 순간 얼어붙는 듯했다. 이내 아그누스는 검은 연기를 휘날리며 달려가 앞발로 헤카테를 하나씩 부숴 나갔다. 가차 없이 머리와 몸을 분리시키고, 입으로 목덜미를 물어뜯어 숨통을 끊었다. 사방으로 부서지는 돌조각이 꼭 피 튀기는 것처럼 보여 일순 할 말을 잃었다.
“쟤는 어째 점점 커지는 것 같다?”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말도 안 되는 변명이 튀어나갔다.
“잘 먹어서 그런가 봐요.”
“뭘 얼마나 잘 먹어야 늑대가 곰이 되는 건진 모르겠다만….”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요?”
하하,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저택으로 걸음을 돌렸다. 언덕을 넘어 정원에 들어서자마자 레트반이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열고 나왔다. 한달음에 달려온 그녀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티오. 다 정리된 거니?”
“네. 당분간은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다행이다….”
레트반은 제 가슴을 도닥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많이 놀랐을 그녀를 다독이는데, 뒤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흘끗 눈을 드니 두 명의 메이드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숙덕거리고 있었다.
“티오가 누구야?”
“예전에 잘생긴 백작님께서 데리고 간 그 하인 말이야.”
“뭐? 걔가 저 사람이라고?”
“그렇다니까.”
“그땐 좀 더 비실하지 않았어?”
대화 소리가 너무 잘 들려서 탈이다. 나를 훑어보는 시선에 경계심보다는 호의가 느껴진다면 착각이겠지. 그들을 향해 어색하게 목례를 하곤 다시 레트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튼 오랜만이에요. 누님.”
“그러게. 너무 많이 달라져서 못 알아볼 뻔했어~”
“그래요?”
딱히 달라진 점은 없는 것 같은데.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리자 레트반이 내 뺨 위로 손을 갖다 대었다.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은 나를 응원해 주던 그 시절과 똑같았다.
“특히 눈빛이 정말 좋아졌어. 그땐 아무 의욕도 없어보여서 걱정이었는데….”
“이젠 괜찮아요. 교수님 덕분에 많은 걸 얻었거든요.”
“다행이야. 네가 잘 지내는 걸 보니 나도 좋네.”
친누나가 있다면 이런 기분이려나. 짧은 인연이었지만, 여전히 나를 아껴 주는 마음씀씀이가 느껴져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내 레트반은 내 옆에 가만히 서있는 아이리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쪽은?”
“제 친구인 아이리스 딜런이라고 해요.”
“아, 티오의 친구 분이셨구나.”
레트반은 한 걸음 물러서서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정중히 인사했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딜런 님. 마법 실력이 출중하시더군요.”
“예, 뭐….”
딜런이라 불리는 게 이상한지, 마법을 칭찬받은 게 부끄러운지, 아이리스는 퍽 퉁명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그 후로 이어지는 어색한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운을 뗐다.
“그러고 보니 아멜리 백작님은요?”
“그게….”
아까까지만 해도 생글생글 웃고 있던 레트반의 표정이 금세 굳었다.
“인근 마을이 마물에게 습격 받았다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별장으로 가셨어.”
“그래서 하인이 얼마 없었던 거군요….”
“응. 몇 명만 남아서 저택을 지키고 있지.”
참으로 아멜리 백작다운 선택이다. 영지민은 물론이고, 거의 평생을 함께한 하인까지 버리고 가다니. 역시 사람은 쉽게 바뀌는 게 아닌가 보다. 입을 굳게 닫고 씁쓸한 표정을 짓자 레트반은 어쩔 수 없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근데 마물이 갑자기 왜 마을을 습격하는 거니?”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방금 그건 마물이 아니에요.”
“뭐…?”
“인공으로 만들어 낸 생물, 헤카테라고 해요.”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는 이야기에 레트반은 깜짝 놀랐다. 심지어 그녀의 뒤에서 쉴 새 없이 떠들던 메이드까지 조용해졌다. 쉬이 믿기지 않는지, 레트반은 재차 같은 질문을 물었다.
“그럼 지금까지 영지를 어지럽힌 게 마물이 아니란 말이지?”
“네. 자세한 사정은 말씀 못 드리지만요.”
“그게 사실이라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초조하게 입술을 만지작거리던 레트반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백작님께서 저택을 떠나기 전에 숲을 소탕하라고 기사를 보내셨어. 아마 지금쯤이면, 몬테나 숲에 사는 마물과 맞닥뜨렸을지도 몰라.”
“그런….”
영지민을 두고 도망친 것도 모자라, 상황 파악도 안 하고 무작정 몬테나 숲으로 기사를 보냈다고?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가 뇌리를 스쳤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자 레트반은 내 어깨에 부드럽게 손을 올리며 말했다.
“티오. 어서 가 봐.”
“네? 하지만 여기도 그렇게 안전하지 않아요. 또 다시 헤카테가 올지도 모르고요.”
“우린 걱정하지 마. 저택 지하에 숨어 있으면 쉽게 못 찾아올 거야.”
“그래도….”
섣불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멜리의 기사가 숲으로 갔으니, 이 저택을 지킬 사람이 없다. 메이드가 검이나 마법을 써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면 좋겠지만, 터무니없는 기대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망설이자 아이리스가 내 팔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정 불안하면 내가 이 저택에 남을게.”
“아이리스…!”
“그러니까 여긴 신경 쓰지 말고,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해.”
결의에 찬 회색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아이리스라면 충분히 믿고 맡길 수 있으니까.
재회의 기쁨을 느끼기도 전에 저택을 빠져나와 마차에 올랐다. 몬테나 숲이 아멜리 백작 저택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아 천만 다행이었다. 다시 후드를 뒤집어쓰며 마석으로 움직이는 조각상 마부에게 당부했다.
“여기서 기다리지 말고 다시 저택으로 돌아가 주세요.”
마차는 빠르게 숲에서 멀어졌다. 이제 내가 몬테나 숲에 왔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기척을 숨기고 조심스럽게 숲으로 들어갔다. 히페리온이 있는 쿠네 숲보다 크기는 작아도 나무가 빽빽해서 시야를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아멜리의 기사도 신중하게 움직이는지, 숲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너무 조용한 나머지 새소리도 들리지 않아 문제였다.
결국 눈과 귀가 되어줄 히페리온의 씨앗을 소환하며 말했다.
“이 숲에 있는 마물을 찾아 줘.”
[알았어!]
네 마리의 나비가 쏜살같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부디 그들이 숲에 숨어 있는 마물을 찾아 주길 바라며 점점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처음 아스레인과 현장 실습에 나갔을 때처럼 나무 밑동을 유심하게 살펴봤지만, 마물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 저 멀리서 나뭇잎 나비가 실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태오.]
“어때?”
[이쪽엔 없어.]
잇따라 도착한 나비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여기도.] [저쪽 둥지도 텅 비어 있어.]
그럴 리가 없다. 내가 본 기록만으로 몬테나 숲에 사는 마물이 몇이었는데. 조류형 마물의 낙원이라는 표현까지 봤었단 말이다. 그런데 둥지까지 싹 비어 있다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설마 벌써 아멜리의 기사가 훑고 지나간 건 아닐까.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가만히 보던 나비가 날개를 팔랑 흔들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다들 여기가 위험하다 생각하고 진즉 떠난 것 같아.]
“그, 그래?”
[응. 핏자국이나 싸운 흔적 같은 건 없었어.]
“다행이다….”
겨우 숨을 돌리기도 잠시, 숲속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오!! 이쪽에 다친 마물이 있어!]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나비가 나무 기둥 사이에서 열심히 위치를 알리고 있었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나비를 따라 숲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날개를 퍼덕거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코끝으로 불쾌한 냄새가 스쳤다.
피 냄새다. 이윽고 거친 수풀을 지나자 오색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눈동자와 마주쳤다.
“…오파러스…?”
내가 이 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마주친 마물이 고통스럽게 몸을 비틀고 있었다. 누군가 쳐 놓은 그물에 그만 날개가 걸린 것이다.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으로 그물은 어느 정도 잘려 있었지만, 그 잔해가 복잡하게 얽혀 도리어 오파러스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있었다.
빠져나가기 위해 얼마나 움직였는지, 부리엔 긁힌 자국이 가득했고 주변엔 뽑혀 나간 깃털이 무성했다. 날개를 옥죄어 오는 상처가 더 깊어지기 전에 서둘러 구해 줘야만 했다.
“내가 누군지 알겠니?”
최대한 자극하지 않으려 몸을 낮추어 접근했다. 하지만 이성을 잃은 오파러스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거칠게 날개를 움직였다. 끼에엑!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함께 눈앞으로 발톱이 휙 지나갔다.
“윽…!”
다급히 뒷걸음질쳤지만, 한 발 늦었다. 우악스러운 발톱에 로브가 찢겨나가 앞자락이 너덜너덜했다. 그래도 옷만 찢긴 게 어디인가. 조금만 더 가까웠더라면 필시 살갗까지 뜯겨 나갔을 것이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주륵 흘러내렸지만, 포기하지 않고 다가갔다.
“진정해. 나야. …제발 기억해 줘.”
용기를 내어 손을 내밀자 오파러스가 갑자기 고개를 쳐들었다. 이내 냄새를 찾는 듯 움직이더니 서서히 내게로 머리를 숙였다. 이윽고 상처 입은 부리가 내 손에 닿는 순간 흉흉하게 빛나던 눈이 서서히 얌전해졌다. 예전에 맡은 내 체취를 기억한 것이다.
“옳지. 얌전히 있으면 금방 풀어 줄게.”
부리를 손등으로 살살 쓸어 주자 오파러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제자리에 앉았다. 곧바로 날개를 붙잡은 그물을 하나씩 세심하게 풀어 주었다. 어찌나 복잡하게 엉켜 있던지 푸는 데만 해도 한참이었다.
다행히 상처는 심하지 않았지만,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오파러스. 미안하지만, 넌 여길 떠나야 해.”
아직 아멜리의 기사가 몬테나 숲을 순찰할지도 모른다. 그들에겐 헤카테니 뭐니 하는 말 따위 통하지 않는다. 그러니 기사단과 마주치기 전에 얼른 오파러스를 보내야 한다. 어디든, 안전한 곳으로.
“언젠가 반드시 네게 몬테나 숲을 돌려줄게. 그러니까 지금은 날 믿어 줘.”
간절한 마음이 전해진 걸까. 조심스럽게 커다란 몸을 어깨로 밀자 오파러스가 제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내 날개를 활짝 펼치고 파닥거리더니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저 멀리 훨훨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후… 진짜 죽겠네.”
어지러운 머리를 감싸며 숨을 돌리는데, 문득 깃털 사이로 반짝이는 것을 발견했다. 뭔가 하고 들춰 보니 웬 빛나는 보석이 반으로 쪼개져 있었다. 묘하게 익숙한 형태와 빛깔에 이상함을 느끼다가 한 박자 늦게 알아챘다.
“아, 안 돼….”
그건 바로 내 목에 걸려 있던 정화석이다. 오파러스가 휘두르는 발톱에 로브가 찢기면서 함께 갈라진 모양이다. 이게 말로만 듣던 삼재인가? 어째 불길한 일이 연달아 일어나는 것 같다. 속상한 마음에 울상을 지으며 정화석을 집어 들었다.
“…어떻게든 이어 붙이면 되겠지.”
스스로에게 심심한 위로를 건네던 그때였다. 쪼개진 정화석에서 희미한 빛무리가 떠올랐다. 둥둥 날아다니는 빛이 마치 반딧불처럼 보였다. 홀린 듯 손끝으로 빛을 건드리자 앳된 소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녕, 태오.]
데우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