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6 (256/305)

#256

헤카테의 등장으로 술렁거리던 숲에 조용한 바람이 불었다. 늠름하게 버티고 서 있는 아그누스 때문인지, 병사들은 섣불리 나서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잠시 고민하던 감독관은 이내 오른손을 들며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반은 막사로 돌아가 숲 입구를 지키고, 나머지 반은 마을 경비를 강화해라.”

“예!”

우렁차게 대답한 병사들은 대열을 맞추어 쿠네 숲을 빠져나갔다. 착착. 철로 된 발소리가 아예 들리지 않은 후에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아무리 히페리온이라 한들 토벌할 작정으로 무기를 들고 들어오는 인간에게까지 호의적일 리가 없었다.

긴장한 탓에 참고 있던 숨을 뱉어 내며 감독관에게 말했다.

“현명한 판단에 감사드립니다.”

“아뇨. 제 부하들을 지키고 싶었을 뿐입니다.”

가만히 돌무더기를 내려다보던 감독관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정말… 안전한 겁니까?”

“제가 보증하죠. 헤카테라면 몰라도, 마물이 먼저 마을을 습격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하자 그의 굳은 표정이 한결 풀어졌다. 이윽고 감독관은 죽은 헤카테 옆에 쭈그려 앉아 돌무더기를 이리저리 뒤적거렸다. 회색 털을 가진 마물이 한낱 돌이었다는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니까 이 헤카테라는 인공체를 사제가 만들었다는 겁니까?”

“간단하게 말하면 그렇죠.”

“대체 왜 사제가 인간과 마물을 공격한단 말입니까. 신성한 제국에서 감히 누구의 사주를 듣고…!”

감독관이 추측하는 용의선상에 황제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나라에 충성을 바친 기사이니, 애초에 황제를 의심하는 것부터 불가능하겠지. 그러니 황제보다는 의심하기 쉬운 쪽을 택하기로 했다.

“기사가 폐하의 명령을 받들듯, 사제는 대사제의 명령을 따르죠.”

내 발언이 불쾌하게 느껴졌는지 그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꽤 위험한 상상을 하시는군요. 대사제님은 신의 가호를 받으시는 분입니다. 아무 이유 없이 신민을 공격할 리가….”

“없을까요?”

단호하게 말허리를 자르며 역으로 질문하자 감독관은 자못 당황했다. 어쩌면 신실한 신도일지 모를 그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지만, 언제까지고 진실에서 눈을 돌릴 수만은 없다. 나를 의심하는 눈빛에 어쩔 수 없이 얼마 전의 일을 언급했다.

“축도의 날, 이아페 섬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 아시나요?”

“갑자기 그 마물이 나타나 대사제님을 공격한 사건 말씀이십니까?”

“네. 폐하께서 그 금빛 마물을 잡으려 혈안이 되셨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했다고 들었어요. 카르사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인재들도 소용없었죠. …그 이유가 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잠자코 내 말을 듣고 있던 감독관의 얼굴이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설마… 축도의 날에 나타난 마물이 인공체라 말씀하고 싶으신 겁니까?”

“말하고 싶은 게 아니라 사실이에요. 코어가 없으면 이렇게 보잘 것 없는 돌로 돌아가니까 지금까지도 그 마물의 비늘조차 찾을 수 없었던 거죠.”

검 끝으로 돌을 툭툭 건드리며 말하자 그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한낱 음모론자로 취급당하려나. 한동안 상념에 빠져있던 감독관은 곧 한쪽 입꼬리를 부자연스럽게 움찔거리며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 귀에는 대사제께서… 자작극을 했다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제대로 이해하셨네요.”

“하하, 그런 궤설은 믿지 않겠습니다.”

“과연 궤설일까요? 잘 생각해 보세요.”

천천히 그의 주변을 맴돌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문을 떼었다.

“헤카테를 만들고 조종하는 건 신력이 담긴 코어입니다. 그건 직접 보셨잖아요?”

“…….”

“한데, 사제가 아닌 존재가 저만한 신력을 다룰 수 있을까요? 만에 하나 사제가 저지른 짓이 아니라면, 대신전은 왜 신력이 버젓이 악용되는데도 가만히 있는 걸까요?”

조금만 생각해보면 금방 이상하단 걸 눈치 챌 수 있다. 단지 대사제를 의심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 그런 거지. 아마도 유피테르가 헤카테를 데리고 대담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전부 의심을 사지 않으리란 확신 때문이리라.

“당장 믿기 힘드시겠죠. 아예 못들은 걸로 하셔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당신은 오늘 헤카테를 봤고, 이미 그 머릿속에 의심이 움트기 시작했을 거예요. 제 위치로 돌아간 병사들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짚어 주자 감독관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조심스레 그의 손에 반으로 쪼개진 판도라를 올려두었다. 더 이상 신력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판도라의 존재만으로 오늘 일을 잊지 않기엔 충분할 것이다.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하시길 바라요.”

그 말을 끝으로 홀연히 숲길을 떠났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감독관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바닥에 놓인 판도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빛에 고뇌가 담겨 있었다. 기나긴 고민의 끝이 나와 같은 이상이기를 바랐다.

다시 걸음을 돌리는데, 어깨에 붙어있던 나비가 눈앞에 날아들었다.

[태오. 태오.]

어디선가 숨어있던 다른 나뭇잎 나비도 함께였다.

[괜찮은 거야?] [이제 숲으로 안 쳐들어와?]

“응. 하지만 황명이 언제 바뀔지 몰라. 그때면 설득이고 회유고 아무 소용없어.”

방금이야 감독관이 말귀가 통하는 사람이라서 다행이지, 다음에도 같은 방법이 통하리란 보장이 없다. 게다가 쿠네 숲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일이 계속해서 일어날 것이다. 미노스 황제가 버티고 있는 한, 모든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럼 어떡해?]

걱정이 담긴 목소리에 안심하라며 웃어보였다.

“우릴 도와줄 사람이 있어.”

[누군데?]

“저기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

황제를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우리 곁에 있지 않은가. 이제 옥좌의 주인이 바뀔 때가 됐다.

나비들을 뒤로 물리고 눈을 감은 채 머릿속으로 어느 마물을 떠올렸다. 낮과 밤이 공존하듯 흑백의 깃털이 아름답게 뒤섞인 새. 이윽고 몸 안에 충분한 힘이 쌓이자마자 번뜩 눈을 빛내며 말했다.

“키코로. 여기야.”

그 순간 나무 사이로 흘러내린 한줄기 햇살이 강렬하게 빛났다. 허공에 손을 뻗자 손끝에 빛이 모여 한 쌍의 날개를 만들어냈다. 이내 기분 좋게 지저귀는 새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어머, 태오!]

“오랜만이야. 키코. 볼 때 마다 아름다워지네.”

[너도 참~ 근데 무슨 일이야?]

“혹시 코로는 어디 있어?”

코로의 행방을 묻자 키코는 의아한 듯 머리를 갸웃거렸다. 내 질문이 이상했나 싶어 덩달아 머리를 기울였다. 그때 발밑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긴. 당연히 키코랑 같이 있지!]

곧바로 고개를 숙이자 키코의 그림자가 요란하게 흔들렸다. 아, 지금은 낮이라 그림자에 있었구나. 그들이 한 몸이라는 사실을 깜빡 잊어버렸다. 민망한 웃음을 흘리며 땅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아 물었다.

“내 말을 누군가에게 전해 줄 수 있어?”

[이번엔 키코가 아니라 나야?]

“응. 눈에 띄면 안 되는 일이라서.”

[흥, 난 비싼 몸인데.]

코로가 대번에 응하지 않자 키코가 잽싸게 바닥에 내려와 그림자를 콕! 쪼았다. 나를 곤란하게 하지 말라는 둥, 어차피 부탁을 들어줄 거면서 괜히 시간 끌지 말라는 둥 잔소리가 이어졌다. 왠지 부부싸움을 보는 듯해서 잠자코 기다리고 있으니 코로가 얌전히 입을 열었다.

[누구한테 전하면 되는데?]

스르르 튀어나온 검은 새에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황궁에 있는 내 친구에게.”

***

아스레인이 세워 둔 마차를 타고 안겔루스 대학으로 돌아갔다. 헤카테가 마을을 습격했다고 하니, 가장 먼저 학교에 있을 그들이 걱정되었다. 꼬박 반나절을 달려 늦은 밤이 되어서야 학교에 도착했다. 그런데 당연히 어두우리라 생각한 학교는 마치 대낮처럼 밝았다.

곳곳에 마법으로 된 등불이 켜져 있었고, 꼭 방학 첫날을 보듯 마차가 입구부터 줄지어 서 있었다. 급하게 마차에 짐을 실은 학생들은 꾸준히 학교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덩그러니 교문에 서서 바삐 지나다니는 마차를 눈으로 좇았다.

“뭐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서둘러 정문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얇은 막을 뚫고 온 것처럼 기묘한 느낌이 온몸을 스쳤다. 어깨를 흠칫 떨며 뒤를 돌아보자 바깥 풍경이 희미하게 일렁거렸다. 결계다. 견고한 마법으로 이루어진 결계가 안겔루스 대학 전체에 둘러져 있었다.

설마 헤카테가 대학까지 침입한 건가?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 오던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태오?”

흠칫 뒤를 돌아보니 아이리스가 동상처럼 우두커니 서있었다.

“아이리스!”

반가운 얼굴을 보자마자 한달음에 길을 가로질러 달려갔다. 긴가민가한 눈빛으로 쳐다보던 아이리스는 바로 앞까지 다가온 나를 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뭐야. 진짜 너였네. 순간 환각이라도 보는 줄 알았어.”

“방금 막 왔어요. 그런데 이게 다 무슨 일이에요?”

이 와중에도 학교에 드나드는 마차 행렬은 끊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아이리스의 표정은 왠지 모르게 떨떠름해 보였다. 이내 아이리스는 나를 마차가 오가지 않는 정원으로 데려간 후에 비로소 운을 뗐다.

“이미 들었을지도 모르지만, 제국 곳곳에서 마을 습격 사건이 벌어지고 있어.”

“잠깐만요. 곳곳이라뇨?”

“내 귀에 들려온 소식만 벌써 다섯 곳이 넘어. 다행히 피해가 그리 심각하진 않은가 봐.”

심각하지 않다는 말을 들어도 마음은 도무지 편해지질 않았다. 물론 아직까지 상황을 파악하고 있겠지만, 조만간 무력으로 진압한 곳이 나올지도 모른다. 쿠네 숲도 병력과 마물이 부딪치기 일보 직전이었지.

순식간에 낯빛이 어두워지자 아이리스는 조심스레 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아, 물론 여기 있는 결계는 교수님들이 혹시 몰라서 쳐 둔 거야.”

“…학교에 별 일이 없어서 다행이네요.”

“그건 그래. 교수님들은 위험하니까 웬만해서 학교에 머물라고 했는데, 고향이 걱정되는 애들은 이미 다 마차를 타고 떠났어.”

“그럼 세잔이랑 진도 갔어요?”

“어. 아까 낮에.”

거긴 과연 괜찮을까. 만약 유피테르가 일부러 나를 무너뜨리기 위해 내 친구들과 그들의 가족을 노린다면…. 불안한 마음에 두 손을 모아 쥐고 제자리를 맴돌았다. 그러자 아이리스가 차갑게 식은 내 손을 그러쥐며 말했다.

“걔네가 널 만나면 말을 전해 달라고 했어.”

“무슨… 말이요?”

“그쪽 일은 걱정하지 말라고.”

예상치 못한 말에 고개를 퍼뜩 들자 결의에 찬 회색 눈동자가 보였다.

“마을을 습격하는 그거, 헤카테잖아?”

“네. 맞아요.”

“그러니까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잘 해 보겠대.”

단지 고향을 지키기 위해서 학교를 떠난 줄 알았다. 하지만 그들은 나보다 한 수 앞을 내다보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다. 내게 연루되어 화를 당할 수도 있는데도 그들은 서슴없이 나를 도왔다. 이번에도 마물이 아니라 헤카테임을 알리기 위해 움직이겠다니.

“의외지?”

“…네.”

“이래도 걱정돼?”

아이리스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씩 웃었다. 그 미소가 친구를 한 번 믿어 보라는 듯 보여서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말했다.

“아뇨. …엄청 믿음직스럽네요.”

걱정보다는 믿음이 필요한 때다. 그들이 고향에서 열심히 일하는데, 나라고 여기서 멈춰 있을 수는 없었다. 떨리는 숨을 내쉬며 불길한 생각을 떨쳐 내곤 아이리스에게 물었다.

“혹시 가장 먼저 소식이 들려온 곳이 어딘지 알아요?”

“그게… 몬테나 숲이라고 했었나.”

왠지 귀에 익은 이름인가 했더니, 그곳은 내가 이 세계에 넘어와 처음 본 장소다. 그날의 기억이 낚시찌를 끌어올리듯 줄줄이 딸려서 떠올랐다. 차에 치여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뜨니 소설 속 몬테나 숲이었다. 명령을 받은 기사단장이 내 목에 칼을 대고 있었고, 바로 거기서 처음으로 마물을 봤다.

멍하니 먼전만 바라보고 있으니 아이리스가 내 어깨를 톡톡 치며 물었다.

“왜 그래?”

“그 근처에 제가 일했던 아멜리 백작 저택이 있어요.”

일하는 내내 천대받은 기억밖에 없다. 그래도 늘 웃음으로 대해 주던 레트반 누님과 하인들이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몬테나 숲에 있는 마물 오파러스도 걱정이었다. 곧바로 걸음을 돌리자 아이리스가 내 손목을 탁 붙잡으며 말했다.

“이 시간에 어딜 가?”

“몬테나 숲에 가 봐야겠어요.”

“오늘은 늦었으니까 내일 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보자 아이리스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딱히 걱정이 되는 건 아니고, …아무튼 같이 가 줄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