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
두 힘이 팽팽하게 대립했다. 유피테르는 족쇄에 붙잡혀 있는데도 불구하고 공격을 쉴 새 없이 퍼부었다. 아스레인은 날카롭게 날아오는 공격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그 탓에 신력이 사방으로 튕겨나가 예배당 벽과 바닥이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아스레인의 결계로 보호를 받는 지금도 폭발적인 힘의 충돌이 여실히 느껴졌다.
“늦어서 미안하군.”
결계 안으로 걸어 들어온 아스레인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마력으로 유지하던 인간의 모습은 점차 무너지고 있었다. 날카롭게 찢어진 세로 동공과 하늘 높이 솟은 뿔에서 숨길 수 없는 마력이 느껴졌다.
“아스레인. 괜찮아요? 모습이….”
비늘이 돋아난 뺨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자 전기가 오른 듯 손끝이 저릿했다.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자 아스레인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내 손을 잡아 내렸다.
“나를 걱정할 때가 아니잖나.”
“전 괜찮아요. 보다시피 다친 곳은 없어요.”
“다행이군.”
안도의 한숨을 내쉰 아스레인은 이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데우스는?”
“계획대로 흡수됐어요. 그런데….”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엄청난 힘이 결계로 날아와 꽂혔다. 쿠궁! 다행히 뚫리지는 않았지만, 결계가 흔들리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퍼뜩 고개를 들자 유피테르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 이런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나?
여전히 고고함을 잃지 않은 그는 심지어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 충분히 느끼지 않았나. 무슨 수를 써도 짐을 방해할 수 없다는 걸.
“네 미래는 이미 무너졌다. 유피테르.”
- 글쎄. 과연 그럴까?
유피테르는 턱 끝을 살짝 치켜들어 우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 제국의 황제는 짐을 따르고 있다. 신민들 또한 마찬가지지. 그러니 이곳에 짐의 발을 묶어 둔다 한들 아무 소용없어.
마법에 붙잡히고도 견고한 자신감의 원천은 신앙이었다. 그의 말마따나 유피테르가 사라져도 한 번 구축된 신앙은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제국에 널리 퍼진 사제와 신도들은 원하든 원치 않든 유피테르의 수족 노릇을 하게 될 것이다. 모든 권력을 가진 황제마저도 신의 사자를 자처하고 있지 않은가.
- 지금도 미노스는 짐이 내린 사명을 위해 움직이고 있겠지.
“어째서 황제에게 뿔을 찾으라고 시킨 거죠? 어차피 당신은 뿔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잖아요.”
- 하나는 아나, 둘은 모르는군.
유피테르는 나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
- 본디 사람이란, 당장 내 이웃이 죽길 바라도 아무 이유 없이 손에 피를 묻히긴 꺼리지. 너 또한 그러지 않나. 그래서 그들에게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는 목표를 줬다.
“그게 무슨….”
- 마물을 토벌하라 했을 때 주춤하던 이들이, 신께서 주신 사명이란 이름 아래선 한없이 용감해지지. 무고한 생명이 아니라 신의 앞길을 가로막은 불신자를 처단하는 거니까.
어느 정도 예상하고는 있었다. 지금껏 유피테르가 나서지 않고 뒤에서 명령만 내리던 이유를. 그는 인간이 스스로의 신념과 의지로 칼을 들길 바란 것이다. 신의 사명을 따른다는 명분만 존재한다면, 무수한 목숨을 거두면서도 죄책감 따윈 가지지 않을 테니까.
불안정한 세계에서 안식처를 찾는 자는 신을 따르고, 자신을 수호하는 신을 위해 칼을 든다. 그렇게 오랜 역사가 쌓여 마물과 인간이 가진 감정의 골은 한없이 깊어지기만 한다. 바로 지금처럼.
“피는 피를 부를 뿐이에요.”
단호한 태도로 지적하자 유피테르는 피식 웃었다.
- 아까부터 속 편한 소리만 하는구나.
이윽고 유피테르는 마치 교리를 설파하듯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 균형이니 공존이니 하는 건 전부 허울 좋은 궤설이다. 인간에게 반기를 드는 마물은 도태되고, 오직 인간의 지배를 받는 마물만이 우리와 함께할 것이다. 그리하여 세계는 진정한 평화를 찾게 된다.
지금 궤설을 늘어놓는 쪽이 누구인지 정녕 모르는 건가. 더는 들어줄 수 없었다.
“정말 당신이 인간을 위한다고 생각해요?”
- 그들은 신에게 기도했고, 짐은 그 기도를 들어줬을 뿐이다.
“아뇨. 어느 순간부터 기도는 들은 채도 안 했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세계를 바라는지 모르죠.”
내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마물과 인간이 공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누르는 자신의 일가족을 말살하는데 일조한 아이리스를 용서하며 기꺼이 동족의 마안을 내어주었다. 히페리온은 제 몸체에 지워지지 않을 흉터를 남긴 인간을 미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닉스에게 도움을 받은 캄페 산의 소녀는 끝내 어린 마물을 구해 줬다.
“결국 이 계획은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짓이에요.”
나는 보았다. 마물과 인간이 공존하는 세상을. 서로가 서로를 도우며 사는 세계를.
- 넌 인간의 본성을 몰라. 태오.
“영겁을 살아온 당신보단 당연히 모르겠죠. 그래도 이거 하난 잘 알아요.”
그러니 눈앞에 다가온 이상을 망가뜨리는 유피테르는 신세계로 이끌어 나갈 개척자가 아니다.
“당신은 전능한 신이 아니에요.”
유피테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신의 행세를 하는 기만자일뿐이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기의 흐름이 변했다. 싸늘하게 굳은 하늘색 눈동자에선 일말의 자비 따위 느껴지지 않았다. 죽일 기세로 나를 노려보던 유피테르는 이내 족쇄에 묶인 팔을 비틀며 말했다.
- 내 너를 너무 오랫동안 풀어 줬구나.
쾅! 유피테르가 몸을 움직이자 사슬이 크게 일렁거렸다. 그러자 족쇄와 연결된 고리에 미세한 금이 갔다. 아스레인은 곧바로 새로운 사슬을 끄집어 내어 유피테르의 다리를 얽매었다.
“허튼 저항하지 마라.”
- 당신이야말로 멍청한 짓 하지 말지.
다리에 묶인 사슬을 손쉽게 끊어 낸 유피테르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 원한다면 영원토록 싸울 수도 있어. 하지만 그 사이에 당신이 아껴 마지않는 세상이 어찌 변할까, 궁금하지 않나?
“혀가 쓸데없이 길군.”
아스레인은 옅게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아직까진 우리가 우위에 있다. 하지만 언제 갑자기 뒤집힐지 모른다. 이곳은 엘렉트의 신전. 아무리 신의 불을 차지했다지만 유피테르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장소였다. 심지어 유피테르가 족쇄를 풀어 내기 위해 신력을 폭발시킬 때마다 예배당이 크게 흔들렸다. 기둥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만큼 쪼개져 있었다. 신전이 무너질지도 모르는데, 유피테르는 멈추지 않았다.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한 사슬을 잠자코 지켜보던 아스레인이 나지막이 불렀다.
“태오.”
곧바로 고개를 돌리자 아스레인이 내 머리 위에 부드럽게 손을 얹으며 속삭였다.
“뒤를 부탁하겠네.”
“…아스레인.”
“코카서스 산에서 기다리마.”
마지막으로 본 그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윽고 바닥에서 터져 나온 빛에 눈을 질끈 감고 두 팔로 머리를 감쌌다. 한참 후에 눈을 뜨자 예배당은 텅 비어 있었다. 유피테르와 아스레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나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금방 갈게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금빛 귀걸이를 조심스럽게 그러쥐었다. 아스레인의 마력이 깃든 마석이 마치 대답하듯 따스한 빛을 발했다. 그 덕분에 마음을 어지럽히던 두려움을 억누르고 신전 밖으로 나섰다.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곧바로 코카서스 산을 올려다보았다. 저 멀리 보이는 산꼭대기엔 두터운 먹구름이 자욱하게 껴 있었다. 그 사이로 번쩍거리는 빛이 꼭 번개가 치는 듯했다. 마력을 느끼지 못하는 자라도 알 것이다. 저곳에서 범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이제부터 나 혼자만의 싸움이다. 궁극적인 목표는 유피테르의 이름을 찾는 것. 데우스는 오직 나만이 이름이 숨어 있는 단서를 찾을 수 있으리라 확언했다. 내게 유피테르를 제거할 수 있는 신의의 검을 쥐여 준 그가 거짓말을 했으리라곤 생각지 않는다.
여전히 내 심장에 가장 가까운 자리에 놓인 정화석에 대고 말했다.
“…대의를 위하여.”
그렇게 걸음을 돌린 순간, 다급한 음성이 내 발목을 붙잡았다.
[태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나뭇잎 나비가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얼마나 급하게 왔는지, 날개 끝이 살짝 찢겨져 있었다.
[하아, 여기 있었구나.]
“무슨 일이야?”
[도와줘.]
나비의 목소리가 답지 않게 떨리고 있어 불안이 엄습했다. 늘 그렇듯 예상은 어긋나지 않았다.
[쿠네 숲이 위험해.]
그 말을 듣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쿠네 숲으로 달려갔다. 턱까지 숨이 차올라도 멈추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심장을 입 밖으로 토해 낼 수 있을 즈음, 나뭇잎 나비가 언성을 높였다.
[저기야!]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자 숲 입구에 포진해 있는 병사들을 발견했다. 무장한 병사가 무려 열댓 명이나 있었다. 가장 앞에 있는 사람이 묘하게 익숙하다했더니, 마차를 타고 쿠네 숲에 왔을 때 처음 마주친 병사였다.
주춤거리는 사이, 감독관은 병사들에게 숲으로 들어가라 명령했다. 방법을 생각할 틈도 없이 다급히 그 앞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잠시만요!”
갑자기 튀어 나오자 병사 하나가 칼자루에 손을 대며 경계했다.
“네 놈은 뭐냐.”
“싸우려는 게 아니에요. 잠깐 저랑 대화 좀 하시죠.”
무기가 없다는 뜻으로 두 손을 들어보였는데도 긴장감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그나마 나를 기억하고 있을 감독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나를 바라보던 감독관이 눈을 살짝 키우며 탄성을 내뱉었다.
“그쪽은 아스레인 백작님과 함께 계시던 분 아닙니까?”
“맞아요. 태오라고 해요.”
냉큼 이름을 밝히자 감독관이 손을 들며 말했다.
“경계를 해제해라. 손님이시다.”
감독관이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어 천만다행이었다. 안심하기도 잠시, 감독관은 웃음기 하나 없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백작님은 어디로 가시고 혼자 돌아다니시는 겁니까? 이곳은 위험합니다.”
“위험하다뇨?”
그의 예리한 시선이 쿠네 숲을 향했다.
“쿠네 숲에서 나온 마물이 마을을 습격했습니다.”
“네?”
“목격자가 한둘이 아닙니다.”
쿠네 숲에 사는 마물이 마을을 습격했다고? 그럴 리가. 히페리온이 인간에게 우호적인 이상, 그의 신념을 거스르고 인간을 공격할 마물은 없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말에 인상을 찌푸리자 감독관은 설명을 덧붙였다.
“백작님과 태오 님께서 마물을 아끼는 마음은 잘 알지만, 인간을 공격한 이상 어쩔 수 없습니다. 마물을 토벌하는 한이 있더라도 마을을 지키라는 황명입니다.”
감독관의 진지한 눈빛은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대체 뭐지? 혼자 고민하고 있으니 내 어깨에 붙어있던 나뭇잎 나비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거짓말이야! 숲의 주민들은 어르신이 만드신 벽 안에서 꼼짝도 안 했어.]
나뭇잎 나비는 곧 히페리온의 눈과 귀다. 벽을 빠져나가는 마물은 없었다는 증언엔 틀림없었다. 그런데 마물이 마을을 습격했다는 감독관의 말도 거짓은 아니다. 그럼 설마… 헤카테인가?
마을을 습격한 마물에 대해 물으려던 찰나, 감독관은 차분한 어조로 경고했다.
“이제 그만 비켜 주십시오. 이대로 막고 계신다면 황명을 거스르겠단 의미로 간주하겠습니다.”
직접 보여 주기 전까진 쉬이 믿지 않을 것이다. 마물이 마을을 습격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으니 감독관과 병사의 입장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무력을 써서라도 막아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숲 속에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렸다.
“으아아악!”
인간이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전부 숲을 향해 뛰어갔다. 수풀을 헤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현장에 도착했다.
“저, 저리 가!”
잔뜩 겁에 질린 채로 나뭇가지에 매달려있는 사내가 소리쳤다. 버둥거리는 발아래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짐승이 날카로운 엄니를 빛내며 기회를 탐하고 있었다.
한 눈에 봐도 마물이었으나, 내게는 그의 심장에 박힌 신력이 느껴졌다.
“나으리! 제발 살려주십쇼!”
우리를 발견한 사내가 울먹이며 소리쳤다. 뒤늦게 인기척을 느낀 헤카테가 곧바로 사내를 포기하고 쏜살같이 도망쳤다. 병사들은 굳이 대적하지 않아도 돼서 안도하며 사내를 구조했다. 하지만 내겐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과 같았다.
“아그누스. 죽이지 말고 가져와.”
나직이 명령하자 발끝으로 이어진 그림자가 크게 일렁거렸다. 그 사이 무사히 바닥에 내려온 사내가 벌벌 떨며 말했다.
“구,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을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죄송합니다. 하지만 약초를 캐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하기가 힘듭니다….”
“목숨부터 부지해야 하지 않겠나.”
감독관의 말에 사내는 할 말을 잃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 후 사내는 병사의 호위를 받으며 숲을 빠져나갔다. 한 차례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서 감독관은 피곤한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보셨습니까? 마물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 말에 대답은 않고 헤카테가 도망친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침 아그누스의 뾰족한 귀가 수풀 위로 올라왔다. 이쪽으로 다가오라 손짓하자 검은 늑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두 개의 머리를 가진 헤카테보다 커다란 마물이 나타나자 병사들은 일제히 무기를 쥐었다.
“다들 경계 태세로…!”
숨길 수 없는 공포가 그들의 얼굴에 서렸다. 괜히 아그누스에게 칼을 휘두르기 전에 감독관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안심하세요. 제가 데려오라고 한 거니까.”
“…예?”
순간 멍해진 감독관을 뒤로하고, 아그누스에게 다시금 손짓했다. 그러자 아그누스는 헤카테의 목덜미를 물고 질질 끌고 왔다. 한쪽 머리는 뜯겨 나가고 없었지만, 다행히 숨은 붙어 있었다. 아그누스는 도망치려 몸부림치는 헤카테를 내 앞에 내려놓고 커다란 앞발로 제압했다. 날카로운 엄니가 허공을 가를 때마다 병사들은 주춤거리며 무기에 손을 올렸다.
그들의 시선이 헤카테에게 팔린 사이, 목걸이에서 신의의 검을 꺼내며 말했다.
“두 눈 똑바로 뜨고 보세요. 이게 정녕 마물인지.”
하늘 높이 올린 신의의 검을 단숨에 헤카테에 박아 넣었다. 끼에엑! 괴상한 울음소리가 쿠네 숲 전체에 울렸다. 정확히 코어를 관통당한 헤카테는 금세 돌덩이가 되어 바닥에 축 늘어졌다.
“돌이… 됐잖아…?”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잔뜩 경계하던 병사들이 하나씩 무기를 내려놓고 헤카테를 둘러쌌다. 당황한 기색이 얼굴을 반쯤 가린 투구를 뚫고 느껴지는 듯했다. 아직 상황 파악이 덜된 그들에게 헤카테란 존재를 강하게 인식시키려 칼끝으로 돌무더기를 헤집으며 말했다.
“이건 마물이 아닙니다. ‘헤카테’라고 불리는 인공체죠.”
“말도 안 돼.”
“분명 살아있었는데…?”
낯선 광경에 놀란 감독관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그런 이름은 처음 들어 봅니다.”
“처음 봤을 테니까요. 하마터면 애먼 마물만 억울하게 될 뻔했네요.”
조용히 옆을 돌아보자 감독관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를 탓하려는 건 아니지만, 내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어떤 참사가 일어날지 불 보듯 뻔했기에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아직 머릿속이 복잡할 감독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속삭였다.
“황명이 절대적이라는 거 알아요. 지금껏 헤카테를 마주칠 기회가 없어 몰랐다는 점도요. 그래서 이렇게 보여 드리는 거예요. 여러분의 의무는 이 나라의 안녕을 지키는 것이지, 무차별적인 토벌이 아니니까.”
다독이는 손길에 어느 정도 진정됐는지, 감독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옳은 말씀입니다.”
“게다가 저 인공체에게 마물들도 공격받고 있어요.”
“대체 저런 걸 누가 만든 겁니까?”
마침내 기다렸던 질문이 나왔다. 돌 더미 사이에 묻혀 있는 판도라를 꺼내어 손바닥에 올렸다. 무참히 반으로 쪼개졌지만, 아직 신력은 그 안에 깃들어 있었다. 그들의 앞에 수정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판도라를 내밀며 물었다.
“이런 광휘를 본 적이 있나요?”
뚫어져라 판도라를 관찰하던 이들 중 어린 병사가 가장 먼저 반응을 보였다.
“설마….”
뒷말을 얼버무리자 감독관이 날이 선 목소리로 물었다.
“뭔데 그러나.”
“시, 신력입니다.”
더듬거리는 말에 일대는 혼돈에 빠졌다.
“신력이라니….”
“거짓말이지?”
병사들은 하나같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몇몇은 내가 느닷없이 자작극을 벌인다고 의심하는 눈치였다.
끝내 여론은 반반으로 나뉘었다. 나를 믿고 물러서자는 쪽과 혹시 모르니 일단 숲을 헤집어야겠다는 쪽. 아직 감독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여기서 물러서면 안 된다. 성큼성큼 앞서 걸어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이래도 여전히 쿠네 숲에 들어가겠다면, 죄송하지만 못 보내 드리겠네요.”
바닥에 신의의 검을 꽂고 칼자루에 손을 올리자 아그누스가 내 옆을 늠름한 자태로 지켰다. 퍽 위협적으로 느껴졌는지, 병사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누구 하나 나서지 못했다. 너무 협박하는 것처럼 보이려나. 다시금 회유하듯 나긋한 말투로 말했다.
“참고로 마물이 다칠까 봐서가 아니라, 여러분이 저 안에 있는 마물의 손에 죽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요.”
그리 반가운 내용은 아니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