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
반나절 만에 모든 준비가 끝났다. 엘렉트 신전의 지하 밑바닥에 검은 연기로 만들어진 마법진이 완성되었고, 코카서스 산에서도 계획대로 작업이 끝났다는 전령이 왔다. 제 할 일을 마치고 불꽃이 되어 사라지는 붉은 새를 바라보니 문득 복잡 미묘한 감정이 느껴졌다. 이제 정말 실행만 남았구나.
아스레인은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고 닉스에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마법진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게.”
[아, 지금 설마 내가 실수할까 봐 그래?]
“신중한 거라고 해 두지.”
[하! 쓸데없는 걱정은 사양이야. 영감이나 잘하라고.]
자신감으로 가득 찬 닉스의 태도가 오늘따라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다. 걱정은 이만 넣어 두라며 장난스럽게 내젓는 손짓에 아주 잠깐이나마 긴장이 풀렸다. 이내 아스레인은 계획대로 흩어지게 될 그들을 한 명씩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모두 무사히 다시 만나도록 하지.”
그 말을 끝으로 저마다 제 위치를 찾아갔다. 간밤에 반가운 얼굴들로 시끌벅적했던 쿠네 숲은 다시 적막으로 휩싸였다. 마지막으로 누르와 인사하고 나니 어느덧 지평선 너머로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어슴푸레하게 밝아지는 새벽하늘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슬슬 약속된 시간이다. 엘렉트 신전으로 출발하기 전, 데우스는 거듭 당부했다.
“웬만해서 유피테르가 나타나기 전까지의 미래는 크게 바꾸지 않는 게 좋아요.”
“그럼 일단 꿈에서 본 대로 할게요.”
“네. 무슨 일이 있거든, 그 목걸이에서 나와서 지켜 줄게요.”
데우스는 내 긴장을 풀어 주려는 듯 장난스럽게 윙크했다. 그 덕분에 피식 웃을 수 있었지만, 표정은 금방 다시 굳어 버렸다. 몇 시간 후면 새하얀 감옥 속으로 돌아가게 될 데우스를 보고 마음 편히 웃을 리 만무했다.
이내 목걸이 안으로 들어가려던 데우스가 갑자기 멈춰 섰다. 무언가를 고민하는지, 입술을 움찔거리더니 뒤돌아 아스레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시선을 느낀 아스레인이 퍽 차가운 투로 용건을 물었다.
“뭐지?”
“그게….”
“계획을 바꾸고 싶으면 지금 말하게.”
“하하, 그런 건 아니에요.”
데우스는 싱그레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간 고마웠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내게?”
“네. 아스레인에게요.”
“딱히 뭔갈 해 준 기억은 없다만.”
“원래 호의를 베푼 사람은 기억을 잘 못하죠.”
아스레인은 의아한 눈초리로 데우스를 내려다보았다. 이별 직전에 갑자기 감사 인사를 받은 걸 이해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대강 데우스의 속내를 알 것도 같았다. 어제 아스레인에게 있는 그대로의 생각을 전하라고 한 조언 때문이겠지.
속마음을 털어놓아 한결 후련해졌는지, 데우스는 가벼운 걸음걸이로 내게 다가왔다.
“마지막까지 잘 부탁해요.”
나지막이 속삭이는 인사엔 일말의 미련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게 데우스는 우리 곁을 떠나 목걸이 안으로 돌아갔다. 어쩌면 우리가 평범하게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은, 방금이 마지막이었을지도 모른다.
은은하게 빛나는 목걸이를 그러쥐며 어딘가에서 모든 걸 지켜보고 있을 신에게 기도했다. 부디 모두의 노력이, 데우스의 희생이, 아스레인의 시간이 헛되지 않기를. 이윽고 눈을 뜨니 소환의 여파로 이파리만 남아 앙상해진 치자 꽃나무가 보였다.
“언젠가 다시 피겠죠?”
혼잣말하듯 묻자 아스레인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봄이 무사히 돌아온다면.”
활짝 피어날 치자 꽃을 다시 볼 수 있기를 기리며 발길을 돌렸다. 한참을 걸어 쿠네 숲을 빠져나오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마을을 발견했다. 다행히 헤카테로부터 습격당하진 않았는지, 마을은 그지없이 평화로웠다.
그 후로도 마을 하나를 더 지나 마침내 엘렉트 신전에 도착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신전 주변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노크하기 전 숨죽이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처음 오는 곳인데도 왠지 모르게 익숙해서 이상하다 했더니, 꿈에서 본 광경과 먼지 한 톨 다르지 않았다. 기둥 옆에 있는 사슴의 석상까지 전부 똑같았다.
“아무도 없나 봐요.”
검은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문 중앙에 달린 고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꿈이 곧 미래가 된다면, 붉은 곱슬머리를 가진 젊은 사제가 나올 것이다. 똑똑. 노크를 하자 힘찬 목소리가 신전 안에서 들려왔다.
“잠시만요!”
이윽고 사제가 문을 열고 나왔다.
“무슨 일로 오셨죠?”
흰 옷자락을 펄럭이며 등장한 그는 놀라울 정도로 꿈에서 본 모습 그대로였다. 굴곡진 머리카락에 짙은 눈썹,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서글서글하게 웃는 눈매. 너무도 익숙해 마치 원래 알고 지낸 사람을 마주친 듯했다.
“숲을 지나가는 길이었는데, 마침 신전이 보여서요.”
“아, 기도하러 오신 모험가분들이군요. 어서 들어오세요.”
사제는 우리가 들어가기 편하도록 안에서 문을 잡아 주며 한 발 물러섰다. 무사히 신전 안으로 들어와선 내부를 쓱 둘러보았다. 꿈에서와 같이 다른 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기도실로 안내하는 사제를 따라가며 아스레인에게 은밀히 속삭였다.
“이 사람뿐인 것 같아요.”
살짝 뒤를 돌아보니 기둥 사이로 예배당이 얼핏 보였다. 저 의자 옆으로 드리운 그림자에 내가 숨어 있었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금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아스레인의 옆으로 가서 사제가 듣지 못하도록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뭔가 느껴지나요? 아스레인.”
아스레인은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유피테르의 기척을 느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이곳은 신전 안이다. 마물로 치면 그들의 체취가 가득 묻은 소굴인 셈이다. 그 안에서 매복해 있는 마물을 쉽게 찾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이쪽입니다.”
사제가 기도실을 정중히 가리키며 말했다.
“기도가 끝나면 복도 끝 방으로 와 주세요. 차를 내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사제를 유심히 관찰했다. 하지만 그는 수상한 기색 없이 곧장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멀어진 후에야 기도실 문고리를 잡았다.
이 너머에 노인이 쓰러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 유피테르가 깃들어 있다. 조용히 아스레인과 눈빛을 주고받곤 문고리를 돌렸다. 달칵, 끼이익. 문이 열리자마자 당연하게도 시선은 바닥을 향했다. 그러나 기도실은 텅 비어 있었다.
“왜….”
아무도 없지? 이상하다. 지금까지는 꿈과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붉은 머리의 사제가 나와서 반겨 주었고 기도실까지 안내받았다. 심지어 내가 하는 말과 행동 그 어느 것 하나 꿈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미래가 달라졌다.
심상찮은 낌새를 느낀 아스레인이 기도실을 찬찬히 살펴보며 말했다.
“태오. 여기가 맞나?”
“네. 제 꿈에선 여기 그가 누워 있었어요.”
설마 우리의 계획을 알아챈 건가? 유피테르의 혜안은 내게 통하지 않을 텐데. 그럼 혜안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미래가 바뀌었음을 알아챘단 소리다. …망할. 빠득 이를 갈며 고개를 들자 제단 위에서 활활 타오르는 신의 불과 마주쳤다. 날렵한 기세로 일렁이는 불꽃이 마치 우리를 조롱하는 듯했다. 얼마 못 가서 포기하게 될 거라고.
“아스레인. 신력을 억눌러 줄래요?”
“…흡수하려는 건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데우스는 최대한 미래를 바꾸지 말라고 했지만, 이미 미래는 틀어지기 시작했다. 계획을 무사히 성공시키기 위해선 유피테르의 힘을 조금이라도 빼야만 했다. 제단으로 성큼성큼 다가가자 아스레인이 내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함정일지도 모르네.”
“그래도….”
미래를 바꾸는 건, 단 한 가지의 수.
“끝까지 하나라도 더 빼앗고 말겠어요.”
결국 아스레인은 내 부탁대로 마력을 펼쳐 신의 불을 억눌렀다. 견고한 마력 속에서 몸부림치는 불을 붙잡아 망설임 없이 가슴에 밀어 넣었다. 마침내 신력이 코어에 닿는 순간 심장이 삐거덕대는 듯했다. 여태 무수한 신력을 흡수하며 무리했던 코어가 끝내 한계에 달한 것이다.
“태오!”
일순 정신이 아득해져 제자리에서 비틀거렸다. 재빨리 제단을 붙잡으며 중심을 잡자 식은땀이 후드득 떨어졌다. 쿵, 쿵. 귓등까지 울려 대는 심장소리에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 이상은 무리라는 걸. 하지만 내색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괜찮아요. …원래 늘 이랬잖아요.”
모두가 제 소중한 것을 내걸고 싸우고 있으니, 나라고 약한 소리할 수는 없었다. 조금 지나니 다행히 가슴의 박동이 평소대로 돌아왔다. 후회하는 빛이 어린 금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연신 괜찮다고 말하던 그때였다.
“으아아아악!!”
처참하게 일그러진 비명 소리가 귓속을 뚫고 들어왔다. 젊은 사제의 목소리다. 아스레인과 나는 곧바로 신전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자 문 너머로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헤카테…!”
엄청난 수의 헤카테 무리가 신전을 둘러싸고 있었다. 대충 눈대중으로 새도 머릿수가 스물은 넘어보였다. 온몸이 돌로 이루어진 괴생명체와 마주친 사제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신의 이름을 외치며 살려 달라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벌벌 떨리고 있었다.
“에, 엘렉트 신이시여…. 저를 가호하시고, 이 땅을 보호하시어….”
헤카테를 만든 창조주가 바로 신인데, 지금 기도가 통할 리 없었다. 그 사이 헤카테는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그르릉 낮게 울기 시작했다. 먹잇감이 되는 건 한 순간이다. 멍하니 기도만 중얼거리는 사제를 언성 높여 불렀다.
“사제님. 이쪽으로 오세요!”
“모험가님….”
“어서요!”
그 말에 사제는 엉금엉금 기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무사히 신전 안으로 대피시킨 후, 아스레인이 그 앞을 가로막고 섰다. 번쩍이는 금빛 마력에 헤카테는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가 헤카테를 상대하는 사이, 패닉 상태에 빠진 사제에게 신신당부했다.
“여기 가만히 계세요.”
“저게 대체 뭡니까. 모험가님.”
“저도 잘….”
“애초에 저런 금수가 왜 여기 있는 겁니까!”
대답할 수 없었다. 그야 나도 모르겠으니까. 어째서 신의 불을 차지했는데도 헤카테가 버젓이 살아 있는 걸까. 신의 불은 헤카테에게 신력을 조달하는 원천이자 유피테르를 대신해 명령을 내리는 중심축이다. 따라서 불에 깃든 신력을 흡수하는 순간 헤카테는 사라지거나 나를 따르게 된다.
하지만 이번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달랐다.
“이곳은 성스러운 엘렉트 님의 성전인데, 어찌….”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당황하기도 잠시, 한 가지 생각이 뇌리에 꽂혔다. 간단하면서도 당연한 사실이었다.
헤카테를 유지시키는 코어가 이 근처에 있다.
그 점을 깨닫자마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신력의 흐름을 느꼈다. 저 수많은 헤카테를 움직일 만한 신력이라면, 반드시 느낄 수 있을 터. 집중해야 한다. 헤카테끼리 얽히고설킨 실타래는 한곳으로 이어져 있을 것이다.
“괜찮은 건가요?”
“…….”
“모험가님.”
재촉하는 목소리에 자꾸만 집중이 흐트러졌다. 어쩔 수 없이 사제를 안심시켜 주려 그 옆에 앉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금방 끝날 거예요.”
이윽고 어깨에 손을 올리는 순간 그대로 뻣뻣하게 굳고 말았다.
“다행이네요. 모험가님이 계셔서.”
봐선 안 될 것을 봐 버렸다.
“…그럼요.”
사제에게서 무수한 실들이 이어져 있었다. 흰 옷자락에서부터 뻗어 나간 실이 저 바깥의 헤카테에게 촘촘히 연결되어 있었다. 이자다. 이 젊은 사제가 신의 불을 대신할 코어다. 그걸 눈치채자마자 온몸에 한기가 돌았다.
유피테르인가? 아니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중심축이 되어 버린 것인가. 짧은 찰나에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만약 유피테르라면 아직도 나를 속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마치 꿈에서 본 노인처럼.
“모험가님.”
“네, 네?”
“괜찮으세요? 안색이….”
사제가 걱정스러운 빛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일단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괜찮아요.”
대답하는 입술이 부디 새파랗게 질리질 않았길 빌었다. 이대로 계속 모르는 척 해서 예배당까지 끌어들여야 한다. 마법진의 중심은 그곳에 있으니까.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숨기려 일부러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내 자연스럽게 예배당을 가리키자 사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그가 일어나기만을 기다리는데, 갑자기 내게 손을 뻗는 것 아닌가.
“미안해요. 다리에 힘이 풀려서…. 도와줄래요?”
곤란한 듯 찌푸린 얼굴을 보니 마음이 흔들렸다. 만약 유피테르가 아니라면 어쩌지? 휘브리스처럼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연결되어 있었던 거라면, 그 또한 피해자가 아닌가. 무엇보다 그를 예배당 중간까지 데리고 가야했다. 설령 속는 한이 있더라도.
“여기요.”
스스로 일어나려 휘청거리는 사제를 보다 못해 손을 뻗었다. 부축을 받고 일어난 사제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고마워요.”라고 말했다. 그에 별거 아니라며 손을 빼려는 순간, 사제가 다른 쪽 손으로 내 팔을 덥석 붙잡았다.
“손이 너무 차네요.”
“…그건….”
“많이 놀라셨나 봐요. 안색까지 하얗게 질리고.”
내 손을 살살 쓰다듬는 손길에 오싹 소름이 끼쳤다. 그리 세게 붙잡고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윽고 사제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스치는 시선이 꼭 온몸을 집요하게 핥는 것만 같았다.
“걱정하지 말라면서요.”
사제가 내게 한 걸음 다가오며 말했다. 그에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벽에 맞닿고 말았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내 얼굴은 형용할 수 없는 긴장감으로 잔뜩 일그러진 채였다.
“금방 끝날 거라면서.”
어느새 숨결이 닿을 거리까지 다가온 사제는 내 눈을 빤히 바라보며 속삭였다.
“노인이 아니라서 놀랐나?”
“……!!”
“그러게 감히 미래를 바꾸려고 들면 못 쓰지.”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동자는 어느새 하늘색으로 변해 있었다.
“또 만나는구나. 헤메라.”
그것은 만물을 꿰뚫어보는 혜안의 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