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2 (252/305)

#252

참담한 운명을 피하기 위한 항해가 시작되었다. 나침반도, 지도도 없었다. 그저 제거해야 할 적만 존재할 뿐. 늘 추종자의 뒤에 숨어 있는 유피테르를 이번엔 직접 끌어내야만 했다. 그래서 미끼를 준비했다. 함정임을 알면서도 물지 않을 수 없는 최상의 미끼를.

목표가 결정되자마자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다만, 엘렉트 신전에서 유피테르와 부딪칠 경우 쿠네 숲과 인근 마을까지 피해가 간다는 의견에 계획을 조금 틀기로 했다. 결전의 장소를 바꾸는 것이다.

“내가 유피테르를 데리고 코카서스 산으로 가겠네.”

“그게 가능한가요?”

“산 정상과 엘렉트 신전을 마법진으로 연결해 두면 되네.”

말은 쉬워도 전혀 간단하지 않은 방법이었다. 아스레인의 마법 실력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상대가 유피테르여서 문제였다. 무슨 수로 신전에 깔린 마법진 안으로 들어오도록 유인한단 말인가. 걱정이 앞서는 나와 달리 아스레인은 이미 고안해 둔 방법이 있는 눈치였다.

“제가 도와 드릴 게 있을까요?”

“자네는 이름을 찾아야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네.”

“그래도 혼자서 준비하긴 힘들 텐데….”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마법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괜히 나섰다가 방해만 될 게 뻔했다. 그때 잠자코 계획을 듣고 있던 히페리온이 다가와 말했다.

[그럼 이카로스와 닉스를 부르심이 어떠십니까. 분명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흠. 이카로스라면 몰라도 닉스는 꽤나 번거로워할 것 같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내심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히페리온의 말에 아스레인은 고민에 빠졌다. 이 와중에도 언급되지 않는 이름이 있었으니, 그건 오케아노스였다. 마물 중에서도 유독 세력이 강한 오케아노스가 아군이 되어 준다면 든든하겠지만… 아무래도 평화를 위한 싸움 따위에 그가 함께할 리 만무했다. 그래도 다른 마물이 도와준다면 한결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아직 결단을 내리지 못한 아스레인을 보곤 선뜻 소매를 걷고 나섰다.

“제가 그들을 부를게요!”

“자네가…?”

“여기라면 충분해요.”

전설의 마물을 둘씩이나 불러내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곳이 생기 넘치는 쿠네 숲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을 소환하기 위한 생명력을 충당할 원천이 넘쳐흘렀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활짝 핀 치자 꽃이었다. 여러 풀과 나무를 시들게 하는 것보다 생명력이 높은 꽃을 희생시키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조용히 치자 꽃 앞에 무릎을 꿇고 앉자 히페리온이 곁으로 다가왔다.

“이 꽃을… 받아 가도 될까요?”

[물론이네.]

조심스럽게 새하얀 꽃잎을 쓸자 향기로운 냄새가 물씬 올라왔다. 냄새로 인한 기억은 쉬이 희석되지 않는다던가. 한 떨기의 꽃에 얽힌 추억이 머릿속에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결국 마음이 약해져 치자 꽃에서 손을 거두었다.

“역시 다른 방법을 쓰는 게 좋겠어요.”

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히페리온이 내 옆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았다. 나뭇결이 선명하게 드러난 손으로 꽃잎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던 그가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구나.]

“네…?”

[꽃은 언젠가 시들지만, 이 꽃에 맺힌 그대와 나의 인연은 영원하다는 것을.]

따스한 빛을 내는 연녹색 눈동자를 보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래. 꽃은 언젠가 사라지지만, 약속은 내가 눈을 감는 순간까지 유구하게 이어지겠지. 히페리온의 말에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꽃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바람이 잦아든 순간, 머릿속으로 하늘과 지하를 지배하는 두 마물의 형상을 그렸다. 이윽고 재물로 쓰인 꽃이 단숨에 시들고 몸을 지탱해 주던 마력까지 말끔하게 빠져나갔다. 기력이 죄다 빨려나가는 느낌에 아득해져 가는 정신을 겨우 붙잡았다.

“…된 건가…?”

혼잣말에 대답하듯 바스락, 수풀을 밟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이야~ 또 가족 모임이네?]

나른한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자 왼손을 허리에 올린 채 삐딱하게 서 있는 닉스와 눈이 마주쳤다. 안녕. 입 모양으로 인사한 닉스는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짓궂게 웃었다. 뒤늦게 그 옆으로 또 다른 인물이 나타났다.

[어째서 이곳에 전부 계신 겁니까.]

이젠 인간의 모습이 더 익숙한 이카로스였다. 방금까지 일을 하다 왔는지, 살짝 걷어 올린 셔츠 소매에 흙이 묻어 있었다. 히페리온과 아스레인을 번갈아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에 그답지 않은 당혹이 서려있었다.

왠지 모르게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히페리온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구나. 닉스, 이카로스.]

[요즘 들어 유독 자주 만나네요. 아저씨.]

[…여기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히페리온이 있어서 그런가. 닉스와 이카로스가 만나면 당장 서로를 물어뜯지 못해 으르렁댈 줄 알았건만, 분위기가 봄비 내린 땅처럼 말랑했다.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그때 닉스가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기분 좋은 미소를 흘렸다.

[우리를 이렇게 부르다니, 무슨 성대한 파티라도 하려는 거야~?]

“하하, 아뇨. 부탁할 일이 있어서요.”

[뭔데?]

닉스의 물음에 답하기도 전에 저쪽에서 깊은 탄식이 들려왔다. 누군가 싶어 보니 이카로스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닉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파티를 하겠습니까? 당신이란 마물의 생각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그럼 그냥 닥치고 있지 그래?]

역시 이럴 줄 알았다. 둘의 시선이 충돌하자마자 마력이 꼭 비 온 뒤 습기처럼 공기를 한가득 메웠다. 어느새 누르는 내 뒤에 숨어서 눈치만 보기 바빴다. 말려야 하나 생각이 드는데, 팽팽한 긴장감 사이로 너그러운 웃음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둘은 여전히 사이가 좋구나.]

흐뭇하게 그들을 바라보는 히페리온에 맥이 탁 풀려 버렸다. 아무래도 이카로스나 닉스도 히페리온 앞에서 다툼하는 게 무의미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 모습까지도 정말 오랜만에 만난 가족 같다고 말하면 닉스가 불같이 화를 내겠지. 조용히 말을 아끼고 있는데, 옆에서 가만히 구경하던 데우스가 자그맣게 웃음을 터뜨렸다. 안 그래도 이카로스 때문에 예민해져 있던 닉스가 날카로운 눈초리로 흘겨보았다.

[쟤는 뭐야?]

“아, 나는 신경 쓰지 말고 하던 얘기 계속 해요.”

데우스가 애써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도 닉스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간 괜히 데우스에게 불똥이 튈 게 뻔했다. 쓸데없이 힘 빼기 전에 자연스럽게 둘 사이로 끼어들어 말했다.

“데우스예요. 닉스라면 누군지 알 텐데요?”

[내가 어떻게 알….]

슬쩍 목에 걸린 정화석을 만지자 닉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맞아요.”

한창 닉스와 함께 오르커스 황야에 머물 적에는 데우스가 아직 목걸이 안에 있었지. 어찌 보면 드디어 생명의 은인을 만난 건데, 닉스의 반응은 영 탐탁지 않았다. 아무래도 데우스의 정체와 더불어 그 몸 안에 깃든 신력 때문인 듯했다. 더 안 좋은 인상을 심어 주기 전에 서둘러 소개를 마쳤다.

“아무튼 우리 곁에서 이번 계획을 도와줄 거예요.”

[그 계획이란 게 뭡니까?]

의아하게 눈살을 찌푸리는 이카로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지금 무슨 일을 하려는지. 그리고 어째서 그들을 이곳에 불렀는지까지도. 설명이 끝나자마자 이카로스는 도리어 눈을 총명하게 빛내며 아스레인을 바라보았다. 아스레인을 도울 수 있다는 임무에 기쁜 눈치였다. 게다가 닉스까지 흔쾌히 일을 받아들여 주었다.

[뭐, 좋아.]

“정말요?”

[응. 웬일로 영감이 우리가 필요하다고 불러 줬잖아?]

히페리온의 말이 맞았다. 닉스는 내심 아스레인이 자신을 불러 주길 기다린 것 같다. 이카로스야 말할 필요도 없고. 이윽고 닉스는 뭐든지 말해 보라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아스레인에게 말했다.

[하~ 어쩔 수 없네. 내가 도와줘야지.]

“어처구니가 없군….”

[하루이틀이야? 그래서 해야 할 일이 뭔데? 영감.]

그 뒤부터는 내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아스레인이 중심축이 되어 대규모 마법을 구상하고, 다른 마물들이 최종 목표까지 나아갈 수 있는 중간다리 역할이 되어 주었다.

먼저 닉스가 유피테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지하 깊숙한 곳에 마법진을 그리면, 이카로스가 코카서스 산에 똑같은 마법진을 그려 신전과 연결한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히페리온은 언제라도 신전 주변에 장벽을 칠 수 있도록 대기한다. 그야말로 범상치 않은 능력을 가진 그들이기에 가능한 계획이었다.

“이만하면 됐겠지.”

벌써 마법 구상을 끝낸 아스레인이 허공에 금빛으로 된 마법진을 띄웠다. 이중 삼중으로 겹쳐진 형태가 얼마나 복잡하던지, 마법에 대해 문외한인 내 눈에는 외계인의 도형으로만 보였다. 이내 아스레인은 이카로스에게 제 마법진을 보여 주며 물었다.

“기억할 수 있겠나?”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딱딱한 말투에서 완벽한 자신감이 드러났다. 저 복잡한 마법진을 한 눈에 외워서 똑같이 따라 그릴 수 있다는 말은 아무나 할 수 없었다. 오직 최고의 마법사 아래서 자라 온 천재이기에 확언할 수 있는 일이었다. 왠지 대단하게 느껴져 탄성을 흘리는데, 그 옆에서는 따분한 탄식이 튀어나왔다.

[어후, 재수 없어.]

속내라곤 숨길 줄 모르는 닉스다운 한마디였다. 이내 아스레인이 도자기를 빚듯 유려한 손길로 마법진을 보강해 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엔 수정할 부분 따위 없었는데, 완벽주의자의 눈에는 다른 모양이다. 그가 마법을 일으킬 때마다 일렁이는 금빛이 아름답다 못해 황홀할 지경이었다.

모두가 일대 장관을 넋 놓고 보는데, 한발 물러서있던 데우스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아름답지 않아요?”

설마 데우스가 솔직하게 칭찬을 할 줄은 몰랐다. 아스레인의 손짓을 따라 움직이는 눈빛은 총기로 말똥말똥했다. 꼭 아스레인을 교수로 처음 만났을 때의 나를 보는 듯했다. 평소의 비아냥대거나 장난치는 기색 따위 없이, 온전히 아스레인의 마법 실력을 경탄하고 있었다.

“아마 그가 온전한 상태였더라면, 유피테르를 쉽게 제압했을 거예요.”

온전한 상태라 함은 뿔을 말하는 거겠지. 그렇게나 대륙을 돌아다녔는데도 아무런 수확이 없어 아쉬울 따름이었다. 정말로 아스레인에게 뿔을 찾아줄 수 있긴 한 걸까. 어쩐지 가망이 없어 보여 착잡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뿔을 찾는다면 유피테르를 상대하기 수월해질까요?”

“그럼요.”

“하지만 대체 어디에 있는지….”

혼잣말을 웅얼거리며 데우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이미 내 말은 들리지 않는 듯 데우스는 아스레인만 쳐다보고 있었다. 허공을 떠다니는 금빛에 물든 하늘색 눈동자는 어느새 동경으로 가득 차있었다. 그간 데우스가 아스레인에게 관심이 많은 건 알았지만, 이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내 “대단해.” 하고 감탄하는 목소리를 듣고 나니 의아함을 참을 수 없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지 그랬어요?”

“응?”

“아스레인한테요. 솔직하게 대단하다고 말하는 쪽이 훨씬 좋았을 거예요.”

그랬다면 아스레인과의 첫 만남이 그렇게까지 최악이진 않았을 텐데. 아스레인은 겉으로 보기엔 무뚝뚝해도 제게 호의적인 사람을 무참히 쳐 낼 정도로 냉정하진 않다. 아마 첫 단추를 잘만 끼웠더라면 둘은 훨씬 친근한 사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 굳게 믿는 나와 달리 데우스는 잘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흐음, 글쎄요. 태오도 봤잖아요? 나를 싫어하는 거.”

“아뇨. 아스레인은 진짜 싫어하는 사람한텐 절대 곁을 내어 주지 않아요.”

“그건….”

“그는 당신을 믿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 계획에 동참한 거고요.”

바로 옆에서 아스레인을 지켜봐 온 나로서 이거 하나만큼은 확언할 수 있다. 데우스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관련 없다’라거나 ‘신경 안 쓴다’라고 대답하지만, 사실 아스레인은 은근히 그에게 마음을 쓰고 있다. 그 증거로 데우스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던 내게 그가 원하는 대로 해 달라고 조언까지 해 줬으니까.

확신에 찬 눈을 본 데우스는 이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내겐 그에게 가까이 다가갈 자격이 없어요.”

“네?”

“…이건 벌이니까.”

벌? 혹시 처음 만났을 때 실수한 걸 아직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건가. 저 두툼한 가면 속에 어떤 얼굴을 감추고 있는지 모르니 답답할 뿐이었다. 조용히 데우스를 바라보던 그때, 아스레인이 우리를 불렀다. 서둘러 가 보니 아까보다 훨씬 정교한 형태로 빛나는 마법진이 완성되어 있었다. 단기간에 거대한 이동 마법진을 만들다니, 역시 아스레인이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진짜 대단해요! 아스레인.”

“음. 이제 실행으로 옮기기만 하면 되네.”

그 말에 이카로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날개를 펼쳤다. 등 뒤로 돋아난 거대한 세 쌍의 날개는 꼭 종교화에 나오는 천사를 닮아 있었다. 비현실적인 자태에 놀라기도 잠시, 이카로스는 눈 깜짝할 사이에 돌풍을 일으키며 사라져 버렸다. 그 후로 닉스와 히페리온도 계획을 차질 없이 이행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기분이 이상했다. …정말로 하는구나. 마지막 항해를.

“태오.”

나를 부르는 낮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아스레인이 부드럽게 손을 잡아 왔다.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온전히 나만을 담은 눈동자엔 그의 깊은 심정이 묻어났다. 걱정과 애정, 그리고 그답지 않은 초조함까지- 신기할 정도로 나와 닮아 있었기에 얼마나 불안한지도 잘 안다.

“할 수 있어요.”

조금이나마 걱정을 덜어 주고 싶었다. 따스한 손을 맞잡으며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스레인이 유피테르를 상대하는 사이, 제가 반드시 이름을 찾아올게요.”

한동안 떨어져 있게 되겠지. 그 시간이 얼마나 될지는 모른다. 내가 이름을 빨리 찾을수록 아스레인에게 더 빨리 돌아올 수 있다. 그러니 어떤 수단을 써서든지 찾고 말 것이다. 이번 항해를 성공시킬 열쇠는 내게 달려 있다.

“우리 같이… 이 지겨운 굴레를 끊기로 해요.”

문득 그와 했던 약속이 떠올랐다. 이번이 마지막 ‘아스레인’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했었지. 이번 결전으로 유피테르가 사라지고 나면, 아스레인도 기나긴 희생에서 해방될 수 있다. 그러니 반드시. 이번엔 반드시 내가 그를 책임이란 족쇄로부터 구할 것이다.

“날 믿어요? 아스레인.”

“언제나.”

결의를 다지며 손을 꽉 쥐자 아스레인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내게 이마를 맞대었다. 물씬 풍겨 오는 창포 향기를 기억하려 눈을 감은 채 숨을 들이쉬었다. 한동안 말없이 온기를 나누던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술을 맞췄다. 이내 아스레인은 내 뺨을 그러쥐며 속삭였다.

“무사히 내게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게.”

“약속할게요. 그러니 아스레인도 무사해야 해요.”

“…널 향한 마음에 대고 맹세하마.”

그토록 달콤한 맹세는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닐까. 그리하여 지금, 아무도 예견하지 못한 미래를 발견하기 위해 최후의 닻을 올렸다. 과연 누구의 배가 새로운 시대에 닿을 것인가. 과연 누가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을 것인가. 그건 오로지 신만이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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