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
이름 모를 신전은 신도가 거의 없는 레톤이나 벤테온 신전에 비해 훨씬 깔끔했다. 벽에 균열이나 이끼가 없는 걸 보아하니 아직 사제가 관리하는 모양이다. 문제는 여기가 대체 어느 신전이냐는 건데….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다가 신전 옆에 있는 석상을 발견했다.
“사슴인가?”
마치 왕관을 쓴 듯 여러 갈래로 뻗은 뿔을 가진 사슴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껏 여러 신전을 거치며 다양한 상징을 봤지만, 사슴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석상의 동그란 눈망울부터 햇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는 신전 기둥까지 이상하게 현실감이 느껴졌다. 꼭 이 대륙 어딘가에 눈앞의 신전이 실재할 것만 같았다.
꿈과 현실 사이, 그 어딘가에 끼어있는 듯했다. 왠지 꺼림칙해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용기 내어 문 앞으로 걸어갔다. 신전 내부를 보면 이곳이 어딘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 확신하며 손을 뻗었건만, 문고리에 닿지도 못하고 손이 통과해 버렸다.
“어…?”
유령이 된다면 이런 느낌일까. 몇 번씩이나 문고리를 잡으려 했지만 계속 헛손질만 해 댔다. 생소한 경험에 당황하기도 잠시, 꿈이려니 생각하며 문을 열지도 않고 쑤욱 들어갔다. 투명한 몸으로 들어선 신전 내부는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여느 신전에나 있을 법한 예배당이 정면을 장식했고, 양 옆 복도로 접견실과 기도실로 가는 길이 나뉘었다. 내부를 보면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있으리란 확신이 무색하게 더 아리송해졌다. 혹시 예배당 안에 신을 상징하는 종교화가 있을까 걸음을 옮기는 순간이었다.
“무…없….”
문 밖에서 자그맣게 말소리가 들려왔다. 희미하긴 해도 여럿이 떠드는 건 확실했다. 손님인가? 아무리 꿈속이라지만 내가 보이면 안 될까 봐 서둘러 예배당으로 몸을 숨겼다. 이윽고 노크 소리가 울리자 복도 끝에 있던 문이 벌컥 열리고 청년이 나왔다. 발목까지 길게 내려오는 의복을 입은 걸로 보아 이곳의 사제임이 틀림없었다.
“잠시만요!”
힘차게 대답한 사제는 곱실거리는 벽돌색 머리만큼이나 쾌활해 보였다. 딱 봐도 서글서글한 눈매에 짙은 눈썹이 어딜 가나 호감을 살 인상이었다. 옷자락을 휘날리며 마중나간 사제는 문을 열자마자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죠?”
“숲을 지나가는 길이었는데, 마침 신전이 보여서요.”
“아, 기도하러 오신 모험가분들이군요.”
…뭐지? 신전에 찾아온 손님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익숙하다.
“어서 들어오세요.”
사제가 한 발 물러서자 두 손님이 나란히 들어왔다. 후드를 깊게 눌러쓴 탓에 육안으로 확인되는 거라곤 키와 체격뿐이었다. 제법 정체가 의심스러울 만도 한데, 사제는 망설임 없이 그들을 기도실로 안내했다. 몰래 그들의 뒤를 따라가다가 우연히 키가 작은 쪽이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이 사람뿐인 것 같아요.”
조용히 뒤를 돌아보는 모험가의 후드 자락이 살짝 팔락거렸다. 그 덕분에 그림자에 묻혀 있던 얼굴이 슬며시 드러났다. 스치듯 찰나에 지나가는 낯을 보곤 나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왠지 목소리가 익숙하다 했더니….
“뭔가 느껴지나요? 아스레인.”
그자는 바로 나였다. 뒤에 있는 사람이 아스레인이란 사실까지 확실해지니 당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꿈속에 다른 인물도 아닌 ‘내’가 둘일 수 있는 건가? 내가 버젓이 여기 존재하는데, 또 다른 내가 꿈에서 활개칠 수 있냔 말이다.
“이쪽입니다.”
코너를 돌아서 들리는 목소리에 일단 의구심은 뒤로하고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어느새 그들은 기도실 앞에 다다 라있었다. 사제는 안으로 들어가라는 듯 정중히 손짓하며 말했다.
“기도가 끝나면 복도 끝 방으로 와 주세요. 차를 내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후 사제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던 ‘나’는 조용히 아스레인을 돌아보았다. 주고받는 눈짓이 꽤나 은밀했다. 이윽고 ‘내’가 한 발 물러서니 아스레인이 기도실 문을 열었다. 당연히 비어 있으리라 생각했건만, 누군가 기도실 안에 있었다. 심지어 제단 앞에 의식을 잃은 채로 쓰러져 있었다.
“저기요…!”
곧바로 쓰러진 사람을 향해 다가가려 했으나, 아스레인이 ‘내’ 어깨를 붙잡으며 말렸다.
“뭔가 좀 이상하군.”
“네?”
의심으로 가득한 눈초리가 쓰러진 사람을 향했다. 그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의 창백한 얼굴이 보였다. 가만 두고 볼 수 없었던 ‘나’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노인의 어깨를 두드리며 의식을 확인했다.
“괜찮으세요?”
“으음….”
“할아버지. 제 목소리가 들려요?”
질문에 답하려는 듯 노인은 힘없이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가 너무도 작았던지라 ‘나’는 조심스럽게 노인의 뒷목 아래로 손을 넣어 상체를 일으켜 주었다. 거의 품에 안기다시피한 노인은 그제야 밭은기침을 하며 속삭였다.
“숨 쉬기가… 힘들어….”
쇳소리가 섞인 호흡은 금방이라도 넘어갈 것처럼 불안했다. 혼자 노인을 들려고 아등바등하자 잠자코 지켜보던 아스레인이 대신 부축하겠다며 나섰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의심을 할 수 없었다. 물론 노인에게서 신력이 느껴졌으나, 신도라면 그 정도 신앙심을 가진 게 당연하니까. 설마 그게 복병이 될 줄은 몰랐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사제님을 데리고 올게요.”
그리 말하며 문 쪽으로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푸욱- 날카로운 무언가가 옷을 찢고 깊숙이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본능적으로 소리가 나는 뒤쪽을 돌아보았다가 그만 마주치고 말았다.
“사랑은 판단을 무디게 만들지.”
아스레인의 가슴에 칼이 꿰뚫리는, 그 끔찍한 순간을.
“당신은 정말 달라진 게 없구나.”
눈 깜짝할 새였다. 노인이. 아니, 노인에게 깃든 유피테르가 아스레인을 찔렀다. 이윽고 심장에 꽂힌 칼을 빼내자 찬란한 금빛이 마치 피처럼 솟구쳤다. 아스레인이 곧바로 노인을 벽으로 밀쳐냈지만, 이미 너무 늦은 후였다. 신력에 관통당한 코어는 벌써 제 기능을 잃어 가고 있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나’는 아스레인에게 다가가 꿰뚫린 가슴에 손을 얹었다. 괜찮을 거라고. 내가 어떻게든 해 보겠다고 말하며 울먹이는 목소리가 참담하기 짝이 없었다. 그 와중에도 아스레인은 겁 많은 연인을 진정시키려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게 나를 더 힘들게 하는 줄도 모르고.
현실 같은 악몽을 지켜봐야만 하는 나로선 이곳이 곧 지옥이었다. 이제 그만 꿈에서 깨어나고 싶어 머리를 쥐어뜯는데,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연방 귀를 괴롭히는 소리가 마치 나를 비웃는 것만 같았다.
이게 내가 맞이하게 될 미래라고. 운명으로부터 발버둥친 대가라고.
“…그만해!!!”
고성을 지르며 퍼뜩 눈을 떴다. 그러자 티타임을 즐기며 웃고 있던 데우스와 눈이 마주쳤다. 자꾸만 꿈속으로 새어 들어오던 웃음소리는 다름 아닌 데우스의 것이었다. 전부 꿈인 걸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유피테르와 같은 얼굴을 가진 데우스를 증오하듯 노려보고 있었다. 가쁜 호흡을 몰아쉬자 곁에 있던 누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태오. 왜 그래?]
대답할 겨를 따위 없었다. 저 회색머리에 곱상한 얼굴만 봐도 호흡이 점차 가빠지는 듯했다. 방금 전, 태풍처럼 나를 치고 지나간 꿈의 후유증에서 쉬이 헤어 나오지 못했다. 금세 이상함을 느낀 데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꿈에서 뭔가 본 거죠?”
퍽 예리한 질문에 스스로 입을 떼는 데도 오래 걸렸다.
“꿈에서 어느 신전을… 거기에… 내가. 아니, 아스레인도 있었는데….”
“진정하고 말해요. 진정하고.”
불안감에 한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눈을 질끈 감자 새까만 시야로 꿈에서의 기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심장을 꿰뚫린 아스레인과 애써 현실을 부정하는 나. 그리고 우리를 비웃는 유피테르. 하하! 귀를 때리는 웃음소리가 심장 박동만큼이나 크게 온몸을 울렸다.
“아니야. 아니….”
귀를 틀어막는 순간 내 머리 위로 차분한 손길이 와 닿았다. 은은한 창포 향기에 익숙한 온기. 굳이 두 눈으로 확인할 필요도 없이 그에게 뛰어들 듯 안겼다. 아무 말 없이 너른 등에 팔을 두르고 가슴에 얼굴을 묻자 아스레인은 내 등허리를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우선 호흡부터 가다듬게나.”
“…아스레인.”
“그래. 난 여기 있네.”
아스레인은 나를 세뇌시키듯 계속해서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곁에 있다고. 혼자 두고 가지 않는다고. 그러자 불안에 경직되어 있던 몸의 긴장이 풀리면서 호흡이 차차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니 아스레인이 나지막이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주겠나.”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꿈에서 본 광경에 대해 설명했다. 처음엔 차분하던 목소리가 아스레인이 다치는 순간을 묘사할 때가 되니 또 다시 격양되어 있었다. 이윽고 꿈 이야기가 끝나자 쿠네 숲은 이로 말할 수 없는 정적에 휩싸였다. 그럴 만도 했다. 유피테르의 등장은 물론이고, 거기서 아스레인이 치명상을 입었으니까.
“그 신전에 대해 자세히 말해 봐요.”
어느새 바로 옆에 자리 잡은 데우스가 물었다. 내가 잠에서 깨자마자 불쾌하리만치 노려봤는데도 아무렇지 않은 눈치였다. 사과하는 대신 꿈에서 본 신전의 모습을 열심히 떠올렸다. 그래 봤자 평범한 신전에 지나지 않았다.
딱 하나, 정체를 특정할 수 있을 만한 석상을 제외하면.
“뿔 달린 사슴 석상이 있었어요.”
“사슴이 상징이라면, 엘렉트의 신전이네요.”
거기가 엘렉트의 신전이라고? 왜 하필…? 불길한 꿈을 꾼 마당에 엘렉트 신전에 갈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찝찝하지 않은가. 심지어 그 꿈을 꾸는 내내 느껴졌던 현실감을 무시하기 어려웠다. 그때 데우스는 안타까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태오. 내가 보기에 그건 예지몽이에요.”
“…네? 예지요?”
“정확히는 수많은 경우의 수 중에서 유피테르가 계획한 하나의 미래를 본 거지만.”
예지몽이라니, 말도 안 된다. 거짓말이라고 믿고 싶었으나 데우스의 표정은 전례 없이 진지했다. 결국 이대로 가면 내가 본 참담한 미래가 곧 현실이 되리란 소리였다. 돌처럼 굳어 버린 내 생각을 읽었는지, 데우스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말아요. 아직 일어난 일이 아니니까 바꿀 수 있는 기회는 충분해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당장 방법을 알려 달라고 하려다가 불현듯 예전에 데우스가 말해 준 설화가 떠올랐다. 고대 이아페는 혜안으로 내다 본 미래를 함부로 바꾸려다가 몰락해 버렸다고 했지. 비록 나는 혜안으로 본 건 아니지만, 미래를 바꾸면 엄청난 리스크가 돌아오리란 확신이 있었다.
“근데 미래를 마음대로 바꿔도 되는 건가요?”
“당연히 안 되죠. 하지만 손 놓고 있을 건 아니잖아요?”
“…네.”
반드시 바꿔야 한다. 무슨 이유로 예지몽을 꿨는지는 몰라도, 이건 신이 주신 기회다. 언제 겁에 질려 있었냐는 듯 단단한 결의로 눈을 빛내자 데우스는 선뜻 방법을 알려 주었다.
“가까운 미래를 바꾸긴 쉬워요.”
“어떻게요?”
“영원히 엘렉트 신전에 가지 않는 거죠.”
“아….”
“하지만 그런다고 운명은 달라지지 않아요. 질릴 만큼 달라붙어서 기회를 노리겠죠.”
그 말 그대로였다. 우리가 영원히 엘렉트 신전에 가지 않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유피테르가 건재한 이상, 다른 장소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어쩌면 아스레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다칠지도 모른다.
그러니 미래를 바꾸기로 마음먹은 이상, 하루빨리 원흉을 제거하는 수밖에 없다.
“지금 그가 어디 있는지 알아요?”
“그걸 알았더라면 진즉 말해 줬겠죠.”
“하아, …대체 어디 있는 건지.”
무사히 계획이 완성될 때까지 사람들의 뒤에 숨어 있을 작정인가. 끝까지 모든 것을 지켜보고 조종하는 신인 양 행동하는 유피테르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조용히 화를 삭이는데 데우스가 좋은 생각을 떠올린 듯 탄성을 흘렸다.
“우리가 찾을 필요 없이 제 발로 나오게 하는 건 어때요?”
“그게… 가능한가요?”
“그가 직접 나설 수밖에 없는 일을 만드는 거죠.”
직접 나설 수밖에 없는 일? 그 철두철미한 유피테르가 직접 개입하는 경우는 본 적 없다. 심지어 대사제일 때마저도 황제를 포함한 신도들을 수족처럼 부렸었지. 그런 유피테르를 우리 앞에 스스로 나타나게 하려면 웬만한 미끼로는 시도도 못할 것이다.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이자 데우스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그 앞에 모습을 드러낼게요.”
“…네?! 그럼 다시 결계 속으로 들어가게 될 거예요. 이번엔 나오지도 못할 거라고요.”
“그렇겠죠.”
데우스는 퍽 태연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소멸할 운명이에요. 그러니 미끼라도 해서 한 방 먹이는 게 재밌겠네요.”
“…데우스….”
“나중에 진짜 이름을 찾거든 불러 줘요. 그럼 아주 잠깐이나마 유피테르의 발을 묶을 수 있어요. 그땐 태오. …부탁했던 대로 해 주세요.”
부탁했던 대로. 그 말이 무거운 짐처럼 어깨를 짓눌러 왔다. 데우스는 처음 자신을 믿어 달라고 했고, 그 다음으로는 결계에서 꺼내 달라고 했다. 그 모든 게 자신의 자유를 위한 거래라고 생각했다. 설마 스스로를 죽이기 위해서일 거라곤 상상도 못했지.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자 데우스가 싱긋 미소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내 부탁. 잊지 않았죠?”
“…네.”
“이름에 대한 단서는 반드시 신력으로 봉인되어 있을 거예요. 당신이라면 찾을 수 있어요.”
유피테르와 데우스의 진짜 이름. 그걸 찾는 게 내가 데우스를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임무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데우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 후엔 여전히 나를 부축하듯 끌어안고 있는 아스레인에게 말했다.
“아스레인. 만약 그가 나타나거든 마력을 아끼지 말고 공격을 퍼부어 주세요.”
“그래도 괜찮은 건가?”
“그러다 죽으면 오히려 좋죠. 태오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되니까.”
“아니, 자네 말이네. 이 세계에 더 있고 싶어 하는 거 아니었나.”
아스레인이 호의적으로 나올 줄 몰랐는지, 데우스는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게 왠지 정곡을 찔린 것처럼 보였다면 착각일까. 하지만 당혹스러운 표정은 이내 평소의 능청스러운 미소로 덧씌워졌다.
“지금 누가 누구를 걱정할 처지인가요? 태오가 당신이 다치는 미래를 봤어요.”
“난 그 정도로 죽지 않네.”
“알아요. 하지만 그 칼날이 다음에도 당신을 향하리란 보장은 없죠.”
그리 말한 데우스는 넌지시 나를 바라보았다. 아스레인도 마물도 죽이지 못한다면, 다음 타깃은 나다. 아예 불가능한 시나리오도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아는 아스레인은 착잡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데우스의 선택을 따르겠단 의미였다.
“자, 그럼 방법은 해결됐으니 계획을 짜 보자구요.”
데우스는 꼭 피크닉 계획을 짜는 듯 해맑게 웃었다. 그 얼굴이 안겔루스 대학에서 며칠간 지내던 어린 소년의 모습과 문득 겹쳐 보였다. 그때 데우스는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친구들 사이에 껴서 떠들고 웃는 순간만큼은 평범한 아이였다. 그래서 더 마음이 쓰였다.
“돌아가서 다시 만나기로 했잖아요.”
혼잣말하듯 중얼거리자 데우스의 눈가가 살짝 움찔거렸다. 분명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쿠네 숲으로 출발하기 전, 진과 약속했었던 많은 일들을. 하지만 이번 계획이 실행되는 한 그 둘이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영원히.
“한 번이라도 다시 만날 생각 없어요?”
“길게 끌어봤자 좋을 거 없어요.”
“신이 거짓말을 하면 어떡해요.”
답답한 마음을 그대로 털어놓자 데우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태오. 나는 신이 아니에요. …신이 되고 싶었던 기만자라면 모를까.”
마치 고해성사를 하듯 진중한 목소리였다. 어쩐지 슬퍼 보이는 하늘빛 눈동자를 보니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죽음을 앞둔 채로도 웃을 수 있는 이유는, 스스로를 향한 자조 때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