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0 (250/305)

#250

익숙한 기운이라고? 설마 누르가 유피테르를 마주했을 리는 없고, 혹시 사제의 기운과 비슷해서 헷갈리는 건가? 영 미심쩍어 슬그머니 데우스를 바라보았다. 누르의 혼잣말을 못 들은 건지, 듣고도 모르는 척 하는 건지… 데우스는 평소와 다름없이 느긋하기만 했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아뇨.”

마안이 무엇을 보았는지는 몰라도, 지금으로선 의심할 만한 정황은 없었다. 설령 물어본다고 한들 데우스의 반응도 불 보듯 뻔했고. 아무것도 아니라며 다시 누르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그래서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평소처럼 순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풀이 타 들어가는 냄새가 났어.]

“어디서?”

[할아버지가 쳐 놓은 벽 밖이었어. 당연히 위험하다고 생각은 했는데, 혹시 숲에 불이 날까 봐….]

뒷말을 흐리며 눈치를 살피는 표정은 어쩐지 주눅 들어 보였다. 그 모습이 꼭 혼이 나는 어린아이처럼 보여 못내 안쓰러웠다. 힘없이 시선을 떨구고 있는 누르를 찬찬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널 탓하려는 게 아니야. 누르. 오히려 네 덕분에 더 큰 피해를 줄였어. 알지?”

[…응.]

“그래서 벽 밖으로 나갔어?”

누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웬 랜턴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어. 향도 거기서 나고 있었고. 아무리 봐도 뭔가 이상해서 없애려고 했어. 근데 머리가 점점 어지럽기 시작하더니….]

다음 일부터 떠올리기 힘들었는지, 누르는 코끝을 찌푸렸다. 그때의 상황이라면 히페리온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이성을 잃은 누르가 스스로 가시덤불에 들어갔다는 것까지. 괴로운 순간을 회상하게 하는 것조차 미안하지만,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누군가 보진 못했어?”

[랜턴을 막 발견했을 때 주변에 기척은 없었어. 하지만 정신이 점점 흐려질 쯤, 누군가의 그림자를 봤어.]

“그림자? 인간이었어?”

[응. …먼발치에서 내가 몸부림치고 있던 걸 지켜만 보고 있더라고.]

증거로 남을 랜턴을 회수하러 온 건가. 어쩌면 누르가 제대로 황금사과의 약효가 돌고 있는지 확인하러 온 걸지도 모른다. 마치 수풀 속에 덫을 놓고 기다리는 사냥꾼처럼. 수상한 낌새를 느낀 히페리온이 서둘러 누르를 찾아서 다행이었다.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그자가 누르에게 어떤 짓을 했을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인상을 찌푸리자 누르의 둥근 귀가 움찔거렸다.

[자세하겐 못 봤어. 미안해.]

“응? 아냐.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누르.”

많이 놀랐을 누르를 안아주며 등허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잘했어, 하고 나지막이 속삭이자 누르가 내 품으로 얼굴을 묻었다. 이제 막 상처를 떨쳐 내고 새로운 삶을 살아 보려고 한 아이에게 또 다시 허튼 짓을 하다니. 이것도 더 나은 세계를 위한 계획이라고 할 텐가?

고요히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는데, 등뒤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오. 그대가 알고 있는 걸 내게도 알려 주겠나.]

“…그럴게요.”

이후 히페리온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빠지지 않고 전부 이야기했다. 쿠네 숲만큼은 영원히 마물들의 낙원으로 남길 바랐다는 마음까지 잊지 않고 덧붙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동안 말이 없던 히페리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돌로 된 인공체가 곳곳에서….]

“네. 그래도 이곳엔 히페리온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상황 설명이 끝나자 녹색 눈동자에 천천히 먹구름이 밀려왔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해도 불안하겠지. 아무리 히페리온이라 한들 신과 대적하기가 달가울 리는 없었다. 조심스럽게 그의 팔을 잡자 바스락,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나를 내려다보는 히페리온에게 봄비보다 잔잔한 미소가 맺혔다.

[걱정 말게나. 그대. 나의 숲과 아이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킬 테니.]

“히페리온이 그렇게 말해 주니 안심되지만… 부디 무리는 하지 말아요.”

연신 걱정할 필요 없다는 히페리온에게서 그날의 닉스가 겹쳐 보였다. 그때도 닉스가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리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심지어 닉스를 제거하려는 계획이 실패했으니, 다음이 히페리온이 아니라는 확신도 없었다. 엄습해 오는 불안감에 버릇처럼 손을 어루만지다가 문득 손목이 허전하단 사실을 떠올렸다.

“아, 맞다. 히페리온. 처음에 선물해 준 팔찌 말인데요….”

오르커스 황야에 성물을 두기 위해 썼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쪽이 좋겠지. 기껏 내게 선물해 줬는데 다른 용도로 쓴 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한참동안 말을 고르다 입을 여는 순간, 따스한 손길이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네.]

“네?”

[그대라면 분명 필요한 곳에 썼겠지. 내가 아는 그대는 무척 다정한 인간이니까.]

목 끝까지 차올랐던 변명이 자그마한 숨결로 흩어져 버렸다.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눈동자는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전부 알고 있는 듯 보였다. 역시 히페리온인가. 이윽고 그의 자상한 손길을 따라 불어온 바람이 마치 괜찮다고 귓가에 속삭여 주는 것만 같았다. 늘 받기만 하는 나로선 “고마워요.”라고 속삭이는 게 전부였다.

내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던 히페리온은 이내 아스레인에게 물었다.

[그럼 이제 엘렉트의 신전으로 가시겠군요.]

“음. 자네는 계속 이곳을 맡아 주게.”

[이 히페리온, 기꺼이 명 받들겠습니다.]

숲의 수호자가 정중히 인사하자 주변을 부산스럽게 날아다니던 나뭇잎 나비들이 일제히 멈췄다. 그러곤 히페리온을 따라하듯 아스레인을 향해 저마다의 날개를 펴서 부드럽게 팔랑거렸다. 그 모습이 꼭 파티에서 만난 영애가 치맛자락을 잡고 인사하는 것처럼 우아했다.

아름다운 광경에 탄성을 흘리자 히페리온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은 이만 쉬는 게 좋겠구나.]

“여기서 더 있어도 괜찮나요?”

[물론이고 말고.]

흔쾌히 허락해 준 히페리온은 더 깊은 숲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의 뒤를 따라가면서 순찰하듯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곳곳에 마물이 머물다 간 흔적은 있었으나, 다행히 신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벽 밖에 있었다던 랜턴이 신경쓰여 아스레인에게 물었다.

“엘렉트 사제의 소행일까요?”

“글쎄. 이제 와서 어느 신을 따르는 사제인지 구분할 필요가 있겠나.”

“그건 그렇지만, 지금까진 헤카테를 시켰었잖아요? 그런데 이번엔 사제를…. 심지어 히페리온이 버젓이 지키고 있는 숲에 들어가게 할 줄은 몰랐어요.”

“판단이 흐려질 만큼 급박하단 거겠지.”

유피테르가 급박해졌다고? 더 이상 한 수 앞이 보이지 않으니 흔들리기 시작한 건가. 이번 엘렉트 신전만 지나면, 절대적인 열세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열두 신으로부터 신력을 끌어 모으던 유피테르의 다섯 번째 팔을 자르는 셈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기쁘지 않았다.

“어쩌면 이번이 그가 세운 계획의 최종 단계일지도 모르죠.”

실은 데우스를 만난 순간부터 직감했다. 결전의 날이 목전까지 다가왔음을.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계획을 방해받기만 하는 유피테르가 어떤 무모한 짓을 벌일지 모른다. 그러니 최후의 최후까지 만전을 기해야만 한다. …내가 꿈꾸는 세계를 쟁취하기 위해선.

“…윽.”

계속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서 그런가. 갑자기 관자놀이를 찌르는 두통이 찾아왔다. 머리를 부여잡으며 멈춰 서자 사방에서 도움의 손길이 나타났다.

“태오. 괜찮나?”

[어디 아파?]

[이런, 무리했나 보구나.]

곁에서 걷고 있던 아스레인은 물론이고, 앞서 가던 히페리온과 내 뒤를 따라오던 누르의 목소리까지 겹쳐 들려왔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걱정으로 물든 여러 쌍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즐거운 상황은 전혀 아니었지만, 그들을 보니 왠지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괜찮아요. 그냥 좀… 긴장이 풀려서요.”

[조금만 더 가면 되네.]

얼마 지나지 않아 수풀 너머로 거대한 나무가 나타났다. 히페리온의 본체였다. 아까부터 느껴지던 치자 꽃의 향기는 여기서 시작됐나 보다. 두꺼운 기둥 주변에 활짝 피어난 꽃 덕분에 새하얀 향연이 펼쳐졌다. 이윽고 히페리온이 가볍게 손짓하자 나뭇잎 나비가 일제히 움직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수풀과 나뭇잎이 모여 누울 자리를 만들고, 판판한 돌 위에 신선한 열매가 가득 쌓였다. 저절로 탄성이 나올 법한 광경이었다.

“와… 꼭 님프의 연회에 초대받은 것 같아요.”

[과찬이구나.]

너그러운 미소를 지은 히페리온이 재차 손끝을 까딱였다. 그러자 나뭇잎 나비 여러 마리가 연꽃을 닮은 너른 나뭇잎을 낑낑 들고 왔다. 둥글게 말린 나뭇잎 안에는 맑디맑은 시냇물이 담겨 있었다.

[자. 이걸 마시고 푹 쉬려무나.]

“고마워요. 히페리온.”

시원한 물을 마시니 답답한 속이 한결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 후 물을 길러 왔던 나비 중 몇몇이 나를 데리고 수북하게 쌓인 수풀로 갔다. 어서 앉으라는 듯 요란한 날갯짓에 얌전히 나뭇잎 뭉텅이 위로 자리 잡았다. 은근히 푹신한 게, 바스락 대는 소리만 없었다면 침대인 줄 알았을 거다.

편하게 자리를 잡자마자 뒤에서 쫄쫄 쫓아오던 누르가 당당히 옆자리를 차지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히페리온은 나뭇가지 같은 손가락을 뻗어 누르의 털을 쓰다듬어 주었다.

[태오를 곁에서 돌봐주겠느냐. 누르.]

[맡겨만 주세요!]

씩씩한 대답에 그도 만족한 눈치였다. 이내 히페리온은 아스레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잠시 저와 대화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래.”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가 이번엔 데우스에게로 향했다.

[그대도.]

“나야 환영이죠.”

그리하여 히페리온, 아스레인, 데우스가 돌로 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모였다. 나무뿌리로 만들어진 의자에 앉아서 나뭇잎으로 만들어진 컵으로 티타임을 가지는 모습은 꽤나 이색적이었다. 하지만 저곳에 끼어들 엄두는 나지 않았다. 함부로 낄 데도 아니었고.

“흔쾌히 받아줘서 고마워요. 히페리온.”

[그대는 소중한 분들의 손님이니 당연한 처사네.]

흡사 정치인들이 만난 자리를 방불케 했다. 물론 정상회담과 그리 다르지 않긴 하지만. 혹시 데우스가 이상한 말을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아무래도 히페리온이 데우스의 어떤 얘기든 자상하게 받아 주는 덕분인 듯싶다.

“걱정보다는 잘 어울려서 좀 신기하네.”

나지막이 중얼거리자 함께 기이한 티타임을 구경하던 누르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나뭇잎 나비들은 싫어하는 것 같지만.]

“하하, 걔네는 원래부터 경계가 심했잖아.”

결코 한 자리에 모이지 않을 것 같은 세 명이 한 앵글에 잡혀 보이는 게 신기했다. 시초의 마물과 첫 번째 기둥, 그리고 만들어진 신의 일부라. 어디 가서 돈 주고도 못 볼 구도였다. 더욱 신기한 일은 세 명의 낯선 조합이 생각보다 어우러진다는 점이었다.

그 순간 누르가 했던 말이 떠올라 대뜸 물었다.

“근데 아까 데우스가 익숙하다고 한 건 뭐야?”

[아, 그거? 저… 인간도 아니고 뭣도 아닌 생물 말이야.]

누르는 별 일 아니라는 듯 심드렁한 투로 대답했다.

[묘하게 어르신의 본질과 비슷해.]

“뭐? 히페리온하고?”

[뿐만 아니라 너희 교수님하고도.]

이상한 일이다. 아스레인과 히페리온은 비슷할 이유가 충분했다. 그야 히페리온은 아스레인이 균형을 위해 만들어 낸 첫 번째 기둥이었으니까. 그럼 데우스는 대체 왜….

[태오.]

“어, 어?”

누르는 긴 꼬리로 내 등을 철썩 때리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확실히 말해 두는데, 이번 건 정확하지는 않아.]

“그게 무슨 소리야?”

[애초에 나보다 강한 존재의 본질은 제대로 보기 어렵거든. 워낙 철저들 하셔서.]

그럼 잘못 본 걸지도 모른다는 건가. 본질을 본 장본인이 불확실하다고 말하는데도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고 영생을 약속받은 자들은 원래 비슷한 본질을 갖고 있나.

또 다시 복잡한 생각이 들어차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잠깐 이마를 짚는다는 걸 누르는 귀신같이 알아챘다.

[됐으니까 조금이라도 자 둬.]

“…나?”

[그럼 너 말고 누가 있겠냐.]

장난스럽게 투덜거린 누르가 내 머리맡에 몸을 둥글게 말아 누웠다. 그 위에 머리를 베고 누우라는 듯 꼬리를 붕붕 흔들었다. 천천히 상체를 뒤로 젖히자 어느 순간 포근한 털이 뒤통수에 닿았다. 적당히 푹신한 감촉에 와! 탄성을 내뱉자 누르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나 전보다 더 푸근해졌지?]

“그러네. 이러고 있으니까 왠지 옛날로 돌아간 것 같지 않아?”

한때 온실로 가지 않고 침대에서 누르와 함께 지냈던 시절이 떠올랐다. 아직 성체가 되기도 전인데, 몸집이 꽤 커다래서 침대를 거의 뺏기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침대에 둘이 올라가기란 아예 불가능할 것 같다.

선선한 바람에 우리는 금세 그리운 나날들의 회상에 빠졌다.

[진짜 예전 같네. …물론 그 시절의 나는 솜털 난 애송이였지만.]

“푸핫, 지금은 아니야?”

[야! 이 정도면 다 큰 거지. 뭘 더 바라?]

“하하, 미안. 미안. 그때랑 비교하면 넌 엄청 컸지.”

그리고 나도 참 많이 달라졌다. 어쩌면 누르보다 훨씬 많이.

“그땐 진상을 알고 싶어서 아등바등 거렸는데….”

[응? 뭐라고 했어?]

“…아무것도 아냐.”

천천히 몸을 돌려 누르의 털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젠 잠시나마 머리 아픈 걱정 따윈 잊고 살고 싶다. 그래. 지금 이 순간에라도. 천천히 숨을 들이쉬면 신선한 공기와 치자 꽃향기가 폐부 깊숙이 파고든다. 귀를 기울이면 나를 아껴 주는 이들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오고, 눈을 감아도 곁에 있는 누르가 느껴진다.

“잘 자. 누르.”

[좋은 꿈 꿔.]

입김처럼 사라질 여유를 잠깐이나마 마음껏 느끼려 했다. 하지만 행복한 순간이 오면 늘 불행이 찾아온다. 그건 내 인생 불변의 진리였다. 이번에도 역시 나의 단잠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으음.”

천천히 잠에서 깨어나자 웬 낯선 신전 앞에 서 있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곳이 뭔가 이상하다 느낄 즈음, 우연히 바닥을 내려다보곤 기겁했다. 내게 그림자가 없었다. 그 덕분에 알아챘다.

꿈속에서 꿈임을 깨닫는 걸 자각몽이라고 부르던가. 나는 묘한 자각몽에 들어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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