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
우리의 만남은 시작부터 꽤나 극적이었다. 무자비하게 살해된 사체 더미에서 설마 새끼가 살아있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부패가 시작된 사체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을 때, 손가락 끝에 스치던 희미한 숨결을. 이윽고 절망만이 가득한 곳에서 내 손으로 희망을 건져 냈을 때 결심했다.
이 아이만큼은 내가 살려내리라고. 반드시 내가, 지켜 내겠다고.
어쩌면 그 순간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계기가 됐을지도 모른다. 단순히 마물을 연구하고 싶다는 생각이,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지 않도록 만들겠다는 집념으로 변했다. 그렇기에 누르는 내게 친구를 넘어 희망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다.
그러나 지금, 그 희망이 수풀 위에 힘없이 누워 있다.
“…누르….”
죽은… 건가? 천천히 움직이는 털이 호흡 때문인지, 바람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면 될 텐데, 도무지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저 몸을 내가 직접 만지는 순간, 원치 않은 현실을 마주하게 될 것 같았다.
아니야. 아닐 거야. 세뇌하듯 중얼거리는 혼잣말 사이로 거친 숨소리가 끼어들었다. 믿기지 않는 현실로부터 도망치려는 그때, 내 어깨 위로 손이 불쑥 올라왔다. 화들짝 놀라 옆을 돌아보니 아스레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안심하게.”
“이 상황에 어떻게 안심을….”
“잠든 것뿐이니까.”
휘둥글게 뜬 눈으로 곧장 누르를 돌아보았다. 그는 여전히 수풀 위에 미동 없이 누워 있었다. 정말로 살아있긴 한 건가? 반신반의한 채로 누르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윽고 가슴 위에 손을 올리는 순간, 싸늘하게 식은 손바닥으로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쿵. 쿵. 느릿하긴 해도 확실했다.
살아있다.
“…다행이다.”
짧은 찰나에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던가. 한 순간에 긴장이 풀려 현기증이 일었다. 아찔해진 정신을 바로잡으려 마른세수를 하고 나니 어느새 아스레인과 히페리온이 곁에 와 있었다. 이 모든 진상을 알고 있을 히페리온에게 넌지시 물었다.
“누르가 잠든 지 얼마나 됐어요?”
[오늘로 벌써 닷새가 넘었겠구나.]
“네? 그렇게나 오래 됐다고요?”
이유를 물었으나 히페리온은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잠들어있는 어린 마물을 내려다보는 눈빛엔 왠지 모를 처연함이 묻어났다. 이윽고 그는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아이의 부탁으로 내가 재웠네.]
“누르가… 부탁했다고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히페리온은 후회로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여느 때처럼 나를 돕겠다고 숲 일대를 순찰하러 나갔었지. 그러다 하루가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아 가보니 가시덤불에 틀어박힌 채 고통스러워하고 있더구나. 처음엔 실수로 덤불에 걸린 줄 알았지만… 전혀 아니었네. 저 아이는 일부러 들어간 게야.]
“…왜죠?”
[남을 해치기 싫어하는 아이였으니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히페리온은 떨리는 손길로 누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무껍질처럼 거칠게 결이 난 손이지만, 누르를 어루만지는 손길만큼은 제 아이를 대하듯 부드러웠다. 이윽고 깊은 한숨이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마력이 기이하게 증폭되어 있었네.]
“갑자기요?”
[나도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었네. 이성을 붙잡고 있는 것도 힘겨워 보였지. 내게… 그 어린 아이를 해방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곤 재우는 길뿐이었다네.]
알 수 없는 이유로 폭주한 것도 모자라, 스스로의 마력을 재어하지 못하고 남을 공격할까 봐 가시덤불로 뛰어들다니. 혼자서 얼마나 두려웠을까. 그나마 히페리온의 정성으로 상처는 많이 아물어있었지만, 곳곳에 긁히고 찔린 생채기가 남아 있었다.
안쓰러운 마음에 평온하게 잠든 누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날 뭔가 이상한 점은 없었나요? 인기척이라든가….”
[숲으로 인간이 드나든 기척은 느꼈네. 희미하긴 해도 신력이 느껴졌으니 사제였겠지.]
“잠깐만요. 사제가 쿠네 숲에 왔었다고요?”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라네. 사제는 종종 이곳을 지나가곤 했지. 하지만 숲의 아이들을 공격하거나 포획하려는 시도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네.]
그저 숲을 지나가는 엘렉트의 사제인가. 괜히 누르의 상태가 급작스럽게 악화되었다고 하니, 사제가 1순위로 의심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날의 기억을 다시금 회상하던 히페리온은 느닷없이 탄식을 내뱉으며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날 누르에게서 풀이 타는 냄새가 났던 것 같구나.]
풀이 타는 냄새? 숲에서 불을 피우는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다. 심지어 숲 입구를 병사가 통제하고 있는 이상, 야영 따윈 더욱이 힘들 것이다. 그런데 풀이 타는 냄새가 났다니.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다가다가 불현듯 한 단어가 떠올랐다.
“황금사과네요.”
“황금사과로군.”
아스레인과 동시에 같은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재빨리 고개를 돌려보자 확신에 찬 눈빛과 마주쳤다.
황금사과. 고대 신화에서 갖가지 불화를 일으킨 물건의 이름이었던가. 클라우스 자작은 위험한 마물을 미리 알아낼 명목으로 만들었다고 했지만, 실은 마물의 마력을 폭주하게 부추기는 배합물이다.
그걸 다른 곳도 아니고 마물 보호 구역으로 지정된 쿠네 숲에서 쓸 줄은 몰랐다. 고작 사제가 위험을 무릅쓰고 할 리는 없을 테고. …역시 황제가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겠지.
[황금사과…?]
아무것도 모르는 히페리온은 퍽 의아해했다. 그딴 물건 따위 평생 몰랐다면 좋았으련만. 착잡한 어조로 불화의 씨앗에 대해 설명해 주니, 자비로운 얼굴이 참담히 일그러졌다. 이내 히페리온은 초조한 목소리로 아스레인에게 물었다.
[그럼 이 아이는 괜찮은 겁니까?]
“웬만해선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만… 사이누르의 경우엔 너무 장시간 노출되어 있었군.”
절망적인 소식이었다. 중독으로 인한 코어 장애라니. 당장 아스레인이 누르의 코어를 진정시킨다고 한들, 언제 다시 폭주할지 모르는 불안정한 상태라고 했다. 남을 해치고 싶지 않아 스스로 고통을 감내하며 가시덤불로 뛰어든 아이에게 너무도 가혹한 벌 아닌가.
“해독제 같은 건 없을까요?”
“…글쎄. 그때 본 연구 기록엔 없었던 것 같다만.”
그 순간 클라우스의 저택에서 발견한 편지 내용이 떠올랐다. 아내를 살리기 위한 고군분투하던 그는 우연히 연구의 가치를 알아주는 ‘그분’을 만났다. 그 후, ‘그분’ 덕분에 연구는 순풍에 돛 단 배처럼 빠르게 진행되었다고 했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그분’은 미노스 황제일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클라우스가 혈연단신으로 황금사과 제조법을 떠올릴 수 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다. 황금사과라는 최악의 약품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가장 큰 공을 들인 배후는 ‘위대하신 그분.’ 유피테르다.
“데우스.”
허공에 대고 이름을 부르자 목걸이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어느새 곁에 나타난 회색빛 소년은 살가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불렀어요?”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매는 마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수했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선. 이미 목걸이 안에서 다 들어놓고 시치미 떼는 모습이 아주 천연덕스러웠다. 그 탓에 더욱이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리고선 추궁하는 어조로 물었다.
“당신인가요? 클라우스를 조종한 게.”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유피테르죠.”
“그럼….”
“말했잖아요. 계획을 이루기 위해 조종된 말은, 비단 클라우스뿐만이 아니에요.”
데우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신과 잇닿은 사람들은 전부 유피테르가 조종하는 실에 연결되어 있겠지. 그렇게 따지면 사람들의 생애는 이미 결말이 나온 연극의 일부에 불과했다. 열심히 움직이는 인형들은 자신이 하는 모든 행동이 무사히 극을 마칠 수 있도록 짜인 극본이란 걸 모르겠지.
찝찝한 기분에 갇혀있는 사이, 데우스의 관심은 히페리온에게 향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히페리온.”
[그대는…?]
“데우스라고 해요. 보다시피 태오에게 신세를 지고 있죠.”
[내 목소리가 들리는가?]
“…공교롭게도.”
히페리온을 올려다보는 하늘색 눈동자에 오묘한 기운이 서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진 모르지만, 지금은 한가하게 자기소개나 주고받을 때가 아니다. 아직도 히페리온에게 한눈이 팔려 있는 데우스의 팔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데우스. 당신은 알고 있죠? 황금사과의 해독제를 만드는 법….”
“알고 있다면요?”
“알려 줘요. 아니, 당장 만들어 내요.”
“만약 이 숲에 재료가 없다고 하면 어쩔 셈이죠?”
그건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다. 당황한 나머지 눈만 굴리고 있자 아스레인이 나섰다.
“바로 가져다주마.”
“해독제를 만드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면요?”
“…지금 말장난할 기분 아니네.”
“말장난 아니에요.”
차갑게 쏘아보는 눈길에도 데우스는 동요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당당한 표정에 점점 속이 타들어 갔다. 대체 얼마나 걸리는 거지? 아스레인이 치료한다면 당분간은 괜찮겠지만, 언제까지고 마법에 기댈 수만은 없는 일이다.
초조한 마음에 입술을 물어뜯던 그때, 데우스의 손에 들린 작은 병을 발견했다.
“그게 뭐예요?”
“해독제요.”
지극히 간략한 대답에 일순 내 귀를 의심했다. 지금 해독제라고 한 건가? 아니면, 나를 놀리는 건가. 어이가 없는 건 비단 나뿐이 아니었다. 아스레인도, 심지어 히페리온마저 데우스를 의아한 듯 쳐다보았다.
“재료 없다면서요. 게다가 만드는데도 오래 걸린다고….”
“난 거짓말은 안 했어요. 다만, 이미 갖고 있을 뿐이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는 데우스에 절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러니까 그걸 왜 갖고 있어요?”
“만약 당신이 닉스의 사건 이후로도 나와 손잡지 않으면, 이것까지 협상의 수단으로 쓰려고 했거든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정말 안심할 수 없는 상대이기도 했고. 황금사과의 해독제를 미리 준비했다고 하니, 자연스럽게 생각의 흐름이 좋지 못한 쪽으로 흘렀다. 설마 데우스가 세뇌된 사제를 이용해 누르를 중독되게 만든 게 아닐까 하고.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흘겨보자 데우스는 마치 내 속을 읽기라도 한 듯 먼저 말했다.
“사이누르가 이렇게 될 걸 미리 알고 있긴 했지만, 내가 시킨 일은 아니에요.”
“미리 말해 주면 좀 좋아요?”
“전에 말했잖아요. 태오. 혜안으로 내다본 미래를 듣는 자가 어찌 되는지….”
기록에도 남지 않은 고대 이아페처럼 사라져 버리겠지. 더 이상 그를 탓할 수 없어 옅게 혀를 찼다. 그 사이 데우스는 누르의 입을 벌려 해독제를 천천히 흘려 넣었다. 자그마한 병이 바닥을 보일 즈음, 데우스는 나를 돌아보며 샐쭉 웃었다.
“나한테 빚 하나 더 졌네요.”
“애초에 황금사과 같은 걸 만들지 않았으면 될 일이잖아요.”
“…아야.”
데우스는 제 가슴에 손을 올리며 상처 받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알고 있다. 유피테르가 계획한 것이지, 데우스는 잘못 없다는 걸. 그래도 사실을 꼬집지 않고 넘어가긴 싫었다.
해독제를 전부 다 마신 후, 아스레인이 누르를 향해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힘없이 누워 있기만 하던 누르가 연신 몸을 움찔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콜록! 기침소리와 함께 그의 눈꺼풀이 스르르 올라갔다.
“누르야!”
[어어…?]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냉큼 누르를 끌어안고 이름을 부르자 몽롱한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내 체취를 맡자마자 살랑살랑 흔들리는 꼬리에 그만 울컥하고 말았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힘겹게 감정을 억누르는데, 뒤늦게 잠에서 깬 누르가 사태를 파악하곤 화들짝 놀랐다.
[야! 네가 왜 여기 있어?!]
“말하자면 길어. 그보다 건강하게 다시 만나기로 했잖아….”
[서, 설마 울어?]
“내가 안 울게 생겼어? 정말로 네가… 죽은 줄 알았다고.”
꼴사납게 울지 않으려고 했건만, 기운 찬 목소리를 들으니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다. 입술을 비죽이며 훌쩍거리자 누르는 자못 당황한 듯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더니 두툼한 발을 번쩍 들어 내 이마를 가볍게 건드리며 말했다.
[넌 걱정이 너무 많다니까. 그냥 잠깐 잠을 잤을 뿐이야.]
“잠 같은 소리하지 마. 흑, 다 알고 있어.”
[진짜 잘 잤는데? 꿈에 네가 맛있는 열매를 엄청 많이 들고 나왔어.]
태평한 소리에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혹시 잠에서 깨지 못할까 얼마나 속이 썩어 갔는지, 누르는 평생 모를 거다. 와락 그를 끌어안고 뻣뻣한 털에 얼굴을 묻었다. 한동안 못 본 사이 또 커진 것 같다.
“…덩치만 큰 바보.”
[뭐? 바보는 너지.]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니 예전 온실에서 함께 했던 시절로 돌아간 착각이 일었다. 포근한 품에선 여전히 고운 흙과 촉촉한 풀, 그리고 향기로운 치자 꽃내음이 느껴졌다. 고목나무의 매미처럼 붙어 있다가 떨어지자 누르는 내 옆에 있는 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어르신도요.]
[아무렴 무사히 깨어나서 다행이구나.]
누르는 공손하게 히페리온과 아스레인에게 인사했다. 당연히 그들의 도움을 받았으리라 생각한 모양이다. 아예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 말에 서운함을 느낄 사람이 있었다. 역시나 뒤편에 앉아있던 데우스가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인사 받을 건 그쪽이 아니라, 이쪽.”
앳된 목소리에 누르는 당황한 눈으로 데우스를 돌아보았다.
[…누구…?]
매번 데우스를 소개해야할 순간이 오면 말문이 턱 막힌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지금도 데우스를 인사시킬 생각에 누르와 재회해서 오던 감동이 단숨에 사라졌다. 거칠게 눈물을 닦아내고 차분한 투로 말했다.
“데우스라고 해. 신력이 느껴지겠지만, 경계는 안 해도 돼. …일단은 우리 편이니까.”
누르는 말없이 데우스를 바라보았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외부인을 경계하기보다 관찰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본질을 꿰뚫어보는 마안이 무엇을 들여다보고 있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과연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신의 본질은 어떻게 생겼으려나.
숨을 죽이고 누르가 말하기를 기다리던 그때, 데우스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태오. ‘일단은’이라뇨. 불쌍한 나를 동료로 받아들인 거 아니었나요?”
“오늘 일로 약간 마음이 틀어질 것 같거든요.”
“후후, 서운해라.”
서운은커녕 이 상황을 순수하게 즐기는 표정이었다. 더는 상대하기 힘들어서 시선을 피하는데, 기다란 꼬리가 나를 툭툭 건드렸다. 옆을 돌아보니 누르가 눈짓으로 데우스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래서 이…분이 나를 깨워 준 거야?]
“응. 널 그렇게 만든 약초의 해독제를 갖고 있었어.”
[…약초 때문이었구나.]
그 후로 누르는 또다시 데우스를 응시했다. 이상한 일이다. 똑같은 상황에서 나르키소스는 데우스를 경계하기 바빴다. 심지어 누르는 마안으로 본질을 봤을 터. 데우스가 지닌 위압적인 신력에 응당 겁을 먹어야 했다. 하지만 칠흑같이 검은 눈동자엔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자신을 구해준 은인이기 때문인 걸까.
“무섭지 않아?”
속삭이듯 물어보니 누르가 둥근 귀를 쫑긋거리며 대답했다.
[왜 무서워?]
“다른 마물은 저 신력 때문에 본능적으로 피했거든.”
[나도 꺼림칙하긴 한데, 왠지….]
한없이 길어지는 말꼬리가 누르의 고민을 대변하는 듯했다. 몇 초간 침묵이 흐르는 내내 누르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데우스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익숙한 기운이 보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