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
쿠네 숲. 혹한의 라비린토스와 산맥 하나로 갈라진 이곳은 카르사 대륙에서 가장 큰 삼림 지역이다. 오래 전, 선대 에브게니아 황제는 이 숲을 마물을 위해 선뜻 내어 주었다. 그 덕분에 보호소에서 자연으로 돌아가야 하는 마물이 매해 쿠네 숲을 오고간다.
그 숲에 사는 마물이 우리에게 친절하리란 착각은 금물이다. 아무리 인간에게 보살핌을 받았다고 한들 야생에서 자고 나란 마물에게 우리는 그저 영역을 어지럽히는 이물질일 뿐이다. 그 사실을 망각한 모험가들이 이따금씩 숲으로 들어가곤 하지만, 모두 한 줌의 재가 되어 돌아왔다.
그리하여 쿠네 숲은 인간들에겐 미지요, 마물들에겐 낙원이 되었다.
물론 내게는 오랜 친구의 집처럼 친숙한 곳이다. 너른 숲 안에서 길을 잃지 않으리란 확신도 있었다. 하지만 숲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쳤다.
“…저게 뭐죠?”
쿠네 숲으로 들어가는 길목이 나무 울타리로 가로막혀 있었다. 게다가 그 옆에는 막사가 지어져 있었고, 울타리 앞엔 병사 두 명이 상주해 있었다. 아스레인도 알고 있던 일이 아닌지, 의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여길 막았다는 소린 못 들었는데….”
가장 먼저 마차를 발견한 병사가 성큼성큼 다가와 말했다.
“지금 숲은 관계자 외에는 출입할 수가 없습니다.”
퍽 단호한 태도로 우릴 맞이한 병사는 창문 안을 흘끔 둘러보았다. 나를 볼 때만 해도 위용 넘치던 눈빛이 아스레인에게 닿자마자 살짝 흔들렸다. 이내 아스레인은 재킷 안에서 금속 패를 꺼내어 창밖으로 내밀었다.
“여기 감독관이 누구지?”
패에 새겨진 독수리 문양을 마주한 병사는 눈이 빠질 듯 휘둥그레졌다. 이내 빠릿빠릿하게 경례하며 “잠시 기다려 주십쇼!”라고 말하곤 막사로 뛰어 들어갔다. 그 안에서 대체 무슨 이야길 했는지 모르지만, 감독관처럼 보이는 자가 버선발로 뛰어나왔다.
창문 너머로 눈이 마주치자마자 대번에 아스레인을 알아보았다.
“역시 백작님이셨군요. 그런데 이 앞엔 무슨 일로….”
“관리해야 할 마물이 있어서 왔네.”
“아! 정말 수고 많으십니다. 곧바로 길을 내어 드리겠습니다.”
이후 감독관은 다급함이 느껴지는 손짓으로 병사들을 지휘했다. 척 봐도 무거워 보이는 울타리를 병사들이 힘들게 움직이는 사이, 아스레인은 금속패를 다시 옷 안으로 넣으며 물었다.
“그보다 여긴 언제부터 막은 건가?”
“좀 됐습니다. 갑자기 황명이 내려왔던지라… 소식을 못 들으신 겁니까?”
“…황명?”
이어진 감독관의 말에 따르면, 쿠네 숲이 막힌 원인은 이아페 섬에서 일어난 대사제 피습 사건이었다. 혹여 쿠네 숲에 사는 마물이 마을로 나와 기승을 부릴까 봐 아예 길목을 닫아 버렸단다. 쿠네 숲을 시작으로 점차 통제를 늘려 갈 얘기에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럼 조심히 다녀오시죠.”
감독관은 정중히 인사하며 마차 창문을 닫아 주었다. 아스레인 덕분에 무사히 울타리를 넘어 쿠네 숲으로 들어갔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숲을 바라보면서도 기대감은커녕 불안감만 커져 갔다.
“아무 일도 없겠죠…?”
내심 초조해져 두 손을 꼼지락거리고 있으니, 아스레인이 내 손을 가볍게 그러쥐었다. 조심스럽게 전해져 오는 온기에 소란스러웠던 마음이 점차 차분해졌다. 이윽고 마차가 숲 초입에서 멈춰 섰다.
앞서 걸어가는 아스레인을 따라가다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온몸을 로브로 두른 마부가 마차를 지키고자 남아 있었다. 혼자 두고 갔다가 마부가 위험한 일에 휘말릴까 문득 걱정되었다. 슬쩍 아스레인의 옷자락을 끌며 물었다.
“저분은 여기 혼자 둬도 되는 걸까요?”
그 물음에 아스레인은 대답 대신 마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윽고 그가 손가락을 까딱 움직이자 마부가 이쪽을 휙 돌아보았다. 깊게 눌러쓴 후드가 살짝 올라가며 숨겨진 마부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런데 이목구비가 없었다.
“으악!”
웬 악몽에서나 볼법한 광경에 비명을 지르며 재빨리 아스레인의 등 뒤로 숨었다. 저게 뭐야. 얼굴이 무슨 매끈한 대리석처럼…. 잠깐. 대리석? 혹시나 하고 다시 마부를 바라보자 이마에 박힌 마석이 반뜻 빛났다. 그 순간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깨달음을 얻었다.
“조각상…이었구나.”
“많이 놀랐나?”
“저걸 보고 안 놀랄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쿠네 숲으로 걸음을 돌렸다. 오랜만에 보는 누르는 과연 얼마나 성장해 있을까. 고향에 비하면 쿠네 숲은 훨씬 컸지만, 어디서든 잘 지내는 누르이기에 걱정은 안 됐다. 다만 헤카테가 습격하지 않았을까 걱정이다.
우거진 수풀 사이로 들어가다 보니 어느새 입구는 보이지 않았다. 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풀과 나무뿐이었다. 아스레인이 가는 대로 조용히 따라다가보니 저 멀리서 잔잔한 시냇물 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전부였다.
“여기가 원래 이렇게 조용했었나요?”
지금보단 조금 더 활기찼던 거 같은데….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 봐도 확신만 생겼다. 예전에 왔을 땐, 아주 작게나마 동물이나 마물의 울음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조용하다.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 폐허처럼.
흘끔 쳐다봐도 아스레인은 대답이 없었다. 아마 그에게는 보고 들리는 것 외에 마물의 마력을 느낄 수 있는 육감이 있기 때문이겠지. 아스레인의 감각대로라면 이곳에 마물이 사는 건 틀림없는 사실일 텐데….
“저기, 아스레인.”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어보려는데, 아스레인이 나무 사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길 보게.”
마물이라도 있는 건가? 퍼뜩 손짓을 따라 고개를 돌렸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여태 지겹도록 봐왔던 이끼와 덩굴만 뒤덮여 있었다. 조금 더 가까이 가면 무언가 보이려나. 최대한 풀이 없는 쪽으로 발을 옮겨 아스레인이 가리킨 나무 사이를 통과했다.
그러자 눈앞에 엄청난 광경이 펼쳐졌다.
“우와….”
자연이 만들어 낸 요새가 이곳에 있다. 촘촘한 나무가 첫 번째 벽이라면, 바로 이 앞에 두 번째 벽이 있다. 두툼한 나무뿌리가 엮여 내 키를 훨씬 웃도는 벽을 형성했다. 심지어 뿌리 사이사이를 이끼로 뒤덮어 자그마한 틈도 없애 버렸다. 한 눈에 봐도 웬만한 칼로 뚫지 못할 정도로 견고했다.
예전에 왔을 땐 나무로 만들어진 벽은 없었다. 그럼 이건 히페리온이 숲을 지키기 위해 만든 장치다. 이제와 보니 뿌리에 깃든 마력은 줄곧 내 손목에 얽혀 따스한 빛을 발하던 힘과 동일했다.
“이래서 아무 소리도 안 들렸던 거였네요.”
놀랄 만한 광경은 그뿐이 아니었다. 벽 앞에 웬 바위가 띄엄띄엄 놓여 있었다. 대부분 넝쿨로 뒤덮여 모양을 제대로 알 수 없었지만, 평범한 바위로는 안 보였다. 조심스레 가까이 다가가보니 자연적인 바위라기보다는 인공적인 조각 같았다. 심지어 크기도 제각각인 것이 어째 수상했다.
어느새 곁에 다가온 아스레인이 위로 높이 솟은 바위를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이건 아무래도….”
무어라 말하려던 아스레인이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다. 예리한 안광이 수풀 너머의 먹잇감을 발견한 듯 형형하게 빛났다. 그제야 나도 희미하게 일렁이는 신력을 발견했다. 판도라다. 아니, 정확히는 헤카테가 바짝 엎드려 몸을 숨기고 있었다.
“뒤로.”
나직이 속삭이는 아스레인의 말에 순순히 뒤로 물러섰다. 그때 수풀 밖으로 시커먼 물체가 불쑥 튀어나왔다. 새까만 검치호랑이를 닮은 놈은 턱 아래까지 길게 내려온 송곳니를 빛내며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심지어 하나도 아닌 세 마리가 우리를 둘러쌌다.
아스레인은 조용히 손에 마력을 모으며 헤카테가 행동하기만을 기다렸다. 또 다른 매복이 있을까 경계하는 태세였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그 순간이었다.
“……!!”
쿠구구궁- 대지가 진동하는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돌연 발밑이 흔들리니 헤카테도 공격을 멈추고 나무쪽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그것은 제 발을 묶는 악수가 되고 말았다.
바닥을 뚫고 올라온 뿌리가 순식간에 헤카테를 제압했다. 그들이 도망치려 몸부림칠수록 뿌리는 더욱 세게 숨통을 조여 왔다. 투둑, 투둑. 돌과 돌이 이어져 있던 이음새가 부러져 나가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눈 깜짝할 새였다. 위협적으로 달려들던 헤카테는 어느새 뿌리의 일부가 되어 굳어 있었다. 몸을 뒤덮은 털은 사라지고 태어난 그대로 바위의 형상만 남았다. 세 마리가 불과 몇 초 만에 텅 빈 깡통이 되고 만 것이다.
“죽은…건가요?”
“신력은 느껴지지 않는군.”
아스레인의 말에도 아직 꿈을 꾸는 듯 해서 직접 헤카테를 확인하고 싶었다. 제법 역동적인 자세로 굳은 세쌍둥이 바위로 다가가 손을 뻗었다. 마침내 손끝이 겉 표면에 닿으려는데, 어디선가 재잘거리는 대화가 들려왔다.
[만져봤자 좋을 거 없을 걸~?] [맞아. 다치면 어쩌려고!]
꺄르르, 귓가를 간질이는 웃음소리가 반갑게 느껴졌다. 이윽고 돌풍이 불어와 일대의 나뭇잎이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크기와 색깔이 제각각인 나뭇잎이 한데 뭉쳐 마침내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이런, 귀한 분들이 오셨구나.]
아아, 진한 치자 꽃향기가 난다. 이내 나무껍질과 같은 짙은 갈색 피부에 싱그러운 녹음을 끌어안은 신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녹색 눈동자를 보자마자 모든 걱정이 말끔하게 사라지는 듯했다.
“히페리온!”
[오랜만이구나. 그대.]
살며시 웃는 그의 눈가와 입가에 보기 좋은 주름이 졌다. 정말로 봄이 만연했나 보다. 양복에 행커치프를 꽂듯 히페리온의 가슴엔 하얀 치자 꽃이 걸려 있었다. 얼마나 사랑을 받고 자랐는지, 풍성한 꽃잎은 상처 난 곳 하나 없이 말끔했다.
“아름답게 폈네요. 그 꽃.”
[꽃을 선물해 준 그대의 마음씨가 고와서 아니겠나.]
나직하게 웃은 히페리온은 뒤이어 아스레인을 향해 정중한 인사를 건넸다.
[미리 나와서 반기지 못해 송구할 따름입니다. 나의 주인이시여.]
“그간 무탈했나?”
[물론이지요. 당신께서 제게 하달하신 사명은 앞으로도 영원히 걱정하실 일 없습니다.]
사근사근 대답하는 히페리온의 뒤로 넝쿨에 얽히고설킨 바위들이 보였다. 역시 듬성듬성 놓인 바위는 전부 헤카테였다. 쿠네 숲을 침입하려다가 히페리온의 손에 처리되었는지, 자세도 역동적이기 그지없었다. 자연스럽게 방금 전의 광경이 떠올라 두 손을 마주치며 말했다.
“아깐 대단했어요! 히페리온. 저 진짜 꿈을 꾸는 것 같았다니까요?”
[후후, 그리 말하니 조금 부끄럽구나.]
“부끄럽긴요. 여기 있는 것도 전부 히페리온이 한 거예요?”
히페리온은 엷은 미소를 머금으며 바위가 된 헤카테를 바라보았다.
[순리를 거스르고 태어났으니 자연의 이치대로 돌려보낸 것뿐이네.]
햇빛을 받은 녹색 눈동자는 마냥 따뜻하지만은 않았다. 묘하게 냉랭한 면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리 의외는 아니었다. 자고로 나무란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는 만물을 지켜보는 존재이니까. 헤카테 또한 히페리온에게는 스쳐 지나가는 생물로 느껴졌을 지도 모르겠다.
잠시 상념에 잠겨 있던 히페리온은 여느 때처럼 부드러운 미소로 돌아와 응대했다.
[어서 들어오시죠.]
히페리온이 손짓하자 단단한 벽을 이루고 있던 넝쿨이 스르르 내려가는 것 아니겠는가. 이윽고 성인 한 명이 지나다닐 크기의 구멍이 생겨났다. 꼭 비밀의 숲으로 초대받는 것 같은 설렘에 한껏 들뜬 표정으로 벽을 지나 들어갔다.
쥐 죽은 듯 조용한 바깥과 달리, 뿌리 안쪽은 생태계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이름 모를 마물의 울음소리와 짝을 찾는 새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어깨를 쭉 펴고 숨을 크게 들이쉬자 폐 깊숙한 곳까지 촉촉한 흙과 풀내음이 번졌다.
“이런 분위기가 그리웠어요.”
배시시 미소 지으며 말하자 히페리온은 말없이 내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자연의 품에 안긴 느낌에 한없이 편안해지다가 문득 그리운 이름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누르는요?”
당연히 히페리온 곁에 딱 붙어있을 줄 알았다. 벌써 독립했더라도 내가 왔으니 반겨 줄 줄 알았는데, 누르는 털끝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는 동안에도 대답 대신 바람이 나뭇가지에 스치는 소리만 스산하게 울렸다.
“…히페리온?”
침묵이 이상하리만치 길게 흘렀다. 무거운 적막은 곧 불안으로 번져 나갔다. 끝내 제자리에 멈춰서 쳐다보자 히페리온이 곤란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진즉 그대에게 말하려고 했는데, 그 여린 떡잎이 안 된다고 말리더구나.]
“네? 왜요? 아니, 무슨 일인데요?”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정리되지 않은 생각이 한꺼번에 튀어나왔다. 뭐라도 대답을 해 줬으면 좋겠는데, 히페리온은 조용히 우리를 어디론가 이끌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몸이 천근처럼 무거워지는 듯했다.
대체 무슨 일이지? 왜 나한테 말을 안 한 거지? 누르의 성격이라면, 내가 걱정할까 봐 비밀로 한 것 같은데….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망상이 스쳐 지나갔다. 아픈가? 아니면, 이제 완전히 야생으로 돌아가고 싶어진 건가? 뭔들 좋으니 최악의 경우만 아니었으면 했다.
다시 마주할 수 있기만 하면, 그 맹랑한 목소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 상관없었다.
“히페리온. 왜 말을….”
답답한 마음에 대답을 재촉하려다가 저 너머로 보이는 광경에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나뭇잎과 수풀이 모여 있는 보금자리에 누르가 누워 있었다. 나만 보면 세차게 흔들리던 꼬리가 너무도 힘없이 축 처져 있었다.
“…누…르야?”
굳게 감긴 눈은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도 떠질 기미가 없었다. 마치 영원한 잠에 빠진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