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
남은 시간동안이나마 그의 의지를 따라 주어라. 그 한 마디가 복잡한 머릿속을 단숨에 정리해 주었다. 골머리를 썩이던 문제가 사라져 오랜만에 개운한 아침을 맞이했다. 며칠 내내 제집인 양 내 옆구리를 차지하고 있던 데우스가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아스레인과 한 침대에 누워 있어서 그런가. 어쩌면 어제 일이 신경 쓰여서일지도 모르겠다.
식사를 마친 후, 아스레인은 보여 줄 게 있다며 처음 보는 방으로 안내했다. 방 한가운데 놓인 기다란 책상에 각각 다른 이름이 쓰인 주머니가 있었다. 마른 풀 내음이 코끝을 스치니, 꼭 온실 안에 있는 약제실에 온 것만 같았다.
“이게 다 뭐예요?”
“씨앗이네. 어디서든 잘 자라는 종자만 모아 두었지.”
슬그머니 주머니를 열어 보니 색깔과 모양이 서로 다른 씨앗이 한 줌씩 담겨 있었다. 무려 여섯 종류가 넘는 것들은 대부분 꽃을 피우거나 약용으로 쓰이는 식물이었다. 조심스레 씨앗 하나를 들어 만져 보니 껍질이 여간 단단하지 않았다.
“오, 이정도면 신력도 거뜬하게 버티겠는데요?”
“일부러 생명력이 강한 것들만 준비했네.”
준비했다니?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아스레인은 씨앗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네만 괜찮다면, 이 씨앗에 신력을 불어넣어 주겠나?”
“어… 그래도 돼요?”
“그러려고 가져온 걸세.”
라비린토스에서 살아있는 성물을 퍼뜨리기 위해 이용한 방법을 또 다시 쓰려는 모양이다. 심지어 흔히 접할 수 있고 키우기도 쉬운 종자로 일부러 준비했다니, 아스레인의 철저한 준비성에 새삼 감탄했다.
주머니를 묶어 둔 리본 끈을 하나둘씩 풀면서 한껏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기왕 이렇게 됐으니 주변에 이걸 선물해도 좋겠네요.”
봄은 생명의 순환이 다시 시작되는 계절. 씨앗을 선물하더라도 의심을 살 여지는 없다. 게다가 성물로 인해 그들이 조금이나마 유피테르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금상첨화였다. 반짝거리는 눈으로 씨앗을 찬찬히 훑어보는데, 아스레인이 내 어깨를 잡아 의자에 사뿐히 앉히며 말했다.
“그럼 소포를 보낼 리스트를 정리해 보겠네.”
“어, 제가 해도 괜찮은데…!”
“자네는 신력을 주입해야하지 않겠나.”
가벼운 미소를 머금은 아스레인은 허리를 숙여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쪽, 귓가를 스치는 소리가 가슴을 살근살근 간지럽혔다. 실실 눈웃음을 지으며 올려다보자 천천히 떨어지던 입술이 다시 와 닿았다. 쪽, 쪽. 눈가와 콧잔등에 온기를 남긴 아스레인은 내 머리를 헝클이며 말했다.
“그럼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부탁하네.”
“네. 맡겨만 주세요!”
씩씩하게 대답하곤 눈앞의 씨앗에 집중했다. 주머니가 여섯 개나 되지만, 신력을 잘 분배하기만 한다면 그리 힘들진 않을 것이다. 가장 왼쪽에 놓인 꽃 씨앗부터 양손으로 들고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두꺼운 껍질 안에 있는 생명이 신력에 억눌리지 않도록, 섬세하고도 정밀한 작업이었다.
후우- 옅은 호흡을 내쉬며 천천히 눈을 떴다. 짙은 갈색 씨앗 주변으로 희미한 막이 둘러져 있었다. 성공이다. 이젠 요령이 생겨서 많이 힘들지도 않았다.
“잘 자랐으면 좋겠네….”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씨앗을 꼬옥 쥐었다가 놓고 다음 주머니를 들었다. 그 순간 지척에서 인적이 느껴졌다.
“뭐하는 거예요?”
불쑥 튀어나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어깨를 꿈틀 움츠렸다. 하필 주머니를 놓치는 바람에 씨앗이 와르르 쏟아져 책상을 어지럽혔다. 정작 나를 놀라게 한 장본인은 씨앗을 손가락으로 튕기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많이 놀랐어요?”
“…그럼 안 놀라겠어요? 갑자기 튀어나오는데.”
“앞으로 예고라도 하고 올까 봐요. 신탁을 내리는 것처럼… 후광이라도?”
후광 같은 소리하네. 기왕 할 거면 제대로 왕이 행차할 때처럼 대취타라도 울리지 그러나. 가늘게 뜬 눈초리로 흘겨보니, 데우스는 한쪽 눈썹을 짓궂게 들썩였다. 혹시 어제 일로 위축되었을까 봐 걱정한 시간이 아까울 정도였다.
“기왕 할 거면 왕이 행차할 때처럼 악사들까지 모으지 그래요?”
은근히 비아냥거리며 흩어진 씨앗을 주워 모았다. 웃기려고 한 농담은 아니었는데, 데우스는 자그맣게 쿡쿡 웃었다. 그러곤 함께 씨앗을 집어 주머니에 담아 주며 물었다.
“근데 뭐 하는 거예요?”
“씨앗에 신력을 담고 있어요. 널리 퍼뜨리면 좋을 것 같아서요.”
“신력을…?”
데우스는 테이블에 남아있던 씨앗을 들고 보석을 감정하듯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이런 식으로 성물을 만들 줄은 몰랐는데.”
호기심으로 번뜩이는 눈동자는 마치 새로운 물질을 발견한 과학자 같았다. 그 후에 데우스는 내 손에 직접 씨앗을 얹어 주며 어서 해 보라는 듯 눈치를 주었다. 부담스러운 시선을 애써 무시하곤 무사히 마지막 씨앗에까지 신력을 불어넣었다.
“…됐다.”
가볍게 한숨을 몰아쉬며 일을 마치자 데우스는 물개 박수를 쳤다. 우와, 하고 터져 나온 탄성이 악의 없이 정말로 신기해하는 것처럼 들렸다. 환한 미소를 보니 괜스레 마음이 약해져서는 넌지시 물었다.
“이따가 친구들을 만나러 갈 건데, 같이 갈래요?”
한참 씨앗을 구경하던 데우스가 문득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하루 사이로 친절해진 내 태도가 영 이상했는지, 묘하게 굳은 얼굴로 눈만 끔뻑였다. 왠지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아 그에게 건넨 호의를 냉큼 주워 담았다.
“싫으면 말고요.”
“아니, 그건 아닌데….”
의아한 표정을 짓던 데우스는 급기야 의심하는 투로 말했다.
“뭐예요? 왜 이렇게 순순하게 나와요?”
옆얼굴을 쳐다보는 시선이 얼마나 따갑던지, 이러다 탄내가 날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짐짓 모르는 척 눈길을 피하자 데우스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어제 했던 말 때문인가?”
그냥 흘려 넘겨 버리면 될 것을 나도 모르게 손을 움츠린 모양이다. 눈 하나 깜빡 안 하던 데우스의 얼굴에 당황하는 빛이 스쳐 지나갔다.
“…진짜였네.”
혼잣소리로 웅얼대는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원체 마음이 약한 줄은 알았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요.”
“…내가 동정해도 기분 나쁘진 않다면서요.”
“그야 그렇지만, 만약에 내가 유피테르랑 짜고 수작부리는 거면 어쩌려고 그래요?”
데우스는 내 쪽으로 상체를 완전히 기울이곤 턱을 괴었다. 오른팔이 그와 착 달라붙어 있었으나, 온기는커녕 차갑기만 했다. 이내 기다랗게 흘러내린 회색 머리카락이 내 팔을 간질이듯 살랑살랑 흔들렸다.
“죽이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면, 세계를 버리고… 불쌍해 마지 않는 나를 택할 건가요?”
숨결이 섞인 은근한 속삭임에 마른침을 삼키며 옆을 돌아보았다. 방금 전만해도 웃고 있던 데우스가 어느새 울상이 되어 있었다. 내게 팔짱을 끼고선 가련한 표정을 짓는데, 툭 건드리기만 해도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태오. …실은 죽고 싶지 않아요. 아직 못해본 게 너무 많은데….”
가련하게 떨리는 목소리에 일순 마음이 흔들릴 뻔했다. 하지만 잊어선 안 된다. 이 어린 소년의 본체는 영물에 가까운 능구렁이라는 사실을.
곧바로 목걸이를 잡고 칼자루를 꺼내어 데우스를 향해 휘둘렀다. 휙! 망설임 없이 허공을 가르자 검신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 빛줄기 남았다. 이윽고 안개처럼 흩어진 광채 뒤로는 의자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내게 착 달라붙어 있던 데우스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하아, 하아….”
그가 앉아 있던 자리를 노려보며 거친 숨을 내쉬는데, 등 뒤에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곧바로 뒤를 돌아보니 데우스가 제 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며 샐쭉 웃었다.
“하마터면 머리카락이 잘릴 뻔했잖아요.”
“솜털도 안 다쳤으면서….”
후후, 여유를 되찾은 웃음소리가 능글맞게 들렸다. 이내 데우스는 아직 칼자루에 남아 있는 검신을 미술품 평가하듯 찬찬히 훑어보았다. 손끝으로 칼날을 건드리는 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전보다 날이 더 예리해진 것 같네요. 이정도면 안심해도 되겠어요.”
“애초에 선택을 번복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신의의 검을 다시 목걸이로 돌려보냈다.
“데우스 말대로, 내겐 지켜야 할 것이 많으니까요.”
희생할 운명이 불쌍하다고 생각해도 때가 되면 반드시 그 목숨을 내 손으로 거둘 것이다. 유피테르는 앞으로 한 발 나아가기 위해 사라져야 할 존재였으니까. 굳은 결의를 보이자 데우스는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좋네요. 그러니까 괜히 마음 쓰지 말고….”
“그러니까.”
아직 할 말이 남았기에 불쑥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데우스가 사라지기 전에 호의를 베푸는 건, 순전히 제 마음이에요.”
서서히 커져가는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항상 나보다 수 초 앞을 내다보는 그이지만, 이번 일만큼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나 보다. 놀람 뒤에 당혹, 그리고 혼란스러움까지 뒤섞인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드디어 만연해 있던 미소가 사라진 것이다.
그 후로도 한참동안 나를 바라만 보던 데우스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러면 더….”
뒷말은 채 목구멍을 넘지 못하고 허공으로 흩어져 버렸다. 무어가 그리 후회되는지, 날카로운 송곳니로 입술을 살짝 짓이겼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아스레인이 들어왔다. 내게 보여 줄 리스트를 들고 온 아스레인은 무심하게 데우스를 흘겨보며 말했다.
“와 있었군.”
“다시 갈 거예요.”
“굳이 그럴 거 있나. 편한 만큼 있다가게.”
눈에 띄게 수그러든 태도에 데우스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가 이렇게까지 감정적 동요를 내비치기는 처음이었다. 어떤 도발을 해도 금세 원래대로 돌아오는 사람이었는데. 어지간히 당혹스러운 데우스는 마른세수를 하며 아스레인을 추궁하듯 물었다.
“…왜 당신까지 그러는 거예요?”
“뭐가.”
“지금껏 날 못마땅하게 여겼잖아요.”
“지금도 못마땅하다만.”
전처럼 백이면 백 받아치긴 해도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고작 둘이 눈만 마주쳐도 저릿저릿하게 느껴지던 긴장감은 이제 먼지만도 못해졌다. 뭔가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는 걸 느꼈는지, 데우스는 최후의 수를 두었다.
“내가 아버지라고 불러도 가만 둘 거예요?”
“…이제 네가 뭐라고 부르든 관심 없다.”
“허.”
바람이 빠지듯 허무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데우스는 꼭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또 다시 헛웃음을 흘리며 혼잣말을 했다.
“진짜 알다가도 모를 사람들이네….”
기분 탓일까. 그리 말하는 데우스에겐 싫은 기색 하나 없었다. 살짝 휘어진 눈매나, 약간 상기된 볼이 왠지 모르게 기뻐 보였다. 우리를 이해할 수 없다며 웃는 얼굴에서 처음으로 진심이 느껴졌다. 애써 본심을 지우려고 해도 내겐 보였다.
얼핏 그의 얼굴에 스치는 감정은 설렘이었다.
그 후로 아스레인은 리스트대로 소포를 보내러 갔고, 나는 데우스와 함께 안겔루스 대학으로 향했다. 막 수업이 끝난 그들에게 신력이 담긴 씨앗을 자그마한 주머니에 담아 주었다.
“선물이에요. 금세 새싹이 나올 거예요.”
가장 먼저 꽃 씨앗을 받은 이는 아이리스였다.
“아, 나 이런 거 잘 못 키우는데.”
“이번 기회에 키워 보는 거죠.”
주머니 안을 흘끔 들여다보는 눈동자에 곤란한 기색이 가득 묻어났다. 고작 씨앗을 받았을 뿐인데, 마치 비오는 날 상자 안에 있는 새끼고양이라도 발견한 양 심각해했다. 이내 아이리스는 씨앗을 재킷 안쪽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고개를 휙 돌렸다.
“하… 새싹 안 나와도 난 모른다?”
“기대하고 있을게요.”
“아오씨….”
그 다음으로 세잔에게 그늘에서도 잘 자라는 씨앗을 주었다. 햇볕이 없어도 푸른 잎을 내는 식물이 꼭 아버지의 그림자 아래서도 바르게 자란 세잔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세잔은 주머니를 받자마자 결의에 찬 눈을 빛내며 말했다.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세잔은 왠지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그럼 일단 도서관에 가서 원예 책을….”
“하하, 그렇게 신경 안 써도 알아서 잘 자랄 거예요.”
마지막으로 진에게 약초 씨앗을 건넸다. 약초학과답게 식물을 다루는 데는 원체 뛰어났기에 무어라 부탁할 말이 없었다. 대신 데우스와 가장 친했던 친구라서 인사를 시켜 주고 싶었다. 지금 당장 어떻게 되진 않겠지만, 앞날이 어찌 될지 모르니까.
“이제 슬슬 가려고요.”
“아, 벌써…가 아니겠네. 조심히 다녀와요.”
아쉬운 인사를 건넨 진은 곧 내 뒤에 서있는 데우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시 여기로 돌아올 거죠?”
데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으로서 살아온 그에게 약속이란, 남들과는 사뭇 다른 의미를 가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탓에 확신으로 차 있던 진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 갔다.
“설마 연구 결과도 안 보고 갈 생각은 아니죠? 말린 토타 꽃을 갈아서 넣어 보라면서요!”
“…….”
“나중에 우리, 공동 연구로 논문도 내야죠. 학회 때 발표도 하고!”
학구열로 이글이글하게 불타는 진은 어느새 데우스와의 미래까지 그린 모양이다. 듣기만 해도 행복한 이야기지만, 데우스는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에 진이 “데우스!” 하고 억울한 표정을 짓자 그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돌아올게요.”
그 후로 데우스는 해가 질 때까지 진과 함께 약초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이리스는 그게 뭐 재밌냐고 핀잔을 던졌고, 세잔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열심히 경청했다. 그 평화로운 모습을 보면서도 단 한 번도 마음 편히 웃을 수 없었다.
돌아온다는 약속은 과연 지켜질 수 있을까. 아니면, 신이 한 최초의 거짓말이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