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6 (246/305)

#246

창공을 자유롭게 쏘다니는 새는 깊은 바다 속 풍경을 모른다. 심해를 마음껏 유영하는 물고기는 평생 구름의 형태를 알지 못한다. 영생을 사는 자에게 죽음이란, 새의 심해이자 물고기의 하늘 아니던가. 데우스 또한 그런 줄 알았다.

…그의 입에서 소멸이란 단어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뭐 그리 놀라요? 알고 있는 거 아니었어요?”

천천히 고개를 젓자 데우스는 유감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몰랐다. 전혀. 그야 데우스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늘 웃고만 있었다. 그 환한 미소에 죽음을 향한 두려움은 전혀 엿볼 수 없었다. 그래서 그가 여태 걸어온 길은 볕이 드는 꽃밭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설마 길마다 놓인 꽃이 죽은 자를 기리는 하얀 국화인 줄, 누가 알았겠는가.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죽음을 앞두고도 태연한 그를 이해하기 어려워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내가 유피테르를. …아니, 당신을 죽여야 한다는데.”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죽음을 계획하는데, 그는 서슴없었다. 두 번의 기회는 없다며 정확히 심장을 찌르라고 했다. 심지어 아무것도 없는 내게 칼을 직접 쥐여 주었다.

무엇보다 나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이 와중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얼굴이었다.

“날 걱정해 주는 거예요?”

또 웃는다. 죽음이라곤 모르는 아이처럼.

“솔직히 말해서 이해가 안 돼요.”

그 해사한 웃음이 나의 정신을 갉아먹는 듯했다.

“평생 결계 안에만 있다가 이제 겨우 나온 거잖아요. 물론 계속 당신을 의심한 제가 할 말은 아니에요. 아닌 거 아는데, …전 당연히 데우스가 계속 살아가는 줄 알았어요.”

“내가 유피테르의 육체를 차지하려고 당신을 돕는 줄 알았나 보네요.”

“…네. 그게 아니고선 달리 도울 이유가 없잖아요.”

몇 번을 곱씹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머리를 살래살래 가로저었다.

“어느 누가 자신의 죽음을 기쁘게 계획하겠어요? 제아무리….”

푸흐, 바람 빠지듯 허탈한 웃음소리가 말허리를 끊었다. “아, 미안해요.”라며 손을 들어 보이는 데우스는 이상하리만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살짝 상기된 뺨이 창백한 피부와 대비되어 더욱 붉게 보였다.

“누군가 나를 동정하는 게 처음이라서요.”

“네?”

“…생각보다 기분 좋네요.”

가늘게 웃음 짓는 목소리가 밤바람처럼 산들거렸다.

동정이라…. 이 무거운 마음이 과연 동정일까? 그리 짧은 단어로 형용할 수 있는 기분이라면, 진즉 뱉어 버렸을 텐데. 복잡한 말들이 목구멍에 얽혀 가슴까지 꽉 억눌렀다. 당장 내일 죽는 걸 모르고 오늘을 사는 기분이 뭔지 궁금하다고 했었나. 이제야 그 질문의 숨겨진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데우스는 내가 이 세계에 온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내가 그 자신을 찌를 검이라는 것을.

“더 빨리 만났더라면….”

데우스는 물결마저 잦아든 호수로 몸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말간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흩어지는 윤슬을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착 가라앉은 저 하늘색 유리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러고도 한참 동안 상념에 잠겨있던 데우스는 이내 입을 열었다.

“태오. 나 같은 건 신경 쓰지 마요.”

휙 고개를 돌려 데우스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의 얼굴엔 웃음기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당신에겐 지켜야 할 이들이 있잖아요.”

“그….”

“유피테르는 감히 볼 수 없는 미래가 바로 앞에 있어요. 그리고 당신과 아스레인은 그곳으로 나아갈 수 있죠. 내가 무슨 말하는지 알겠어요?”

단호한 목소리에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유피테르와 맞서 싸우는 이유가 나와 같다고 했었나. 그 또한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전부를 내걸은 모양이다. 그게 세계인지, 어느 한 존재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의지로 굳게 다져진 얼굴은 이미 결심을 끝낸 듯했다.

“언제든 신의의 검이 필요할 때면, 이 목걸이를 쥐어요. 그리고….”

데우스는 곧 칼을 쥐고 있는 내 손목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그러곤 이곳이 심장이라는 것을 알려주듯 칼자루를 제 가슴께에 끌어다대었다.

“이렇게 찌르는 거예요.”

칼날이 없는데도 마치 그를 찌른 것처럼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자 데우스는 내 손목을 더욱 강하게 그러쥐며 말했다.

“부디 대의를 잊지 마요.”

그 말을 남기고 데우스는 먼지처럼 사라졌다. 고요한 호숫가에 나 홀로 남아 멍하니 그가 서있던 자리를 바라볼 뿐이다. 그가 사라지면서 손에 들린 칼자루도 함께 빛이 되어 사라졌다. 하지만 텅 빈 손은 여전히 천근 같이 무거웠다.

내가 짊어져야하는 책임의 무게려나. 아니면, 데우스가 지닌 죽음의 무게려나.

창창한 호수 앞에 서서 지그시 눈을 감았다. 바람이 저편에 있는 나무를 건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사이로 자박, 자박, 데우스의 발걸음을 따라 바르작거리던 자갈 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그리고…….

“태오.”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환청인가 싶어 돌아보지 않았다. 그 순간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이 어깨 위로 올라왔다.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눈과 마주쳤다.

“아스레인!”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건가.”

“…오랜만에 나르키소스를 보려고 왔어요.”

어깨에 있던 그의 손이 천천히 뺨으로 올라왔다. 계속 호숫가에 서 있어서 그런가. 평소보다 더욱 아스레인의 체온이 따스하게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손에 뺨을 기대고 눈을 감자 아스레인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봄이라도 밤에는 바람이 차네.”

“그러네요. 어서 들어가요.”

어리광부리듯 그의 품을 파고 들어가 허리를 감싸 안았다. 배시시 웃으며 올려다보니 아스레인은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눈가에 입을 맞췄다. 죽음의 그림자에 드리워 차갑게 굳어 있던 몸이 봄볕에 눈처럼 사르르 녹았다.

그 후 아스레인과 함께 서재로 향했다. 아직 처리하지 못한 서신이 한 가득 쌓여 있었지만, 아스레인은 오로지 내게 집중했다.

“식사는?”

“아까 학교에서 먹어서 괜찮아요.”

“거르는 건 아니고?”

“아니에요.”

가볍게 웃으며 서류 뭉치가 놓인 책상으로 다가갔다. 아스레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크고 작은 연회 초대부터 시작해서 혼담까지 이어지니 보기만 해도 어지러웠다.

살짝 흐트러진 서류를 정리하며 아스레인에게 물었다.

“아직 일이 남은 거 아니에요?”

“급한 건 아니네.”

“그래도요.”

나 때문에 그의 일정에 지장이 생기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의자를 뒤로 빼 주며 살며시 웃자 아스레인이 한숨을 내쉬며 다가왔다. 기어이 그를 의자에 앉히고는 어깨를 가볍게 툭툭 두드려 주었다.

“저는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그 옆에 서서 비서처럼 손수 펜까지 들려주었다. 그대로 방해되지 않게 물러서려고 했는데, 아스레인이 내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아스레인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

“말하기 힘든 건가?”

“…네?”

“아무리 봐도 내가 없는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애써 모르는 척해도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긴 어려웠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눈이 내 속내까지도 샅샅이 훑어보는 듯했다. 그럼에도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하자 아스레인은 손을 가볍게 끌어당겨 나를 무릎에 앉혔다. 이내 허리를 감싸 안으며 내 가슴에 얼굴을 묻는 그는 어쩐지 초조해 보였다.

“아무리 나라도, 자네가 그리 입을 다물어 버리면 불안해지네.”

그 말에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또 불안하게 만들었구나. 미안한 마음에 양팔을 벌려서 너른 어깨를 감쌌다. 그가 편히 쉬기엔 너무도 좁고 초라한 품이었지만, 그래도 온힘을 다해 끌어안은 채로 말했다.

“있죠. 아스레인.”

“응.”

“…나중에 유피테르가 사라진다면. 정말로 이 세계가 공존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아스레인은 뭘 하고 싶어요?”

데우스는 유피테르가 상상하지 못한 미래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고 말했다. 마물과 인간의 공존. 그건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단언한 것이자 아스레인의 오랜 염원이었다. 만약 그 미래를 쟁취한다면, 아스레인은 책임이란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예전에는 쉬고 싶다고 했잖아요. …그 마음, 여전해요?”

잔잔한 고요가 방 안에 찾아왔다. 그 침묵이 긍정이라는 것을 알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에겐 살아가는 매순간이 업이었으니, 모든 걸 내던지고 쉬고 싶을 만도 하다.

그러나 문득 일어오는 불안감을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혹시… 그때도 곁에 있어도 돼요?”

인세를 떠나 쉬고 싶어 하는 그에게 내가 짐이 되진 않을까 걱정이 됐다. 초조하게 눈을 굴리자 아스레인이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나를 올려다보는 그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제법 섭섭한 소릴 하는군.”

“네?”

“계속 함께 있자면서, 이 일이 끝나면 날 두고 가려고 했나?”

“예?! 다, 당연히 아니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황급하게 머리를 가로젓자 아스레인이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윽고 바람에 휘날린 벚꽃이 이마를 스치듯 가벼운 입맞춤이 이어졌다. 입술의 열기가 차차 얼굴로 흘러갈 즈음, 아스레인은 내 뺨을 부드럽게 그러쥐며 말했다.

“나의 빛. 자네가 없었다면, 나는 진즉 길을 잃었겠지.”

왠지 모르게 울컥해 버려서 얼굴을 찌푸리며 입술을 비죽였다. 그러자 아스레인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검지로 내 입술을 꾹 눌렀다. 어서 기분 풀라는 장난처럼 느껴져 픽, 바람이 새듯 웃어 버렸다.

“그래서 뭘 하고 싶어요?”

“함께 여행을 가고 싶네.”

“여행…이요?”

아스레인은 벌써 여러 번 생각해 왔던 일인지, 머릿속에 든 생각을 술술 말했다.

“카르사 대륙에서 벗어나도 좋고. 마음에 드는 곳이 생기거든 오래 머물러도 상관없지 않겠나. 어차피 우리 둘뿐이니까.”

“오…! 좋은 생각인데요? 혹시 대륙밖엔 새로운 마물이 있을까요?”

“물론이네. 신기한 약초도 많을 테고.”

“재밌겠다….”

상상만으로도 흥미진진했다. 아무 걱정 없이, 오로지 연구만을 위한 여행을 아스레인과 함께 떠난다니. 그의 말마따나 마음에 드는 마을이 있다면 1년 정도 죽치고 있어도 좋겠다. 행복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가 다시 현실로 이끌려 내려왔다.

“그럼… 이 질문은 조금 불쾌할 수도 있는데….”

올곧은 금빛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보며 물었다.

“만약 아스레인이 조만간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면, 뭘 하고 싶어요?”

데우스와 마찬가지로 아스레인에게도 죽음은 머나먼 이야기다. 심해를 꿈꾸는 새처럼, 죽기 직전의 시간을 상상해 보진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내 질문에 고민하며 오랜 시간을 보낼 줄 알았다. 하지만 아스레인은 미리 죽음을 염두에 둔 사람처럼 즉답했다.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네.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망설임 없는 목소리에 나 또한 맹세하듯 말했다.

“…저도요.”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거짓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서로가 있다. 내일 당장 죽는다고 하더라도, 손을 뻗으면 단단히 잡아 줄 그가 있다. 하지만 데우스에겐…, 그 삭막한 순백의 우주엔 아무도 없다.

다시금 우수에 잠기자 아스레인이 우려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말을 하나.”

“실은… 아까 호숫가에서 데우스가 제게 이걸 줬어요.”

목걸이를 쥐자 찬란한 빛 무리가 흘러나왔다. 신력이 깃든 빛은 서서히 한 곳으로 모여들더니 어느새 칼자루가 되어 있었다.

“이 검으로 유피테르의 마지막을 거두라고 하더라고요.”

신의의 검을 본 아스레인은 자못 놀란 눈치였다. 설마 데우스가 내게 그런 부탁을 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그래서 일부러 더욱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예상한 일이긴 했어요. 모든 일은 유피테르가 죽지 않는 이상 끝나지 않겠죠. 당연해요. 그런데… 하나는 알면서 둘은 몰랐어요.”

아무리 목소리가 떨려도 태연하게 굴었다. 하지만 얕은 연기 따윈 속절없이 몰려오는 감정 앞에 무너질 뿐이다.

“유피테르가 죽으면, 데우스도 사라진대요.”

칼자루에 새겨진 기도문을 보고 싶지 않아 뿌리치듯 손을 털어 버렸다. 그러자 신의의 검은 다시 빛이 되어 목걸이 안으로 스며 들어갔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손을 꽉 쥐며 아스레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이제와 그를 불쌍하게 여기는 것도 우습지만, 어떻게 동정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아스레인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나를 상념의 늪으로 빠져들게 했다.

쓰레기통에 갇힌 기억은 관찰자로 다시 태어났다. 세상이 비틀어지는 것을 보고도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는 존재- 그가 데우스였다. 아무도 그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손바닥이 닳도록 기도하면서 아무도 신이 누구인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 데우스는 기약 없는 기다림을 가졌다. 누군가 자신을 이곳에서 빼내주기를. 누군가 자신을 알아채 주기를.

그러던 어느 날, 세계의 이치에 벗어난 인간이 결계로 흘러 들어왔다. 무력한 관찰자와 미래가 없는 자의 만남이, 먼 훗날을 바꿀 단 하나의 변수였다. 당연하게도 내가 데우스를 감옥에서 빼낼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라고 생각했다. 데우스도 그래서 나를 반기는 줄 알았다. 하지만 실상은 정반대였다.

“자신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는데, 웃고 있더라고요. 아주 환하게… 기쁜 듯이.”

나는 확실하게 유피테르의 숨통을 끊을 검이고, 데우스는 유피테르의 발목을 잡기 위해 설계된 덫이다. 유피테르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친 데우스의 노력은 처음부터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 사실을 데우스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겠지. 누구보다 자신의 처지를 잘 아는 사람이니까. 그래서일까. 죽음 앞에 태연한 데우스가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대체 어떤 시간을 보내야, 얼마나 체념해야…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웃을 수 있는 거죠?”

모르겠다. 차라리 그냥 못되어먹었으면 좋으련만. 그럼 서로 이용하기 편하잖아. 예전에 라비린토스에 대한 정보를 빼내려 내게 접근한 시지프처럼, 유피테르의 끄나풀이 되어 카르사를 주무르는 미노스 황제처럼. 그저 그런 나를 방해하는 악인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나 같은 건 신경 쓰지 마요. 당신에겐 지켜야 할 이들이 많잖아요.’

선을 긋기 위해 한 말이 도리어 내 마음을 열어 버렸다.

“태어날 때부터 대의를 위해 희생해야만 하는 운명은… 어떤 기분일까요?”

결계 안에서 내가 오기만을 기다렸다던 데우스의 눈빛이 아른거린다. 매일 밤, 내 곁에 웅크려서 온기를 찾던 그 작은 소년이 거슬린다. 드디어 스스로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며 행복해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시간 보내길 좋아하는- 그 천진난만한 뱀이 자꾸만 신경 쓰인다.

“전 모르겠어요. 아니, …알고 싶지 않아요.”

혼자 모든 것을 짊어지고 떠나려는 데우스에게서 아스레인의 옛 모습을 겹쳐 보고 말았다. 이대로는 유피테르를 신의의 검으로 처리하고도 평생 죄책감에 시달릴 것 같다. 혼란스러운 기분을 억지로 누르는데, 차분한 목소리가 내 집중을 끌었다.

“그가 안쓰럽나?”

“…네.”

“무시하지 못할 만큼?”

“…네.”

현실에서 만난 건 고작 일주일 하고도 하루뿐이다. 하지만 여러 신전을 거쳐 오면서 봤던 뱀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너무도 달라서 신경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랜 정적 끝에 아스레인은 내 머리카락을 쓸어 주며 말했다.

“그럼 남은 날까지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주게.”

심해의 저편이 궁금했던 새는 죽음을 예견하고도 바다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건져서도 날개를 닦아 주어서도 안 된다. 서서히 그 숨이 다할 때까지 지켜봐야만 한다. 그것도 모자라 비구름 같은 회색빛 심장을 칼로 찔러야 한다.

“…나라면 그편이 행복할 것 같군.”

하나, 심해의 먹이가 되어도 새는 기뻐할 것이다.

평생을 갇혀 지낸 지독한 하늘에서 마침내 벗어날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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