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
그 후로 일주일간, 데우스는 줄기차게 결계와 현실을 넘나들었다. 이젠 좁은 기숙사 침대를 둘이서 쓰는 것도 익숙해졌다. 느지막이 잠에서 깨면 내 옆에 누워있던 데우스가 태연하게 인사한다.
“좋은 아침이에요.”라며 웃기도하고.
“오늘은 뭘 할 건가요?”라며 하늘색 눈동자를 빛내기도 한다.
데우스는 마치 공전하듯 내 주변을 맴돌았고, 아스레인은 그 자그마한 위성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럼에도 데우스는 늘 웃는 얼굴로 아스레인을 대했다. 속없는 건지, 아랑곳하지 않는 건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덕분에 아스레인도 어느 순간부터 별다른 눈치를 주지 않았다. 이따금씩 데우스를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쉬긴 해도.
우려와 달리 데우스는 현실에 빨리 적응했다. 더 이상 정체를 암시하는 수상한 언행은 하지 않았다. 게다가 틈만 나면 내 친구들과 둘러 앉아 잡담하기를 즐기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특히나 진과는 만나기만 하면 약초에 대해 토론하기 바빴다.
“데우스. 전에 말해 준 대로 배합 비율을 바꿔 봤는데, 효과가 훨씬 좋아졌어요.”
“아, 마비 완화제 만드는 거요?”
“네! 덕분에 보고서는 무사히 넘길 것 같아요.”
진은 연신 데우스에게 감사인사를 전했다. 이토록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는 진은 처음 본다. 꼭 이 세계에 와서 아스레인을 처음 만난 나처럼 한껏 신나 보였다.
“실은 이번에는 말린 토타 꽃을 이용해서….”
약초 토론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아이리스가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신났네. 신났어. 저놈의 풀떼기 얘기가 뭐 재밌다고.”
완전히 몰입한 진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에 불현듯 옛날 일이 떠올랐다. 진 못지않게 아이리스도 정교한 마법진 앞에서 아이처럼 신이 나서 주절거렸었지. 조용히 눈치를 살피다가 흘러가는 투로 중얼거렸다.
“…아이리스도 마법 얘기할 때 저러던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시선이 날아와 뺨에 꽂혔다.
“야. 너 전부터 자꾸 그럴래?”
“장난이죠. 장난.”
입을 합! 다물고 곁눈질로 흘끔거리자 아이리스는 헛기침하며 말했다.
“아무튼 진이랑은 잘 맞는 것 같네.”
“그러게요. 전에 보니까 세잔이랑도 잘 지내던데.”
“하는 말이나 행동을 보면, 약간 애늙은이 같단 말이지.”
정확히 진실을 꿰뚫는 말에 뜨끔했다. 애늙은이가… 맞긴 하지. 소년의 거죽을 쓰고선 카르사 제국과 동갑이니까. 괜히 혼자 찔려서는 어색한 웃음으로 화제를 돌렸다.
“아이리스는 아직 친해질 생각 없어요?”
“딱히. 그래도 처음 봤을 때랑 느낌은 많이 다르네.”
“어떤 식으로요?”
“그냥 평범한 애 같아.”
설마 아이리스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부터 이상한 광경을 목격한 나머지 데우스를 의심하지 않았었나. 그런데 아이리스의 눈빛엔 전과 같은 경계심은 묻어나지 않았다.
“뭐, 그렇다고 아예 믿는 건 아니고.”
아이리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덧붙였다. 그 태도 변화가 신기하긴 해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야 내 눈에도 지금의 데우스는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한 소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무리에 껴서 즐겁게 웃는 그를 볼수록 확신이 들었다.
“…그간 쓸쓸했나 봐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겠다고 친구를 사귀겠단 말 따위- 역시 변명이었다. 스스로가 인지하고 있든 못하든, 결계에 갇혀 있던 데우스에겐 온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영겁의 세월을 홀로 떠나보낸 아스레인이 그러했듯.
그렇게 오늘도 데우스 덕분에 떠들썩한 하루가 저물어 갔다. 지는 해를 뒤로 하고 기숙사를 떠나 아스레인의 저택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일상은 즐겁다만, 이제 슬슬 다음 행선지를 정해야만 했다.
교수회관과 이어진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조각상은 기다렸다는 듯 우리를 서재로 안내했다. 넓은 책상 위에 펼쳐진 지도엔 아직 건재한 신전이 속속들이 보였다.
“어디로 가야할까요?”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아스레인이 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신경 쓰이는 곳이 있긴 하다만….”
“어디요?”
“결국 유피테르가 노리는 게 마물이니, 다른 이들도 안전하진 못할 걸세.”
지도 위를 배회하던 손끝이 녹음이 우거진 숲에서 멈췄다. 휘갈긴 글씨로 적혀있는 숲의 이름은 너무도 익숙한 것이었다.
“여긴… 쿠네 숲이잖아요.”
치자 꽃과 푸르른 녹색으로 물든 그 아름다운 숲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아드 쿠네를 계기로 보호소를 떠난 마물들은 물론이고, 히페리온과 누르도 그곳에서 살고 있다. 그 평화로운 장소에 유피테르의 마수가 닿을지도 모른다니 일순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윽고 아스레인은 쿠네 숲의 동쪽으로 맞닿아 있는 신전을 가리켰다.
“광명의 신, 엘렉트의 신전이 이곳에 있네.”
“생각보다 멀지 않네요….”
분명 히페리온이라면 쿠네 숲에 사는 다른 마물까지 지켜 주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 걱정이었다. 히페리온의 힘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만, 닉스가 위험했던 일을 겪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준비되는 대로 출발하죠.”
엘렉트의 신전으로. 부디 다시 만나는 그들이 별 탈 없길 바랐다.
이후 아스레인이 서신을 처리하는 동안, 조용히 저택 밖으로 나왔다. 오랜만에 맞이한 리리오페 호수는 여전히 밤하늘처럼 고요했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어두운 수면을 들여다보니, 곧이어 높은 울음소리가 귓속을 찔렀다.
끼이익- 물살을 만들며 빠르게 다가오는 그림자에 반갑게 인사했다.
“나르키소스…!”
부름에 대답하듯 수면 위로 기다란 몸체가 튀어 올랐다. 나르키소스의 수경에 반사된 달빛이 눈가를 아른거렸다. 곤란한 일이 생기기 전에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로 허공에 손만 뻗었다. 이윽고 손바닥에 물기를 가득 머금은 매끈한 비늘이 닿았다.
“잘 있었어? 혼자 심심했겠다.”
살갑게 웃으며 몸을 쓰다듬어 주자 나르키소스가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냈다. 연신 제 머리를 손바닥에 비벼오기에 꼭 강아지를 대하듯 “착하지.” 하고 속삭였다. 시야에 걸쳐지는 광경만 봐도 흐뭇해서 저절로 미소가 흘러나오던 그때였다.
갑자기 나르키소스가 등줄기에 돋아난 지느러미를 바짝 세웠다. 기분 좋게 퍼지던 울음소리도 뚝 끊겼다. 내 손길마저 거부한 채 어딘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래?”
걱정스럽게 물어도 나르키소스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한껏 경계하는 듯했다. 설마, 하고 고개를 돌린 순간 내 뒤에 서있는 소년을 발견했다.
“…데우스.”
“아름다운 마물이네요.”
나르키소스를 훑어보는 하늘색 눈동자가 호기롭게 빛났다. 그 따가운 시선을 위협으로 받아들였는지, 나르키소스의 온몸을 둘러싼 비늘이 날카롭게 섰다. 한껏 움츠린 모습은 공격하려는 신호라기 보단 겁에 질려 제 몸을 지키려는 듯했다.
이러다 데우스를 공격이라도 하면…! 불길한 생각에 서둘러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 찰나의 순간 나르키소스가 몸을 돌려 호수 안으로 숨어 버렸다. 마물은 자존심보다 생존에 충실한 생물이다. 본능적으로 자신이 눈앞의 소년을 이기지 못하리란 사실을 알아채고 호수로 도망친 것이다.
“아, 가 버렸네.”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에 데우스를 신경질적으로 돌아보았다.
“왜 겁을 주고 그래요?”
“내가 뭘 했다고요.”
“나르키소스를 노려봤잖아요.”
“그건 쳐다본 거예요. 신기해서.”
다짜고짜 몰아붙이자 데우스는 오히려 억울하다며 입술을 비죽거렸다. 하도 평범한 인간 사이에 묻혀 있다 보니, 자신이 마물에게 미움 받는 신력 덩어리라는 사실을 잊은 모양이다.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체념한 표정으로 데우스에게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에요?”
“다음 행선지를 정한 것 같던데요.”
행선지라는 말에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전부 엿들었어요?”
“고의는 아니었어요. 목걸이를 통해 흘러 들려온 거지.”
퍽 단호하게 청렴결백하다고 말하는 데우스를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야 나도 그 목걸이로 한때 유피테르의 시야를 원치 않게 엿봤으니까. 엘렉트 신전으로 향할 계획을 순순히 인정하자 데우스가 짙은 미소를 지었다.
“있죠. 태오.”
괜히 뜸을 들인 그는 밤바람처럼 은근하게 속삭였다.
“당신도 알고 있죠? 머지않아 유피테르와 부딪치게 되리란 걸.”
미래를 예견하는 눈이 초승달처럼 곱게 휘어졌다. 그 미소가 매혹적이기보다도 섬뜩하게 느껴지는 건, 나의 생각을 그대로 읽혔기 때문이겠지. 순식간에 달라진 공기에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답했다.
“…당신이 그랬잖아요. 제 육체를 차지하기 위해서 올 거라고.”
“맞아요. 몸을 위해서든, 그 신력을 흡수하기 위해서든… 유피테르는 반드시 당신 앞에 나타날 거예요.”
데우스는 내 주변을 천천히 맴돌기 시작했다. 자박, 자박. 자갈 위를 걷는 소리가 메트로놈처럼 일정하게 들렸다. 자박, 자박. 일각을 쪼개며 들려오는 소리에 서서히 숨통이 조이는 듯했다. 이내 바짝 긴장한 귓가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번 공격에 실패하면, 경계는 더욱 높아지겠죠. 그러니 단번에 제압해야 해요.”
“…아스레인에게 말해 둘게요.”
“아뇨. 태오, 난 당신에게 말하고 있는 거예요.”
아스레인이 아니라 내가 유피테르를 공격해야 한다고? 효율로나 위력으로나 안전성으로나, 그 무엇을 생각해도 아스레인이 나보다 우월했다. 그런데 데우스는 내 생각이 틀렸다며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 마물의 마법은 대단하죠. 순수한 위력만으로는 아무도 대적하지 못할 거예요.”
“그럼 왜….”
“바로 그게 문제예요.”
일순 자갈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멎었다.
“그 마물. 아니, 아스레인의 존재감은 너무 짙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도 그 마력이 지닌 살의를 느끼면 곧장 도망칠 걸요?”
“아….”
“그러니 유피테르는 말할 것도 없겠죠. 아스레인의 마력과 유피테르의 신력은 상극이니, 서로에게 독이 되는 힘인 만큼 경계도 더욱 심해질 거예요.”
마치 새하얀 도화지에 검은 물감이 튄 느낌이려나. 조금이라도 방심하는 순간 아스레인에게 허점을 뚫리고 말 테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을 것이다. 방어가 뚫려 승산이 보이지 않는다면 도망치기도 하겠지. 방금 전, 데우스를 피해 호수로 숨어버린 나르키소스처럼.
“그 경계를 뚫기엔 당신의 힘이 제격이에요. 게다가 자신과 비슷한 기운은 더욱 알아차리기 힘들 테니까 급습하기에도 좋겠죠.”
그제야 데우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아스레인이 시선을 끄는 사이,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라는 거겠지. 그러나 애석하게도 내겐 그럴만한 힘이 없다. 마법은 물론이거니와 신력을 다루는데도 미숙하다.
“제가 뭘 어떻게 하면 되죠?”
여전히 그 제안을 믿지 못하는 내게 데우스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말했다.
“신의의 검으로 유피테르의 심장을 찔러요.”
“네? 하지만 그 칼은….”
쓰임을 다해서 벤테온의 신전에 두고 왔다. 아마 지금도 낡아서 금이 간 벽에 걸려 있을 것이다. 다시 그 먼 오르커스 땅까지 가야하나 싶은 순간이었다. 아무것도 없던 데우스의 손에 어느새 칼자루를 들려있었다.
“이걸 어떻게…!”
“이 성물의 주인은 결국 나이니까요.”
데우스는 기도문이 새겨진 칼자루를 내밀며 웃었다.
“아니, 이젠 당신이려나요. …헤메라.”
그리고 데우스는 말했다. 신의의 검이 나를 택했다고. 쓸 만한 무기가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이 검에 깃들어있는 기사의 원념은 과연 내게서 무엇을 보고 싶은 걸까. 자신은 결국 동료를 지키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거뒀지만, 나는 그러지 않기를 바란 것인가.
조심스럽게 칼자루를 건네받으니 손 안에서 기도문이 빛났다. 지키고자 검을 휘두르는 자에겐 축복이 깃들 것이다. 그 글씨가 기도가 아닌, 부담감으로 다가오게 될 줄은 몰랐다.
“어떻게 써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전에 했던 대로 칼자루에 힘을 끌어 모았다. 이번엔 신력만을 정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힘을 그대로 불어넣었다. 지금껏 여러 수모를 지나면서 기꺼이 받아 왔던 마물의 힘까지도.
그러자 마력과 신력이 섞여 오묘한 은빛의 검신이 완성되었다. 가볍게 휘두르니 월색을 머금어 더욱 예리하게 빛나는 칼날이 허공을 갈랐다. 이윽고 데우스는 호기심 가득한 눈을 반짝거리며 자그맣게 탄성을 흘렸다.
“좋네요. 시험 삼아 한 번 나를 찔러 볼래요?”
“데우스!”
“하하, 장난이에요.”
해사하게 웃는 얼굴이 도무지 장난 같지 않아 서둘러 검신을 없애 버렸다. 이내 칼자루까지 시야에서 치우려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이 칼로 유피테르를 없앨 수 있을까. 그럼 신이 죽은 세계는 어떤 미래를 맞이하게 될까? 그보다….
“이 검으로 유피테르를 찌르면, 데우스는요?”
“네?”
“유피테르가 죽으면… 당신은 어떻게 되나요?”
이걸 이제와 묻는 것도 이상하지만, 말 그대로 ‘이제야’ 궁금해졌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데우스는 제 1순위로 의심해야 할 대상이었으니까. 그나마 경계가 사그라지니 혜안으로도 보지 못한 데우스의 미래가 궁금해졌다.
역시 결계에서 나와서 유피테르의 육체를 차지하려나? 그러니 이렇게 흔쾌히 내게 방법을 알려주는 거겠지. 그리 확신했건만, 돌아온 대답은 전혀 달랐다.
“소멸하겠죠.”
“뭐…라고요?”
짧은 한 마디에 돌로 얻어맞은 듯 뒤통수가 얼얼해졌다. 툭 벌어지는 입술을 닫을 길이 없었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멍하니 쳐다보니 데우스는 피식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분리된 존재이지만, 결국 뿌리는 하나예요.”
이내 데우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미소를 지었다. 무서우리만치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그 순수한 미소가 오늘따라 내 가슴에 깊게 새겨졌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창백한 달빛 아래서 은은하게 웃는 그 얼굴은,
“그러니 그가 죽으면 당연히 나도 죽어요.”
도무지 자신을 죽여 달라 부탁하는 사람의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