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
태양이 정오를 알리기 전, 셋이 함께 푸른 수정 숲으로 향했다. 기분이 좋아서 그런가. 오늘따라 유독 하늘이 청청한 느낌이다. 언덕을 부지런히 넘자 익숙한 푸른빛이 우리를 반겼다. 붉은 대지에서 솟아나 천공에 맞닿은 수정은 오늘도 푸르기 그지없었다. 그 사이에서 가장 거대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은 단연 벤테온의 손이었다. 하늘을 향해 뻗은 곁가지는 신에게 닿을 듯 온 힘을 다해 올라가고 있었다.
벤테온의 손앞에서 팔찌를 끄르자 닉스가 걱정스레 물었다.
[바로 해도 괜찮겠어? 쓰러졌었다며.]
“이번만큼은 제가 할 일은 별로 없어요. 필리스가 마음에 들기를 기도해야죠.”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단지 걱정을 덜기 위해 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정말로 필리스 줄기가 이곳을 마음에 들어 해야 무사히 뿌리내릴 텐데…. 팔찌를 풀어 손바닥 위에 올려놓자 줄기에 달린 잎사귀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거친 먼지가 섞인 오르커스의 바람이 썩 나쁘지는 않은 눈치였다.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필리스 줄기를 쥔 채로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았다.
“히페리온…. 나를 위해서 준 선물을 이렇게 써서 미안해요.”
그래도 자비로운 당신이라면 기꺼이 내 뜻대로 쓰라고 허락해 주겠죠. 어쩌면 우리가 처음만난 그 날이, 지금 오르커스 황야를 위한 초석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나는 우리의 만남이 미래를 위한 발돋움이라고 믿고 싶지 않아요. 그렇잖아요? 우린 그저 치자 꽃에 대고 다시 만나자는 맹약을 했을 뿐이니까.
“부디 오르커스에도 봄이…, 붉은 대지 위에 녹음이 드리우는 날이 찾아오기를.”
나지막이 기도를 중얼거리며 필리스에 신력을 불어넣었다. 내게 오래도록 붙어 있던 시간이 도움된 걸까. 설원에서 마주한 나무나 씨앗보다 신력을 주입하기 훨씬 수월했다. 이윽고 신력을 듬뿍 머금은 필리스를 벤테온의 손 근처에 내려놓았다.
눈 깜짝할 새였다. 메마른 뿌리가 본능적으로 물을 찾듯 필리스 줄기는 곧바로 수정에 달라붙었다. 풍족한 마력이 마음에 들었는지, 필리스는 순식간에 벤테온의 손을 타고 올라갔다. 청아한 녹음은 수정을 넘어 점차 거친 대지로 영역을 넓혔다.
그 모습이 꼭 붉은 황야라 불리는 맹수에게서 빼앗긴 봄을 되찾은 것 같았다.
“와…!”
어느새 벤테온의 손은 파릇파릇한 넝쿨에 둘러싸여 새롭게 태어났다. 오르커스 황야는 더 이상 버려진 불모지가 아니다. 어딜 둘러봐도 봄을 끌어안은 녹색뿐이었다. 앞으로 푸른 수정의 마력이 바닥나지 않는 한, 필리스 줄기는 계속해서 퍼져나갈 것이다. 그럼 언젠가 보금자리를 찾아 떠돌던 동물과 마물이 찾아와 오르커스에 활기를 더하겠지.
어쩐지 가슴이 벅차올라 한동안 벤테온의 손을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닉스와 아스레인도 생명이 퍼져나가는 장엄한 광경을 말없이 눈에 담았다. 얼마 후, 닉스가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아름다워. 헤메라.]
“정말요?”
[네 손길이 닿은 곳은 늘 아름답게 변했지.]
“…과찬이에요.”
민망한 웃음을 짓자 닉스는 짓궂게 한쪽 눈썹을 찡긋 올렸다.
[이제 그 엔젤인지, 안겔인지 하는 학교로 돌아가는 거야?]
“그래야죠. 닉스는요?”
그만의 미식을 찾기 위해 또 다시 여행을 떠나려나. 아니면, 아예 카르사 대륙을 떠나려나. 어디로 튈지 모를 닉스였기에 앞으로의 행보가 궁금했다. 별안간 주변을 휘둘러본 닉스는 뜻밖의 대답을 내놓았다.
[당분간 여기 있을까 해.]
“오르커스 황야에요?”
[응. 나름 마음에 들었거든. 헤메라의 손길이 닿아서 그런 것도 있고.]
닉스는 천천히 푸른 수정 위로 손을 얹었다. 곧장 순도 높은 마력에 반응한 필리스 넝쿨에서 한껏 푸르른 잎사귀가 돋아났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에 자애로운 빛이 서렸다. 죽음과 절망을 먹는 닉스에게서 설마 히페리온의 면모를 볼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이내 평소대로 돌아온 닉스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엇보다 오르커스 만큼 조용한 곳을 찾긴 힘들거든.]
“그건 그렇지만, 괜찮겠어요? 여긴… 그리 좋은 기억이 남은 곳이 아니잖아요.”
[내가 여기서 죽을 뻔했으니까?]
직설적인 물음에 머릿속으로 끔찍했던 순간이 스쳐 지나갔다. 절벽을 볼 때마다 매번 생사를 넘나들던 그때를 떠올리지 않을까. 물론 어디에 머물건 닉스의 마음이긴 하지만, 그를 이곳에 두고 가는 내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그런데 닉스는 그날의 일은 전부 잊은 듯 가벼운 투로 말했다.
[하지만 여긴 밤과 낮이 맞닿은 곳이기도 하잖아?]
밤과 낮이 맞닿은 곳이라. 그의 말마따나 오르커스 황야는 새벽 여명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하지만 진짜 의미는 그게 아니겠지. 예상치 못한 말에 느닷없이 감동을 받아버렸다. 바보처럼 눈만 끔뻑이니 닉스의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그러고 보니 난 네게 두 번이나 도움을 받았네.]
“저도 여러모로 닉스에게 도움을 받았는걸요.”
[그런가? 이 정도면 우리는 하늘이 점지한 운명….]
능글맞은 말이 채 끝내기도 전에 옆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닉스를 노려보는 아스레인의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예전보다 훨씬 빈틈이 없는 탓에 닉스는 순순히 물러서며 말했다.
[하아, 알았다니까. 거참~ 장난도 못 치게 하네.]
“장난이 아닌 걸 누가 모르겠나.”
가늘게 뜬 눈이 의심으로 빛났지만, 닉스는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곤 내게 다가와 부드럽게 손목을 그러쥐었다. 이내 히페리온의 팔찌가 있던 자리에 하얀 실이 겹겹이 둘러졌다.
“이게 뭐예요?”
신기하게 쳐다보니 닉스가 내 손목을 감싼 실을 손톱으로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네게 문제가 생기면, 이 실이 저절로 끊어질 거야. 그 즉시 널 구하러 올게.]
“…고마워요. 닉스.”
[뭘 이런 걸 가지고.]
기분 좋은 미소를 지은 닉스는 슬쩍 아스레인을 흘겨보며 중얼거렸다.
[애초에 네 곁에 극성인 교수님이 있는 한 내가 올 일도 없겠지만.]
은근히 비아냥대는 어조에 아스레인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 상황을 지켜보는 내 마음은 외줄타기라도 하듯 조마조마해졌다. 불안하게 눈치를 살피자 아스레인은 애써 화를 죽이며 말했다.
“알고 있으면 괜한 수작 부리지 마라.”
[이게 왜 수작이야? 순수한 마음이지.]
“순수한 마음은 다 죽었나보군.”
[그런가?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매번 태오한테 수작을 부리니까 그러지.]
길게 늘어지는 말꼬리에 아스레인은 피식 웃었다. 저게 오만상을 찌푸리는 것보다 위험한 신호라는 걸, 이젠 너무도 잘 안다. 역시나 아스레인의 손에 금빛 마력이 모여들기 시작됐다. 헤어지는 순간까지 서로 신경을 긁으려는 모습을 보니 진짜 가족이긴 한가 보다.
“아하하! 해가 지기 전에 출발하죠. 아스레인.”
냉큼 아스레인의 팔을 붙잡아 끌었다. 힘들게 퍼뜨려놓은 필리스 넝쿨이 전부 날아가게 둘 순 없지. 다행히 아스레인은 내 부탁에 못 이겨 화를 속으로 삭였다. 이때다 싶어 얼른 닉스에게 작별을 고했다.
“잘 있어요. 닉스.”
[심심하면 만나러 갈게.]
아무도 몰래. 닉스가 한쪽 눈을 찡긋 윙크하며 은밀하게 속삭였다. 평소라면 웃어 넘겼을 농담에도 옆에 아스레인이 있어서 그런지 가시방석에 앉은 듯했다. 또 다시 부딪치기 전에 얼른 떠나야겠다. 황급히 인사만 하고 아스레인과 함께 걸음을 돌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언덕을 넘다 말고 조용히 고개를 돌려 뒤돌아보았다. 어느새 닉스는 우리가 처음 재회했을 때처럼 벤테온의 손에 앉아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때보다 생기 있는 붉은 눈동자는 오르커스 황야가 아닌, 그보다 멀리 있는 걸 내다보는 듯했다.
저 너머에 있는 미래를.
***
며칠 만에 돌아온 학교는 한창 바쁜 시험이 끝나 여유로웠다. 곧바로 진과 세잔, 아이리스를 만나려다가 얌전히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아스레인이 교수 회의를 하러 간 사이, 혼자 연구실 책상에 지도를 펼쳤다.
대륙 곳곳에 퍼진 신전을 바라보다가 지금껏 신력을 흡수한 신전마다 자그맣게 점을 찍었다. 원래 니칼의 성전이었던 헤메라 신전을 넘어, 레톤 신전. 그리고 다르곤 신전을 지나 벤테온까지 손길이 닿았다.
유피테르의 신전은 총 12곳. 그 중 4개의 신전을 차지했다. 미미한 숫자 같아도 내게는 의미가 남달랐다. 이걸 영토전쟁에 빗댄다면, 대륙의 반을 차지하기까지 단 2곳밖에 남지 않았다. 유피테르가 내게 열 두 신전을 전부 내어 주리란 생각은 안한다. 아마도 그 전에 내 육체를 차지하러 직접 나타나겠지.
그러니 유피테르와 부딪치게 되는 기점은 아마도….
“내가 여섯 번째 신전에 도착했을 때인가….”
어쩐지 내 숨통을 노리는 칼날이 한 발 앞으로 다가온 기분이었다. 아직 다음 행선지조차 정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 거리는 느낌이다. 결국 도망치듯 지도를 말아 치우고 손님용 소파로 향했다.
딱딱한 팔걸이에 머리를 대고 눕자 가슴 한가운데에서 정화석이 홀연히 빛났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일이다. 아스레인의 피를 먹이면, 곧바로 뱀이 현실로 튀어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뱀은 그날부로 며칠간 조용했다. 분명 이쪽과 저쪽의 통로가 이어졌을 텐데….
“더 필요한 게 있는 건가?”
정화석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지그시 눈을 감아 버렸다. 애초에 결계를 나올 방법은 뱀만 아는 일이니, 나로선 더 이상 도울 수가 없었다. 이대로 수업이 끝날 때까지 쪽잠이나 자야겠다. 자세가 불편해서 못잘 줄 알았건만, 역시 책상에 엎드려서 자는 버릇이 남아있어서 그런지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꿈도 꾸지 않았다. 이따금씩 들려오는 소리가 귀를 간질일 뿐. 사락, 사락. 살짝 열어둔 창문 틈으로 산들바람이 밀려와 커튼이 흔들렸다. 그 작은 소음에 선잠에서 깨어나 무거운 눈꺼풀을 슬그머니 들었다.
…뭐지? 소파 옆에 누군가 서있다. 긴 은발을 휘날리는 미청년은 신부처럼 얇은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아른아른 보이는 옆얼굴이 무척이나 신비로운 그는, 시스템이었다.
언제부터 서있던 건지는 모른다. 한동안 가만히 서있던 시스템은 이내 정화석 위로 손을 뻗으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하지만 목소리가 워낙 작아서 한 단어도 들리지 않았다. 몽롱한 눈을 끔뻑이며 깊게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야?”
그리 말하니 시스템은 놀라지도 않고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다. 파도가 치지 않는 바다를 마주하면 이런 기분일까. 베일 너머로 보이는 붉은 눈동자는 평소보다도 지극히 차분하고 평온했다. 내가 아는 시스템이 아닌 것 같은 느낌에 눈살을 찌푸렸다.
“…시스템?”
다시금 이름을 부르자 시스템은 내게 손을 뻗었다. 잠에 취한 눈가를 덮은 손은 온기 한 점 없이 차가웠다. 얼마나 싸늘하던지, 마치 석상을 만지는 듯했다. 이윽고 시스템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 아직 더 주무시죠. 그간 제대로 못 주무시지 않았습니까.
“으응? 하지만….”
내게 할 말이 있는 거 아니었어? 그보다 내가 잠들어있는 동안에는 함께 잠들어있는 것 아니었나.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시스템은 내 의식 여부와 상관 없나보다. 게다가 그의 손길이 닿은 순간 며칠 밤 샌 사람처럼 잠이 몰려왔다.
서서히 의식이 멀어지던 순간 나지막한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 이 모든 일이 끝나면,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말을 다 듣지 못했는데 속절없이 잠들어버렸다. 그 후 정신이 돌아왔을 땐, 배에서 묘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예전에 책에 깔렸을 때 딱 이런 기분이었는데. 혹시 가위라도 눌린 건가? 으으, 앓는 소리를 내며 가느다랗게 눈을 떴다.
그때 변성기도 지나지 않은 소년의 미성이 들려왔다.
“일어났어요?”
“네에….”
본능적으로 대답하다가 문득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화들짝 놀라 눈을 번뜩 떠보니 웬 미소년이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왜 배에서 무게감이 느껴지나 했더니, 그 소년이 나를 깔고 앉아있었다.
“너…아니, 당신은….”
처음 보는 사람이, 그것도 내 허리춤에 앉아있으니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말까지 더듬으며 휘둥그레 뜬 눈을 깜빡거려도 소년은 의미심장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뒤늦게 소년의 외형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단정한 회색 머리카락에 꽁지만 묶어 어깨 앞으로 길게 흘러내려있었다. 소년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살랑살랑 흔들리는 게 꼭 파충류의 꼬리 같았다. 게다가 겁에 질린 나를 내려다보는 동공은 세로로 길게 찢어져있었다. 소름끼칠 정도로 맑은 하늘색 눈을 보자마자 불현듯 누군가가 뇌리를 스쳤다.
“설마….”
입술을 파르르 떨자 소년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입가에 걸린 미소가 순수하기도, 또 매혹적이기도 해서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윽고 소년은 내 머리 양옆에 손을 짚고서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얇은 회색 머리카락이 내 가슴팍을 간질일 즈음, 붉은 입술이 살그머니 열었다.
“내가 누군지 알겠어요?”
그 모습이 꼭 먹이를 삼키려는 뱀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