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
눈물이 잦아들 때까지 닉스는 계속해서 내 등을 토닥여 주었다. 내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바람에 기뻐야 할 재회가 어째 우울해진 눈치였다. 천천히 마음을 진정시키는 동안, 머리 위에서 은근한 속삭임이 오고 갔다.
[아니, 알았다니까. 지금 달래 주고 있잖아.]
그리 말하는 닉스의 목소리에는 짙은 당혹스러움이 묻어났다. 아무래도 아스레인이 범상치 않은 눈초리로 닉스를 쏘아보고 있는 모양이다.
“저기…닉스.”
품에서 빠져나오려 꼼지락거리자 닉스가 곧바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어어, 그래. 괜찮아?]
“네. …이제 좀 후련해졌어요.”
너무 울었나. 눈가가 홧홧하다 못해 따가운 데다가 목까지 쉰 것 같았다. 큼큼 헛기침을 하니 목 안이 긁힌 것처럼 따가웠다. 인상을 찌푸리며 목울대를 어루만지자 닉스가 대뜸 허리까지 숙여 가며 내 안색을 살폈다. 어째 안절부절못하는 것처럼 보여서 별일 아니라고 말하려는데, 옆에서 불쑥 튀어나온 팔이 우리 사이를 가로질렀다.
“언제까지 붙어 있을 작정인가.”
아스레인은 옅게 혀를 차며 불편한 심기를 내보였다. 잔뜩 날이 선 어조와 달리 나를 대하는 손길은 한없이 부드럽고 정중했다. 얌전히 침대에 앉자 아스레인이 기다렸다는 듯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살짝 올려다보는 눈빛에 걱정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이리도 서럽게 우니 어찌 달래야 할지 모르겠군.”
“…기뻐서 운 거예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니 아스레인이 내 뺨을 가볍게 그러쥐었다. 이윽고 그의 엄지가 눈가를 스치자 따끔거리던 열기가 단숨에 사그라졌다. 그제야 안도한 한숨을 내쉰 아스레인은 다시 닉스를 흘겨보며 중얼거렸다.
“저딴 놈 때문에 네가 눈물을 흘리다니….”
멀뚱히 서 있다가 별안간 죄인이 된 닉스는 어이없는 낯빛으로 말했다.
[애가 좀 울 수도 있지. 왜 그래?]
“그 이유가 너라서 못마땅한 거다만.”
[아니, 우리 태오가 나를 위해 울어 주겠다는데 그쪽이 무슨 상관이야?]
“그야 하나뿐인 연인이니까.”
콜록! 나도 모르게 헛기침이 튀어나왔다. 어떻게 남 앞에서 그런… 부끄러운 이유를 댈 수가 있는 거지? 정작 말을 꺼낸 아스레인은 담담하기 짝이 없었다. 그럼에도 닉스는 보란 듯이 아스레인의 트집을 깡그리 무시해버렸다. 그러곤 나를 향해 눈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나저나 헤메라. 검으로 내 코어를 찌를 생각은 어떻게 한 거야?]
올게 왔구나, 생각해 버렸다. 물론 닉스는 나를 칭찬하기 위해 한 말이었겠지. 하지만 내 머릿속에서 나왔다고 얼버무리기엔 의심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닉스를 위해서라도 진실을 말하는 편이 좋겠지. 두 손을 모아 쥔 채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실은 닉스를 살릴 방법을 알려 준 사람이 있었어요.”
[그래? 누군데? 감사 인사라도 해야겠네.]
“그게….”
쉽사리 말하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자 닉스는 금세 눈치챘다. 예사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납득하기 힘든 이야기지만, 말해야만 했다. 차마 얼굴을 똑바로 마주할 용기는 나지 않아 시선을 바닥에 고정하고서 사정을 설명했다. 줄곧 웃고 있던 닉스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유피테르가 나를 구해 줬다는 거야?]
“엄밀히 말하면 그렇죠. 하지만 저는 뱀과 유피테르가 서로 다른 존재라고 생각해요.”
[허.]
허탈한 헛웃음 소리가 겨울의 입김보다 덧없이 흩어졌다. 납득이 되지 않을 만도 했다. 자신을 타르타로스에 가둔 작자가, 일부러 소모전으로 이끌어 코어를 잠식하려는 계획까지 세운 놈이- 자신을 구할 방법을 알려 준 자와 동일인물이라니. 물론 나는 뱀과 유피테르가 분리된 개체라고 생각하지만, 닉스에게는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릴 것이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닉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래서 그자는 지금 어디 있어?]
“…저 너머예요.”
검지를 뻗어 테이블 위에 있는 정화석을 가리켰다.
“뱀은 예전의 닉스처럼 갇혀 있어요. 그것도 자기 자신이 만들어 낸 결계 속에서요. …스스로에게 버려져 아무도 없는 새하얀 상자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죠.”
[갇혀 있다고?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닉스의 한쪽 입꼬리가 조소를 머금고 샐쭉 올라갔다.
[그쪽은 족쇄가 뭔데? 나처럼 성물에라도 찔려 있나?]
“이름이요.”
[…이름?]
“과거에 버린 이름을 찾으면,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고 했어요.”
카르사 제국을 건국하기 전. 아니, 그보다 더 오랜 과거로 들어가야 한다. 마을을 돌아다니며 기적을 행하던 때마저 그는 스스로를 유피테르라 칭했다. 그러니 태어날 때 가지게 된 이름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근심에 찬 표정으로 말을 삼키는데, 닉스가 대뜸 아스레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칠칠맞게 이름을 흘리고 다니네.]
별안간 유피테르와 세트로 묶인 아스레인은 대놓고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일그러진 표정이 제법 살벌한데도 닉스는 모르는 척 눈웃음을 지었다. 방금 전, 나를 울렸다는 이유로 추궁당한 게 어지간히 억울했던 모양이다.
눈에 띄게 홀가분해진 닉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뭐~ 솔직히 말해서 상관없어졌어. 결과가 무엇이든 내가 눈을 뜰 수 있었던 건, 그자의 덕도 있는 거잖아?]
“그건… 그렇죠. 뱀이 알려 주지 않았더라면 전 아무것도 못했을 거예요.”
함께한 추억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닉스에게 말 못할 죄의식을 가졌겠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뱀은 내게 소중한 닉스를 돌려준 은인이었다. 말없이 고개를 푹 숙이자 닉스는 부드러운 손길로 내 머리를 쓸어주었다. 그러곤 걸음을 돌려 테이블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내가 설마 그 자식에게 고마워하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이내 닉스는 정화석에 연결된 끈을 움켜쥐곤 눈높이까지 들어올렸다. 아스레인의 마력을 흡수한 덕분일까. 허공에서 흔들리는 정화석은 벤테온의 손 못지않게 찬란한 푸른빛을 띠었다. 닉스는 사뭇 싸늘한 눈으로 정화석을 바라보다가 혼잣말하듯 말했다.
[지금 말하면, 그쪽으로 목소리가 전해지려나?]
“아마도요. 일단 문을 만들어 두긴 했는데….”
아직까지 반응이 없으니 저쪽 결계는 어떤 상황인지 모르겠다. 잠깐. 그런데 목소리가 전해진다고 하면 대체 무슨 소리를 하게…? 불길한 예감이 엄습한 순간, 닉스는 평소와 달리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일단 고맙다는 인사는 할게. 나를 살릴 방법을 알려 줬으니까.]
예상외의 반응이었다. 다짜고짜 면전에 대고 욕부터 박을 줄 알았는데. 의외라는 표정으로 바라보니 닉스는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 윙크했다. 하지만 닉스가 다시 정화석을 바라보는 순간, 몽글몽글한 분위기는 단숨에 살얼음판이 되었다.
[좋은 얘기는 이 정도면 됐고. …유피테르라고 했나? 처신 똑바로 하는 게 좋을 거야. 내 목숨을 구해준 건 구해 준 거고, 네놈이 헤메라를 곤란하게 하는 건 또 다른 문제거든.]
또박또박 한 단어씩 내뱉는 어투는 마치 뱀을 잘근 씹어 먹는 것 같았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눈매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는 정화석을 물들인 피만큼이나 진한 선홍색으로 빛났다.
[헤메라에게 해를 가하거든 너는 반드시 내가 죽일 거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칼끝이 나를 향해 있지 않은데도 극도로 긴장되는 느낌이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굳어 있는데, 갑자기 닉스가 나를 휙 돌아보았다. 무서우리만치 번뜩이는 붉은 눈동자에 나도 모르게 어깨를 흠칫 굳혔다. 그러자 닉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이쯤하면 알아들었겠지?]
“하, 하하….”
살인 예고로 이해하지 않으면 다행인 것 같은데…. 속내를 밝히진 못하고 어색하게만 웃는 내게 닉스는 정화석을 내밀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도 현실로 나오지 않는 걸 보면, 아직 결계 속에서 할 일이 남은 모양이다.
묵묵히 정화석을 목에 걸어 다시 옷 안으로 넣었다. 이제 여기서의 일은 끝난 건가? 닉스도 멀쩡해졌고, 벤테온 신전의 불도 흡수했다. 그 사이 여러모로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있었지만, 이젠 더 이상 벤테온 신전에 용무는 없었다.
[곧 여길 떠나겠네?]
“그래야겠죠. 하지만….”
막상 떠나자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넌지시 창밖을 바라보자 닉스가 의아하게 물었다.
[왜 그래?]
“…불안해서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커튼 하나 없는 창문으로 황량한 오르커스 대지가 보였다. 울룩불룩 튀어나온 붉은 바위에는 오늘도 생명의 기운 따위 느껴지지 않았다.
“전에 갔던 다르곤 신전에선 자연물에 신력을 심어 뒀어요. 라비린토스 설원에 사는 신민들과 사제들이 유피테르의 지배에서 벗어났으면 했거든요.”
[자연물에 신력을 심는 게 가능해?]
“다행히도 가능하더라고요. 그래서 더 빨리 퍼질 수 있도록, 믿을 만한 친구에게 신력을 품은 씨앗을 뿌려 달라고 부탁했어요.”
지금쯤이면 라비린토스 설원 곳곳에 새로운 씨앗이 자리 잡기 시작했겠지. 어쩌면 갑자기 꽃이 핀 나무를 둘러싸고 사람들끼리 설화를 만들어 낼지도 모르겠다. 한편, 돌 조각만 굴러다니는 오르커스 황야를 보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런데 이곳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물론 인근에 마을이나 신전을 지키는 사제도 없지만… 이대로 가기엔 마음에 걸려서요.”
불현듯 수정을 가지고 가려던 청년이 떠올랐다. 벤테온의 손과 푸른 수정 숲이 있는 한, 모험가나 보석공은 끊임없이 유입될 것이다. 어쩌면 수정이 섞인 헤카테가 또 다시 등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안전하게 성유물을 심어 두고 가는 편이 좋을 테다. 하지만 어떻게…?
혼자 머릿속으로 끙끙거리는 사이, 곁에 다가온 닉스가 황야를 바라보며 물었다.
[식물이 자라기 힘든가?]
“아무래도요. 여긴 비도 잘 안 내리고, 근처에 수원도 없는 것 같아요. 이 메마른 땅에 먹을 거라곤 수정이 품고 있는 마력뿐이에요.”
가망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젓는데, 닉스가 나른한 어조로 말했다.
[뭐야~ 그럼 됐네.]
“네?”
뭐가 됐다는 거지? 그냥 포기하라는 건가…. 하지만 닉스의 당당한 표정을 보아하니 해답을 찾은 듯했다.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자 닉스는 눈짓으로 내 손목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손목에 차고 있는 거, 필리스 줄기 아니야?]
“맞아요. 그게 왜….”
[그게 뭘 먹는지 잊은 거야?]
그 말에 새로운 물질을 발견한 과학자처럼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 이거다. 필리스 줄기는 마력을 먹고 자라는 식물이다. 그래서 히페리온에게 달라붙은 필리스 줄기가 엄청난 속도로 자라났었다. 그걸 제거하기 위해 마력이 없는 내가 손수 소매를 걷고 나서서 잘라 낸 일까지 떠올랐다.
만약 필리스 줄기에 내 신력을 불어넣을 수만 있다면, 오크러스 황야 전체에 퍼지는 건 시간문제다. 벤테온의 손과 푸른 수정들이 가진 마력이 알아서 필리스 줄기를 키워 줄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붉은 대지가 싱그러운 녹음으로 물들겠지.
성공하리란 확신이 느껴져 냉큼 아스레인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걸로도 될까요?”
“오래 전부터 자네가 지니고 다니던 물건이었으니, 신력을 주입하기 훨씬 수월할 걸세.”
아스레인의 대답까지 들으니 더 이상 걱정할 게 없었다. 줄곧 뿌옇게 안개가 껴 있던 머릿속이 한차례 폭풍우가 지나가고 맑아지는 듯했다. 한껏 들뜨는 기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닉스의 두 손을 덥석 붙잡으며 말했다.
“닉스는 천재예요!”
[어?]
“천재가 분명해요. 전 생각도 못했거든요.”
연방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닉스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진심 어린 칭찬을 들어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그런데 닉스는 기뻐하는 데에 멈추지 않고 몸을 살짝 틀어 아스레인에게 말했다.
[봤지? 지금 이거.]
우쭐대는 표정에 아스레인의 관자놀이에 일순 핏대가 섰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닉스의 손을 놓고 조용히 벽으로 빠졌다. 분위기가 싸하다. 설마 방금 막 깨어난 닉스를 공격하진 않겠지. 한없이 이성적이고, 불필요한 무력 사용을 꺼리는 자애로운 그 마물이….
“뭘 보라는 건가.”
[헤메라가 나보고 천재래. 천재.]
“그래서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아니, 이 망할 영감이….]
그 뒤로 벌어진 일에 대해선 아무 말도 얹지 않기로 했다. 가족 싸움이 원래 그렇지 뭐. 피 한 방울 안 섞인 나로선 서로가 화해하길 기다릴 뿐이었다. 그래도 닉스와 아스레인이 살벌…. 아니, 티격태격 다투는 모습을 보며 행복감을 느끼긴 오랜만이었다.
“태오. 잠시 눈을 감고 있게. 금방 끝나니까.”
[뭐가 끝나? …잠깐만. 나 환자야. 환자라니까?]
“나는 너를 약하게 만들지 않았다.”
모든 것이 올바른 자리로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이대로만 흘러간다면, 더 바랄 것도 없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