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9 (239/305)

#239

잠깐. 나를 통로로 쓰겠다고? 웬만한 부탁에도 끄떡하지 않을 확신이 있었는데, 자신감이 무색하게 단번에 무너져 버렸다. 오래 전, 오케아노스를 육지로 데려가기 위해 내 몸을 기꺼이 내어준 적이 있다.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변화를 겪었던가.

심지어 이번엔 유피테르다. 제아무리 그에게 도움을 받았다지만, 몸을 내어주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자 뱀은 쿡쿡 웃으며 말했다.

- 정확히는 당신이 차고 있는 목걸이지만요.

“네?”

멍청하게 반문하니 뱀이 고개를 까딱여 나를 가리켰다. 그제야 내 가슴께에 자리 잡은 아코니툼의 정화석을 내려다보았다. 설마 이걸 통로로 쓰겠다는 건가? 목에 걸린 끈을 손가락으로 걸어 옷 밖으로 빼내자 푸르스름한 마석이 영롱하게 빛났다.

- 그걸 나와 이어서 결계와 현실을 오고가는 통로로 이용할 거예요.

뱀의 눈동자는 심해에 잠긴 보석을 발견한 듯 만족스러운 빛을 자아냈다. 하지만 나로선 다소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엄지만 한 마석이 무려 결계와 현실을 오고가는 통로씩이나 될 수 있을까. 손바닥에 올려 놓은 정화석을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걸로 가능해요? 이건 정화석일 뿐이지, 공간을 오고가는 능력은 없어요.”

- 하지만 이걸로 ‘나’의 시야를 훔쳐봤잖아요?

“…아.”

- 둘 사이를 연결할 매개체로 이보다 확실한 건 없어요.

최근 들어 유피테르의 기억을 읽는 꿈을 꾸지 않아서 잠시 잊고 있었다. 아코니툼의 정화석은 신력을 몰아내는 것 외에도 다른 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뱀의 말마따나 정화석 만큼이나 확실한 연결고리는 없었다.

그제야 이해하고 나지막이 탄식을 내뱉자 뱀은 퍽 순수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 아니면, 정말로 당신의 몸을 매개로 쓸까요? 사실 그쪽이 더 편한데.

살짝 벌어진 입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번뜩였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탓에 마음을 놓을 새가 없다. 일부러 눈을 가늘게 뜨며 대놓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괜한 소리하지 마시고, 제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나 말해 줘요.”

뱀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머리를 돌렸다. 곡선을 그리며 유유히 앞으로 나아간 뱀은 이내 여러 화톳불이 놓인 제단 앞에 멈춰 섰다. 판도라를 넣어 과거를 엿봤던 물그릇이 어김없이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뱀은 능숙하게 제단 위로 올라가 물그릇 주변으로 둥글게 똬리를 틀었다.

- 자, 아코니툼의 정화석을 이 관분(盥盆) 안에 넣어요.

조심스럽게 목걸이를 빼어 물그릇에 넣으려다가 일순 멈칫했다. 수면에 비친 내 얼굴에선 아직 지우지 못한 일말의 의심이 묻어났다. 옳은 선택일까. 아니, 옳은 선택이어야만 해. 눈을 지그시 감으며 한숨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당신을 믿어도 되는 거겠죠?”

- 아뇨.

“…네?”

단박에 튀어나온 대답에 눈을 휘둥그레 뜨자 뱀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 나를 믿지 말라고 하면 이제와 그만 두게요?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여기서 길게 말해 봤자 뱀의 혀에 당하는 꼴이 되겠지. 입을 꾹 다물고 정화석을 미련 없이 손에서 놓았다. 풍덩, 물에 빠진 정화석은 바다에 스며든 햇볕처럼 투명한 빛을 발하였다. 이윽고 뱀이 날렵한 머리끝으로 수면을 톡 건드리자 둥그런 파동이 퍼져나갔다.

잔물결이 잠잠해질 즈음, 뱀은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 내게 길을 열어라.

그것은 기도문도 주문도 아닌, 명령이었다. 뱀의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나는 순간 물그릇 안에 자그마한 소용돌이가 일었다. 갈수록 좁아지는 소용돌이의 중심부는 마치 터널처럼 보였다. 그 너머에 현실로 빠져나가는 문이 있을 것만 같았다.

어지럽게 흔들리던 푸른빛은 금세 정화석으로 빨려 들어갔다. 한차례 마법이 스쳐 지나간 후, 수면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졌다. 이내 물속으로 들어간 뱀은 입에 정화석을 물어서 내게 건네었다. 고맙다고 말하려던 차, 변성기가 지나지 않은 미성이 또렷하게 들렸다.

- 이제 아코니툼의 정화석에 그 마물의 피만 흡수시키면 완성이에요.

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단어에 정화석을 가져가려다말고 흠칫 굳었다.

“…아스레인의 피는 왜요?”

- 그쪽에서도 길을 열기 위해선 그만한 힘이 필요하거든요. 이를테면, 통행료죠.

현실에서도 문을 만들어야 결계와 길이 이어진다는 건가. 이론은 이해 됐는데, 그 이론을 말하는 쪽이 뱀이라 그런지 영 석연찮았다. 입에 정화석을 문 채로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뱀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허튼 수작 부리면 거래는 거기서 끝이에요.”

- 설마요.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정교하게 세공된 아쿠아마린을 닮은 눈동자에선 타오르는 야망이 느껴졌다.

- 반드시 이 지독한 곳에서 탈출할 거예요.

마침내 뱀의 입에 물린 정화석을 손에 넣는 순간 바닥이 훅 꺼졌다. 절벽에서 떨어지는 느낌에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번쩍 떴다. 흐릿한 시야로 금이 가고 낡아 빠진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건조한 바람에서 느껴지는 텁텁한 모래 냄새에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하아….”

오르커스 황야로 돌아왔다. 횃불 없이도 밝은 방을 보아하니 이른 아침인 모양이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상체를 일으키자 어디선가 다가온 팔이 내 등을 받쳐 주었다. 황량한 대지 위에서 유일하게 피어난 창포 꽃향기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좋은 아침이에요. 아스레인.”

갑자기 기절했다가 깨어난 사람치고는 너무 태평한 인사인가. 허, 하고 짧게 흘러나온 헛웃음이 귓등을 스쳤다. 멋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아스레인이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딱 하루 지났네. 보다시피 신전 안이고.”

이젠 말을 안 해도 내가 무엇을 물을지 아나 보다. 심지어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도 척척 알아챘다. 조용히 마른기침을 하자 아스레인이 기다렸다는 듯 물을 가져다주었다. 이가 빠진 컵을 보아하니 신전의 물건인 것 같다. …설마 성물은 아니겠지.

미지근한 물을 벌컥 들이마시니 몽롱한 머릿속이 맑아지는 듯했다.

“닉스는요?”

뒤늦게 닉스를 찾자 아스레인이 내 어깨 너머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곧바로 고개를 돌리니 옆 침대에 누워 있는 닉스가 보였다. 막 코어를 관통했을 때보다 훨씬 상태가 안정되어 있었다. 목 언저리를 덮은 새하얀 거미줄 모양 흉터도 이젠 정말 흉터로만 남았다.

“다행이네요. 정말… 어떻게 되는 줄 알았는데.”

“신력을 빨아들인 성물은 다시 기도실에 두었네.”

“고마워요. 아스레인.”

무사히 잠들어 있는 닉스를 보니 이젠 앞으로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옷 안에 넣어 둔 정화석을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 두었다. 단순한 꿈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정화석에서는 유피테르의 신력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한 눈에 그 차이를 알아챈 아스레인이 경직된 어조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의식을 잃은 후에… 또 다시 뱀을 만났어요.”

새하얀 결계와 그 안에 갇힌 뱀. 스스로를 유피테르의 일부라고 소개한 뱀은 결계에서 빠져나오고 싶어 하고, 나와 아스레인은 유피테르가 만들어나가려는 미래를 무너뜨리려고 한다. 궁극적인 목표는 달라도 원하는 바가 같으니 이 동맹은 가히 극적인 결과였다.

조심스럽게 결계에서 이루어진 상황을 설명하곤 거듭 사과했다.

“미안해요. 상의도 없이 그런 제안을 받아들여서….”

이건 나 혼자서 정할 일이 아닌데. 아스레인이 화를 내도 변명할 여지는 전혀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이며 입을 다물자 무거운 침묵이 어깨를 짓눌렀다. 바닥에만 꽂힌 시선은 주인을 잃은 강아지처럼 이리저리 배회했다. 얼마간의 정적 끝에 땅이 꺼질듯 깊은 한숨이 내려앉았다.

“그래서 정화석에서 갑자기 신력이 느껴진 거였군.”

“…넵.”

“그럼 벌써 통로가 이어진 건가?”

“그건… 아직이에요.”

교무실에서 혼나는 학생이라도 된 듯 흘끗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아스레인의 피가 필요하다고 했어요. 이쪽에서 문을 열기위한 통행료라고….”

피라는 단어가 나오자 역시나 아스레인의 미간이 잔뜩 좁아졌다. 다짜고짜 피를 달라는데, 불쾌할 만도 하지. 아스레인이 싫다고 거절해도 나로선 방법이 없었다. 이윽고 또 한 번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원인이 어쩐지 나 때문인 것 같아 어깨를 움츠리는데, 아스레인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정화석을 이리 주게.”

“네, 네?”

“피를 달라고 하지 않았나.”

생각보다 순순한 대답이 돌아왔다. 슬며시 고개를 들자 불쾌한 기색 없이 평온한 얼굴과 마주했다. 뭐지? 냉큼 아스레인에게 정화석을 건네면서도 계속 안색을 살피기 바빴다.

“싫은 걸 억지로 할 필요는 없어요.”

내 말을 듣고 있긴 한 건가? 묵묵히 침실 구석에 있는 테이블로 향하는 아스레인을 쫄래쫄래 따라갔다. 정화석을 원탁 한 가운데 내려놓은 아스레인은 곧 마력으로 단검을 만들어 냈다. 예리한 칼날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 손바닥을 향했다. 죄없는 살갗을 가르기 직전, 다급히 아스레인의 팔을 붙잡으며 재차 생각해 보기를 부탁했다.

“저 때문에 억지로 안 그래도 돼요. 찾아보면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고….”

미안한 마음에 횡설수설하자 아스레인이 단호히 말허리를 잘랐다.

“태오.”

소름끼칠 정도로 낮은 목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말을 멈추고 고개를 들자 나를 내려다보는 금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정오의 태양처럼 온전하게 빛나는 눈은 내게 물었다.

“그 뱀을 믿나?”

머릿속을 먼지처럼 떠다니던 상념이 일순 멈췄다. 그 질문이야말로 모든 근심이 시작된 출발점이자, 모든 걱정을 억누를 수 있는 요점이었다. 닉스를 살려준 빚을 갚아야 한다는 생각을 미뤄 두더라도 뱀을 믿을 수 있는가. 그가 선인이라고 확언하진 못하더라도, 나를 도와줄 조력자가 되리란 확신은 있었다.

“…네.”

고심 끝에 고개를 끄덕이자 아스레인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런 자네를 믿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스레인은 제 손바닥을 그었다. 후드득, 핏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에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 아니지. 아스레인이 기꺼이 나를 믿어 피를 본다는데 두 눈으로 똑똑히 봐야하지 않겠나.

익숙지 않은 냄새에 울렁거리는 속을 참으며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차마 무참히 찢어진 손을 볼 용기는 나지 않아 테이블로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진득한 피로 물들어 가는 정화석이 보였다. 기이하게도 정화석은 아스레인의 피가 닿는 족족 흡수해 나갔다. 그 탓에 아스레인은 상처를 치료하지도 못하고 계속 피가 나오도록 살갗을 벌리고 있었다.

“이, 이 정도면 충분할 거예요.”

더는 볼 수가 없어서 황급히 그의 팔을 잡아끌며 고개를 저었다. 창백해진 내 안색 때문인지, 아스레인은 마력으로 이루어진 검을 금방 없애 버렸다. 점점 더 미안한 마음이 배가 되어 그 팔에 얼굴을 묻으며 웅얼거렸다.

“괜찮아요?”

“고작 이정도 상처 가지곤….”

“고작이라뇨!”

별안간 언성을 높이자 아스레인은 한쪽 눈썹을 올리며 말했다.

“오케아노스를 부를 때, 서슴없이 피를 쓰겠다고 한 건 어디의 누구였지?”

“…그건 제 손이어서….”

“그럼 이제 내 기분도 알겠군.”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었다. 유독 내 상처에만 둔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소중한 이가 아파하는 모습을 보는 게 배로 힘든 걸 어떡해. 그 타고난 천성 때문에 아스레인을 은근히 마음 고생시킨 모양이다. 자그맣게 미안하다고 속삭이자 아스레인이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어서 상처를 치료하라고 말하려는데, 등 뒤에서 침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이 향긋한 냄새는….]

깊게 잠긴 목소리에 청력을 의심하고 말았다. 뻣뻣해진 목을 돌려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닉스가 침대에서 일어나 있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는데, 닉스가 비척거리며 이쪽으로 걸어왔다.

여전히 꿈속을 헤매는 붉은 눈동자가 테이블에 흩뿌려진 핏방울을 훑었다.

[이거였구나.]

그리 중얼거린 닉스가 갑자기 팔을 뻗어 아스레인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갑자기 무얼 하나 했더니, 대뜸 아스레인의 손에 얼굴을 묻는 거 아닌가. 심지어 혀를 내어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핥아먹기 시작했다.

“무, 무, 무…슨…!”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말을 더듬자 아스레인이 쯧,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부족한 마력을 이리 섭취할 줄은.”

“그, 그렇군요.”

…가 아니잖아! 지금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무려 닉스가 아스레인의 손바닥을 정성스럽게 핥고 있다. 잠에 취해 몽롱한 표정을 보아하니, 지금 스스로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충분히 당혹스러워할 만도 한데, 아스레인은 내치지 않고서 제 손을 내어주었다.

한동안 내리뜬 눈으로 닉스를 바라보던 아스레인이 조소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리도 배고팠나? 게걸스럽게도 먹는군.”

[…시끄러워.]

오고가는 말들은 살벌한데, 어쩐지 야스럽게 보이는 건 내 착각인가? 마력이 부족한 사람이 창조주의 마력을 흡수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연인이 다른 사람에게 손을 빨리고 있는데도 화를 내기는커녕 멍하니 굳어 있기만 했다.

이내 길쭉한 손가락 끝에 맺힌 핏방울까지 남김없이 핥은 닉스가 퍼뜩 눈을 떴다. 그제야 정신이 드는지 구부린 허리를 펴고 아스레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곤 한 박자 늦게 오만상을 찌푸리며 아스레인의 손을 뿌리치듯 놓았다.

[으웩. 뭐야. 영감이었어?]

한껏 언짢은 목소리에 아스레인은 코웃음을 치며 턱을 치켜들었다.

“실컷 취해 놓고 이제 와 불쾌해하니 어이가 없군.”

[참나, 나도 어이가 없어.]

닉스가 온갖 불평불만을 털어놓는 사이, 아스레인은 단숨에 손바닥에 있는 상처를 치료했다. 그 와중에도 나는 벽에 딱 달라붙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갑자기 마주한 광경이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그보다 닉스가 멀쩡히 움직인단 사실이 쉽사리 믿기지 않았다.

아직 나를 발견하지 못한 닉스는 제 이마를 짚으며 신세를 한탄했다.

[하필이면 눈을 뜨자마자 보는 게 당신 얼굴이라니. 기왕이면 나의 헤메라를 보고 싶었는데.]

“누가 너의 헤메라인가.”

[응? 당연히 태오지. 헤메라가 이 세상에 또 있었나~]

얄밉게 어깨를 으쓱인 닉스는 제 입술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진한 키스로 잠을 깨워 주는 건, 인간들이 오래도록 써먹는 클리셰잖아.]

“그래서?”

[헤메라가 그렇게 나를 깨워 주나 싶었지. 아, 하지만 칼로 단숨에 내 코어를 찌른 건 정말 대단했어. 그 결단력과 용기에 새삼 반했다니까?]

아무것도 모를 줄 알았는데, 다 알고 있었구나. 코어를 관통 당했을 아픔까지 생생하게 느꼈다고 생각하니 더욱이 마음이 쓰려졌다. 힘겹게 울음을 참는 나와 달리 아스레인은 화를 참고 있었다.

“…이대로 다시 영면에 들고 싶나?”

순식간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가시 돋친 목소리에도 닉스는 모르는 척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둘이서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이토록 반가울 줄은 몰랐다. 감정 선이 고장 났나? 이대로 닉스와 눈이 마주치면 눈물이 터질 것만 같다.

[아니, 그래서 헤메라는….]

입가에 묻은 피를 거칠게 닦아 내던 닉스가 드디어 나를 발견했다.

[아! 여기 있었네?]

닉스는 아스레인을 대할 때와는 달리 눈에 띄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 그렇듯 샐쭉 올라가는 입꼬리가 도리어 나를 더 슬프게 만들었다. 말없이 인상을 찌푸리며 입술을 비죽거리자 닉스는 당황한 듯 눈치를 살폈다.

[어… 방금 거 때문에 그래?]

대충 아니라고 하려는데 느닷없이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무슨 말이라도 내뱉으면 감정이 와르르 무너질 것 같아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울상을 짓고서 아무 말도 안 하니 닉스는 물론이고 아스레인까지 사색이 되었다.

이윽고 아스레인은 조용히 손을 뻗어 닉스의 멱살을 붙잡았다. 이번엔 단순한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았는지, 닉스는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내 안색을 열심히 살폈다.

[자, 잠깐만.]

그리 말하며 미꾸라지처럼 아스레인의 손에서 빠져나온 닉스가 내게 다가왔다.

[알지? 난 영감한테 전혀, 아주 조금도 사심 없어. 그냥 마력이 좀 맛있어 보여서~]

말꼬리를 길게 늘인 닉스는 내 뺨을 부드럽게 그러쥐었다. 차갑게 식은 볼에 온기가 물씬 풍겨 왔다. 살아있다. 닉스가 정말로 살아있어. 어쩌면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설령 산다고 한들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게 되는 줄 알았는데….

[…헤메라?]

목젖이 아릴만큼 울음을 삼키며 겨우 입을 열었다.

“다신, 흑, 못 보는 줄 알았잖아요.”

줄곧 당혹스러워하기 바쁘던 붉은 눈동자에 일순 미안한 빛이 서렸다. 왜 그런 표정을 하는 거야. 미안한 건 나인데. 무리시키는 줄도 모르고 혼자 두고 간 건 난데. 며칠간의 압박감이 밀려와 결국 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고 말았다. 그러자 닉스는 나를 품에 끌어안으며 뒷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미안해. 많이 무서웠어?]

“흑, 흡….”

[나도 몰랐어. 일이 그렇게 될 줄은.]

닉스의 탓이 아니라며 품 안에 묻은 머리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옷자락이 눈물범벅이 되어가는 데도 닉스는 아랑곳 않고 오히려 나를 더 꽉 안아 주었다. 그 손길이 여느 때처럼 다정해서 나도 팔을 뻗어 그의 등에 둘렀다. 어디 가지 못하도록 옷자락을 꽉 쥐자 긴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사이를 간질였다.

정말로, 살아있구나. 실패하면 어쩌나 싶은 두려움과 다시 만났다는 감격이 얼버무려져 한 마디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흘러나왔다. 속 시원하게 울다가 힘겹게 숨을 고르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또 다시 저를 두고 가려고 하면, 그땐 진짜로 용서 안 할 거예요.”

[후후, 내가 인간에게 그런 소리를 들을 줄이야.]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린 닉스는 내 등을 토닥이며 속삭였다.

[나를 포기하지 않아 줘서 고마워. 헤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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