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8 (238/305)

#238

아스레인에게 결계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뱀이 유피테르에게서 떨어져 나온 존재라는 것도, 유피테르가 신이 되기 위해 많은 것을 버렸다는 사실도. 그리고 신의의 검을 쓰면 닉스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세세하게 전했다.

내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던 아스레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자의 말을 어떻게 믿나.”

“저도 의심했는데… 그럴수록 더 당당하게 나왔죠.”

믿어 달라고 애원하거나, 협박하지도 않았다. 내게 믿을 수밖에 없을 거라고 말하는 뱀은 꼭 갑의 입장에 있는 것 같았다. 불과 그때까지만 해도 뱀이 협상을 위해 일부러 고자세를 취하는 줄 알았다.

멍청했지. 나는 우물 안에 떨어진 사람이고, 뱀은 지상에서 내게 밧줄을 던진 이었다. 당장 우물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내가 이 밧줄이 성한 게 맞느냐고 추궁한들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썩은 동아줄이든, 가시 박힌 동아줄이든 일단 붙잡고 봐야지.

“뱀이 건넨 잔이 실은 독배일지도 모르죠.”

여전히 불신에 사로잡힌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아스레인. 저는 그 누구도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처음부터 모험을 시작한 계기는 지키기 위해서였다. 세계를 구하는 위대한 목표가 아닌 단순히 소중한 마물과 사람들을 위해서. 그러니 닉스를 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전부 하고 싶었다. 그게 설령 내 목에 칼을 대는 일일지라도.

“…닉스를 살리고 싶어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억지로 감정을 억누르며 말하니 금색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다. 오랜 고민 끝에 아스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그 즉시 코어를 파괴하겠다고 덧붙였다. 그편이 오히려 마음이 편했기에 고민할 것도 없이 제안에 응했다.

그 후 벽에 걸린 신의의 검 앞에 섰다. 칼자루 중심에 박혀 있는 수정이 빛나자 새겨진 기도문이 더욱 뚜렷하게 보였다.

지키고자 검을 휘두르는 자에겐 축복이 깃들 것이다, 라. 이 검의 주인도 전쟁에서 동료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목을 베었겠지. 강한 염원이 끝끝내 자기 자신마저 삼켰지만, 이 안에 깃든 신념만은 고귀하고 순결할 것이다.

그러니 검의 주인이여.

“…제게 그 의지를….”

동료를 구하기 위한 힘을 빌려주소서.

기도문을 읊으며 조심스레 칼자루를 쥐어 꺼냈다. 그 순간 푸른 수정에서 눈을 채 뜨지 못할 정도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새까맣게 타버린 시야가 돌아올 즘에는 완벽한 검 한 자루가 내 손에 쥐여 있었다. 검신은 비록 아스레인이 만들어낸 금빛 검보다 얇고 투명했으나, 그 예리함은 가죽을 꿰뚫기에 충분했다.

“어서 가죠.”

아스레인은 곧바로 나를 데리고 푸른 수정 숲으로 향했다. 벤테온의 손을 지나 단숨에 낭떠러지 아래로 도약했다. 거친 바람이 뺨을 스쳤지만 이번엔 눈을 감지 않았다. 오직 살려야 한다는 일념 하에 밑바닥에 있는 닉스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불과 몇 분 사이에 닉스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어 있었다. 아주 작은 틈으로 벌레가 파고들듯 그의 코어는 점점 좀먹고 있었다. 서둘러 닉스의 위로 올라가 코어가 자리한 등에 무릎을 꿇었다. 칼을 두 손으로 쥐어 단단한 껍질 위에 칼끝을 대었다.

이제 찌르면 된다. 내 신력으로 만들어 낸 칼끝이 닉스의 코어에 닿도록 있는 힘껏 꽂아 넣어야 한다. 그러나 막상 칼을 드니 애써 무시하던 두려움이 일었다.

“괜찮…겠죠?”

불현듯 수면 위로 떠오른 망설임이 내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잘못 되면 어떡하지? 만약 아스레인이 새로운 코어를 형성하는 게 옳은 선택이었다면. 결국 내 실수로 인해 다신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면. 나 때문에 닉스가 깨어날 수 없다면….

혼란스러운 마음을 대변하듯 칼끝이 파르르 흔들렸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이 닉스의 등 뒤로 뚝뚝 떨어졌다. 아니, 눈물인가? 어느새 뿌예진 시야로는 거미줄 모양으로 퍼져 가는 흉터만 보였다.

“이대로… 잘못되면 어떡하죠? 아스레인.”

흑, 견디지 못할 부담감에서 흘러나온 울음을 겨우 삼켰다. 이럴 시간이 없는데. 망설일수록 닉스의 상태는 점점 나빠질 뿐인데. 소중한 이의 심장에 칼을 찔러 넣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눈으로 보지 않으면 나을까 싶어 얼굴이 으그러질 정도로 세게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자네가 내게 그랬었지.”

따스한 온기가 칼자루를 쥔 내 손을 부드럽게 감쌌다.

“혼자 모든 걸 짊어지려 하지 말라고.”

옆을 돌아보니 차분한 호수 같은 눈동자가 오롯이 나만을 담고 있었다. 언제나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는 나의 연인. 흔들림 없이 올곧은 눈빛에 한결 마음이 놓였다. 울상이 된 얼굴로나마 흐릿한 미소를 짓자 아스레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반드시 닉스를 구할 것이다. 그 믿음에 어떤 의심도 끼어들 틈이 없도록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후우- 천천히 숨을 내쉬며 칼을 높이 치켜세웠다. 이윽고 투명한 칼날로 떨어진 눈물이 결심이 되는 순간, 닉스의 코어로 검을 꽂았다.

“큭…!”

두 개의 힘이 충돌하자마자 엄청난 반동이 일었다. 당장이라도 튕겨져 나갈 것 같았으나, 아스레인이 버텨 준 덕분에 겨우 제자리를 지켰다. 거센 폭풍에도 지지 않고 더욱 칼을 밀어 넣으니 마침내 신력으로 만들어 낸 칼날이 닉스의 코어를 관통했다.

제발, 나의 소중한 친우를 무참히 데려가지 마소서. 이제 겨우 빛을 맞이한 이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비록 의심이 나를 갉아먹을지라도 지키고자하는 의지는 굳건하니, 가엾은 우리에게 축복을 허락하소서.

칼자루 끝에 이마를 대고 눈을 감은 채 빌고 또 빌었다. 신력이 만들어 내는 기적은 간절한 바람에서 시작된다던가. 이제는 그저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람이 멎고 고요가 찾아왔다. 슬그머니 눈을 뜨자 기이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시, 신력이….”

무려 닉스의 코어에 퍼진 신력이 신의의 검으로 빨려 올라가고 있었다. 신력을 흡수할수록 칼자루 중심에 박힌 푸른 수정은 점차 생기 있게 빛났다. 그 모습은 꼭 사막 한가운데 메마른 나무가 땅속에 스민 수분을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눈 깜짝할 새였다. 닉스를 잠식해 나가던 신력이 스르르 사라졌다. 코어가 되살아나자마자 멈췄던 심장이 다시 뛰어 피가 돌듯 검은 연기가 폭발했다. 어마어마한 힘에 벤테온의 성물은 물론이고, 나마저 멀리 튕겨 나갔다.

“윽!”

무방비하게 바닥에 떨어지려는 순간 아스레인이 가볍게 나를 낚아챘다. 고맙다는 말을 할 정신도 없었다. 그의 품에 안겨 용암처럼 쏟아져 나오는 검은 연기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별 일… 없는 거겠죠?”

더듬더듬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으나 아스레인은 아무 말이 없었다. 협곡 아래를 가득히 채울 정도로 퍼져 나가는 연기에 시야가 온통 새까매졌다. 수정 조각의 빛마저 사라진 지금, 느껴지는 것은 안개 너머로 느껴지는 거대한 마력이었다.

이윽고 검은 연기가 바닥으로 낮게 깔리며 눈앞이 트였다. 거대한 거미가 있던 자리엔 칠흑같이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미청년이 쓰러져 있었다. 닉스였다. 설마 인간의 모습이 될 줄은 몰랐기에 다급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닉스!”

이름을 불러도 반응은 없었다.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어깨에 손을 올리는 순간 화들짝 놀랐다. 늘 닉스는 내 앞에 연기로 만든 분신으로 나타났었다. 그래서 건드릴 때마다 손바닥에 닿는 감촉은 괴리감이 느껴질 정도로 부드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말 그대로 살아있는 생명체를 만지듯 온기와 감촉이 여실히 느껴졌다.

당황한 나머지 불에라도 덴 듯 손을 떼자 아스레인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걱정 말게. 나처럼 잠시 인간의 모습이 된 것이니까.”

“네? 그럼 닉스는….”

“코어는 무사히 돌아왔네. 가히…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군.”

그 말에 다리에 힘이 훅 풀렸다. 제자리에 주저앉으니 닉스의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레톤의 창에 찔려 목에서부터 가슴까지 퍼져있던 거미줄 모양의 흉터는 그대로였으나, 신력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신의의 검에 박힌 푸른 수정이 무사히 모든 신력을 빨아들였다.

“…다행이다….”

조심스럽게 닉스의 뺨을 감싸 쥐었다. 확실히 온기가 느껴진다. 그가 살아있음을 몸소 느끼니 참고 있던 눈물이 왈칵 흘러나왔다. 창백한 회색빛 피부 위로 한 차례 봄비가 내렸다. 닉스가 아직 잠들어있어서 다행이다. 하마터면 우는 얼굴로 평생 놀림 받을 뻔했다.

“어서 일어나요. 나를 만나러 오기로 했잖아요.”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이다가 문득 검은 연기로 뒤덮인 가슴께를 보았다. 아무리 살리기 위해서였다지만, 칼로 코어를 관통했으니 많이 아팠겠지.

“미안해요.”

나지막이 말하며 가슴 위로 손을 올렸다. 짙은 마력을 움켜쥔 코어가 대차게 뛰고 있었다.

“조금만 쉬면 금세 깨어날 걸세.”

확신을 주는 아스레인의 말에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토록 무모한 짓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아스레인이 곁에 있어 주었기 때문이다. 거칠게 눈물을 닦아 내고 아스레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스레인. 나를 믿어 줘서 고마….”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힘을 너무 소모한 탓일까. 아니면,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흐릿해지는 의식 너머로 다급한 아스레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 그저 잠에 드는 것뿐이라고 대답하고 싶었는데, 입술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스르르 감기는 눈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흙먼지로 둘러싸인 벤테온의 성물이었다.

아침인가? 눈꺼풀 위로 밝은 빛이 드리웠다. 으음…. 잠꼬대를 하듯 칭얼거리다가 힘겹게 눈을 떴다. 그러자 나를 내려다보는 하늘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 잘 잤어요?

보여선 안 될 것이 보이니 나도 모르게 소리를 크게 질러 버렸다. 우왁! 소스라치게 놀라며 상체를 일으키자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어지러운 이마를 짚으며 뒤늦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한히 퍼져나가는 새하얀 공간, 또 결계 안으로 들어왔다.

- 연약한 몸으로 무리하니까 그러죠.

걱정하는 말과는 달리 목소리엔 웃음기가 스며 있었다. 벤테온의 성물을 써서 그런가. 아니면, 꿈이 만들어 낸 환상인가. 몽롱한 정신으로 눈을 끔뻑이며 회색 빛깔 뱀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유피테르….”

- 그 이름으로 불리니 조금 서운한 걸요.

“하지만 유피테르 맞잖아요.”

단호하게 말하자 뱀은 혀를 날름거리며 내 무릎에서 내려갔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게슴츠레 뜬 눈으로 유피테르를 흘겼다.

“제가 왜 또 여기에 와 있는 거죠?”

- 내가 할 말이 있어서요.

나보다 어린 소년 같은 목소리에 압도당하는 기분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천천히 몸을 둥글게 만 뱀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서 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내 비밀을 묻는 것처럼 은근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 닉스는 괜찮아졌나요?

가볍게 안부를 묻는 말에도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계속 의심하던 자에게 도움을 받았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은 없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네. 덕분에요.”

- 그럼 이젠 나를 믿어 주겠죠?

활짝 벌어진 입이 꼭 웃는 것처럼 보였다. 내 신뢰를 얻어서 순수하게 기뻐하는 건가. 유피테르의 성격을 감안하면, 이제 나를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쁜 거겠지. 그래도 나를 도와준 사실만큼은 변치 않기에 제대로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요.”

- 응?

“진심으로… 고마워요. 당신이 알려 주지 않았더라면, 닉스를 되찾지 못했을 거예요.”

정중히 목례하며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잠시 뒤, 시선을 들자 뱀은 예상외의 반응을 보였다. 설마 내가 이렇게까지 고마워할 줄은 몰랐는지 하늘색 눈동자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 그렇게까지 인사할 필요는 없어요. 어차피 나도 원하는 게 있어서 도와준 거니까.

“원하는 거요?”

- 나한테 진 빚을 갚아야 하지 않겠어요?

역시 이게 목적이었지. 더는 도망칠 곳도 없었기에 정면으로 맞받았다.

“뭘 원하죠? 이름을 찾아서 당신을 여기서 꺼내면 되는 건가요?”

-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요.

뱀은 노래하듯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 당신이 이름을 찾을 때까지 마냥 기다리기 싫어졌어요. 언제 찾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것 말고는 나갈 방법이 없잖아요.”

- 물론 다른 방법을 생각해 냈죠. 그러니까 태오를 내 앞으로 부른 거고요.

투명한 하늘빛 눈동자에 긴장한 내 얼굴이 비쳤다. 그게 꼭 유리 감옥에 갇힌 것처럼 보여 저절로 입 안이 바짝 말라 왔다. 짧은 침묵 끝에 뱀은 내게로 다가오며 속삭였다.

- 애초에 여기서 완전히 나가면, 나에게 들키고 말 거예요. 그럼 당신을 돕는다는 우리의 거래도 무산이 되겠죠. 그러니 들키지 않는 선에서 결계와 현실을 오고가려고해요.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온 뱀은 갈라진 혀를 날름거리며 말했다.

- 태오. 당신을 통로를 쓸 거예요.

나는 우물 안에 떨어진 사람이요, 뱀은 내게 밧줄을 던진 이였다. 기꺼이 밧줄을 붙잡고 힘겹게 밖으로 나갔으나 그곳은 뱀의 둥지였다. 도무지 도망칠 수 없는 뱀의 똬리 속. 그러나 뱀은 나를 잡아먹지 않고 또 다시 밧줄을 던졌다.

- 그게 내가 닉스를 살리는 방법을 알려 준 대가예요.

더 큰 먹잇감을 사냥하지 않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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