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
이것은 양날의 검이다. 이 상황을 모르는 유피테르의 허를 찌르는 비수가 되거나, 나 자신의 목을 조르는 악수가 되거나. 홀인지 짝인지 모를 주사위에 돈을 거는 이들을 어리석게 여길 처지가 아니었다. 지금이야말로 나의 운명을 내건 도박을 할 순간이었다.
버젓이 다리 위에 자리 잡은 뱀이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유리알 같은 눈동자에 비친 내 얼굴에선 수만 가지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끝끝내 표정에 남은 것은 의심, 그것도 뱀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불신이었다.
“제가 그쪽의 뭐를 믿고 손을 잡죠?”
내가 당신을 믿을 수 있는 증거를 달라고 했다. 아직 신이 되기 전, 인간들의 신임을 받기위해 기적을 행사했던 유피테르처럼 뭐라도 해 보라고. 그러자 뱀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 믿을 수밖에 없을 걸요.
“네?”
- 곧 알게 될 거예요.
너무도 당당한 태도에 도리어 머리가 얼떨떨해졌다. 대체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온 거냐고 물어보려다가도 목구멍에서 턱 막혀 버렸다. 무어라 말은 못하고 눈살만 찌푸리자 뱀은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 그럼 한 가지 좋은 걸 알려 줄게요.
천천히 다리에서 내려간 뱀은 바닥에서 둥그렇게 몸을 말았다. 이내 머리를 하늘로 치켜세우자 어디선가 나타난 빛이 한데 모였다. 허공에 무리지은 빛은 곧 길쭉한 형상을 만들어 냈다. 위아래가 넙적하고 허리만 잘록한 것이 뒤집힌 촛대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게 뭐죠?”
- 벤테온의 성물이에요. 누군가는 신의(信疑)의 검이라고 부르죠.
“신의의 검…?”
그 덕분에 손 한 뼘만 한 물건이 칼자루라는 것을 깨달았다. 비록 검신은 아예 없었지만, 독수리가 날개를 펼친 듯 양옆으로 뻗어 있는 칼자루를 보아하니 예사 물건이 아닌 듯했다. 게다가 칼자루 중심에 박힌 보석은 오르커스 황야를 상징하는 푸른 수정이었다.
- 수백 수천이 넘는 적군의 목을 벤 검이에요. 검의 주인은 특이하게 전쟁의 신 레톤이 아니라 벤테온을 따르던 기사였죠. 아무렴 전쟁에 나가는 족족 공을 세워 한때는 명검이라 불렸지만, 결국 기사가 스스로 목을 베면서 마검으로 전락했어요.
“자살을… 한 건가요?”
- 역사서에는 전쟁 중에 순국했다 기록됐지만 실은 아니에요. 뭐… 연승을 거머쥐었다고 한들, 사지로 내몰려 동료와 부하가 죽어 나가는데 미치지 않으리란 법은 없죠.
확실히 어느 종교에서나 스스로 삶을 포기한 것을 죄악으로 여긴다. 제아무리 명검이라고 해도 어두운 내막을 가진 검을 성물로 쓸 리가 없었다. 이내 뱀은 꽤 오래된 역사를 제 눈으로 직접 목격한 듯 생생하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 그 후에 벤테온의 대사제가 피로 물든 검신을 제거하며 정화했고, 끝내 칼자루에 기도문을 새겨 봉인했어요.
유심히 칼자루를 살펴보니 정말로 희미한 글씨가 보였다.
‘지키고자 검을 휘두르는 자에겐 축복이 깃들 것이오, 의심에 지배당한 자는 그 칼날이 스스로에게 향할 것이다.’
얼핏 살생을 멀리 하라는 경고처럼 보이지만, 검에 깃든 비설을 알고 나니 그리 마음이 편치는 못했다.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으나 뱀은 아랑곳 않고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 기도문으로 인해 누구도 상처 낼 수 없지만, 그 의지에 따라 검을 쓸 수 있죠.
“검신을 제거했다면서요.”
- 네. 그러니 마력이나 신력으로 칼날을 만들어 내는 거예요.
허공에 둥실 떠있던 빛 무리가 뱀의 시선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아무것도 없던 칼자루엔 금세 찬란한 빛으로 이루어진 검신이 생겨났다. 칼자루만 남은 성물의 비화를 듣는 것까진 좋았으나 처음 든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당신을 믿는 것과 이 검이 대체 무슨 상관인거죠?”
의아한 표정으로 물어보니 뱀은 살짝 입을 벌렸다. 그게 꼭 미소를 짓는 것처럼 보였다.
- 도움이 필요해지거든 이 검으로 서슴없이 찔러요.
“네?”
찌르라고? 누구를…? 의미심장한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뱀은 나를 향해 빠르게 달려들었다. 휙! 방심한 먹잇감을 사냥하는 몸놀림에 본능적으로 두 팔을 들어 머리를 감쌌다. 그 순간 은밀한 속삭임이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 잊지 마요. 당신은 나한테 빚을 진 거예요.
눈앞이 아득해질 정도로 밝은 빛이 쏟아졌다. 온몸이 분자 단위로 쪼개지는 듯 기묘한 느낌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들었다. 흐릿한 시야로 금이 간 벽과 낡은 제단이 어렴풋이 보였다. 무사히 벤테온의 신전으로 돌아왔다.
“…아스레인.”
잠긴 목소리로 속삭이자 아스레인이 곧바로 상체를 일으켜 세워 주었다. 억지로 초점을 잡으려할수록 눈앞이 어지러워서 얌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괜찮나?”
등을 쓰다듬으며 묻는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저 얼마나 기절해 있었어요?”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네.”
다행이다. 그리 순탄치는 않았지만 아무튼 벤테온의 신력도 흡수했다. 이젠 닉스만 무사하면 된다. 혼자 헤카테를 상대했을 닉스가 걱정되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리하지 말라는 아스레인에게 괜찮다고 말하려는데, 시야에 익숙한 물건이 들어왔다.
“저건…!”
제단 뒤쪽 벽에 성물이 걸려 있었다. 독수리가 날개를 펴듯 양옆으로 벌어진 그것은, 뱀이 보여준 칼자루였다. 빛으로 만들어낸 형상보다 훨씬 낡은 데다가 녹도 슬어 있었다. 하지만 중심부에 박힌 푸른 수정은 검 주인의 의지를 이어받은 듯 선명한 빛을 띠었다.
저걸로 찌르라고 했던가. 설마 앞으로 벌어질 무언가를 예언한 건 아닐까? 초조한 눈길로 성물을 바라보니 아스레인이 내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왜 그러나.”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서 가자며 아스레인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도 아닌데, 정신없이 신전 밖으로 나왔다. 벌컥 문을 열자마자 한가득 쌓여 있는 크고 작은 돌이 보였다. 마치 산사태라도 난 것 같은 난장판 한가운데, 닉스가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끝난 거야?]
그리 말하는 닉스의 입가엔 미소가 맺혀 있었지만, 목소리에선 어째선지 피곤함이 묻어났다. 어딘가 다친 걸까? 한달음에 곁으로 다가가서는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아무 일 없었어요?”
[괜찮다니까~]
느릿느릿 말을 이어가는 닉스는 평소와 다를 바 없어보였다. 헤카테를 맡기고 들어갈 때보다 유독 지쳐 보이는 건 기우였나. 괜찮다는 말에도 집요하게 낯빛을 살피자 닉스는 샐쭉 웃었다. 그러곤 먼지를 떼어 주듯 내 뺨을 살짝 어루만지며 말했다.
[아무튼 이제 귀찮은 놈들이 깨어날 일은 없는 거지?]
“네. 당분간은요.”
[그럼 나는 눈 좀 붙이고 올게.]
천연덕스러운 눈웃음에 하마터면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닉스는 잠 따윈 자지 않는데. 슬그머니 내게서 떨어져나가려던 손을 탁, 붙잡고 물었다.
“닉스. …역시 무리했던 거죠?”
뜻밖의 행동에 자못 놀랐는지, 붉은 눈동자가 서서히 커다래졌다. 잠시 그게 정곡을 찔려서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살짝 굳어 있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태연하게 풀어졌다. 닉스는 한쪽 눈썹을 하늘로 비죽 올리며 물었다.
[지금 태양이 어디 떠 있는지 보여?]
“예? 아, 머리 위에요.”
[그래~ 벌건 대낮이야. 헤메라.]
아침에 해가 뜨자마자 폐가에서 출발했으니, 지금이 낮인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게 뭐 문제 있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닉스는 나른한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모르겠어? 너와 달리 난 야행성이라고. 이렇게 해가 벌겋게 떠있는 대낮엔 안 돌아다녀.]
“…아.”
[이제 이해된 거야?]
재차 답을 묻는 선생님과 같은 말투에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닉스는 늘 아침을 싫어했지. 회색빛의 창백한 피부는 태양을 기피하는 뱀파이어처럼 보이기도 했다. 안 그래도 달갑지 않은 아침에, 나 때문에 힘까지 썼으니 싫증이 날 만도 했다.
불안감에 꽉 잡고 있던 손목을 놔주자 닉스는 바람이 새듯 피식 웃었다.
[쉬다 올게. 밤에 보자.]
그리 인사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오늘따라 다정하게 느껴졌다. 그럼 안심이 되어야 할 텐데, 왜 계속 마음 한 구석이 찜찜한지 모르겠다. 결계 속에서 뱀이 내뱉은 말 때문인가. 나도 모르게 닉스에게 불쑥 다가가며 물었다.
“정말 오는 거죠?”
[애처럼 왜 이래~ 뭐, 나야 좋지만.]
장난스럽게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기분 좋게 울렸다. 쾌활한 모습을 보니 손끝에 박힌 가시처럼 거슬리던 초조함이 사라지는 듯했다. 그 후 닉스는 미련 없이 걸음을 돌렸다. 그대로 사라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아! 하고 탄성을 내뱉으며 이쪽을 돌아보았다.
[우리 친애하는 교수님.]
별안간 아스레인을 다정하게 부른 닉스는 한쪽 눈을 찡긋 윙크했다.
[이번엔 방해 안 할 테니까, 잘 해 보라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까득, 이를 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어째 아스레인의 이성이 끊어지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엔 닉스가 빨랐다. 얄밉게 손을 살랑살랑 흔든 닉스는 아스레인의 마법이 닿기도 전에 홀연히 사라졌다. 그가 서있던 자리엔 검은 연기만 남아 있었다.
“닉스의 장난이 반가워질 날이 올 줄은 몰랐어요.”
“늘 저랬던 것을….”
“하하, 그건 그렇죠.”
장난을 치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마음이 놓이다니… 나도 어지간히 불안했나 보다.
닉스가 사라지고 난 후, 엉망이 된 주변을 둘러보았다. 푸른 수정과 난잡하게 섞여 있는 돌조각을 보니 절로 탄식이 나왔다. 분명 엄청난 수의 헤카테가 쉴 새 없이 몰려들었겠지. 그걸 단신으로 막아 낸 닉스는 역시 대단하다.
그의 도움으로 무사히 신의 불을 제압했지만 마냥 안심하기엔 일렀다. 방심한 사이 유피테르가 손을 쓸지도 모른다.
“여기도 성물을 퍼뜨리면 좋을 텐데요.”
그나마 라비린토스 설원에는 나무와 풀이 이따금씩 보였다. 하지만 오르커스 황야는 넓기만 할뿐 황량하기 짝이 없었다. 물도 없는 붉은 바위에 무슨 풀과 꽃이 피랴. 달리 방법이 없을까 고심하는데, 아스레인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일단 하루라도 쉬는 게 좋겠네.”
“으음… 그럼 신전에서 쉴까요?”
문조차 성하지 않은 폐가로 돌아가느니 신전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사제에게도 버림받은 신전은 우리의 안식처가 되었다. 신물이 날 정도로 신전을 들러서 그런지, 이젠 사제의 방이 어디 있는지 몰라도 척척 찾아갈 수 있었다.
피곤한 몸을 침대에 뉘이고 아스레인과 도란도란 대화를 나눴다. 개미 한 마리도 지나가지 않는 바깥 풍경은 볼품없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이번 일도 우려와 달리 무사히 끝났다는 생각 덕분이었다.
그렇게 잠에 빠졌다가 눈을 떴을 땐 한밤중이었다. 비몽사몽 눈가를 비비며 아스레인에게 물었다.
“으음, 닉스는요?”
아스레인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밤이 되도록 닉스가 오지 않았단다. 정말 폐가에서 있었던 일 때문인가? 그런 거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데…. 아까 아스레인에게 방해하지 않을 테니 잘 해 보라는 말까지 남긴 걸 보면, 진심으로 자리를 피해 준 모양이다.
그래도 내일엔 오겠지. 그리 확신하며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아침에도 신전 주변에서 검은 연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금 오래 쉬는 구나, 하고 넘겼다. 그 사이 아스레인과 나는 혹시 벤테온의 신전에 숨겨진 장소가 있을까 둘러 보았다. 황야에 보물이 숨어 있듯 아스레인의 뿔이 묻혀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큰 법이었다.
“아무것도 없네요.”
“너무 실망하지 말게.”
“어떻게 실망 안 하겠어요….”
그리하여 벤테온의 신전도 후보에서 지워졌다. 이제 남은 곳을 머릿속으로 추려 보다가 문득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은 붉게 물들고 땅거미가 밀려오고 있었다.
지평선 너머로 떨어지는 태양이 아름답다 생각하기도 잠시,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너무 조용하지 않아요?”
“뭐가?”
“…닉스요.”
분명 밤에 온다고 했다. 그것도 어젯밤에. 별거 아닌 약속이긴 했다. 그냥 흘리듯이 말했기에 귀찮아서 안 오나 보다 싶었다.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닉스다. 나와 아스레인 사이에서 짓궂은 장난을 치는 걸 무엇보다 즐거워하던 그란 말이다.
그런데 만하루가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다.
“아스레인. 혹시….”
닉스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죠? 그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말을 하면 안 될 것만 같았다. 만에 하나라도 말이 씨가 될까 봐서. 그럼에도 해는 저물고 밤은 찾아왔다. 아무리 기다려도 닉스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둠이 없는 밤은, 지독하게 공허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