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5 (235/305)

#235

경계심을 바짝 드러낸 헤카테가 신전 주변을 둘러쌌다. 하나, 둘… 스물 넷, 다섯. 신전 뒤편에 있는 헤카테는 셀 수도 없었다. 지금껏 이만한 수의 헤카테는 처음 본다. 심지어 어제 마주쳤던 개체보다도 몸 구석구석에 푸른 수정이 많이 섞여 있었다.

끝없이 살아나는 인공체가 무려 마석으로 보완됐으니, 한층 상대하기 까다로워졌다.

“뒤로 물러서 있게.”

아스레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예리하게 날이 선 금빛 마력이 감돌고 있었다. 혹여 방해가 될까 몸을 신전 벽에 딱 붙인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이윽고 아스레인이 헤카테 무리를 한꺼번에 소탕하기 위해 마법 주문을 중얼거렸다.

그 순간 검은 연기가 짙은 해무처럼 붉은 대지 위를 뒤덮었다. 광휘롭게 빛나는 아스레인의 마법과는 전혀 다른 기운이었다. 본능적인 공포를 자극하는 어둠, 닉스의 힘이었다.

[무리지어 공격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달리 검은 연기는 제게 닿는 모든 생명을 빨아들일 듯 무서운 속도로 퍼져 나갔다. 위협을 느낀 헤카테가 즉시 몸을 피했지만, 뒤따라오는 죽음을 따돌릴 수는 없었다.

검은 연기는 순식간에 해일처럼 치솟아 도망치는 헤카테를 덮쳤다. 콰직! 곳곳에서 바위가 으그러지는 소리가 명쾌하게 들렸다. 검은 파도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산산조각 난 판도라와 헤카테의 흔적뿐이었다. 정확히 코어만 노린 훌륭한 실력이었다.

[스스로가 마물인 걸 잊은 거야? 고상하게 마법이나 쓰면서 언제 잡으려고.]

얄궂은 미소를 머금은 닉스의 입꼬리가 연신 씰룩거렸다. 대놓고 빈정거리는 어투에 아스레인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러나.”

[이 황량한 곳에 대체 누가 있다고 그래?]

닉스는 꽤 의기양양한 기세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대로 신전에 들어가려던 차, 닉스의 어깨 너머로 믿지 못할 광경이 이어졌다. 바닥에 흩어진 바위 조각과 수정이 다시금 한데 뭉치고 있던 것이다.

“말도 안 돼. 분명 코어는 부셔졌는데…!”

헤카테를 구성하고 움직이던 판도라는 파괴되었다. 그런데도 그 망할 인공체는 사라지지 않고 네 개의 다리로 꿋꿋하게 서있었다. 심지어 아까 전보다 수가 눈에 띄게 늘어나 있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닉스는 쯧, 옅게 혀를 차며 손을 뻗었다.

[끈질기네.]

또 다시 검은 연기가 붉은 대지를 뒤덮었다. 이내 하늘로 높이 치솟은 연기는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헤카테에게 쏟아졌다. 마치 성벽 위에서 적진을 향해 수백 개의 화살 비를 쏘는 듯한 장관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헤카테는 저항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픽픽 쓰러졌다.

그대로 끝났으면 좋으련만, 바닥에 흩어진 바위는 또 다시 뭉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신의 불에 깃든 신력을 없애지 않는 이상 계속 살아날 모양이군.”

“그런….”

아스레인의 말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코어를 부숴도 곧장 살아나는, 이 좀비 같은 인공체를 상대해야 한다니. 조금이라도 방심하는 순간 곧바로 전세가 역전될 것이다. 어서 빨리 신의 불을 찾아 신력을 흡수해야 한다. 그럼 그동안 헤카테는 어쩌지? 머릿속으로 대책을 강구하는데, 닉스가 흘끗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안 가고 뭐 해?]

“네?”

[여긴 내가 맡고 있을게. 그러니 영감이랑 신전으로 들어가서 신의 불인가 뭔가를 없애.]

그리 말하는 사이에도 닉스는 계속해서 헤카테를 제압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바닥으로 꽂히는 검은 화력에 헤카테 무리는 다가올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안했다. 닉스의 실력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혼자 괜찮으시겠어요?”

헤카테를 부수면 부술수록 그 수가 계속해서 늘어났다. 먼저 달려들지는 않으니, 꼭 닉스를 상대로 소모전을 걸고 있는 것 같았다. 신의 불에 깃든 신력이냐, 닉스의 마력이냐. 둘 중 먼저 바닥나는 쪽이 패자가 될 테다.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내게서 불안함을 읽었는지, 닉스는 여유로운 미소를 흘렸다.

[걱정 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본체가 있으니 마력은 충분히 끌어올 수 있어.]

“하지만….”

[헤메라. 말했지?]

초승달처럼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에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온 대지를 뒤덮은 검은 연기 사이로 홀연히 빛나는 그것은 오르커스 황야에 뜬 태양보다 맹렬한 기세로 타올랐다.

[나는 그리 쉽게 당하지 않아.]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닉스에게서 흘러나오던 검은 연기가 배로 짙어졌다. 솜털이 바짝 설 만큼 위협적인 힘에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애초에 걱정하고 있던 것은 나뿐이었던 듯, 아스레인은 이미 신전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를 따라 들어가며 어깨 너머로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그럼 부탁할게요.”

등을 돌린 닉스는 여유롭게 허공에서 손을 까딱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닉스가 헤카테 따위에게 질 리가 없다. 그런데 어째서 발길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지 모르겠다. 몇 번이고 계속 뒤를 돌아보다가 힘겹게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문까지 닫으니 꼭 바깥세상과 단절된 것 같았다. 세월의 흐름에 낡은 건 비단 외벽뿐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관심을 받지 못한 벤테온의 신전은 찬란했던 과거와는 달리 허름하기 짝이 없었다.

빠르게 사방을 훑어본 아스레인은 한숨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관리하는 사제도 없어 보이는군.”

“그러게요. 설마 레톤 신전보다 심할 줄은 몰랐어요….”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신전에 탄식이 절로 새어 나왔다. 걷기만 해도 나풀거리는 먼지에 잔기침을 하며 중심부로 향했다. 발길이 끊긴지 족히 수 년은 되어 보이는 기도실을 지나 마침내 고해소에 도착했다.

벌컥 문을 열자 제단 위에 우두커니 놓인 신의 불을 마주했다. 제단을 장식한 푸른 광물은 지난날의 영광을 떠올리듯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신력을 흡수하기 전, 제단 앞에 서서 나지막이 아스레인에게 말했다.

“혹시 제가 또 결계로 들어가거나, 의식을 잃거든 닉스부터 도와주세요.”

예상대로 아스레인은 침묵을 고수했다. 이유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우리에게 1순위는 서로의 안위였으니까. 그럼에도 닉스를 향한 걱정을 떨칠 수 없었기에 아스레인의 옆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집요하게 따라붙는 시선에 아스레인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노력해 보지.”

그 후 아스레인은 능숙하게 마력을 펼쳐 신의 불을 억누르기 시작했다. 여러 헤카테를 조종하는 만큼 거세게 타오르던 불길은 금빛 마력으로 인해 서서히 숨죽어 갔다. 이윽고 밑바닥에 깔려 허덕이는 신력을 끌어와 단숨에 흡수했다.

“윽…!”

순간 심장을 옥죄는 고통에 가슴을 움켜쥐며 상체를 숙였다. 분명 과정은 익숙해졌는데, 신력이 몸으로 흡수되며 수반되는 아픔은 도통 나아지질 않았다. 게다가 순순히 힘을 내어줬던 다르곤의 신력과 달리 벤테온의 신력은 유독 저항이 심했다. 산채로 삼킨 구렁이 한 마리가 목구멍에서 몸부림치는 것만 같았다.

“태오.”

나를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마저 점차 의식 밖으로 멀어졌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어떻게든 빠져나오려 하는 힘을 겹겹이 가두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겨우 숨통이 트였다. 힘겹게 물 밖으로 빠져나온 사람처럼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밭은 호흡에 온몸이 들썩이던 그때, 앳된 목소리가 귓등에 스쳤다.

- 아파요?

화들짝 놀라 히끅, 딸꾹질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황급히 상체를 들자 허름한 고해소는 어디로 가고 하얗게 물든 공간만 가득했다. 또다.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결계 속으로 들어와 버렸다. 그리고 내 앞에는 이 결계를 지키는 파수꾼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 슬슬 그 육체로는 버티기 힘들 거예요.

나를 바라보는 하늘색 눈동자가 어째 부드러운 빛을 띠었다. 이번엔 또 무슨 소리를 하려나. 여전히 욱신거리는 가슴을 어루만지며 슬그머니 뒤로 물러섰다.

“왜 자꾸 저를 이쪽으로 데려오는 거죠?”

- 아직 할 말이 있으니까요.

“…저는 없어요.”

- 정말로?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퍽 순진해서, 도리어 섬뜩하게 느껴졌다. 그 탓에 가벼이 떠보는 질문에도 긴장하고 말았다. 바짝 몸을 웅크리자 뱀은 천천히 다가오며 말했다.

“해칠 생각 없대도.”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무도.

“반갑단 인사는 차마 못하겠네요.”

- 그래요? 나는 반가운데.

잔뜩 경계 어린 나와 달리 뱀은 한없이 여유로웠다.

- 기다리고 있었어요. 당신 덕분에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게, 이토록 피 말리는 일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죠.

“저를 왜 기다려요?”

- 그럼 안 돼요?

예상치 못한 반문에 일순 말문이 막혀 버렸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눈길은 다른 의도 없이 순수한 궁금증만을 담고 있었다. 그 탓인지 덕분인지, 팽팽하게 잡고 있던 긴장의 끈이 툭 풀려 버렸다.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이상하지 않아요? …우린 적이잖아요.”

아무리 그가 내게 호의적이라 하더라도 유피테르와 연결되어 있단 사실만은 변함없었다. 솔직하게 의아함을 표하자 뱀은 머리를 갸웃 기울이며 말했다.

- 단순한 이유를 들자면, 이곳엔 수 세기동안 나 말곤 아무도 없었어요.

“…아.”

- 그래서 기다렸어요. 당신을.

아주 오랫동안…. 나직이 중얼거리는 끝말에 얼핏 쓸쓸함이 스쳤다. 아무것도 없이 새하얗기만 한 곳에 홀로 오랜 시간 있어야 한다면, 미쳐 버리는 게 당연했다. 그럼 혹시 외로움을 느낀 것일까? 문득 안타깝다는 감정이 일었다가 촛불 꺼지듯 휙 사라졌다.

정신 차리자. 그는 유피테르의 결계에 존재하는 자다. 게다가 아까 내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그는 나의 적이라고.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잡념을 떨치는 사이, 뱀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 이곳에 왔다는 건, 또 신의 불을 흡수했다는 거겠네요.

“왜 모르는 척해요? 이미 어느 신전이 함락됐는지도 알고 있으면서.”

- 그야 그렇죠.

날이 선 태도로 대했으나 뱀은 도리어 즐거워 보였다. 정말로 나와 함께 있는 지금을 흥미로워하는 것 같아서 점점 묘한 기분이 되었다. 곡선을 그리며 내게 다가온 뱀은 아주 천연덕스럽게도 내 다리를 타고 올라와 무릎에 자리 잡았다.

- 당신에겐 안타까운 얘기지만, 지금까진 계획에 큰 차질 없이 흘러가고 있어요.

“전에 말했던 그건가요? 유피테르가 일부러 제게 신력을 흡수시키려 한다는 계획.”

뱀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 하지만 ‘나’도 딱 한 가지 예상하지 못한 점이 있어요.

천천히 몸을 기다랗게 편 뱀은 나와 살며시 눈을 맞췄다. 흰 비늘에 푸른 눈동자는 꼭 설원에 둘러싸인 얼음 호수 같았다. 잠시 홀린 듯 멍하니 쳐다보니 뱀은 눈을 게슴츠레 뜨며 속삭였다.

- 우리가 이렇게 만났다는 거.

투명한 유리알에 비친 내 얼굴을 보곤 퍼뜩 정신을 차렸다. 뒤늦게 상체를 뒤로 물리며 경계하는 눈초리로 흘겨보았다.

“전에도 물었지만, 이런 걸 저한테 알려 주는 저의가 뭐예요?”

- 난 여기서 나가고 싶어요.

“나가고 싶다니….”

- 여긴 내게 감옥이나 다름없어요. 그리고 당신이라면 나를 이곳에서 빼낼 수 있죠.

감옥이라고? 이곳을 유피테르의 머릿속쯤으로 생각했던 내게는 퍽 당황스러운 이야기였다. 기억을 지키는 수호자가 아니라, 기억에 갇힌 수감자였단 말인가. 실상을 알고 보니 저번에 뱀이 내게 말했던 ‘기대하고 있다’는 말뜻을 어렴풋이 이해했다.

하지만 뱀의 기대와 달리 나는 그럴 능력 따위 없다.

“제겐 그럴 만한 힘이 없어요.”

- 아뇨. 당신은 가능해요.

단호한 목소리가 얼마나 확신으로 차 있던지, 재차 부정하기도 어려웠다. 이곳에 유일하게 들어온 내게 일말의 희망이라도 걸어 보고 싶은 건가. 아니면, 이마저도 나를 홀리기 위한 유피테르의 술수인가. 머릿속에서 두 가지 가설이 매몰차게 싸워 댔다.

끝내 떨어진 결론은 오래 고민한 것치곤 참으로 속물적이었다.

“설령 가능하다 해도 제가 도울 이유가 있나요?”

사실 내게 그를 빼내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보다 뱀이 나의 가능성을 믿고 있는 한, 얼마나 도움이 되어 줄지가 훨씬 중요했다. 금세 나의 속셈을 알아챈 뱀은 끝이 갈라진 혀를 날름거리며 물었다.

- 나의 원대한 계획을 망가뜨리고 싶지 않아요?

“그건….”

- 내가 도와줄 수 있어요.

그것은 선악과를 먹으라는 악마의 속삭임보다도 더욱 달콤한 제안이었다.

- 선황이 되면서 ‘내’가 버린 과거가 발목을 잡는데 도움이 될 거예요.

“과거를 버렸다고요?”

뜻밖의 이야기에 저절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잠깐. 지금 이게 사실이긴 한가? 곧이곧대로 믿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반면, 나는 뱀의 말을 서슴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 나…. 그러니까 유피테르는 카르사를 건국하면서 많은 것을 이곳에 가뒀어요. 완벽한 신에게는 감정이나 추억 따위 불필요한 것이었으니까. 약점 따위는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 않은 거죠.

그래서 처음 뱀과 대화를 나눴을 때, 이 하얀 우주를 쓰레기통이라고 칭한 거구나. 유피테르가 스스로에게 불필요한 부분을 떼어 내어 가둬 둔 곳. 그리고 다신 들여다보지 않을 곳. 쓰레기통이라는 단어만큼이나 잘 어울리는 표현도 없었다. 게다가 인간들의 기도가 전부 ‘쓰레기통’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 그 후로 결계에 갇히게 됐지만, 나름 이 안에서 인간들의 기도를 받으며 세계를 지켜봐 왔어요. 유피테르가 인간 사이에 섞여 어떤 삶을 살았는지도 봐 왔고….

“그럼 혹시 아스레인의 뿔이 어디 있는지 알아요?”

- 애석하게도 몰라요.

뱀은 단호하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유피테르의 일부라면서, 이 하얀 지옥에 갇혀 세상사를 몇 세기 동안 지켜봤으면서 뿔의 행방을 모른다고? 미심쩍은 눈빛을 보내자 뱀은 차분하게 변명을 덧붙였다.

- 진심이에요. 나는 유피테르가 선황이 되면서 생겨난 존재- 그러니 이전의 있던 일 따윈 몰라요.

막 지어낸 이야기인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아스레인의 뿔이 잘린 것은 그 말마따나 유피테르가 선황이 되기 전에 벌어진 사건이다. 일부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으나 물고 늘어진다 한들 알려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럼 떨어져 나올 당시에 뭘 기억하고 있었는데요?”

끈질긴 추궁에도 뱀은 어떤 불쾌한 기미도 없이 즉답했다.

- 그때 머릿속에 남은 것은 나의 이름, 그리고 인간을 위해야 한다는 사명. …하지만 유피테르라는 이름도 거짓이니 사실상 사명만 남았네요.

“…유피테르가 본명이 아니에요?”

- 선황이 되면서 이전의 이름을 버렸더군요. 그리고 본명으로 나를 봉인했어요.

유피테르의 진짜 이름. 그게 결계를 여는 열쇠였다.

그럼 이 뱀은 내가 유피테르의 본명을 알아낼 수 있으리라고 믿는 건가. 어떻게? 카르사 제국이 건국되기 전에 쓴 역사서라도 있나? 지금 내가 아는 과거는 고작 유피테르가 마을을 돌아다니며 인간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게 뭔지 물어보고 다녔다는 것뿐이었다.

“저는… 이름 같은 건….”

들어 본 적 없어. 심지어 아스레인의 이름조차 찾지 못했단 말이야.

가만히 생각해 보면 모든 비극은 아스레인의 뿔이 잘리면서 시작됐다. 칭송받던 그 마물이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시기도, 유피테르가 제 과거를 떼어내 봉인한 때도, 평화롭던 대륙이 망가지던 순간도- 전부 하나의 사건으로 이어진다.

- 나와 손을 잡죠. 태오.

그리고 얽히고설킨 실타래가 끝끝내 풀리려 한다.

- 나는 당신을 도울 수 있어요. …아니, 나만이 당신을 도울 수 있어요.

내가 또 다른 유피테르와 협력하는 방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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