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4 (234/305)

#234

지하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결코 뒤를 돌아보면 안 됐던 오르페우스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금빛 섬광이 터진 후에 찾아온 지독한 적막이 상상력을 자극했다. 심지어 평소와 달리 툴툴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아 잠시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대체 무슨 일이….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해 뒤를 돌아보려는 순간, 아스레인이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내 어깨를 붙잡았다.

“먼저 가지. 알아서 따라올 테니.”

그대로 아스레인의 손에 이끌려 마을을 향해 걸었다. 문이 다 뜯어져 허름한 폐가에 들어갈 때까지도, 뒤따라오는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뒤늦게 걱정이 되어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벌판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스레인.”

“음?”

“아까 닉스한테 뭘… 한 거예요?”

은근슬쩍 떠보았지만, 아스레인은 침묵을 고수했다. 그러곤 태연하게 나무로 만들어진 의자를 장작으로 쓰려는 듯 조각조각 해체했다. 먼지만 가득 쌓인 바닥 위에 장작을 모아 두고 불을 지피자 그럴싸한 캠핑이 완성되었다. 따스한 모닥불이 폐가를 나름대로 운치 있게 만들어 줬지만, 무거운 고요마저 몰아내진 못했다.

모닥불 앞에 앉아서 내내 눈치만 살피다가 슬며시 물어봤다.

“화난 거 아니죠?”

“내가 왜 화를 내나.”

“하지만 휘브가 떠난 후로 계속….”

휘브의 이름이 튀어나오자마자 가지런한 미간에 깊은 협곡이 생겼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무표정할 아스레인이 저렇게 대놓고 반응하는 건 처음 본다. 어째 내가 닉스나 아이리스와 함께 있을 때보다 싫어하는 눈치다. 설마 휘브가 내 손등에 입을 맞췄던 일을 마음에 두고 있는 건가.

너른 어깨에 머리를 툭 기대며 부드럽게 그의 손을 잡았다.

“저한테 그런 쪽으로 관심이 있는 느낌은 전혀 아니었어요.”

감사 인사를 전하는 휘브는 충성을 맹약하는 기사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스레인에겐 아니었나보다. 피곤한 듯 찌푸려진 얼굴을 쓸어내린 아스레인은 한숨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눈을 봤다면 그리 말하지 못할 걸세.”

“무슨 눈이요?”

“이따금씩 자네의 뒷모습을 몰래 바라볼 때….”

내 뒷모습? 내가 모르는 사이 흘겨보기라도 했나.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이자 아스레인은 별안간 뒷말을 삼켰다. “아니, 됐네.” 하고 흐름을 끊어 내며 내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아쉬움을 남기고 떨어진 입술이 어서 자라고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왠지 이대로는 자고 싶지 않았다.

괜히 투정을 부리고 싶어져 아스레인의 품에 파고들곤 고개를 꼿꼿하게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배시시 웃으니 굳어 있던 그의 표정이 조금씩 풀어졌다. 이윽고 아스레인은 내 뺨을 감싸 쥐며 서서히 고개를 숙였다. 그대로 입을 맞춰 주는가 했더니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멈추는 것 아닌가. 뜨거운 숨결만 오고갈 뿐, 연신 스치기만 하는 입술에 점점 속이 타들어 갔다.

“…너무해.”

평소엔 아닌 척하면서 은근히 애태우길 좋아하는 사람이란 말이야. 게슴츠레 뜬 눈으로 쳐다보니 아스레인의 입꼬리가 짓궂게 올라갔다. 재촉하듯 옷자락을 꽉 쥐자 아스레인은 살며시 입술을 겹쳐왔다. 살랑거리며 불어오는 밤바람에 은은하게 그의 체취가 섞여 쉬이 달뜨고 말았다.

점차 호흡이 거칠어지자 아스레인은 내 허리를 감싸 안아 제 무릎 위에 앉혔다. 어느새 그의 목에 두 팔을 두른 채로 입맞춤을 이어 나갔다. 아니, 이걸 입맞춤이라고 해도 되나. 나는 그에게 삼켜지고 있었다. 등줄기를 쓰다듬는 손은 한없이 부드러운데도 맞닿은 입술만은 거치니, 그 격차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능숙하게 입술 새를 벌리고 들어온 혀를 급급히 받아 내던 그때였다.

[어후, 죽는 줄 알았네.]

질척하게 섞이는 타액의 소리를 뚫고 들어오는 음성에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황급히 입술을 떼어 내곤 뒤를 돌아보니 문가에 기대어 선 닉스가 보였다. 마법에 호되게 당한 탓인지, 안 그래도 창백한 피부가 훨씬 핏기 없어져 있었다.

[저기요. 아저씨. 아무리 분신이라고 해도 너무한….]

비아냥대던 닉스가 우리를 보자마자 말을 뚝 끊었다. 얼이 빠진 듯 조용히 눈만 끔뻑이는 모습을 보니 뺨이 화악 붉어졌다. 문을 닫을 걸. 폐가에 문이 없어도 아무튼 뭐라도 닫을 걸! 어찌할 바를 모르고 돌처럼 굳어 있자 닉스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혹시 내가 한창때에 온 건가?]

“아, 하하…하, 아니요. 괜찮아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아스레인의 무릎에서 내려와 얌전히 그 옆에 앉았다. 어째선지 흐트러진 옷차림을 정리하곤 흘낏흘낏 닉스를 바라보았다. 이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린 닉스는 턱짓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 옆에 있는 사람은 전혀 안 괜찮아 보이는데?]

“예?”

곧장 옆을 돌아보니 아스레인이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닉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차분해서 역시 아스레인이다, 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낮게 깔린 목소리가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하자 주변으로 엄청난 마력이 모이기 시작했다. 마법이었다. 아스레인은 차분한 게 아니라 인내심에 한계가 온 거였다.

“아스레인! 참아요. 참아.”

주문을 외는 아스레인의 팔을 다급하게 잡아끌며 말했다.

“이 폐가 무너지면 저 어디서 자요? 네?”

아무 변명이나 갖다 붙이며 말리자 한창 주문을 읊던 입술이 멈췄다. 그 후로 안개처럼 깔려 있던 마력이 살얼음 녹듯 말끔하게 사라졌다. 막 마법을 받아칠 준비를 하던 닉스는 다시 여유로운 태도로 돌아왔다.

[음~ 폐가가 으슥하니 좋긴 하지?]

“닉스…!”

[하하, 장난이야.]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인 닉스는 성큼성큼 모닥불로 다가왔다. 혹시나 무슨 짓을 할까 봐 나도 모르게 아스레인의 옷자락을 꼭 잡았다. 고래 사이에 낀 새우의 심정도 모르고, 맞은편에 앉은 닉스가 속 편하게 물었다.

[그래서 할 말이란 게 뭐야?]

“사제를 시켜 닉스를 공격한 사람의 정체를 알아냈어요.”

줄곧 장난스럽던 눈빛이 일순 달라졌다.

[그게 누군데?]

착 가라앉은 목소리는 바람 한 점 없는 겨울을 연상시켰다. 예전엔 막연히 레톤 신전의 사제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젠 안다. 그 푸른 옷자락에 연결된 줄을 조종하고 있던 이가 누구인지.

“카르사 제국을 건국한 선황, 유피테르예요.”

[…뭐?]

닉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듯 얼굴을 심하게 일그러뜨렸다. 유피테르에 관한 이야기가 인간에 대한 증오를 높이는 시작점이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범인을 잡고 싶어 하는 그이기에 그간 있었던 일을 낱낱이 설명했다. 유피테르와 카인, 그리고 제국을 가호하는 열두 신의 이야기를 듣던 닉스는 참다 못해 말허리를 자르고 끼어들었다.

[잠깐. 그러니까… 내 어깨를 찌르도록 시킨 놈이랑 영감의 뿔을 잘라 간 작자랑 같다는 거지?]

“네. 유티페르가 모든 일의 배후였어요.”

[허…!]

코웃음을 치는 닉스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선혈처럼 붉은 눈동자는 모닥불보다도 무서운 기세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의 장작은 필시 복수심이겠지. 당장이라도 목을 치고 싶어 하는 증오심이 느껴져 곧장 입을 열었다.

“무턱대고 건드렸다간 오히려 이쪽이 당할 거예요.”

[그래서?]

“그의 계획은 전부 혜안으로 본 미래와 직결되어 있어요. 그런데 유피테르가 제 미래만은 볼 수 없다더군요.”

[네가… 맹점이로구나.]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걸 이용해서 유피테르의 계획을 천천히 무너뜨릴 생각이에요. 신전을 돌아다니면서 신력을 흡수하고 있는 것도 그 일환이고요.”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닉스가 다소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오히려 인간에게는 반가운 존재 아닌가? 가장 원하던 신이 되어 주는 것과 동시에 인간을 가호하고 있잖아. 그걸 없앤다면, 태오. …오히려 네가 인간의 적으로 몰릴 수도 있어.]

“닉스 말이 맞아요. 누군가는 여전히 만들어진 신의 존재가 간절하겠죠. …하지만 지금 유피테르는 가호를 명목으로 사람들을 조종하고 있는 것뿐이에요.”

한 번쯤 불행을 운명의 탓으로 돌린 적이 있을 것이다. 물론 나도 그랬다. 모든 건 타고난 운명 때문이라고- 그리 생각하니 제법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어떻게든 자신의 운명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휘브리스를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누구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 나갈 권리가 있잖아요? 저나 닉스뿐만 아니라… 여기 사는 모든 생물에게도 마찬가지로요.”

설령 내 선택에 후회할지언정 남에게 조종당하고 싶진 않다. 불행한 인생이라고 한탄할지언정 누군가의 계획을 위해 쓰이긴 싫다. 나의 선택은 오로지 나의 것. 그건 신조차도 침범할 수 없는 불가침의 영역이다.

단호한 의지를 내비친 후, 폐가는 적요한 침묵에 빠졌다. 타오르는 모닥불을 가만히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는 어느 심연을 떠다니는지 초점이 없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닉스는 무심한 낯으로 물었다.

[그래서 내일 벤테온의 신전으로 갈 생각이야?]

“네. 신전 내부 상황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닉스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나도 함께 갈게.]

“…네?”

[그리 만든 놈을 방해한다는데, 나라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아직도 어깻죽지가 쑤신다고.]

동행은커녕 인정도 받지 못할 줄 알았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닉스는 선뜻 동행을 결정했다. 역시 복수 때문일까. 그래도 예상치 못한 반응에 선뜻 동조할 수 없었다. 입술을 움찔거리기만 하자 닉스는 한쪽 눈썹을 삐죽 올리며 물었다.

[왜, 싫어?]

“아뇨. 그건 아니지만….”

말할까, 말하지 말까. 속으로 고민하다가 힘겹게 운을 뗐다.

“신탁에 따르면, 닉스가… 죽는다고 했어요.”

닉스뿐만이 아니다. 히페리온도, 오케아노스도, 이카로스도… 심지어 아스레인도 죽는다고 했다. 그들이 죽어야 유피테르의 계획이 성공한다. 그야 죽지 않도록 지키면 그만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두고 싶지 않았다.

초조한 기색을 여실히 드러내자 닉스는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헤메라. 나는 그리 쉽게 죽지 않아.]

여유로운 미소에서 자신감이 드러났다. 알고 있다. 시작의 마물들이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살아왔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놓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별안간 엄습해오는 초조함을 무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닉스가 함께 가 준다면, 저야 고맙죠.”

그리 말하면서도 언젠가 이 날을 반드시 후회할 것 같은… 그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문득 불어오는 찬바람에 눈을 떴을 땐, 이미 지평선 위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조금이나마 잠을 자서 그런가. 폐허에서 묵은 것치고는 컨디션이 나쁘지 않았다. 찌뿌듯한 몸을 일으키자마자 지체할 것 없이 벤테온의 신전으로 향했다.

정처 없이 울룩불룩한 언덕을 걷다 보니 저 멀리 신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불그스름한 대지 위에 세워진 다섯 개의 기둥이 유난히 새하얬다. 마침내 신전을 찾았는데도 반가운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나 조용했다.

“…뭔가 이상해요.”

[그러게. 사람이 있긴 한 거야?]

닉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단 한명의 사제라도 지낸다면 물을 길러 올 수원이 있어야 하고, 충분한 식량이 근처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벤테온의 신전 주변에선 그 어떤 생명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기둥 근처에 쌓인 모래먼지와 금이 간 석제 벽이 세월의 흐름을 보여 줄 뿐이었다.

“신력이 느껴지긴 하는데….”

신전 안에 신의 불을 지키고 관리해야 할 사제는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의아함을 품은 채로 신전 앞에 다다르자 벤테온 신을 상징하는 석상이 보였다. 오른 발을 든 산염소가 ‘벤테온의 손’을 닮은 수정 위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름 정교하게 세공되어 있었으나, 그 뿔과 얼굴은 이미 풍화되어 가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돌조각을 주운 아스레인이 짐짓 심각한 투로 말했다.

“발길이 생각보다도 더 오래 끊긴 것 같군.”

“그래도 오르커스 황야를 건너는 모험가들이 가끔 들르지 않았을까요?”

“글쎄. …살아서 건넌 이가 얼마나 될지 모르겠군.”

퍽 비관적인 이야기에 쓴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어제 만난 청년만 해도 거의 죽을 뻔했으니까. 부디 사제가 남아 있길 빌며 신전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서서 목소리를 높였다.

“계세요?”

아무리 기다려도 대답은 없었다. 혹시 못 들었나 싶어 노크하려고 문고리에 손을 댄 순간, 끼이익- 문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이 열려 있었다. 게다가 그 안에선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수상한 낌새를 느낀 아스레인이 나를 제지하곤 앞서 신전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때였다. 갑자기 온 대지가 우르릉우르릉 진동하기 시작했다. 강도 높은 지진에 버티지 못하고 휘청거리자 아스레인이 재빨리 내 팔을 붙잡아 주었다.

“괜찮나?”

다급한 목소리에 우선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무슨 일이지? 제아무리 오르커스 황야에 지진이 자주 일어난다지만, 그건 벌써 오래 전의 이야기다. 느닷없는 재해에 당황하기도 잠시 싸늘한 목소리가 귓등을 스쳤다.

[환영 받는 것 같네? 우리.]

환영을 받는다고? 누구에게? 퍽 엉뚱한 닉스의 말에 뒤를 돌아보았다가 전혀 달갑지 않은 광경과 마주쳤다. 무려 수 십 마리의 늑대형 헤카테가 신전을 둘러싸고 있었다. 설마 방금 전 지진은 헤카테가 형성되면서 일어난 건가.

생기 없는 눈동자는 오로지 우리를 향한 살의만으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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