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3 (233/305)

#233

칠흑 같은 그림자가 드리운 곳엔 반드시 그가 있다. 그는 순결한 죽음이요, 찬연한 절망이었으니. 공포로 젖은 이의 귓가에 감언을 속삭이고, 마침내 그 눈동자에 희망이 깃들 즈음 마지막 숨결을 앗아간다. 오로지 비탄만을 삼키는 밤의 주인이 오르커스 황야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확실하게 끝을 맺어야지. 다신 태양빛도 보지 못하도록.]

닉스가 앉아 있는 벤테온의 손은 마치 푸른빛의 옥좌처럼 보였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몸 선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검은색 비단 옷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매혹적인 자태를 가만히 쳐다보던 그때, 닉스가 천천히 다리를 꼬자 살짝 벌어진 천 사이로 회색빛 살결이 보였다. 생각보다 깊게 파인 옷차림에 놀라 황급히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어떻게….”

[응?]

“어째서 여기에 계신 거예요?”

무의식중에 흘끔, 올려다보았다가 또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번엔 아예 허벅지까지 드러나 눈을 둘 곳이 없었다. 어수룩한 행동이 우스웠는지, 닉스는 야살스러운 웃음을 쿡쿡 흘리며 말했다.

[내게 어울리는 곳이잖아?]

망자의 땅. 수정에 부딪치는 바람소리가 꼭 죽은 이의 속삭임처럼 들리기도 하는 오르커스 황야. 그의 말마따나 닉스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장소였다. 심지어 뜻밖의 만남에 놀란 나와 달리, 닉스는 애초부터 우리가 이곳에 올 줄 알았다는 듯 태연했다.

“언제부터 오르커스에 계셨어요?”

[너와 헤어진 직후였나~]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인 닉스는 벤테온의 손에서 내려왔다. 가볍게 바닥에 착지하는 그의 발 아래로 검은 연기가 훅 피어올랐다. 아무래도 거대한 본체는 근처에 두고서 분신으로 돌아다니는 모양이다. 성큼성큼 다가온 닉스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눈웃음을 지었다.

[한동안 인간은 보고 싶지 않아서 조용한 곳을 찾다보니 이렇게 됐네.]

“아직 제게 실망하셨어요?”

[그렇다고 하면, 어떡하게?]

슬쩍 반응을 떠보는 탓에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얼마 전, 리리오페 호수에서 닉스와 나는 좁힐 수 없는 견해 차이를 보았다. 결국 닉스는 나르키소스에게 잡아먹힐 뻔했던 인간을 구해 낸 내게 환멸을 느끼고 떠났다. 언젠가 재회할 때는 응어리진 마음이 풀린 후일 줄 알았는데, 이렇게 급작스럽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게….”

제대로 대답해야 한다. 그런데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마물이나 인간, 어느 한쪽의 편을 들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저 소중한 이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으면 그걸로 족했다. 짧은 고민 끝에 예리하게 빛나는 붉은색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하며 말했다.

“그러게요.”

[뭐?]

명료한 대답에 닉스는 다소 당황한 듯했다. 기왕이면 유창한 언변으로 넘어가면 좋겠지만, 내게는 그럴 만한 말솜씨도 그런 식으로 꾀어 낼 마음도 없었다. 천천히 닉스에게로 다가가며 진실한 마음을 전했다.

“미안해요. 그때와 지금의 저는 똑같아요.”

[…똑같다고?]

“네. 분쟁을 두려워하고, 소중한 이들 하나 잃고 싶지 않아 쩔쩔매죠.”

나지막이 속삭이며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닉스의 손을 붙잡았다. 창백한 살갗은 생명의 온기 따윈 품고 있지 않아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하지만 나를 쳐내지 않는 손길만은 그 어느 봄볕보다도 따스했다.

“물론 닉스 님의 마음을 바꾸겠다고 이제와 빈말이라도 꾸며 낼 수는 있겠죠. 하지만 저는 당신을 진솔하게 대하고 싶어요. 이런 제 모습을 닉스 님. …아니, 닉스가 싫어한다고 해도요.”

오르커스만큼이나 황량한 눈동자에 일순 균열이 생겼다. 그게 마음의 벽을 허무는 신호인지, 심기를 거슬렀다는 뜻인지는 알지 못했다. 한동안 말없이 나를 응시하던 닉스는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정말 여전하구나. 한없이 무르고 무뎌.]

한숨이 섞인 목소리엔 체념한 기색이 선명했다. 결국 나는 닉스를 설득하지 못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제 목숨을 노린 인간을 사랑하라니, 왠지 마음이 쓰라려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 용기를 내어 잡았던 손도 괜히 미련이 남을까 놓았다. 그렇게 발길을 돌리려는 순간, 바람 소리보다 작은 음성이 발목을 붙잡았다.

[그런데 왜일까.]

후회어린 목소리에 시선을 들자 잔뜩 일그러진 채로 웃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그런 너를 미워하려야 미워지지가 않아. 그저 흔하디흔한 인간 중에 하나일 뿐인데….]

닉스는 천천히 손을 뻗어 내 뺨을 그러쥐었다. 길고 뾰족한 손톱이 귀 뒤쪽과 목의 여린 살결에 닿았다. 당장이라도 힘을 주면 곧장 숨통을 끊을 수 있을 텐데도, 닉스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부서지기 쉬운 유리를 어루만지듯 조심스럽고 소중하게 쓰다듬었다.

[이 땅에 발을 들인 너를 발견하자마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비뚜름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어쩐지 서글프게 보였다.

[그간 다치지 않고 잘 지내서 다행이라고, 그리 안심했어.]

“…닉스.”

[분명 실망했었는데, 역시 인간은 다 똑같은 족속이라고 생각했는데…. 실망하기 무섭게 다시 기대해 버렸지. 너라면 정말로 나를 포기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얼굴을 쓰다듬는 손길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애틋했다. 늘 장난스럽던 닉스가 깊은 속내를 드러내니, 새삼 그에게도 여린 면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예리한 눈썹아래 서슬 퍼렇게 빛나던 눈동자는 어느새 애정이 담긴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나는 계속, 빛이 그리웠었나 봐.]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귓가로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물기 어린 홍옥의 눈동자가 새벽이슬을 머금은 산수유열매 같기도, 먹구름에 휩싸인 달 같기도 했다. 오롯이 나를 비춰 주는 것이 고마워 화답하듯 내 뺨에 올린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닉스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헤메라.]

“네. 닉스.”

[정말로 낮과 밤이 공존할 수 있을까?]

그 물음이 제게 확신을 달라는 것처럼 들려 품고 있던 이야기를 꺼냈다.

“있죠. 닉스. …실은 다 들었어요.”

[뭘?]

“얼마 전에 캄페 산에 들를 일이 있었거든요. 거기서 소녀를 다시 만났어요.”

소녀를 언급하자마자 닉스는 내가 무슨 말을 할지 깨달은 듯 탄식을 내뱉었다.

[하아, 그 돌멩이. 벌써부터 입이 가벼워서 어째.]

“걱정돼서 갔었던 거죠?”

닉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도리어 강한 긍정으로 느껴졌다.

애당초 캄페 산에 돌아갈 이유는 없었다. 오랫동안 갇혀 있던 타르타로스이니, 오히려 일평생 다신 가고 싶지 않은 장소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닉스는 단지 소녀를 보기 위해 마을로 향했다. 다 알고 있다며 미소를 짓자 닉스는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어린 마물은 잘 지내던?]

“네. 게다가 소녀가 미스트라고 이름을 지어 줬더라고요. 안개 낀 날에 만났다고….”

이름을 듣자마자 닉스는 푸흐,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며 중얼거렸다.

[참 멍청한 이름이구나.]

그는 알고 있을까. 살며시 내리뜬 눈동자가 한없이 자애롭다는 사실을. 지금의 닉스라면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설득보다도 내가 앞으로 그와 함께 하고 싶었다.

“미스트는 닉스 덕분에 살았어요.”

[치료는 누구라도 할 수 있었어.]

“아뇨. 그때 닉스가 소녀에게 친절하게 대해 줬기에, 그 소녀도 기꺼이 마물을 구했던 거예요.”

비관적인 앞날만 바라보던 그에게 마물과 인간이 함께하는 미래를 보여 줄 수 있지 않을까. 이윽고 내 뺨을 어루만지던 손이 천천히 떨어져나갔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그가 내게서 멀어진 만큼 더 가까이 다가가서 물었다.

“닉스는 그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어요?”

[…….]

“저는 그들이 함께 있을 수 있는 세계가… 그리 멀리 있지 않다고 믿어요.”

그리 말하며 닉스를 향해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이번엔 부디 스스로를 어두운 밤에 가두지 말라고, 낮과 밤은 틀림없이 공존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을 생각에 잠겨있던 닉스가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하여 손가락 끝이 맞닿으려는 그때였다.

콰직! 눈앞이 번쩍하는 광채와 함께 닉스를 향해 금빛 검이 날아들었다. 찰나의 순간 닉스는 재빨리 한 걸음 물러섰다. 단 1초만 늦었더라도 내게 향한 손이 무참히 잘려 나갔으리라. 검 날에 찢겨나간 옷을 손 본 닉스는 짜증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언제쯤이면 평범하게 인사해 주려나?]

비아냥대는 말투는 내 등 뒤에 있는 이에게 향해 있었다. 곧장 뒤를 돌아보니 아스레인이 어느새 가까이에 서있었다.

“아스레인!”

반갑게 맞이했으나, 한껏 경계하는 눈빛이 바닥에 꽂힌 검만큼이나 매서웠다.

“네가 왜 여기 있지?”

[흐응, 내 마음인데?]

애틋하고 자비로운 마물은 어디로 가고, 닉스는 평소의 얄미운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연신 씰룩거리는 입꼬리에 아스레인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져만 갔다. 이윽고 닉스는 못 마땅한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보다 영감, 방금 헤메라와 감동의 재회하려던 거 안 보여?]

“봤지. 그래서 방해한 거고.”

[하! 그 더러운 성격은 언제쯤 무뎌지려나.]

“네가 태오한테서 떨어지기만 하면 아무 문제없네.”

[그럼 그냥 평생 더러운 성격으로 살아야겠네~]

평소처럼 티격태격하는 광경을 불난 집 구경하듯 한발자국 떨어져서 지켜보았다. 그러다 뒤늦게 닉스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뜻을 이해했다. 커다래진 눈으로 휙 돌아보니 닉스가 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널 믿어 볼게. 헤메라.]

“……! 정말이에요?”

[그래. 네가 나아갈 세상이 어떨지 궁금해졌어.]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가슴 벅찬 감동을 느껴 나도 모르게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자 닉스는 짓궂은 웃음을 흘리며 양팔을 크게 벌렸다. 그러곤 마치 달려와서 안기라는 듯 고개를 까딱 움직였다.

[자, 이제 감동의 포옹이 이어질 차례인데?]

그에 응하려 다가가려다가 문득 바닥에 꽂혀 있는 검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우르릉, 천둥이 치듯 진동하는 소리에 슬쩍 아스레인의 눈치를 살폈다. 역시나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아스레인은 닉스를 향해 대놓고 불쾌감을 드러냈다.

“꿈도 꾸지 마라.”

[난 원래 꿈 안 꿔~]

“함부로 닿을 생각도 하지 말고.”

아스레인은 옅게 혀를 차며 마지못해 검을 거두었다. 그 검이 닉스를 향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혼자 안도의 한숨을 삼키는 사이, 아스레인이 걱정스러운 안색으로 물었다.

“태오. 내가 없는 사이 무슨 일 있었나?”

“숨어있던 헤카테가 있었어요. 다행히 아그누스가 제압해 줬고, 닉스가 대신 파괴해 줬죠.”

“다친 곳은?”

“없어요. 그보다 도망치던 사람은 어떻게 됐어요?”

“빈 주머니를 들고 열심히도 도망치더군.”

수정을 담은 주머니가 뜯어진 걸 끝까지 몰랐구나. 필사의 각오로 왔다가 빈 주머니를 들고 갔을 생각에 조금 안쓰러운 것 같기도 했다. 물론 값싼 동정이었지만. 청년이 도망친 길을 따라 떨어진 수정을 바라보며 아스레인은 차분한 투로 말했다.

“헤카테에게 그리 쫓겼으니 다신 오지 못할 걸세.”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닉스가 느긋하게 손을 휘적거리며 말했다.

[글쎄? 아무리 봐도 그 인간… 여기 다시 왔다가 죽을 것 같은데.]

“뭐, 목숨이 아깝지 않다면 그렇겠지. 우리가 신경 쓸 바도 아니지만.”

냉정하게 고개를 저은 아스레인은 내 어깨를 감싸 쥐며 말했다.

“이만 돌아가지. 내일 아침부터 움직여야 하잖나.”

“그래요. 아까 봐 둔 폐가로 가죠.”

원래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눈을 붙이고 있어야했는데…. 예상치 못한 사건을 맞닥뜨리는 바람에 황야 한가운데서 새벽을 맞이하고 말았다. 왠지 긴장이 풀려서 졸음이 몰려오는 동시에 하품이 나왔다. 피곤한 눈을 비비자 아스레인이 어깨를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하지만 그 다정한 손길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벤테온의 손을 등지고 몇 걸음 채 가지도 못했는데, 아스레인이 우뚝 제자리에 멈춰 섰다. 이윽고 뒤를 돌아보는 시선이 제법 살벌했다.

“대체 왜 따라오는 거지?”

가시 돋친 물음에도 닉스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그쪽이 아니라 태오를 따라가는 건데?]

“그러니까 왜 따라오는 거냐고 물었네.”

[그야 심심하니까~]

퍽 황당한 이유에 아스레인은 헛웃음을 흘렸다. 어깨를 으쓱이는 닉스는 그래서 뭐 어쩌라고, 하는 표정으로 서있었다. 둘의 시선이 맞닿은 곳에서 스파크가 튀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그에 서둘러 아스레인의 팔을 잡아끌며 닉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같이 가요. 안 그래도 할 말이 있었어요.”

그에게 유피테르에 관해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려 어깨에 창을 꽂도록 시킨 장본인이었으니, 닉스도 배후를 알아야 하지 않겠나. 그 이야길 하려던 참이었는데, 편을 들어주는 줄 알았는지 닉스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는데?]

“…하아….”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아스레인은 질끈 눈을 감으며 걸음을 돌렸다. 아예 포기해 버린 뒷모습에 대고 닉스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근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날이 섰어? 영감.]

그러게. 원래도 못마땅하게 여기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닉스를 싫어하진 않는데…. 유독 닉스를 멀리 떼어놓으려는 모습에 솔직히 나도 궁금하던 차였다. 집요하게 따라붙는데도 아스레인이 반응하지 않자 닉스는 흘러가는 목소리로 의문을 던졌다.

[설마 또 누가 태오를 건드렸어?]

“…….”

[좋다고 고백이라도 하든?]

아차 싶은 순간, 또 다시 눈앞이 번쩍하는 빛이 일어났다. 헤카테를 공격할 때보다 거대한 마력이 등 뒤로 날아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뒤는…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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