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2 (232/305)

#232

공포에 질린 비명이 들리자마자 본능적으로 몸을 틀었다. 어떻게든 봐 보겠다며 미간까지 찌푸리고 살펴봤지만, 울퉁불퉁한 언덕에 시야가 가려져 벤테온의 손 주변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 협곡을 빠져나간 바람 소리를 목소리로 착각했나? 시선은 푸르게 빛나는 수정의 숲에 고정한 채로 아스레인에게 물었다.

“들었어요?”

한 발 앞으로 걸어 나간 아스레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력까지 느껴지는군.”

“네? 신력이라면… 헤카테인가요?”

“그건 모르겠군. 벤테온의 손에서 나오는 마력이 기운을 방해하고 있네.”

빛에 홀린 이방인이든 벤테온의 사제든, 헤카테를 만났다면 무사하진 못할 것이다. 심지어 비명소리가 들린 직후 오르커스 황야는 섬뜩한 고요에 빠졌다. 도망치거나 살아있다면 또 다시 비명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벌써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아스레인과 함께 빛나는 수정으로 걸어갔다.

급한 마음에 걸음이 점점 빨라지는 가운데,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설마 유피테르가 파 놓은 함정은 아니겠죠?”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서서 바라보니 아스레인이 도리어 되물었다.

“함정이라는 걸 알면 안 갈 텐가?”

“…아뇨.”

뻔히 의심이 드는데도 불구하고 가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설령 함정이라고 한들 누군가는 저곳에 잡혀 있다는 얘기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푸른 수정의 숲 앞에 있는 언덕에 다다랐다. 여전히 사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언덕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이 수정에 부딪쳐 카랑카랑한 쇳소리만 울렸다.

최대한 인기척을 내지 않으려 조심스럽게 언덕을 넘었다. 그러자 거대한 수정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가까이서 보니 그 웅장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찬란하게 내뿜는 빛에 붉은 바위마저 청색으로 물들었다.

얼기설기 얽힌 수정에 압도되어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붙잡았다.

“아스레인. 혹시 뭔가 보여요?”

“너무 조용한데….”

벤테온의 손 주변을 둘러보던 아스레인이 갑자기 말을 멈췄다. 유심히 무언가를 응시하던 눈빛이 이내 날카롭게 변했다. 곧바로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붉은 돌조각으로 만들어진 늑대형 헤카테가 청년의 뒷덜미를 물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거친 바위 위로 질질 끌려가는 데도 청년은 몸부림치지 않았다. 혈흔 없이 축 늘어진 몸을 보아하니 의식만 잃은 듯했다.

“하아, 다행히 살아있는 것 같아요.”

“그래도 안심하긴 아직 이르네. …우리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으니 일단 지켜보지.”

아스레인의 말을 따라 언덕 꼭대기에서 헤카테의 동태를 살폈다. 마치 사냥에 성공한 늑대가 먹잇감을 가져가듯 헤카테는 청년을 데리고 수정 사이로 깊게 들어갔다. 저곳에 둥지가 있나, 싶은 궁금증이 들기 무섭게 헤카테가 멈춰 섰다. 별안간 청년을 바닥에 내려놓곤 기다란 콧잔등으로 청년의 허리춤을 툭툭 밀기 시작했다.

“저게… 뭐 하는 거죠?”

아스레인도 영문을 모르는 듯했다. 그 사이 옆으로 굴러가던 청년은 살짝 튀어나온 돌부리에 덜컥 걸렸다. 때마침 기둥에서 떨어져 나온 수정이 청년 바로 옆에 있는 그림자로 굴러갔다. 아니, 저건 그림자가 아니다. 그 앞은 칠흑 같은 어둠만이 가득한 낭떠러지였다.

툭, 투둑, 툭.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진 수정이 절벽에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하염없이 멀어지는 소리에 낭떠러지가 얼마나 깊은지 실감하다가도, 그제야 헤카테가 무엇을 하려는지 눈치챘다.

“안 돼….”

다음은 청년이 낭떠러지로 떨어질 차례였다.

목적이 드러나자마자 아스레인이 곧장 공격을 감행했다. 허공에 떠오른 수십 개의 금빛 칼날이 헤카테에게 비처럼 쏟아졌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놀란 헤카테는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 수정 기둥으로 착지했다. 사냥을 방해한 이가 누구인지 찾는 눈동자가 맹렬하게 빛났다.

“여기서 기다리게.”

아스레인은 짧은 한 마디만 남기고 곧장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그때 벤테온의 손 뒤에서 다섯 마리의 헤카테가 걸어 나왔다. 몸 전체를 이룬 붉은 바위 곳곳에 푸른 수정이 박혀 있어 마치 오르커스의 파수꾼과 같았다. 살의를 내뿜으며 다가온 헤카테 무리는 순식간에 아스레인을 둘러쌌다.

“아스레인!”

서둘러 다가가려고 하자 아스레인이 나를 향해 손을 올렸다. 가까이 오지 말라는 의미였다. 내가 제자리에 주춤 멈추자 아스레인은 금빛으로 이루어진 검을 꺼내들었다.

오르커스 황야에 무거운 긴장이 흘렀다. 이윽고 등 뒤에 있던 헤카테가 아스레인에게 달려들었다. 다리를 노리려 쩍 벌린 입 안으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흉흉하게 빛났다. 이빨이 닿기 직전, 아스레인은 칼을 거꾸로 잡아 헤카테의 머리를 찔렀다.

휘익- 콱! 바위가 쪼개지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처박힌 헤카테는 칼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쳤다. 그 후로 일방적인 싸움이 이어졌다. 물 흐르듯 유려한 검술이 헤카테를 토막 내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섯 헤카테가 아스레인의 발 아래로 쓰러졌다.

마지막으로 청년을 물고 가던 헤카테까지- 전부 볼품없는 돌조각으로 돌아갔다.

“태오.”

“아, 네!”

흠 잡을 데 없는 검술에 넋을 놓고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조심스럽게 언덕을 내려가니 아스레인이 눈짓으로 수정 사이에 쓰러져있는 사람을 가리켰다.

“가서 저 청년을 봐주게.”

“아스레인은요?”

“아직 정리가 덜 끝나서 말이네.”

“예? 뭐가….”

스스슥, 흩어진 돌조각이 움직이는 소리에 목소리가 묻혔다. 황급히 바닥을 내려다보니 조각난 헤카테의 몸이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칼날에 무자비하게 썰려 나간 다섯 마리의 헤카테가 새로이 태어났다. 심지어 몸을 형성하면서 방금 전보다 훨씬 많은 수정을 삼켰는지, 온몸이 푸르게 빛났다.

코어를 찾아야 한다. 돌조각 사이에 숨어있는 판도라를 파괴하지 않으면 이 싸움은 영영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아는 아스레인은 내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금 눈짓으로 뒤를 가리켰다.

“여긴 알아서 처리할 테니, 청년을.”

“네!”

헤카테의 처단은 아스레인에게 맡기고 서둘러 청년에게 다가갔다. 평탄하지 않은 지형과 수정에서 뻗어 나온 줄기가 끊임없이 앞길을 가로막았다. 몇 번이고 휘청거린 끝에 겨우 쓰러진 청년 곁에 도착했다.

흙먼지 구덩이를 쓴 로브 차림의 청년은 아무리 봐도 사제는 아니었다. 옷자락 그 어디에도 신전을 나타내는 징표 따윈 없었다. 그럼 여행객인가? 그나마 정체를 파악할 수 있는 소지품이라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떨어진 보따리뿐이었다.

선뜻 보따리를 주워주려는데 갑자기 얕은 기침소리가 들렸다.

“어, 정신이 드세요?”

곧바로 곁으로 다가가 안색을 확인했다. 얼굴을 잔뜩 찌푸린 청년이 끙끙 앓고 있었다. 의식이 돌아오려는 참이었다. 그대로 잠들지 않도록 어깨를 꽉 잡고 흔들며 “저기요!” 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 청년이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괜찮으세요?”

“으….”

“여기가 어딘지 아시겠어요?”

“…오르…커스….”

띄엄띄엄 물음에 답하던 청년은 갑자기 눈을 떴다. 꼭 귀신이라도 들린 듯 퍼뜩 상체를 일으켜 앉는 모습이 섬뜩했다. 막 움직이면 안 된다고 어깨를 붙잡았지만, 청년은 힘없는 손짓으로 나를 밀어냈다.

“왜 그래요?”

물어봐도 소용없었다. 패닉에 빠진 눈동자가 무언가를 찾는 듯 열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시나 싶어 등 뒤를 가리키자 청년은 경기를 일으키며 보따리를 향해 기어 갔다. 마침내 보따리를 되찾아 히힉, 괴상한 웃음을 흘리는 모습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대체 뭐가 들었기에 저리도 소중하게 여기는 걸까. 궁금하던 와중에 작은 구멍으로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벤테온의 손 주변에 흔히 굴러다니는 손가락 한 마디만 한 수정이었다. 왠지 황당한 기분이 되어선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이걸 가져가려고 이 위험한 곳까지 온 거예요?”

이만한 마력을 품은 수정이라면 꽤 비싼 값에 팔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조금만 늦게 도착했어도 이 사람은 죽을 뻔했다. 말 그대로 자신이 팔려던 수정의 일부가 되기 직전이었다. 그런데도 청년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떨어진 수정을 줍고 있었다.

“저기요.”

불러도 반응이 없었다. 결국 청년에게 다가가며 조심스럽게 회유했다.

“일단 우리랑 같이 여길 벗어나요.”

“…….”

“여긴 너무 위험해요. 방금 전만해도 당신,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을 뻔했어요.”

“…….”

“제 말 들리세요?”

마침내 청년의 어깨에 손이 닿으려던 순간이었다. 청년은 내가 보따리를 뺏는 줄 알았는지,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다.

“뭐, 뭐하는 짓이에요?”

나를 추궁하는 목소리는 공포로 점철되어 있었다. 뺏을 생각이 없다며 두 손을 들어 보여도 소용이 없었다. 이미 수정이 내뿜는 마력에 홀려 이성을 잃은 청년의 귀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결국 청년은 보따리를 끌어안고 냅다 반대편으로 도망쳤다.

“저기요!!”

서둘러 따라가려 했으나, 있는 힘껏 달려가는 그를 붙잡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친 청년은 어느새 언덕을 넘고 있었다. 허탈하게 제자리에 서서 부리나케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치 헨젤과 그레텔처럼 청년이 지나간 자리에 푸른 수정이 굴러다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스레인이 다가왔다. 너른 어깨너머로 흔적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산산조각 난 바위만 가득했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던 아스레인은 의아하게 물었다.

“그 인간은?”

“죄송해요. 놓쳤어요.”

“…놓쳤다고?”

“정확히는 도망갔어요. 제가 해치려는 줄 알았나 봐요.”

그 후로 청년이 수정을 주우러 왔었다는 설명을 덧붙이자 아스레인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나와 마찬가지로 이 먼 오르커스 땅까지 온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못마땅한 표정을 지은 아스레인은 계속 청년을 걱정하는 내게 단호하게 말했다.

“신경 쓰지 말게. 그만한 기력이 있거든, 어떻게든 살아남겠지.”

“그랬으면 좋겠는데….”

도무지 제정신으론 보이지 않는 얼굴이 자꾸만 아른거려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아, 헤카테 무리는요?”

“다섯 모두 판도라를 찾아 파괴했네.”

“…다행이네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수정으로 뒤덮인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금 전, 청년이 떨어질 뻔했던 낭떠러지는 보기만 해도 아찔한 높이였다. 절벽에 있는 바위까지 수정으로 가득 들어차 환히 빛났다.

“이런 곳까지 헤카테가 있을 줄은 몰랐어요.”

“사람은 없어도 일단 신전이 있는 성역이라는 건가….”

성역이라. 다시 생각해도 등골이 오싹하다. 설마 사람을 일부러 죽이지 않고 이곳에서 수정의 제물로 만들려고 할 줄은 몰랐다. 심지어 수정이 섞여서 그런지, 예전에 헤메라의 신전에서 만난 헤카테와는 차원이 달랐다. 마법을 피하는 민첩함이나 일부가 잘렸을 때의 치유력도 훨씬 좋아졌다.

스스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수정을 몸에 섞는 행동은 꼭 진화하는 생물 같지 않은가.

“이 상태라면 벤테온의 신전도 그리 안전하진 않겠네요.”

아슬아슬한 낭떠러지에서 한 걸음 물러서는데, 불현듯 희미하게 남아 있는 신력을 느껴졌다.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드는 순간 수정 사이에 숨어 있던 헤카테와 눈이 마주쳤다. 곧바로 아스레인의 옷자락을 끌며 헤카테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저기…!”

제 위치가 발각된 걸 알아채자마자 헤카테는 수정 밖으로 튀어 나갔다. 아스레인이 재빨리 마법을 써서 도망치는 헤카테의 다리를 잘랐다. 하지만 헤카테는 아랑곳하지 않고 전력을 다해 언덕으로 달려갔다.

“아까 청년을 데리고 가던 헤카테로군.”

“네?!”

생각해보니 아까 아스레인을 공격한 헤카테는 총 여섯 개체였다. 여러 조각으로 분해된 후 새로 태어난 개체가 다섯뿐이라, 한 마리가 사라졌다는 걸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그 사이 다리가 잘린 헤카테는 제 몸의 일부를 떼어내 새로운 다리를 만들어냈다. 도무지 내 두 다리로는 따라잡을 수 있는 속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스레인이라면….

“혹시 따라잡을 수 있어요?”

“그렇다만.”

“그럼 부탁해도 될까요?”

“…뭐?”

“어디로 갈지 모르잖아요. 이번에야말로 그 청년을 죽이러 가는 걸지도….”

아스레인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자네를 여기 혼자 둘 순 없네.”

무엇을 걱정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전에도 라비린토스 설원에서 이런 식으로 내가 납치됐었으니까. 하지만 그때와 지금의 나는 전혀 달랐다. 아스레인의 손을 꽉 붙잡으며 확신에 찬 눈으로 말했다.

“걱정 말아요. 예전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아요.”

“그….”

“부탁이에요.”

결국 아스레인은 한숨을 내쉬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아그누스.”

그 부름에 내 그림자에서 뾰족한 귀가 쫑긋 올라왔다. 그제야 아스레인은 마음을 놓고 그물 밖으로 도망친 먹잇감을 사냥하러 떠났다.

그가 사라진 후, 일대는 또 다시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수정과 수정 사이를 지나치는 바람 소리가 꼭 속삭임처럼 들리기도 했다. 기왕 혼자 남은 김에 천천히 숲 밖으로 걸어 나가 벤테온의 손앞에 멈춰 섰다. 거대한 몸집만큼이나 그 안에 깃든 마력도 상당히 짙었다.

“아그누스. 대단하지? 난 태어나서 이런 건 처음 봐….”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벤테온의 손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때 얌전히 그림자 안에 있던 아그누스가 펄쩍 뛰어나왔다. 내가 이름을 불러서 그런 줄 알았건만, 아그누스는 수정 기둥 사이를 맹렬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살의가 깃든 신력을 감지한 것이다.

“아직도 헤카테가 남아 있었나?”

아그누스가 경계하는 곳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러자 방금 전 상대한 것보다 훨씬 거대한 늑대형 헤카테가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바위 조각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푸른 수정이 뒤섞여 있었다.

“…많이도 먹었구나.”

제법 위협적인 자태를 뽐냈지만, 그 정체가 신력으로 움직이는 인공체임을 알기에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차라리 말이 통하지 않는 맹수였으면 몰라도…. 잔뜩 털을 부풀린 아그누스의 등을 쓰다듬어 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물어 와.”

짧은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아그누스는 헤카테를 향해 달려들었다. 수정 사이를 달려가던 그림자 늑대는 순식간에 흑표범으로 변모했다. 내 힘을 양껏 흡수한 아그누스는 바위로 된 목덜미를 단숨에 물어뜯었다. 콰직! 아그누스의 송곳니에 돌조각이 부서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이윽고 아그누스가 발톱을 세워 머리를 거칠게 억누르자 헤카테는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어떻게든 벗어나려는 몸부림은 오히려 제 힘을 빼는 지름길이었다.

결국 완벽하게 제압당한 헤카테는 텅 빈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이 시야가 유피테르에게 전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우위를 점했음에도 썩 유쾌하진 못했다.

“인공체를 동정하는 것부터가 웃길지도 모르지만….”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아그누스에게 잡혀있는 헤카테를 향해 다가갔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마치 세례를 하듯 헤카테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내 신력을 불어 넣으면, 굳이 판도라를 찾아 파괴하지 않아도 유피테르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엔 부디 생명으로 태어나기를.”

기도를 중얼거리며 신력을 손에 모아 헤카테에게 주입하려는 순간이었다. 휙-! 하늘에서 떨어진 창이 정확히 판도라를 꿰뚫었다. 찰나의 순간에 코어가 깨진 헤카테는 평범한 돌이 되었다.

뭐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기도 잠시, 헤카테를 없앤 창부터 살펴보았다. 날과 긴 손잡이까지 빠짐없이 붉은 창은 꼭 피로 물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창을 만지는 순간 알아챘다. 이건 아스레인의 검처럼 마력으로 만들어진 물건임을. 게다가 소름끼칠 정도로 순도 높은 마력은 너무나도 익숙했다.

[여전하구나.]

귓등을 핥듯 들려오는 나른한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탁 트인 시야로 벤테온의 손에 느긋하게 앉아있는 인영이 보였다. 검은 비단처럼 흘러내린 머리카락과 창백한 회색빛 피부, 고고하게 이곳을 내려다보는 선혈의 눈동자.

[넌 마음이 너무 여려.]

게슴츠레 뜨니 휘어지는 눈매마저 매혹적인 그는,

[…헤메라.]

닉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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