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
다음 신전을 물색하려 자료를 찾던 중 낯선 신의 이름을 발견했다. 이아페 성전이나 카르사 제국 역사서, 심지어 세간에서도 들어 본 적 없었다.
그 이름은 벤테온. 지하와 광물을 관장하는 신이다.
곧바로 지도를 펼쳐 보니 벤테온이란 이름은 북동쪽 내륙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북방을 뒤덮은 코카서스 산맥 중 가장 높은 낙맥을 타고 내려오면 오르커스 황야가 펼쳐진다. 그 암석 지대 한가운데 벤테온의 신전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직선상 거리만으로 따지면 헤메라 신전과 그리 멀지 않았으나, 길게 뻗친 산맥이 두 신전을 벽처럼 가로막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완전히 고립된 지역도 아닌데, 어째서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걸까. 예전 레톤 신전에서 발견한 지도에서도 벤테온 신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었다. 지도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결국 아스레인에게 물었다.
“혹시 벤테온 신에 대해서 알아요?”
“벤테온?”
“네. 신전이 있는 지역 이름조차 처음 들어 보는 것 같아서요.”
나지막이 이름을 중얼거리던 아스레인은 이내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오르커스 황야에 있는 광산에서 시작된 신앙 말인가. 막 탄생했을 때는 바다의 신 팔리아와 대등할 만큼의 사제와 신도를 거느렸었네.”
“그래요? 생각보다 규모가 꽤 크네요.”
“…결국 지난날의 영광이 되었지만.”
의미심장한 소릴 중얼거리는 아스레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과거 벤테온의 신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우수에 찬 눈빛이 퍽 불안한 낌새를 풍겼다.
“지난날이라뇨?”
초조한 목소리로 묻자 아스레인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한때는 광산으로 풍요롭던 대지가 이젠 다른 이름으로 불리지.”
“무슨….”
“…망자의 땅.”
뜻밖의 이야기에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그 불길한 별칭에 저절로 벌레가 들끓는 부패한 시신과 비가 오지 않아 쩍쩍 갈라진 땅이 떠올랐다. 이윽고 아스레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안타까운 과거를 회상했다.
“지진으로 인해 광산이 무너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네. 심지어 한두 번이 아니었지.”
“그 참사 때문에 사람들이 떠난 건가요?”
“그것도 무시는 못하겠지만… 제일 중요한 건 광산의 가치였네. 오르커스 광산에서 나오는 광물은 이렇다 할 쓸모가 없었지. 가끔씩 마석으로 쓸 수 있는 수정이 나왔지만, 그건 굳이 오르커스가 아니어도 캘 수 있었네.”
결국 버려진 거였다. 힘들게 광산을 복구하고, 목숨까지 걸어가며 일할 만큼의 가치가 없으니까. 마침내 광산에 남아 있을 이유를 잃은 사람들은 모두 떠나가고, 홀로 남은 황야는 한때 풍요로웠던 흔적을 끌어안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신전은 계속 남아 있네요?”
“제아무리 황무지라고 할지라도 엄연히 성역이니, 섣불리 신전을 옮기기는 어렵겠지.”
망자의 땅이라 불리는 성역이라. 이름만 들어선 결코 가고 싶지 않지만, 목적만 생각하자면 이보다 제격일 수는 없었다. 안 그래도 다르곤 신전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연달아서 인파가 많은 곳은 가고 싶지 않았다. 또 다시 유피테르가 사제와 신도들을 인질로 잡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짧은 고민 끝에 지도상의 오르커스를 가리키며 아스레인에게 물었다.
“위험하지만 않다면 벤테온 신전으로 가도 좋을 것 같은데… 아스레인 생각은 어때요?”
“근처에 마을이 없어서 하룻밤 정도는 밖에서 묵어야 할지도 모르네. 괜찮겠나?”
“야영이라면 문제없어요.”
자신 있게 말했는데도 썩 믿음이 가진 않았나 보다. 아스레인은 별안간 서장으로 걸어가 책 한 권을 가져왔다. 내게 잘 보이도록 책을 펼치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래도 알고 가는 게 낫겠지.”
두꺼운 책에는 카르사 대륙의 여러 지역 생태가 담겨 있었다. 빠르게 페이지를 넘기는 와중에도 다양한 동식물 종이 눈에 들어왔다. 이윽고 끝부분을 펼치자 오르커스 황야에 대한 장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다른 페이지와 달리 유독 오르커스 황야만 생태 연구가 부실했다.
발길이 끊겨서 그런가?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이자 아스레인이 입을 열었다.
“오르커스는 말이 황야지, 실제론 가파른 절벽과 바위로 이루어져있네. 바닥에는 온통 자잘한 수정이 박혀 있어 밤에도 낮처럼 반짝거리지. 그 탓에 빛에 이끌려 왔다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생명이 한둘이 아니네.”
“아….”
“게다가 아직까지도 오르커스로 수정을 캐러 갔다가 실종된 인간도 종종 있다지.”
괜히 ‘망자의 땅’이란 이름이 붙여진 게 아니었다. 동식물이 살기 힘든 환경인데다가 매년 오르커스에서 사람이 실종되고 있다. 심지어 그 이유가 사고이니 누군가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설상가상 아스레인은 더한 이야기를 말해 주었다.
“그 때문에 퍼진 소문도 만만찮네.”
“무슨 소문이요?”
날렵한 손가락이 책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오르커스 황야에 얽힌 소문이 적혀있었다.
유독 오르커스의 바위가 붉은 이유는 죽은 이들의 피로 물들었기 때문이라는 둥. 바위에 박힌 수정이 억울한 망자의 원념을 빨아들이는 탓에 점점 밝아지고 있다는 둥. 실은 수정으로 만들어진 마물이 인간을 잡아먹는 거라는 둥- 야사(野史)에서 볼 법한 문장이 이어졌다.
이런 종류의 괴담은 대개 가짜라는 걸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긴장해 버렸다.
“전부 거짓말이죠?”
슬쩍 눈치를 살피자 아스레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심하기도 잠시, 뒤늦게 흘러나온 목소리가 서늘하게 스쳐지나갔다.
“하나만 빼고.”
뜻밖의 대답에 퍼뜩 아스레인을 올려다보았다. 대체 저 기이한 소문 중 무엇이 진실이란 말인가. 어두운 밤길에 정체모를 그림자를 마주친 듯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불안하면 입술을 짓이기는 나쁜 버릇이 또 튀어나왔는지, 아스레인은 조심스럽게 내 아랫입술을 건드리며 말했다.
“바위에 박힌 수정이 매년 밝아지고 있네.”
“서, 설마 원념 때문이에요?”
“정확히는 죽은 이들의 마력을 빨아들이는 것 같지만.”
그 말이 사실이라면 바위 자체가 마석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윽고 아스레인이 책장을 한 장 넘기자 줄글 사이로 얇은 펜 선으로 그린 그림이 나타났다.
웬 기둥이 있나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여러 개의 수정이 한 몸으로 합쳐져 만들어진 거대 광물이었다. 마치 바오밥 나무처럼 두툼한 기둥의 꼭대기엔 길쭉한 갈래가 마구잡이로 퍼져 있었다. 그림만 봐서는 도무지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붉은 대지 위에 돋아난 푸른빛의 수정은 존재만으로도 엄청난 위압감을 풍겼다.
“이게 뭐예요?”
“오르커스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수정이네. 하늘과 맞닿은 모습이 꼭 신의 손길 같다고 하여 ‘벤테온의 손’이라는 이름을 지었다더군.”
그 이름을 듣고 나니 제법 성스럽게 보이기도 했다. 정작 신력은 하나도 깃들어 있지 않고, 망자의 마력을 빨아들인 기이한 광석이지만.
뒤이어 그림 아래 적힌 줄글을 읽어 보았다. 밤이 되면 ‘벤테온의 손’뿐만 아니라 붉은 바위에 섞인 수정이 달빛에 반짝거린단다. 꼭 바다에 별을 수놓은 것 같다는 표현에 낭만을 가지다가도, 문득 오르커스에 얽힌 진실이 떠올랐다.
잊어선 안 된다. 수정이 밝게 빛나는 만큼 그곳에서 죽은 이가 많다는 사실을.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네요.”
과연 벤테온의 신전엔 몇 명의 사제가 남아 있을까. 아무리 믿음이 강하다지만, 굳이 그 신전을 찾아가는 신도가 있긴 할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가장 기본적인 의문을 드러냈다.
“무턱대고 신전에 찾아갔다가 의심을 사는 건 아닐까요?”
“일단 신전 근처로 가서 동태를 지켜보지.”
아스레인도 한동안 오르커스에 가지 않아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그 말에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책을 덮었다. 망자의 땅, 오르커스. …이번 모험도 그리 호락호락할 것 같진 않다.
***
오르커스가 얼마나 황무지인지 도착하기도 전에 여실히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륙 구석구석에 길을 이어 둔 태자마저 오르커스로 향하는 마법진은 만들어 두지 않았다. 결국 그나마 가까운 곳으로 가서 오르커스까지 직접 이동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아침에 출발한 우리는 저녁이 되어서야 붉은 지평선에 도착했다. 코카서스 산맥과 이어진 협곡을 힘겹게 내려오고 나니 눈앞엔 무의 대지가 끝없이 펼쳐졌다.
“여기가… 오르커스?”
차라리 라비린토스 설원이 낫다고 생각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불타는 들판처럼 새빨갛게 물든 암석 지대엔 물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오래 전, 지진으로 인해 울퉁불퉁하게 솟은 지형은 꼭 두더지가 망쳐 놓은 밭 같았다. 온통 바위로 둘러싸인 오르커스는 꼭 붉은 빛의 화성을 연상시켰다.
일순 말문이 막혀 서있기만 하니, 아스레인이 앞서 언덕을 내려가며 손을 내밀었다.
“신전은 저쪽이네.”
이런 곳에 정말로 신전이 있다니…. 내가 수행사제였다면, 부디 순례길로 벤테온의 신전만은 가지 않길 빌고 또 빌었을 것이다. 발에 치이는 게 돌인가 싶어 내려다보면 풍화된 뼛조각이었고, 사체를 노리는 개미와 거미가 꽃밭에 나비 날아다니듯 돌아다녔다. 살아있는 생명이라곤 곤충뿐인 이곳에 오직 붉은 바위만이 숨 쉬듯 반짝거리니 가히 섬뜩한 풍경이었다. 이방인을 반기지 않는 듯 황량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말했다.
“이곳에 벤테온의 신전이 없었더라면, 절대 안 왔을 것 같아요.”
“여기에만 사는 마물이 있대도?”
“…그건 다른 얘기죠.”
그 후로 아스레인과 함께 언덕을 오르내리다 보니 어느덧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했다. 황무지의 밤은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그러나 굳이 횃불을 킬 필요는 없었다. 주변이 어두워지자마자 바위에 섞인 수정이 스스로 발광하며 길을 비췄기 때문이었다.
퍽 아름다운 광경이었으나, 일말의 감탄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낭떠러지와 가까울수록 수정이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걸 봐 버렸으니까. 유독 그곳에 있는 바위가 피처럼 붉게 보이는 건 내 착각일 것이다.
“슬슬 묵을 장소를 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슬그머니 아스레인에게 딱 붙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햇빛이 사라져 급속도로 기온이 떨어지는 건 둘째치고, 묘하게 감도는 분위기가 스산해서 왠지 무서워졌다. 그러자 아스레인은 기꺼이 곁을 내어주며 눈짓으로 언덕 너머를 가리켰다.
“조금 더 걸어가면 폐가가 나올 걸세.”
“폐가요?”
“여긴 예전에 마을이 있었던 곳이니까.”
아. 그랬었지. 도무지 사람이 살 수 없는 환경에 잠시 잊고 있었다. 한때 광산으로 번성했던 지역이었다는 사실을. 이윽고 아스레인과 함께 걸음을 재촉해 언덕을 넘었다. 마침내 꼭대기에 다다르는 순간, 아스레인이 언급한 마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정작 시선을 붙잡은 것은 너머로 보이는 기둥이었다.
“아스레인. 저기….”
마을 뒤로 달보다 환하게 빛나는 수정이 있었다. 두꺼운 기둥에 사방으로 뻗은 줄기는 책에서 본 그대로였다. 족히 5m쯤 되려나. 멀리서도 느껴지는 거대함에 어안이 벙벙해진 사이, 아스레인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벤테온의 손이군.”
책에서는 분명 벤테온의 손이 홀로 우뚝 서 있었다. 그러나 삽화와는 달리 벤테온의 손 주변으로 여러 수정 기둥이 놓여 있었다. 창백하리만치 푸른 수정이 숲처럼 한데 모여 있으니 은하수를 보듯 황홀했다.
“그림으로 볼 땐 몰랐는데… 직접 보니까 왜 위험한 걸 알고도 가는지 알겠네요.”
아름다웠다. 푸른 수정이 밝게 빛날 수 있는 이유를 알고도 탄성은 끊이지 않았다. 그 아래는 거친 협곡이 이어졌다. 자칫 잘못 발을 헛디뎠다가는 곧바로 수정이 내뿜는 광채의 일부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한 번쯤은 가까이 가 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다들 그렇게 다가갔겠지. 그저 빛을 좇다가 결국 불을 향해서 뛰어드는 나방처럼.
“태오.”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니 아스레인이 나를 불렀다. 헛, 숨을 들이쉬며 고개를 돌리자 가늘게 뜬 눈과 마주쳤다. 혹시 내가 수정이 내뿜는 빛과 마력에 홀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건가.
“걱정 마요. 무모한 짓은 안 하니까.”
“말은 그러면서 표정은 당장 가고 싶은 것 같은데.”
“…그렇게 티나요?”
슬쩍 입꼬리를 올리자 아스레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일 해가 뜨면 함께 가지.”
마치 아이를 달래는 것 같은 투에 가벼운 웃음이 터졌다. 아무튼 허락해준 게 어딘가 싶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아스레인과 함께 언덕을 내려가던 그때였다.
“으아아아악!!”
멀리서부터 찢어질 듯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우뚝 걸음을 멈춘 나와 아스레인은 동시에 같은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바람소리뿐이 들리지 않는 고요한 황야에서 비명의 방향은 더욱 분명해졌다. 벤테온의 손이 있는 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