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0 (230/305)

#230

바람결에 눈처럼 흩날리는 꽃잎이 이마로사뿐히 내려앉았다. 어느새 코앞까지 물씬 다가온 봄의 손짓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나아가길 잘했다고. 반드시 유피테르를 막겠다는 결심이 서기까지 그리 대단한 이유는 필요하지 않았다.

단지 하나라도 더 많은 이들이 봄의 풍경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뿐이었다.

잠시 바닥에 내려놓은 목걸이를 주워 다시 몸에 지녔다. 아코니툼의 정화석이 밖으로 빠져나가던 신력을 붙잡아주니 한층 제어하기 편해졌다. 이래서 유피테르도 항상 정화석을 지니고 다녔던 건가. 어째 점점 그와 비슷한 길을 걷는 것 같다.

뒤늦게 몰려오는 피로감을 한숨으로 토해 내며 아스레인을 돌아보았다.

“다행히 잘된 것 같아요. 앞으로 조금씩 늘려나가도 괜찮겠죠?”

“주변 환경에 아무런 문제는 없어 보인다만… 힘들지 않겠나?”

“네! 그간 생각보다 많은 신력이 쌓였나 봐요. 이 정도는 거뜬해요.”

자신 있는 표정을 지으니 아스레인은 안심한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하늘하늘 날아다니던 꽃잎이 아스레인의 머리카락 위에 자리 잡았다. 나도 모르게 푸핫, 웃음을 터뜨리자 아스레인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하고 입모양으로 묻기에 슬쩍 발꿈치를 들어 그의 머리카락에 붙은 꽃잎을 떼어 주었다.

“으응, 아무것도 아니에요.”

긴장했던 마음이 흐물흐물 풀어지는 바람에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 사이 손바닥에 놓인 꽃잎은 바람을 타고 떠났다. 얇게 깔린 눈 위로 안착하는 꽃잎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기왕이면 더 많은 곳에 성물을 둘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금세 스스로 씨앗을 퍼뜨릴 테니 걱정 말게.”

무리하지 말라고 회유하는 말에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렸다. 이만 마을로 돌아가려는데 불현듯 멀찍이 서 있던 휘브가 눈에 걸렸다. 이쪽을 멍하니 쳐다보는 얼굴이 꼭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휘브?”

이름을 불러도 반응이 없어 가까이 다가가 기웃거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휘브가 희뜩 나를 쳐다보았다. 막 의식을 차린 그를 데리고 나온 게 실수였나. 괜히 걱정이 되어선 휘브의 팔을 가볍게 토닥이며 말했다.

“많이 피곤해요?”

“…예?”

“그냥 쉬게 둘 걸…. 어서 돌아가죠.”

“아? 예, 예.”

휘브는 꼭 교수님께 과제를 받은 대학원생처럼 벙벙하게 대답했다. 절대 말수가 적은 사람은 아닌데, 마을로 가는 내내 조용해서 이상할 따름이었다. 곧장 여관으로 들어가려는데 아스레인이 길목에 잠시 멈춰 섰다. 그의 시선 끝에는 허름한 약초 가게가 있었다.

“왜요?”

“아까 했던 말이 신경 쓰여서.”

아까 했던 말? 그게……뭐더라. 약초랑 관련 있는 이야길 했던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답이 나오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아스레인이 가게 안으로 불쑥 들어갔다. 재빨리 따라 들어가니 아스레인의 주문을 받은 약초 가게 주인이 매대에 이것저것 늘어놓고 있었다. 조용히 눈치만 살피다가 작은 목소리로 아스레인에게 물었다.

“저건 왜요?”

“더 많은 곳에 퍼지길 바라지 않았나.”

마침 약초 가게 주인이 추운 지역에서도 잘 자란다며 자랑하듯 약초 모종을 가져왔다. 그 덕분에 아스레인이 무엇을 계획하는지 눈치챘다. 아직 어린 식물에 적은 신력을 주입해서 심으면, 생존력이 나무만큼은 아니어도 이쪽이 훨씬 빠르게 퍼질 것이다.

의도를 깨닫자마자 가죽 주머니에 특히 건강해 보이는 씨앗을 가득 담아 여관으로 돌아왔다. 외투를 벗어 두지도 않은 채 곧장 주머니를 열어보니 크고 작은 씨앗들이 여럿 보였다. 섣불리 손을 쓰진 못하겠어서 투박한 씨앗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 아이들이 잘 버텨 줄까요?”

“한꺼번에 많은 양의 신력을 주입하지만 않으면 괜찮을 걸세.”

“으음….”

흙 안에 묻은 씨앗에 물을 너무 많이 주면 쉽게 썩어 버리는 것과 같은 이치려나. 씨앗의 여린 생명력에 부담되지 않도록 봄비처럼 엷게 스며들어야 한다. 아직 신력을 완벽히 제어하기 힘드니, 이번엔 정화석을 차고 있는 쪽이 나을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씨앗을 모아들고서 하나하나에 신력을 불어넣었다. 거대한 양동이에 담긴 물을 손가락만 한 잔에 나눠담는 기분이었다. 더 이상 빈 곳이 없다고 느낄 즈음 씨앗을 다시 주머니 안에 넣었다. 두툼한 껍질 위로 희미한 신력이 일렁거렸다.

“이 정도면 될까요?”

“충분히 퍼지고도 남네.”

“헤헤, 다행이네요. 다음번엔 좀 더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스레인의 인정을 받으니 새삼 기분이 좋아졌다. 신력을 머금은 씨앗들이 다르곤 신전 주변뿐만 아니라 라비린토스 설원 구석구석에 퍼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안전할 것이다. 야광초처럼 번뜩이는 씨앗을 휘브에게도 보여주려고 주머니를 들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휘브는 여전히 넋을 놓고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휘브. 괜찮아요?”

의자에 앉아 걱정스럽게 물어보니 휘브가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내 무언가 단단히 이해가 안 되는 듯 인상을 한껏 찌푸리고는 물었다.

“어떻게 그만한 신력을 가지고 있는 거죠?”

“그게….”

“아까 나무 앞에서 목걸이를 풀었을 때는 훨씬 심하던데요. …대체 뭡니까?”

딱딱한 말투에서 반드시 진실을 듣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이미 중요한 사실을 전부 아는 그에게 딱히 숨길 일도 아니었기에 순순히 털어놓았다.

“이건 제 힘이 아니에요. 엄밀히 말해서 남의 힘을 뺏은 거죠.”

“빼앗았다고요?”

“네. 신의 불을 아예 제거하는 대신 그 안에 있는 신력을 흡수하고 있어요.”

덜하지도 더하지도 않고 정확히 사실만을 말했다. 하지만 휘브의 이마에 새겨진 내 천 자는 더욱 진해졌다. 혼자 열심히 고민하던 휘브는 끝내 머리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말했다.

“애초에 그 힘을 몸에 붙들어 놓을 수 있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됩니다.”

“그거라면… 실은 예전에 레톤 신의 성물을 만졌다가 저주를 제 몸으로 받아 낸 적이 있어요.”

“예?”

“아마 그 덕분인 것 같아요.”

“그게 뭔….”

왠지 입을 열면 열수록 혼란만 가중하는 기분이다. 연신 헛웃음을 흘리는 휘브의 입꼬리가 급기야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계란으로 바위를 깨는데 성공했다는 황당한 소식을 들은 것처럼 일그러진 표정이 압권이었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스레인이 넌지시 한 마디 얹었다.

“세상엔 설명할 수 없는 일이 꽤 많은 법이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그러려니 넘기라는 말에도 휘브는 쉬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니, 못하는 쪽에 가까웠다. 애써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불쑥 ‘아니,’하고 어이없음을 토로하곤 했다. 끝내 스스로와 타협했는지, 휘브는 허탈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이래서 신과 대적할 수 있는 거군요.”

“저 혼자서는 불가능해요. 다들 도와준 덕분에 가능한 일이죠.”

“형님. 도움에도 정도가 있는 겁니다. 금붕어한테 날개를 달아 준다고 하늘을 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정곡을 찌르는 비유에 되먹지도 않는 변명을 흘렸다.

“…운이 좋다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나 참, 금붕어가 무슨 마물인 줄 압니까?”

제아무리 마물이라도 날개를 단다고 비행할 수 있는 건 아닌데…. 라고 반박하려다가 말았다. 내 무덤을 스스로 파는 꼴이었으니까. 그런데 옆에서 팔짱을 끼고 듣던 아스레인이 대뜸 입을 열었다.

“수중 마물에게 날개를 달아 준다고 해도 하늘을 날 순 없네.”

“아오, 압니다. 알아요!”

휘브는 질색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겐 미안하지만, 정말로 모든 일은 운이 좋았기에 가능했다. 운 좋게 닉스를 만나 신의 저주에서 살아남았고, 운 좋게 신력을 흡수할 수 있는 몸이 되었다. 물론 사정을 설명해봤자 소용없는 것을 알기에 끝까지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휘브는 피곤한 얼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아무튼 나랑 비슷한 줄 알고 나름 동질감을 느꼈는데, 내가 잘못 봐도 단단히 잘못 봤네요. 그 교수에 그 제자이긴 한가봅니다?”

그림자가 드리운 연녹색 눈동자에 얼핏 체념이 스쳤다. 따지고 보면 휘브가 나보다 훨씬 험난한 인생을 살았으니, 비슷하진 않지. 음.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니 휘브는 한숨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이제 뭘 할 겁니까?”

“여기서의 할 일은 마쳤으니 다른 신전으로 가야죠.”

다르곤의 신전에서 험난한 사건이 많았던 만큼 얻은 것도 많았다. 결계 속에서 뱀에게 들은 이야기와 휘브의 해방. 그리고 신력을 자연물에 담아 퍼뜨리는 계획. 유피테르를 막을 방법을 얻었지만, 결국 이곳에도 뿔은 없었다.

홀로 아쉬움에 젖어 있는데, 별안간 휘브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나는 얌전히 안겔루스 대학으로 돌아가야겠네요.”

“…네?”

“웬만해서 거머리처럼 따라다니려고 했는데, 이래서야 짐짝만 될 것 같아서요.”

평소처럼 히물거리며 웃고는 있었지만, 흘리듯 말하는 목소리가 귀에 콱 박혔다. 단 한 번도 그를 짐이라 생각한 적 없다. 오히려 이아페에서부터 도움을 수십 번 받았으면 받았지.

“휘브.”

서둘러 따라서 일어나자 휘브가 허공에 대고 손을 휘적거렸다.

“아, 동정 사려는 거 아니니까 안 붙잡으셔도 됩니다~ 내가 주제파악 하나는 잘 하거든요.”

“아뇨. 안겔루스로 돌아가기 전에 휘브한테 부탁할 일이 있어서 그래요.”

퍽 단호한 투로 말하니 휘브가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았다. 한 눈에 봐도 의아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한테요?”

“네. 다른 계획이 있다면 어쩔 수 없지만요.”

그 후로 말없이 빤히 쳐다보았다. 나름대로 이 사건에서 발을 뗄 선택권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내 의도가 단단히 잘못 먹혔는지, 휘브는 한쪽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말했다.

“뭐… 형님의 부탁이니 특별히 들어드리죠.”

왜 아까보다 훨씬 들떠 보이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부탁을 기꺼이 들어준다니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는가. 테이블 위에 놓인 씨앗 주머니를 가져와 휘브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 씨앗들을 북쪽에 널리 퍼뜨려 주세요.”

“북쪽이요?”

“라비린토스 설원 말이에요.”

원래 설원에 신력이 깃든 씨앗을 심는 일을 셋이서 하려고 했다. 나와 아스레인, 그리고 휘브. 셋이서 금방 끝내고 함께 안겔루스 대학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휘브를 보니 마음이 바뀌었다. 아무래도 그에겐 기회가 필요한 것 같다.

“왜 그리 중요한 걸 나한테 맡기는 겁니까?”

스스로에게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날 기회가.

“믿으니까요.”

똑바로 눈을 맞추며 말하니 일순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무리 봄이 왔다고 한들 설원은 춥고 험할 거예요. 자칫 길을 잃을지도 모르죠. 그래도 휘브라면 잘해 줄 거라고 믿어요.”

“…그렇게 말하면 거절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작게 한숨을 내쉰 휘브는 조심스레 씨앗 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언뜻 목소리만 들으면 투정부리는 것 같지만, 그의 표정은 진중하기 짝이 없었다. 어째서 자신에게 중요한 임무를 주는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있는 듯했다. 정작 그 의심이 내가 일을 부탁한 진짜 이유인 것도 모르고.

어깨가 한껏 무거워진 것처럼 보여서 괜히 농담조로 말했다.

“제가 너무 어려운 일을 시켰나요?”

“하하, 두 분이 하는 일에 비하면 내리막에서 공 굴리는 수준이죠.”

끝내 휘브는 씨앗 주머니를 품 안에 소중하게 넣었다. 그러곤 망설임 없이 걸음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보기엔 멀쩡해도 하루를 내리 자다가 깨어난 환자다. 혹시 무리할까봐 걱정이 되어 뒤를 쪼르르 따라가며 물었다.

“벌써 가게요? 그래도 쉬는 게 좋을 텐데….”

“꾸물거려 봤자 뭐합니까.”

이쪽을 돌아본 휘브는 피식 웃으며 씨앗을 넣어 둔 가슴께를 툭툭 건드렸다.

“저 혹한의 오지에도 봄이 왔다는 걸 알려야죠.”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나를 말갛게 바라보았다. 연구실 앞에서 처음 본 이래로 가장 생기 넘치는 모습이었다. 메마른 지푸라기가 봄을 맞이하여,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여름의 녹음으로 물드는 순간이었다. 부디 그의 모든 발걸음에 축복이 함께하길 빌며 성큼 다가갔다.

“휘브.”

이윽고 그의 가슴에 손을 올리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절대 잊지 말아요.”

“…….”

“그리고 설원을 찬찬히 돌아다니며 잘 생각해봐요.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선택은 오로지 당신의 몫이에요.”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었다. 제아무리 마석 덕분에 유피테르의 지배에서 벗어났다지만, 여전히 스스로를 의심하고 있을 그에게. 그리고 외로운 설원에서 홀로 걸으며 끊임없이 벽에 부딪칠 그에게… 이번 여정은 순례가 될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휘브의 인생이니까.”

말이 끝나고도 한동안 멍하니 나를 바라보던 휘브는 조심스레 내 손목을 잡았다.

“지금껏 신을 왜 믿는지 몰랐는데… 이젠 좀 알 것도 같습니다.”

“네?”

“물론 아직도 신이 존재하는 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를 구원하는 존재를 신이라고 한다면….”

뒷말을 삼킨 휘브는 내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곤 천천히 고개를 숙여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당신이 나의 신이야.”

혼잣말처럼 속삭이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돌처럼 굳어있는 나를 바라보며 씨익 웃는 얼굴이 만족스러워 보였다. 요즘은 고맙다는 소리를 이렇게까지 하나. 불쑥 튀어나온 아스레인의 손이 내 팔을 잡아 빼지 않았더라면, 계속 잡혀있었을 지도 모른다. 이윽고 잔뜩 날이 선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괜한 수작 부리지 말고 가지.”

“에이, 표정 좀 푸십쇼. 거 한 번 가지고….”

“한 번?”

장난스러운 어조가 도리어 화를 부추길 뿐이었다. 아스레인이 살벌한 눈빛으로 쏘아붙이자 휘브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하하, 더 했다간 얻어맞겠네요.”

뒤로 주춤 물러난 휘브는 자연스럽게 문고리를 잡고 열었다.

“그럼 잘 다녀오겠습니다. 모쪼록 무사히 안겔루스에서 다시 만나죠.”

“조심히 다녀와요.”

문 앞에서의 인사를 끝으로 휘브는 여관 밖으로 나갔다. 창가에 서서 마을 중심가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발목을 붙잡던 무거운 족쇄가 풀리기라도 한 걸까. 앞으로 나아가는 휘브의 발걸음이 훨씬 가벼워보였다.

“처음 만났을 때 보다 표정이 좋아졌어요.”

휘브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커튼을 치며 뒤를 돌아보았다.

“안 그래요? 아스레인.”

“…관심 없네.”

무심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아스레인은 뜬금없이 내 손등을 만지작거렸다. 맨 처음엔 손을 잡고 싶은가 했는데, 못마땅하게 일그러진 표정을 보아하니 그건 아닌 것 같다. 뚫릴 정도로 집요하게 한 곳만 어루만지고 있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방금 휘브의 입술이 닿았던 부분이 이쯤이었던 것 같은데?

“아스레인. 지금 설마….”

“그래. 질투하고 있네.”

혹시나 하고 운을 떼자마자 아스레인이 대답했다. 부정은커녕 기다렸다는 듯 인정하는 모습에 푸핫!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게 얼마 만에 환하게 웃는 거더라.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냉큼 아스레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갑작스러운 포옹에도 그는 별 말 없이 마주 안아 주었다.

“휘브는 그냥 장난이었을 거예요.”

“…그걸 자네가 장난으로 느껴져서 다행인지….”

“네?”

“아무것도 아니네.”

머리 위로 내려앉은 한숨소리가 꽤나 깊게 들렸다. 그 탓에 또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반대의 경우를 생각하자니 미안해져서 입을 꾹 다물었다. 그 후로 한참동안 단단한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서 안겨 있다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결국 다르곤 신전에도 없었네요. …어서 찾아 주고 싶은데.”

“…그래?”

“당연하죠. 뿔을 찾으면 아스레인의 잃어버린 기억도 되돌아올지 모르잖아요.”

반드시 찾아 주고 싶었다. 뿔도, 기억도, 진짜 이름도.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슬쩍 고개를 드니 보이는 아스레인의 표정은 전과 달리 썩 달갑지 않은 듯했다. 어떤 기억이 떠오를지 몰라 불안한 건가. 아니면, 사라진 기억 사이에 유피테르가 얽혀 있을까 봐…?

그 복잡한 심경을 나로선 알 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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