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
아마 처음이지 않을까. 나와 아스레인을 제외하고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사람은. 휘브가 육체를 빼앗겼을 적의 기억을 갖고 있는 덕분에 설명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물론 이해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도 그럴 것이 대사제와 카르사를 가호하는 신, 그리고 선황 유피테르가 전부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과부하 걸린 기계처럼 한참을 가만히 있던 휘브가 다소 경직된 어운으로 말했다.
“신을 이길 수 있긴 한 겁니까?”
스스로도 질문이 황당하게 느껴졌는지, 휘브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신을 이긴다. 그리 말하니 맨손으로 적장에 뛰어드는 무모한 발버둥처럼 들렸다. 하지만 말 그대로 신을 이겨야만 했다. 아스레인과 다른 마물들을 제거하려는 그를 막으려거든, 결국 유피테르를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별다른 반응이 없자 휘브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오만상을 찌푸렸다.
“…진심이에요?”
“달리 막을 방법이 없어요.”
“아무리 그래도 미래가 보이는 작자랑 싸움이 되긴 합니까?”
“그게… 제 주변에 있으면 혜안이 통하지 않는 모양이에요.”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내가 다른 세계에서 왔기 때문이다. 이 세계의 미래를 볼 수 있는 유피테르마저 나라는 변수를 생각지 못했다. 설마 어느 변두리 숲에 떨어진 놈이 시나리오자체를 완전히 바꿔 버릴 줄은 몰랐겠지.
조심스럽게 얘기를 전하니 잠자코 듣고 있던 아스레인이 불쑥 끼어들었다.
“미래가 보이지 않게 된다는 건가?”
“네. 원래는 뚜렷하게 보이던 미래가 하나둘씩 흐려지고 있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그 주변엔 늘 제가 있었다고도 했죠.”
“대체 누구한테 그런 소리를 들었나?”
“유피테르의 결계 안에서 만난… 뱀이요.”
뱀? 뜬금없이 튀어나온 존재에 아스레인은 당혹감을 표했다. 하지만 ‘뱀’이란 단어 말고는 그 미지의 존재를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회색 비늘에 하늘색 눈동자를 가진 뱀은 유피테르가 만들어낸 헤카테와는 전혀 달랐다.
“아무래도 결계 안에 사는 것 같았어요.”
“그럼… 그 뱀이 유피테르란 말인가?”
“아뇨. 목소리는 같아도 엄연히 다른 존재였어요. 심지어 그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지만, 그의 편인 것 같지도 않았어요. 제게 호의적이었거든요.”
아스레인은 마치 처음 외국어를 들은 사람처럼 눈살을 찌푸렸다. 뱀과 직접 마주하며 대화를 한 나조차도 정체를 알지 못하는데, 아스레인이라고 다를까. 휘브는 진즉 이해하길 포기하고 초점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뱀에 대한 이야기는 각설하고 본론을 꺼냈다.
“아무튼 휘브도 시간이 지날수록 유피테르의 영향을 점점 덜 받게 될 거예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휘브의 눈동자가 유난히 커졌다. “정말입니까?” 하고 묻는 표정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설렘으로 가득했다. 왠지 막연한 기대를 안겨 준 기분에 서둘러 설명을 덧붙였다.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는 모르겠지만요. 게다가 아까도 말했다시피 신력을 아예 제거하는 방법은 아직 모르고….”
“그래도 괜찮습니다. 하하, 그럼 이제 맘 놓고 형님 곁에 있으면 되겠네요.”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초상을 치른 듯 죽상이던 휘브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평소대로 돌아온 모습을 보니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피식 웃으며 그의 팔을 가볍게 툭툭 치며 말했다.
“역시 휘브는 이쪽이 더 잘 어울려요.”
“넵?”
“아뇨. …너무 진득하게 따라다니면 아스레인에게 눈총을 살 거라고요.”
“아~ 그런 거라면 아주 잘 알죠.”
휘브는 히죽거리며 슬쩍 아스레인의 눈치를 살폈다. 설마 이 와중에 장난을 칠까 싶었는데, 휘브는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마석을 쥔 주먹을 가슴에 올리며 아스레인에게 정중한 묵례를 건네는 것 아닌가. 그 답지 않은 진중한 태도에 아스레인은 느릿하게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한바탕 소동이 지나간 후, 아스레인은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불렀다.
“태오.”
“네!”
“혜안에서 벗어나는 조건이, 자네의 신력인가?”
“그건…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게 영향을 받는 건 확실해요.”
누군가의 미래를 공이 굴러가는 궤도로 빗댄다면, 유피테르는 모든 공이 어떻게 굴러가 어디로 도착할지 예견했다. 원래는 그의 계획대로 수많은 공은 한곳에 모여야 했다. 하지만 유피테르는 눈앞에 있는 구덩이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다른 세계에서 온 이방인의 발자국이라는, 아주 작은 구덩이를.
공이 굴러가는 방향을 바꾸기엔 엄청난 힘도 필요 없다. 약한 바람, 얕은 돌부리- 그거면 궤도를 바꾸기에 충분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공이 흘러가는 방향을 가로지르고 있었고, 마침내 공은 서로 부딪치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궤도를 예상할 수 없도록.
“정말로 자네가 원인이라면, 언젠가 레톤이나 다르곤의 사제도 유피테르에게서 벗어날 수 있겠군.”
“그랬으면 좋겠지만… 유피테르가 또 다시 신전에 손을 쓰면 어떡하죠?”
코어가 되었던 제단의 불을 바꿔 놓았으니,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사제들이 유피테르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유피테르가 제 꼭두각시가 줄을 끊고 달아나는 걸 가만둘 리는 없었다.
어쩐지 불안한 생각에 쫓겨 초조해하자 아스레인이 대안을 내놓았다.
“그럼 성유물을 만들어서 각지에 두는 건 어떤가.”
“성유물이요?”
“그 정도 신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걸세.”
언젠가 제단의 불이 뺏길 상황에 대비해서 또 다른 코어를 두자는 제안이었다. 확실히 지금보다는 안전하겠지만, 유피테르가 성유물을 찾아서 파괴하는 경우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령 파괴당하더라도 스스로 복구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마치 반절 잘린 나무에서 새순이 돋아나는 것처럼.
“아…!”
일순 머릿속으로 꽂힌 생각에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자연물에 신력을 주입시킬 수 있을까요?”
“…자연물에?”
“네. 이를테면… 나무를 성유물로 만드는 거예요. 코어가 된 나무가 씨앗을 뿌리고, 또 동물이 그 씨앗을 먹으면 굳이 손을 쓰지 않아도 알아서 대륙에 퍼지지 않을까요?”
만약 구상대로만 된다면, 그만큼 이상적인 코어도 없었다. 혹여 첫 번째 코어가 되었던 나무가 파괴된다 할지언정 그 나무가 뿌린 씨앗은 일대에 널리 퍼졌을 테니까. 처음엔 긴가민가하던 아스레인도 슬슬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글쎄. 과연 자연물이 신력을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군.”
“그게 문제라면… 왠지 괜찮을 것 같아요.”
그간 자연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아 왔다. 마물을 소환할 마력이 없는 내게 자연은 기꺼이 생명력을 빌려 주었다. 지금까지 자연에 깃든 생명력을 소모한 만큼, 다른 누구보다 생명력을 다루는 데에는 자신이 있었다.
“한 번 해 보죠.”
확신에 찬 눈으로 바라보니 아스레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적거릴 필요 없이 곧장 걸음을 돌렸다. 그러다 뒤늦게 문가에 기대어 있는 휘브가 눈에 밟혔다.
“지금부터 잠깐 나갔다 올 건데, 휘브는 쉬고 있을래요?”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 나만 대화가 이해되지 않는 것 같은데요.”
눈살을 잔뜩 찌푸린 휘브는 나와 아스레인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다 물었다.
“성유물을 만든다는 게 대체 뭔 소립니까?”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니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이제 대부분의 진실을 아는 휘브도 아직 내가 헤메라라는 사실만큼은 모른다. 무어라 설명할 길이 없어 눈치만 살피자 휘브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주절주절 토로했다.
“헤카테를 움직이는 코어가 신전에 있는 불이라는 것도, 두 분이서 그걸 없애고 다니는 것도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성유물을 만들어 낸다고요? 제아무리 사제여도 억지로 성유물을 만들어 내는 것은 불가능할 텐데요.”
헛웃음을 흘린 휘브는 이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신이라면 몰라도.”
농담조로 흘린 말에 괜히 정곡이 찔렀다. 물론 내가 헤메라이긴 한데, 그렇다고 영생을 사는 신은 아니다. 내로라하는 사제보다 강력한 신력을 갖고 있지만, 또 유피테르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다. 고민 끝에 침묵을 택하자 휘브의 안색이 점점 새하얗게 질려 갔다.
“잠깐만요. 설마….”
뒷말이 무엇인지 대강 알 것 같아서 다짜고짜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턱하니 손을 올리자 휘브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점점 경직되어 가는 표정에 별 일 아니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휘브. 날 믿는다고 했죠?”
“…예.”
“그럼 부디 성공하길 기도해 줘요.”
싱긋 눈웃음을 짓자 휘브는 잠자코 머리만 주억거렸다. 그대로 쉬어도 된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휘브는 기어코 우리를 따라왔다. 혹여 주민의 눈에 띌까 봐 어느 정도 마을에서 떨어진 곳에 도착했다.
드넓은 들판에 거대한 나무가 홀로 서 있었다. 비록 지난겨울의 여파로 아직 앙상했지만, 곳곳에 손톱만 한 새순이 돋아나 있었다. 거친 바람이 부는 설원에서 살아남은 만큼 우직한 생명력을 품은 이 나무라면, 분명 신력을 버텨 줄 것이다.
“아스레인. 부탁할게요.”
“주변은 신경 쓰지 말고, 오로지 신력을 다루는 데만 집중하게.”
아스레인과 휘브에게 일대를 비워 두길 부탁하고 홀로 나무로 다가갔다. 고고하게 서있는 이름 모를 나무는 설원에 흔히 뿌리내린 침엽수와는 달랐다. 봄이 되면 가로로 넓게 퍼진 가지 끝에 아주 잠깐이나마 꽃이 피려나. 사방으로 가지를 뻗은 나무를 올려다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잘 부탁해.”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걸까. 솨아- 찬바람이 스친 나뭇가지의 인사가 꼭 파도소리처럼 들렸다. 이윽고 목에 걸고 있던 아코니툼의 정화석을 빼서 바닥에 내려놓았다. 억제를 도와주던 장치가 사라지자마자 짓눌려 있던 신력이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윽…!!”
제어해야 한다. 억누르지 못하면 오히려 삼켜지고 말 것이다. 눈을 질끈 감은 채로 날뛰는 맹수를 달래듯 조심스럽게 신력을 조절해 나갔다. 마침내 폭풍이 잦아드는 순간, 곧바로 손을 뻗어 나무와 닿았다. 단단한 껍질 안에 몰아치는 생명력이 느껴졌다. 억지로 신력을 밀어 넣었다가는 오히려 나무가 죽고 말 것이다.
그래서 최대한 신력을 얕게 흩뜨려 나무로 흘려보냈다. 이내 나무는 뙤약볕에 메마른 땅이 빗방울을 빨아들이듯 무리 없이 신력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까칠까칠한 껍질을 손끝으로 느끼며 자연스럽게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기도문을 읊었다.
“따스한 볕이 드리우는 날,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꽃을 피우길.”
그리고 그 작은 꽃으로 차가운 땅 아래 묻힌 수많은 생명을 깨울 수 있기를. 설령 균형을 거스르는 자가 억지로 잘라내더라도 나의 의지는 무한히 이어질지니. 이 생명을 취한 자는 광명한 낮의 축복을 받을지어다.
이윽고 눈을 뜨자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와….”
방금 전만 해도 앙상하던 나뭇가지에 눈이 쌓인 듯 새하얀 꽃이 한가득 피었다. 마침 산들산들한 바람이 불어오니 하얀 꽃잎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물씬 풍겨오는 향긋한 꽃내음에 왠지 모르게 가슴이 벅차올랐다. 바야흐로 혹독한 설원에도 봄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