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8 (228/305)

#228

한때 피가 난무했던 신전은 다시 새하얀 눈밭처럼 깨끗해졌다. 그 후 미련 없이 다르곤 신전을 떠났다. 어차피 사제들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기도실 앞에서 뭘 했는지, 이름 모를 모험가는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기분 나쁜 꿈 정도로 치부될 테다.

어스름한 저녁이 밀려드는 동안, 우리는 설원에 맞닿은 마을로 향했다. 최대한 구석진 여관방을 구해 휘브를 침대에 눕히고 나서야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있었다. 아스레인은 내게 편히 자라고 말했지만, 단 한순간도 편히 잠들지 못했다. 혹시 내가 눈을 감은 사이 또 다시 유피테르가 찾아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길고도 고요한 밤이 지나갔다.

“태오.”

해가 뜨자마자 방을 나섰던 아스레인이 간단한 식사거리를 들고 돌아왔다. 혹여 휘브의 단잠을 깨울까 방문을 살짝 열어 놓은 채로 거실로 나왔다. 타닥, 타닥. 벽난로에 갓 넣은 장작 튀는 소리가 훈훈한 열기와 함께 퍼졌다. 퍽 이상적인 아침이었다.

“고마워요.”

아스레인이 낡은 나무그릇을 건네자 달큼한 토마토 냄새가 물씬 풍겼다. 나뭇결이 느껴지는 숟가락으로 저으니 투박하게 잘린 감자와 당근이 둥둥 떠다녔다. 왠지 이카로스와 함께 수프를 만들 적이 향수처럼 다가왔다.

벽난로 앞에 앉아 수프를 먹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을 물었다.

“다르곤의 사제들은 벗어날 수 있을까요?”

“마음 속 깊이 자리 잡은 믿음은 쉽게 밀어낼 수 없네. 그게 신앙이라면 더더욱….”

결국 유피테르에게서 벗어날 방법은 없는 것인가. 앞으로의 생을 전부 신에게 바치기로 서약한 사제들에게 진실을 전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애초에 말한다고 하더라도 한낱 이방인의 직언을 믿어 줄 리 없었다.

“그래도 휘브리스는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는 신을 믿지 않잖아요.”

“하나, 대사제가 직접 세례를 하지 않았나.”

“아….”

산 넘어 산이다. 이대로 두면 휘브는 언젠가 또 다시 유피테르에게 육체를 빼앗기고 말 것이다. 반드시 휘브의 정신에 깊게 뿌리내린 유피테르의 씨앗을 제거해야만 했다. 단지 신의 불에 깃든 신력을 흡수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런데 아스레인은 이보다 더 무거운 이야길 꺼냈다.

“불행한 일이지만, 앞으로 휘브리스가 보고 듣는 것은 모두 대사제에게 향할 걸세.”

“그건… 신전에 있는 불과 다를 바 없잖아요.”

“차라리 불이 낫지. 움직일 수라도 없으니까.”

수심에 잠긴 금빛 눈동자가 새하얀 서리가 낀 창밖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아마도 휘브리스의 인생에 대부분은 그에게 영향을 받았을 걸세.”

“네?”

“사소한 선택 하나도 그 자신의 의지가 아닐 수도 있네. 전부 계획대로 움직이도록 조종당했을 가능성이 크지. …물론 휘브리스는 모르고 있었겠지만.”

세례는 곧 족쇄였다. 휘브는 고아인 자신을 대사제가 받아 주어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신의 자비가 아니라 편리한 도구를 만드는 방법이었다. 한 사람의 인생이 완결까지 짜인 연극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잠시 멍해졌다.

그러다 문득 오랫동안 잊고 있던 옛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 목걸이로 대사제의 시야를 엿봤을 때 들은 말이 있어요. 그때는 무슨 소린지 몰라서 어물쩍 넘겼었는데….”

“어떤 말이었나?”

“아스레인에게 이미 눈을 대신할 것을 이어 두었다고…했어요.”

막연히 감시망이라 생각하여 제단의 불을 뜻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살아 움직이는 눈, 휘브리스였다. 처음 이아페에 도착해서 우연찮게 휘브리스를 만났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어떻게 여기 있냐는 말에 그는 재밌을 것 같아서 따라왔다고 말했고, 나는 아무런 의심 없이 그 말을 믿었다.

“일부러 따라가게 만들어 우리 곁에 붙여 둔 거였군.”

아스레인도 예상하진 못했는지 불쾌한 듯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했다는 사실보다도 자신이 조종당하고 있는지 모르는 휘브리스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남을 의심하는 것도 괴로운데, 하다못해 스스로의 선택마저 의심해야 한다니….

“휘브는 아직 모르겠죠?”

“그렇겠지.”

“그럼 이걸 어떻게….”

곤란한 처지에 놓여 고민하던 그때였다. 끼이익- 녹슨 경첩이 소름끼치는 소리를 냈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드니 문턱에 덩그러니 서 있는 휘브가 보였다. 유난히 커진 그의 눈동자에서 짙은 당혹스러움이 묻어났다.

“휘브. 언제 일어났어요?”

“…방금….”

“벌써부터 돌아다니면 안 돼요.”

곧바로 스프 그릇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휘브에게 다가갔다. 성큼 거리를 좁히며 손을 뻗었지만, 휘브는 도망치듯 뒤로 물러섰다. 명백히 거절이었다. 애써 모르는 척 허공에 남은 손을 거두며 화제를 돌렸다.

“밥 먹을래요? 배고프지 않아요?”

그러나 소용없었다. 휘브는 파리한 입술을 간신히 움직여 말했다.

“방금 한 말… 전부 사실입니까?”

현실을 부정하려는 목소리가 북풍에 떨리는 나뭇가지처럼 떨렸다. 늘 싱그럽던 연녹색 눈동자마저 생기를 잃고 말라비틀어져 갔다. 지금 누구보다 진실에 목마를 그이기에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어디서부터 들었어요?”

“내가 보고 듣는 것은 전부… 대사제에게 향한다는 거.”

처음부터 들었구나. 변명할 길이 없었기에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해 줘야 할까. 말뿐인 위로 따윈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당장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침묵을 지키자 휘브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여태껏 내가 한 모든 선택이 남의 뜻이었다니….”

“그게….”

“거짓말이죠? 형님.”

하, 하. 어색하게 끊기는 웃음소리에 눈을 뜨자 비참하게 일그러진 얼굴이 보였다.

“어서 거짓말이라고 말해 주세요. 예? 그냥 한 말이라고….”

“…….”

“아무 말이라도 해 달라고요!”

휘브는 눈을 부릅뜨고 고함을 치며 내 양쪽 어깨를 붙잡았다. 거센 악력에 어깨가 빠질 듯 아파 왔지만, 도무지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부르르 떨리는 손길이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붙잡고 싶어 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로선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결국 아스레인이 사이로 끼어들어 휘브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진정하게.”

“이 상황에 진정할 수 있겠습니까?”

“혼란스러운 건 충분히 이해하네. 하지만 화를 낼 대상이 잘못되지 않았나?”

“…윽.”

지독하리만치 현실적인 말에 휘브는 손을 툭 떨어뜨렸다. 힘없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약해졌지만, 그를 위해서라도 사실을 말해야만 했다. 후, 숨을 깊게 들이쉬곤 휘브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전부 사실이에요.”

어제 다르곤 신전에서 일어난 사건을 밝히자 그의 얼굴에 남아 있던 엷은 희망마저 사라졌다. 이윽고 겨울 해가 지듯 삽시간에 체념의 그림자로 물들었다. 현실에서 도망치듯 뒷걸음질 치던 휘브는 끝내 벽에 가로막혔다.

“실은 어제 있었던 일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냥…악몽인 줄 알았는데….”

“…휘브.”

천천히 이마를 짚은 휘브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갈 곳을 잃은 눈동자는 끊임없이 바닥을 배회했다.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한참을 허우적거리던 그가 겨우 한 마디 내뱉었다.

“그래도….”

“네?”

“형님을 도운 건 순전히 내 의지였습니다. 내가 하고 싶어서….”

쏟아내듯 빠르게 말하던 휘브가 말을 순간적으로 멈췄다. 그러곤 별안간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니…. 이아페로 따라온 것도 전부 계획된 바라고 했었지.”

“잠시 만요.”

“…다르곤 신전까지 가겠다고 한 것도 계획이었나?”

“일단 진정해요.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요.”

“하하…. 운명 같은 건 전부 개소리라고 이아페에서 도망쳐 나왔는데.”

어떻게든 진정시키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대로는 대책을 찾기도 전에 그의 정신이 무너질 것이다.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성큼성큼 다가가 벽에 가둬 두었다. 그러곤 이번엔 내가 휘브의 양쪽 어깨를 붙잡았다.

“날 봐요.”

어깨를 살짝 흔들자 연녹색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것도 잠시, 휘브는 마치 뜨거운 불에 덴 듯 눈길을 돌렸다. 그러곤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 불안한 표정으로 기괴한 웃음을 지었다.

“보면 안 되잖아요? 내 시야가 어디로 이어질지 모르는데.”

지금껏 먼저 시선을 피하는 법이 없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뚫어져라 쳐다보기에 눈치를 줘도 오히려 짓궂은 미소를 짓는 그였다. 하지만 지금의 휘브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여기를 보라고 팔을 세게 붙잡아도 눈을 피하기 바빴다.

“…지금 이 대화도 엿듣고 있는 거 아닙니까?”

끝내 휘브는 온몸에 도사린 불안을 참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신발도 채 신지 못해 맨발인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잠깐만요!”

따라가며 외쳐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저 바깥은 영하에 달하는 설원인데 고작 천하나 걸치고 나갔다가는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결국 떠나가는 뒷모습을 향해 딱 잘라 말했다.

“벗어날 수 있어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휘브가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이내 천천히 나를 돌아보는 눈동자엔 여러 감정이 혼란스럽게 얽혀있었다. 불안과 초조함으로 점철된 눈빛 속에서 단 하나, 간절함이 스쳤다.

“이제야 나를 보네요.”

깊은 한숨을 내쉬자 휘브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그 말, 정말…입니까?”

“네.”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미 정신이 갈릴 대로 갈려나간 휘브는 오히려 의심했다.

“하하… 나를 동정해서 하는 거짓말이라면, 필요 없습니다.”

겨우 붙잡았는데, 이대로 놓칠 수는 없었다. 어떻게 말해야 믿어 줄까 고민하던 차에 아스레인이 대뜸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휘브를 향해 던졌다.

“아니, 사실이네.”

칭! 맑은 소리를 내며 허공을 포물선으로 가른 그것을 휘브가 가볍게 낚아챘다. 그의 손바닥에 들린 것은 다름 아닌 금빛 마석이었다. 내가 귀에 차고 있는 마석만큼이나 순도 높은 마력이 느껴졌다.

“이건….”

“신력을 최대한 억누를 수 있는 마석이지. 그걸 몸에 지니고 있는 한 괜찮네.”

확고한 목소리에 휘브는 그제야 안심하는 기색을 보였다. 신력을 억누르기엔 아코니툼의 정화석이 제격이겠지만, 유피테르와 연결점이 확인된 이상 섣불리 건넬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아스레인의 마석만큼 확실한 부적은 없었다.

그나마 방금 전보단 나아졌지만, 여전히 불안해하는 휘브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여기 있어요. 그게 당신이 원하는 거잖아요.”

“그게 진짜 내가 원하는 거라는 걸 어떻게 압니까? 하하… 나도 모르는데.”

“진실을 듣자마자 떠나려고 했다는 게 그 반증이에요.”

“…그게 무슨….”

그 사이 휘브와의 거리가 두 걸음으로 좁혀졌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곧장 달려들어 그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처음엔 당황하던 휘브도 절대 놔주지 않으리란 집요한 기세에 한결 누그러들었다.

“당신이 정말로 그에게 잠식되었다면, 어떻게든 여기에 남아 있으려고 했겠죠. 그게 목적이니까. 그런데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려고 했잖아요?”

“그….”

“왜 가려고 했어요?”

“떠나야겠단 생각밖에 들지 않아서….”

“얼버무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요. 이유가 뭐예요?”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자 휘브는 띄엄띄엄 말을 꺼냈다.

“처음엔, 호기심이었습니다. 도련님을 바꿔 놓은 작자가 누군지 궁금해서 접근했을 뿐인데….”

점차 휘브의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멍하니 나를 내려다보는데, 내가 아니라 눈동자에 비친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마침내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마치 제 자신에게 말을 거는 듯했다.

“당신이랑 있으면 나도 쓰레기 같은 인생 청산할 수 있을 것 같았어. 어디 가서 천대받지 않고… 이제라도 제대로 살고 싶었어. 그래. 면죄부. …지금껏 개같이 살아오며 지은 죄들이, 당신을 도우면 하나씩 지워지는 것 같았지.”

“그런데?”

“그런데… 그게 아니래. 내 존재가, 줄곧 당신의 발목을 잡았던 거야.”

지난날을 이야기는 휘브는 내내 자조적인 웃음을 띠었다.

“솔직히 여태 같이 있으면서 좋을 거 없었잖아요? …민폐만 끼칠 뿐이지.”

비뚤게 올라간 그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생각해보면 휘브는 늘 내게 특정한 말을 듣고 싶어 했다. 고맙다고. 당신 덕분이라고. 처음엔 단지 칭찬에 고픈 어린아이의 투정으로 들렸다.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나와 아스레인에게 ‘쓸모 있는 사람’으로 자리잡아야 하는 일종의 장치였던 것 같다.

어쩐지 가슴 한 구석이 따끔해져선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봐요. 스스로 선택했잖아요. 민폐를 끼치기 싫어서 떠나는 길을.”

“하지만 이것도 내 생각이라고는….”

“믿어요.”

“대체 무슨 근거로 믿는다는 겁니까?”

잔뜩 인상을 찌푸린 휘브리스를 바라보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좋거든요.”

모든 게 감시망을 심기 위한 유피테르의 계략이었을지언정 나는 믿고 싶다. 휘브리스는 진심으로 자신을 봐줄 사람이 필요했었다는 사실을. …아니, 믿는다. 그야 지금 그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사실 먼저 해야 할 말이 있어요. 기억이 난다고 하니까 알겠지만…. 휘브리스. 당신 정말로 죽을 뻔했어요. 아스레인이 바로 치료하지 않았더라면, 이 자리에 서 있지도 못할 거예요. 진심으로요.”

“…압니다.”

“아마 내가 여기서 포기하면, 휘브도 평범한 인생을 살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포기할 수 없어요.”

차분히 고개를 젓자 휘브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비수처럼 가슴에 콱 박혔다. 동정은 아니었다. 휘브와 똑같은 처지인 미노스 황제를 볼 때는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이건 아마….

“그리고 당신도 포기하지 못하겠어요.”

휘브리스가 그토록 바라던 우애가 아닐까.

“내 욕심인 거 알아요. 아직 마석으로 억제하는 것 말고는 완전히 신력을 제거하는 방법은 모르겠어요. 그래도 언젠가 평범하게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차갑게 식은 휘브의 손을 잡으며 씨익 웃어보였다.

“나와 아스레인을 믿어 줄래요? 반드시 자유롭게 해 줄게요.”

휘브는 한동안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굳어 있었다. 이내 생명의 빛을 잃은 녹색 눈동자에 봄이 찾아왔다. 말라비틀어진 대지에 새싹이 움트고, 마침내 여름을 알리는 비가 내렸다. 그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내 뺨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제발… 도와주세요.”

항상 짓던 장난스러운 웃음은 어디로 가고 엉망으로 일그러진 얼굴만 남았다.

“믿고 싶습니다. …이 길이, 온전히 내 의지로 선택한 길이라고.”

“휘브….”

“…나는 내 인생을 살고 있다고.”

어느새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할게요.”

끝내 휘브는 내 손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 제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질끈 감은 눈은 마치 신에게 기도하는 듯했다. 신을 믿지 않는다는 그가 처음으로 간절히 드리는 기도가 아닐까. 만약 이 세계에 진정한 신이 있다면, 부디 우리를 도와주길.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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