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7 (227/305)

#227

드높은 창공을 닮은 눈동자는 불쾌하리만치 익숙한 것이었다. 만물을 자신의 발아래에 둔 듯 업신여기는 눈빛을 가진 자는 세상에 단 한 명뿐이었다. 유피테르. 그가 휘브리스의 몸을 차지했다.

“당신이 어떻게….”

문득 그 뱀이 한 말이 뇌리를 스쳤다. 유피테르는 남에게 신력을 주입시켜 몸을 지배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럼 휘브리스는 끝내 유피테르의 수중에 넘어가고 만 것인가. 주춤 뒤로 물러서며 중얼거리니 유피테르가 선뜻 입을 열었다.

“내가 누군지 알겠나.”

“모를 수가 없죠. 대사제 카인이자, 이 제국을 세운 선황… 유피테르인데.”

단호하게 이름을 내뱉자 유피테르의 입가에 냉랭한 미소가 걸렸다.

“다시 보니 반갑구나. 태오.”

“지금이 반갑게 인사할 때는 아니지 않나요?”

“태도가 퍽 불경하군. 짐은 대 카르사 제국을 만든 선황이거늘.”

“당신이 한 짓을 전부 아는 저로선 도무지 존경심이란 게 생기질 않네요.”

앞뒤 생각 않고 속내를 고스란히 내비치자 유피테르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웃음기가 완전히 말라붙은 눈빛은 라비린토스 설원의 바람처럼 매서웠다. 이내 유피테르는 뺨에 묻은 피를 손등으로 닦아 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얌전히 어항 안에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기어이 쥐새끼처럼 빠져나와 나를 방해하는구나.”

내리뜬 눈동자가 내뿜는 위압감에 싸늘한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휘브리스의 거죽을 쓰고서도 그만한 위세를 떨칠 수 있다니, 예상대로 조금도 방심할 수 없는 상대였다. 한참 나를 응시하던 유피테르는 마뜩잖다는 얼굴로 혀를 차며 말했다.

“저 인간을 빼낸 작자는 당신이겠지.”

형형하게 번뜩이던 눈동자는 곧 아스레인에게 닿자마자 말가니 풀어졌다.

“오랜만이네. 현세의 이름은 디아벨 아스레인이었나?”

“…드디어 만나는군. 유피테르.”

“후후, 얼마나 알은체하고 싶었는지 몰라.”

부드럽게 올라가는 입꼬리는 꼭 오랜 지인을 만난 듯 반가워 보였다. 아스레인의 표정이 차갑게 굳을수록 그 미소는 점점 짙어졌다.

“뿔을 자르면서 나에 대한 기억도 함께 사라진 건 아닌가 싶었는데.”

“다른 건 전부 잊어도… 네놈의 이름과 목소리는 똑똑히 기억하네.”

“이거 영광이로군.”

유피테르는 손에 그러쥔 칼을 장난스럽게 흔들며 웃었다. 칼날에 맺힌 사제의 피가 손가락을 타고 주르륵 흘렀다. 그걸 가만 바라보던 유피테르는 마치 더러운 이물이라도 묻은 듯 불쾌한 표정으로 손을 털어냈다. 후두둑- 복도에 쓰러진 사제의 옷자락에 핏방울이 튀었다. 이제 더 이상 의복이 원래 무슨 색이었는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치료를 하려거든 가까이 다가가야 했지만, 휘브리스의 몸으로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탓에 섣불리 움직이지는 못하고 가만히 유피테르의 의중을 떠봤다.

“그 몸을 빌려 우릴 해칠 생각인가요?”

“아니, 아니지. 태오. 날 너무 우습게 보는구나.”

음산한 미소와 함께 복도 끝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오고 있다. 심지어 혼자가 아니다. 여러 명의 발소리가 행군하듯 일정한 박자로 다가왔다. 마침내 모퉁이를 돌아 나타난 것은 다르곤의 사제들이었다. 유피테르의 등 뒤로 나란히 선 사제들은 하나같이 단도를 들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초점 없이 텅 빈 눈동자에 등골이 섬뜩해졌다. 이윽고 휘브의 몸을 빼앗은 유피테르가 손을 들자 사제들이 서슴없이 칼을 제 목에 갖다 대었다. 칼끝이 여린 살에 닿아 핏줄기가 흐르는데도 아픈 기색 따윈 보이지 않았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입술만 움찔거리자 유피테르는 덤덤한 투로 말했다.

“어떤가. 지금 당장 여기 있는 이들에게 자결하라고 명할 수 있는데.”

그저 말뿐인 협박이 아니었다. 팽팽하게 긴장된 손을 보아하니 당장이라도 경동맥을 끊을 기세였다. 급기야 정신을 지배당한 사제들은 목에 칼을 댄 채로 환하게 웃었다.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미소와 목을 따라 흐르는 벌건 선혈이 맞물려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그만둬요!”

“왜? 네게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잖나.”

“저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이에요. 그냥… 당신을 믿고 따른 사제일 뿐이라고요.”

그래도 자신을 위해 일생을 바친 이들에게 일말의 정이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유피테르는 내 말이 의아한 듯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나를 따르니, 내가 죽으라면 죽어야지.”

말문이 턱 막혔다. 미노스 황제가 그러하듯, 유피테르 앞에서 사제와 신도는 전부 도구일 뿐이다. 당장 다르곤의 사제들이 전부 죽는다고 하여도 그는 새로운 사람을 찾아 빈자리를 채울 것이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자의 학살을 막는 방법은 무력밖에 없었다.

그림자에 숨어있는 아그누스를 부르려는 차, 갑자기 유피테르의 눈가가 살짝 움찔거렸다.

“허튼 짓 하지 마.”

벌써 들킨 건가? 초조하게 눈치를 살피는데, 유피테르는 내가 아니라 아스레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제를 구하려 마법을 쓰려다가 간파당하고 만 것이다.

“당신의 마법과 내 명령… 어느 쪽이 빠를지 실험해 보고 싶으면 말리진 않겠지만.”

이윽고 유피테르가 따분한 듯 눈을 옆으로 굴리자 사제들이 일제히 단도를 고쳐 잡았다. 예리한 칼날이 그들의 목에 난 상처를 점점 더 깊게 파고들었다. 선혈이 낭자한 것은 휘브리스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당신이라도 죽은 자는 되살릴 수 없지 않나?”

한쪽 눈썹을 실그러뜨리는 유피테르는 퍽 여유로워 보였다. 결국 아스레인은 손에 모은 마력을 다시 흩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피테르는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호탕한 웃음소리와는 달리 그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네. 이 정도 목숨은 그냥 포기하면 그만일 텐데.”

황제의 품위를 드러내던 진중한 어조는 사라지고 냉랭한 조롱만 남았다.

“내가 말했지? 당신의 그 마음이 유일한 약점이라고. 마물인 주제에 인간을 생각해 주니 결국 뿔까지 잘린 거야.”

“…….”

“뭐, 나는 진즉 쓸데없는 감정을 전부 버렸지만.”

한 줄기 남아 있던 웃음기마저 싹 가신 얼굴은 마치 영혼이 없는 석상 같았다. 그에게 감정적으로 호소해봤자 입만 아플 뿐이었다. 더 이상 돌려 말할 필요를 못 느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우리가 당신의 계획을 방해해서 이러는 건가요?”

“아니.”

계획을 방해해서가 아니라고? 뜻밖의 대답에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럼 왜 무고한 사람들까지 인질로 잡는 거죠?”

“친히 알려 주려고. …네가 무슨 짓을 해도 소용없다는 걸.”

유피테르는 피가 묻은 손을 천천히 내밀며 입을 열었다.

“이 세계의 인간은 전부 내 손아귀에 있어. 물론 네 주변에 있는 이들도 예외는 아니지.”

“무슨….”

“세잔, 진, 테세스. 그리고 아이리스였나?”

익숙한 이름이 줄줄이 흘러나오자 눈이 번쩍 뜨였다. 유피테르는 알고 있었다.

“그 외에도 너를 스쳐간 수많은 인간들… 전부 세례를 받고 태어났지.”

나를 위협하기보다 그들을 인질로 잡는 것이 내게 더욱 두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숨통을 죄여 오는 압박에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끝내 숨기지 못한 두려움을 드러내자 유피테르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

“난 인간에 대해서 아주 잘 알아. 그들이 뭘 원하는지, 무얼 하면 행복한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절망하는지.”

성큼, 유피테르가 한 걸음 다가왔다.

“처음부터 모든 걸 포기한 자보다 알량한 희망을 놓지 못하는 자가 더욱 깊은 절망에 빠지는 법이지.”

한겨울에 내놓인 듯 발끝에서부터 온기가 서서히 빠져나갔다. 흠칫 뒤로 물러서자 아스레인이 내 어깨를 붙잡으며 속삭였다.

“귀담아 듣지 말게.”

낮은 목소리에 겨우 고개를 들었지만, 몸은 이미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러니 모쪼록 희망을 잃지 말고 열심히 발버둥 쳐 보려무나. 태오. …아니, 헤메라.”

입꼬리가 찢어질 듯 기괴한 웃음을 지은 유피테르는 칼을 번쩍 들어올렸다.

“안 돼!”

본능적으로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형형하게 빛나던 칼날이 단숨에 휘브의 목을 그었다.

“어….”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벌어진 입에서 호흡이 되지 못한 쇳소리만 흘러나올 뿐. 그 사이 동맥이 끊어진 상처에선 피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이내 휘브리스가 쓰러지는 모습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천천히 흘러갔다. 연녹색으로 돌아온 눈동자는 점점 생명의 빛을 잃어갔다.

“…아…아니야….”

뒷걸음질 치는 나와 달리 아스레인은 곧바로 휘브리스에게 다가가 회복 마법을 걸었다. 어서 가서 도와야 하는데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눈앞이 온통 빨간색이다. 세상이 전부 피로 물들어 간다. 바닥에 떨어진 칼, 웃는 얼굴로 목을 긋는 휘브리스, 분수처럼 튀는 피, 코가 저릴 정도로 비릿한 냄새.

“우욱….”

입을 콱 틀어막자 심장이 목까지 튀어 올랐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장난스럽게 웃던 사람이 점차 하얗게 질려간다. 꼭 칭찬을 받고 싶은 강아지처럼 내 주변을 끊임없이 기웃거리던 사람이 돌처럼 굳어 간다. 왜 저렇게 가만히 있는 거지? 꼭 죽은 사람처럼.

“…거짓말….”

현실을 부정하며 고개를 저었다. 더는 볼 수가 없어서 눈을 질끈 감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대로 제자리에 주저앉으니 새하얀 석제 바닥에 튄 핏자국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이것은 누구의 혈흔인가. 휘브리스가 찌른 피탈 사제? 아니면, …휘브리스?

“태오.”

아스레인이 내 어깨를 조심스레 붙잡았다. 설마 휘브리스가 더 이상 숨을 쉬지 않는다고 말하려고? 그런 선고라면 듣기 싫다. 아니, 지금은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다.

“이쪽을 보게나.”

“시, 싫어요.”

그의 손길을 피하며 손바닥으로 귀를 단단히 틀어막았다. 마치 물속으로 빠져든 것처럼 모든 소리가 멀어졌다. 천천히 숨을 들이쉬자 떨리는 호흡이 더욱 크게 들렸다. 꼭 이 세상에 혼자 남은 것 같았다. 그때 아스레인이 내 손목을 세게 잡아 내리며 말했다.

“휘브리스는 무사하네.”

흡. 그 말에 숨이 뚝 멈췄다. 서서히 팔을 떨구며 고개를 들자 아스레인의 어깨너머로 휘브가 보였다. 송장처럼 창백해졌던 안색에 다시 혈색이 돌고, 그의 목에 난 상처도 말끔하게 아물어 있었다. 그 옆에 쓰러진 피탈 사제도 마찬가지였다. 일정하게 오르내리는 가슴을 보자마자 저절로 눈물이 고였다.

“…저… 휘브리스가 죽는 줄 알았어요.”

멍하니 눈을 끔뻑이자 뺨을 타고 눈물이 주르륵 흘려 내렸다. 그 모습을 본 아스레인은 나를 끌어안으며 느릿하게 등을 다독였다.

“걱정 말게. 지금은 기절한 것뿐이네.”

“정말 다행이에요. 아스레인이 없었으면….”

죽었겠지. 휘브는 자신이 죽는 것도 모르고 죽었을 거야. 나는 그 앞에 앉아서 무력하게 울기만 했을 테고. 다행이야. …아니, 정말 다행일까? 앞으로는 이러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나? 이건 예고에 불과했다.

그 후로 아스레인이 상황을 수습하는 내내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핏자국은 말끔하게 사라지고, 사제들의 옷자락에 밴 피도 전부 사라졌다. 마치 상황이 일어나기 전으로 돌아간 듯했다.

마지막으로 아스레인은 휘브를 손님방에 있는 침대에 눕히며 말했다.

“사제들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걸세. 하지만 휘브는….”

아스레인이 계속해서 무어라 말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야 아까부터 한 가지 생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아스레인의 말을 끊고 속내를 툭 내뱉었다.

“전부 그만둘까요? 아스레인.”

찬물을 끼얹은 듯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뇌가 고장 난 건가. 이 상황에서도 허탈한 웃음이 자꾸만 새어 나왔다. 갑작스런 고백에 당황한 아스레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뭐?”

“이번이 휘브였으니 다음엔 진일지도 몰라요. 아니면, 한꺼번에 그럴지도….”

“그게 무슨 소린가.”

“그저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시작한 일이었어요. 그런데 오히려 저와 관계가 있다는 이유로 목숨을 위협당하고 있잖아요. 그럼 제가 포기하면… 제가 여기서 그만두면….”

결국 나로 인해 아스레인도 다치고 말 거다. 내가 무모한 짓을 시작해서, 이 따뜻한 품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럼 나는 자신을 원망하며 평생 후회하겠지. 애써 쓴웃음을 지으며 아스레인을 향해 물었다.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앞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유피테르의 목표는 진정으로 인간을 위한 세계를 구축하는 것. 새로운 세계의 기반으로 깔리는 마물의 피. 그리고 거짓된 신에게 기만당하는 인간. 나는 그걸 막기 위해 이 먼 길을 돌아왔다. 하지만 만약 내가 가만히 있는 쪽이 희생을 줄일 수 있는 일이라면? 사실 내가 틀리고, 유피테르가 맞는 거라면.

문득 의심이 생겼다. 내가 하는 일에 그만한 가치가 있나? 나는, 나는….

“태오.”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리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방금 내가 무슨 소릴 한 거지. 나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함께해 주는 사람에게, 어떻게 이런 무책임한 말을 할 수가 있을까.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아스레인에게서 등을 돌렸다.

“미안해요. …못 들은 걸로 해 주세요.”

그대로 멀어지려했으나 낮은 음성이 발목을 잡았다.

“소중한 이들을 잃을까 두렵나?”

“…당연하죠. 아스레인은 지킬 능력이 있으니까 아니겠지만….”

“아니, 나도 두렵네. 그래서 마물을 두고 인간의 편에 섰지.”

아. 입술 새로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한때는 그게 최선의 방법이라 확신했네. 하지만 자네 덕분에 그들을 다시 하나둘씩 만나면서 깨달았지. …내가 틀렸다고.”

천천히 뒤를 돌아보니 그의 얼굴에 후회하는 빛이 가득 서려있었다.

“그들은 도리어 내게 화를 냈네. 어째서 모든 걸 혼자서 끌어안으려 했냐고. 왜 도움을 청하지 않았냐고. …설령 죽더라도 혼자 남기보다 함께 싸우는 게 낫다고 했지.”

“그건….”

안겔루스에 남아 있는 이들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혼자 끌어안지 말라고. 혹시라도 연루되면 지위뿐만 아니라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경고를 해도 그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마 당시 아스레인 곁을 지키던 마물들도 같은 태도였겠지.

이미 스쳐지나간 과거를 회상하는 그의 눈빛에서 진한 그리움이 묻어났다.

“물론 그때로 다시 돌아가더라도 똑같은 선택을 할 걸세. 잃고 싶지 않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그들에게 말할 것 같네. 내가 왜 이런 선택을 내렸는지, 지금 어떤 마음인지.”

“아스레인….”

“그리고 그들도 나처럼 자신의 길을 택할 수 있게 할 걸세.”

자신의 길. 그 단어가 가슴에 묵직하게 박혔다.

휘브리스는 내가 대사제에 대적하고 있음을 알고도 나를 돕길 선택했다. 신분을 위조했다는 거짓말이 들통 나면 위험한 걸 알고도 기꺼이 다르곤 신전에 동행했다. 온전히 그의 선택이다. 그럼 나는 그걸 말릴 자격이 있는가? 오히려 그의 결심과 의지를 무시하는 건 아닐까.

“아직 늦지 않았네. 그러니 그가 깨어나거든 솔직하게 말해 보게.”

아스레인을 따라 시선을 내리자 깊게 잠든 휘브가 보였다.

“…차라리 저를 탓했으면 좋겠어요.”

“글쎄. 내가 그를 제대로 본 게 맞는다면, 오히려 자네에게 사과할 걸세.”

“정말로… 저를 만난 걸 후회하지 않을까요?”

불안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아스레인은 내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쥐며 말했다.

“태오. 누구도 자네를 만난 것을 후회하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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