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
똑똑히 기억한다. 처음 신의 영역에 들어갔을 때, 레톤 신이 내게 한 말을.
‘너, 이곳의 인간이 아니로구나.’
그리고 또 다시 내가 다른 세계에서 넘어왔다는 걸 알아챈 존재가 나타났다. 나를 꿰뚫어보는 동공은 예리한 창처럼 길게 찢어졌다. 입맛을 다시는 뱀 앞에서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며 모르는 척 하기엔 이미 너무 늦어 버렸다. 떨리는 동공, 이마에 맺힌 식은땀, 송장처럼 창백해진 안색, 마른 입술, 초조한 표정. 나는 궁지에 몰린 쥐였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뱀은 천천히 내 팔을 타고 올라왔다. 옷 위로 매끈한 비늘이 움직이며 조여 오는 감촉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어느새 어깨까지 올라온 뱀은 단단한 입 끝으로 귓불을 툭툭 건드리며 속삭였다.
- 그야 당신의 미래가 보이지 않거든요.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고? 새벽의 한기를 쐬듯 팔꿈치에서부터 등줄기로 소름이 죽 끼쳤다. 잔뜩 긴장해서 움츠러든 근육 위로 길쭉한 뱀이 나근나근하게 기어 다녔다. 떼어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두 주먹을 꽉 쥔 채로 돌처럼 굳어있었다.
- 이 세계에서 나의 혜안이 통하지 않는 생물은 없어요. 그러니 유일하게 미래가 보이지 않는 당신은 이 세계에 속하지 못한 자.
“…윽.”
- 내 말이 틀렸나요?
부정할 수 없었다. 어차피 부정해도 소용없었다. 천공을 닮은 눈동자는 신의 눈. 누르가 마안으로 나의 본질을 꿰뚫어본 것처럼 그 또한 혜안으로 나의 비밀을 알아채고 말았다. 긍정하는 대신 침묵을 택하자 뱀은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너무 긴장하지 마요. 아직 해칠 생각은 없으니까.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늦가을에 부는 바람처럼 스산하게만 들렸다. 과연 뱀의 말을 믿어도 되는 걸까. 만약 유피테르가 나를 속이려고 모습까지 바꾸고 나타난 거라면…. 마음에 드는 자리를 찾으려는 듯 돌아다니는 뱀을 감각으로만 좇으며 물었다.
“그럼 아스레인의 미래도 알고 있나요?”
- 아스레인? …아. 그 이름이 됐지.
이내 뱀은 긴 꼬리를 내 팔에 감으며 나른한 투로 말했다.
- 물론 알죠. 아니, 정확히는 알고 있었죠.
알고 있었다? 그럼 이제는 모른다는 건가. 이건 중요한 정보다. 어떻게든 살살 굴려서 답을 얻어 내야 한다. 조용히 머리를 굴리는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내가 묻기도 전에 뱀이 먼저 입을 연 것이다.
- 원래는 혜안으로 뚜렷하게 보이던 이들의 미래가 하나둘씩 흐려지고 있어요. 그리고 그 주변엔 늘 당신이 있었죠. 완벽한 계획이 틀어지기 시작한 것도, 당신이 온 후부터였어요.
“그게 무슨….”
- 처음에는 단지 우연인 줄 알았어요. …내 혜안에 지금껏 우연 따윈 없었는데.
정해진 미래가 어긋나기 시작한 이유는 내가 이 세계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게 우연일지 아닐지는 모르지만, 내 존재로 인해 소설의 내용이 바뀌었다. 그 말을 듣고 있자니 불현듯 레톤이 나를 일컬은 표현이 떠올랐다. …레톤은 나를 ‘계획을 벗어난 자’라고 불렀다.
- 섣불리 당신을 제거하지 못하는 이유도 그거예요. 당신의 죽음이 미래를 어찌 바꿀지 모르니까.
미세한 차이에 의해 결과가 완전히 달라지는 현상을, 나비효과라고 하던가. 유피테르는 두려웠던 것이다. 보잘 것 없는 나비의 날갯짓이 끝내 세상을 휩쓸 동풍을 만들어낼까 봐.
- 실은 당신이 이 세계에 오자마자 알아챘어요. 이건 물을 흐리는 미꾸라지의 알이라고. 그러니 없애지 못할 바엔, 차라리 손바닥 만 한 어항에 가두는 게 낫지 않을까? 내가 먹이를 줄 때만 먹고, 밤에도 빛을 보여 주면 그게 낮이라 생각하게 만들자.
뱀은 키득키득 웃으며 뾰족한 머리를 내게 툭 기대었다.
- 어땠어요? 백합 향이 가득한 어항 속은.
백합. 순수함을 뜻하는 그 꽃은 내게만큼은 불쾌하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백합은 아멜리 백작가의 상징이었다. 내가 이 세계로 떨어지자마자 아멜리 백작 아래서 죽은 듯 생활했던 이유는 그저 운이 더럽게 없어서인 줄 알았다. 그런데 유피테르의 계획이었다고?
- 근데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어항 밖으로 빠져나왔더군요?
“…….”
- 그리고 거기서 가장 만나선 안 될 존재를 만나 버렸죠.
머릿속에 그날의 기억이 스쳤다. 동경하던 아스레인과 처음으로 서점에서 만난 날을.
- 철저한 계산 실수였어요. …아아, 멍청하기도 하지. 스스로 무덤을 파 버리다니.
자책하는 말과는 달리 연방 해맑게도 웃어 댔다. 그 괴이한 웃음은 마치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
- 그거 알아요? 나는 생각보다 당신을 무서워하고 있어요.
“…거짓말.”
- 진짜예요.
유피테르가 나를 두려워해? 차라리 그 목을 벨 힘을 가진 아스레인을 두려워하는 게 이치에 맞지 않은가. 그런데도 뱀은 제 말을 바꾸지 않았다. 길쭉한 머리를 쭉 빼어 나를 정면에서 똑바로 쳐다보았다. 불을 삼킨 듯 이글거리는 눈동자 속에 겁에 질린 내 얼굴이 비쳤다.
- 한 치 앞의 미래도 내다보지 못하는 것은 꼭 하루아침에 시력을 잃은 것 같거든.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부터가 거짓인가. 이윽고 뱀은 다시 내 팔을 타고 바닥으로 내려갔다. 살갗에 느껴지는 감촉이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 끔찍할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꼬리까지 손가락 끝에서 떨어진 후에야 한숨 돌렸다. 말 그대로 한 입에 먹히는 줄 알았다.
뺨까지 흘러내린 식은땀을 닦아내며 넌지시 물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신력을 흡수하고 다니는 것도 두고 보는 건가요?”
- 그건 아니에요. 아무래도 나는 당신에게 신력을 주입시켜 몸을 지배할 생각인가 봐요.
“지배… 한다고요? 그게 가능한가요?”
-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은 좀, 힘들 것 같네요.
일부러 신력을 흡수시켜서 나를 지배하겠다, 라. 그 말을 듣고 나니 문득 두려워졌다. 정말로 이 신력은 온전히 내 것이 된 게 맞는가? 만에 하나 약간의 틈이라도 남아 있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미노스 황제처럼 유피테르의 말대로 움직이고 말 것이다.
섬뜩한 느낌에 주먹을 꽉 쥐며 뱀의 눈치를 살폈다.
“이 모든 걸 왜 저한테 말해 주는 거죠?”
- 기대하고 있으니까요.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뱀은 그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거대한 똬리를 틀었다. 참으로 기묘하고도 의아한 생물이다. 그는 유피테르를 ‘나’라고 불렀지만, 이상하게도 유피테르와 같은 존재는 아닌 것 같았다. 대체 뭐지? 이 뱀의 정체는. 물끄러미 쳐다보니 뱀은 다시금 허리를 꼿꼿이 세워 눈높이를 맞췄다.
- 그래서 이 세계에는 왜 왔어요?
“저, 저는….”
왜 왔더라. 처음 소설을 접하고 나서는 마물이 있는 세계가 부러웠다. 마물 연구가 하고 싶어서 소설로 들어가고 싶다고, 흘러가듯 소망했었다. 정말로 이 세계에 들어와선 신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 허황된 기도를 들어주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마저도 아닌 것 같다.
“…이끌려온 것 같아요.”
- 누구에게?
“그건….”
유피테르는 아니다. 스스로 장애물을 가져올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나를 데려온 자는….
- 혹시.
생각의 흐름이 뚝 끊겼다. 순간 흐려졌던 초점을 되찾으니 어느새 뱀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살짝 벌어진 입 사이로 보이는 독니가 유독 날카로워 보였다. 방금 전과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내가, 잡아먹힐지도 모른다. 그러나 온몸이 굳어 도망칠 수 없었다. 끝내 뱀은 입을 쩍 벌리고 무방비한 목을 향해 달려들었다.
물린다. 그리 단념하며 눈을 질끈 감는 순간 귓가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 ‘나’를 죽이려고 왔어요?
“헉…!”
번뜩 눈을 뜨니 석제로 된 바닥이 보였다. 마치 꿈에서 억지로 깬 것 같았다. 고개를 세차게 젓자 식은땀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그리고 그걸 부드럽게 닦아 주는 것은 가지런한 손가락이었다.
“아스레인!”
휘둥그레진 눈으로 돌아보니 아스레인이 내 뺨을 감싸 쥐었다.
“걱정 말게. 신력은 무사히 자네 몸으로 들어갔네.”
“아니, 그게 아니라… 저 계속 여기 있었어요?”
“그렇다만.”
이상하다. 난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유피테르의 결계 속에 있었는데. 설마 육체를 현실에 두고서 정신만 빨려 들어갔던 건가? 그럼 어떻게 아스레인의 도움 없이 무사히 결계 밖으로 나온 거고? 하나부터 열까지 혼란스러워서 머리가 지끈거리다 못해 쪼개지는 듯했다.
이마를 짚으며 비틀거리자 아스레인이 곧장 나를 붙잡아 제게 기대게 했다. 단단한 가슴에 머리를 기대자 심장소리가 느껴졌다. 평범한 사람보다 훨씬 느린 박동이 나를 달래 주는 것 같았다. 쉴 새 없이 떨리던 손발이 서서히 진정되어갔다. 이내 아스레인은 내 어깨를 조심스럽게 토닥이며 말했다.
“피곤할 테니 어서 돌아가지.”
그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아스레인이 우뚝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잠깐.”
어느새 그의 표정이 사뭇 심각해져 있었다. 문 너머를 험악스레 노려보던 아스레인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피 냄새가 나는군.”
“네?”
갑자기 피 냄새라니. 문 밖에서 기다리는 휘브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겨우 진정되었던 심장이 불안감에 짓눌려 고동치기 시작했다.
“잠시 여기 있게.”
“아뇨. 같이 가요.”
나를 두고 가려는 아스레인의 팔을 꽉 붙잡았다. 결국 아스레인이 먼저 기도실 문을 열었다. 그런데 이곳을 지키고 있어야 할 휘브가 없었다. 어두운 공간에는 횃불만 외롭게 타오르고 있었다.
“휘브?”
낌새가 이상하다. 황급히 중문을 지나 복도로 나가는 문고리를 돌렸다. 그 순간 코끝을 찌르는 비릿한 냄새에 저절로 인상이 써졌다. 피 냄새다. 작은 상처에서 흐르는 피 정도로는 이만큼 역할 수는 없었다. 중상, 아니면 그 이상의….
“휘브! 어디 있어요!”
큰 목소리로 외치며 복도의 모퉁이를 돈 순간이었다. 힉! 눈앞에 벌어진 광경을 믿지 못하고 숨을 들이쉰 채로 멈췄다. 바닥에 쓰러진 사제의 배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선 이는 바로 휘브리스였다.
“그럴 리가….”
자세히 보니 휘브의 손에 칼이 들려 있었다. 사람을 찔렀다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무덤덤하게 사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칼날에서 핏방울이 뚝, 뚝, 떨어져 사제의 옷자락을 더럽혔다. 흰색과 붉은색이 마구잡이로 섞여 아른거렸다.
충격에 입을 틀어막자 거친 숨소리가 온 몸을 울렸다. 히끅, 하는 딸꾹질 소리에 휘브는 이쪽을 돌아보았다. 창백한 피부에 튄 핏자국과 우리를 보자마자 길쭉하게 찢어지는 입꼬리. 떡잎처럼 연한 녹색 눈동자는 어디로 가고 그의 홍채는 하늘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안녕.”
그건 휘브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