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5 (225/305)

#225

북쪽을 다스리는 풍요의 신 다르곤.

가파른 언덕 위에 지어진 신전은 천상의 낙원 같았다. 한겨울에도 찬바람을 막기 위해 기둥이 이중으로 놓여 있었고, 기둥과 기둥 사이로 사제들이 하얀 옷자락을 휘날리며 돌아다녔다. 끝없이 펼쳐진 설원을 수직으로 가로지른 기둥은 간절히 기도하는 신도의 팔처럼 하늘로 높게 뻗어 있었다. 저 멀리 순백의 설원과 만년설로 뒤덮인 산맥이 어우러져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그림 같은 풍경의 정점을 찍는 것은 바로 눈처럼 새하얀 신전이었다.

“이곳이 제가 모시는 신… 다르곤 님의 성전입니다.”

레톤보다도 오래된 믿음의 기원은 설원 라비린토스에서 시작되었다. 이곳 주민들은 길고 긴 겨울을 나기 위해 새벽이슬처럼 금세 사라지는 봄에 식량을 비축해 둔다. 그 봄날의 시작을 알리는 것은 눈밭 위로 움트는 새싹도 아닌, 동면에서 가장 먼저 깨어난 눈토끼들의 발자국이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신께서 눈토끼로 변체하여 봄을 내어 주시는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눈토끼가 물고 있는 것은 호랑가시나무입니다. 겨우내 허해진 몸을 달래줄 약초죠.”

사제는 신전 안으로 들어가기 전, 앞에 세워져 있는 석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말 그의 설명대로 두 발로 선 토끼가 입에 호랑가시나무를 물고 있었다. 봉긋한 주둥이 끝에 달린 뾰족한 잎사귀는 정오의 햇빛을 받아 윤기가 반들반들 흘렀다.

꼭 살아있는 것 같은 석상을 유심히 구경하며 사제에게 물었다.

“이곳 주민들은 다르곤 신을 믿나요?”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 그렇습니다.”

인구수는 그리 많지 않지만, 역사가 긴 만큼 신도와 사제들의 믿음이 깊을 것이다. 그럼 레톤의 신전에서 신력을 흡수할 때보다 고생 좀 하려나.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신전으로 들어가는데, 사제가 별안간 멈춰 서서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 라비린토스에 신의 사자가 나타났더군요.”

“신의 사자요?”

“헤메라, 라는 이름이었습니다.”

이제는 너무도 익숙해진 이름에 놀라기보다도 반가움이 먼저 느껴졌다.

“설화가 널리 퍼지면서 헤메라 신을 따르는 이들도 부쩍 늘어났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그분의 상징은 하얀 뇌조에 재스민 꽃이라더군요.”

“그거 참 신기하네요.”

뇌조와 재스민이라. 키코가 들으면 왜 제 이름을 틀리냐며 서운해 할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산뜻한 미소로 얼버무리며 마침내 다르곤 신전으로 첫발을 디뎠다. 빠르게 내부를 훑어본 감상은 하얗다, 그뿐이었다. 소박한 예배당엔 종교화나 스테인드글라스가 없는 대신 곳곳에 붉은 열매가 달린 호랑가시나무가 놓여있었다. 선홍색과 진녹색의 행렬은 신전 한편에 놓인 접대실까지 이어졌다.

“깔끔하고 정갈하네요.”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아 흘러가듯 중얼거리니 사제가 엷은 미소로 답했다.

“초대 대사제님께서 화려한 장식을 꺼려 하셔서 최대한 소박하게 지었다고 들었습니다.”

이윽고 접견실로 열고 들어가니 벽난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물씬 풍겨 왔다. 아무것도 모르고 청소하던 수행사제가 뒤늦게 우리를 발견하곤 바짝 굳어 버렸다. 차를 준비해 달라는 사제의 말에 후다닥 나가는 모습이 꼭 아멜리 백작가에서 일하던 나와 겹쳐 보였다.

딱딱한 나무 의자로 안내한 사제는 바른 자세로 앉아 인사했다.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작년에 사제직을 수여받은 피탈이라고 합니다.”

“전… 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휴 사제.”

무의식중에 본명을 말할 뻔했던 건가. 말과 말 사이의 간극이 의심으로 번지기 전, 휘브리스는 가까스로 가명을 생각해냈다. 다행히 피탈에게선 딱히 의심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나와 아스레인마저 떠돌이 모험가라는 변명 하에 어물쩍 넘어갈 수 있었다.

잠시 후, 수행사제가 내온 허브티를 마시며 폭풍 전의 고요를 즐겼다.

“달리 대접할 게 없어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아뇨. 설원에서 따뜻한 차를 마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의 은총이죠.”

“하하, 휴 사제의 말에 제 마음까지도 든든해지는군요.”

기계로 찍어 낸 것 같은 웃음소리가 접견실을 채웠다. 아무것도 모르고 이 광경을 봤더라면 훈훈하다고 느꼈을 테지만, 한쪽이 휘브리스라서 그런지 쓴웃음만 나왔다. 저런 멘트가 어떻게 바로바로 나오지. 바짝 마른입을 허브티로 축이곤 슬슬 본론으로 들어갔다.

“요즘 여긴 괜찮은가요? 여행을 다니다보니 이래저래 흉흉한 소문을 많이 접해서요.”

“글쎄요. 저는 신전에서 잘 벗어나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만….”

피탈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고민하다가 이내 걱정 따위 묻어나지 않는 투로 말했다.

“워낙 인적이 드문 곳이다 보니 들짐승이 종종 돌아다니곤 합니다만, 걱정은 안 됩니다. 무엇보다 다르곤 님의 비호아래 지어진 신전이니 마물만큼은 습격하는 일이 없을 겁니다.”

마물이 아닌 것이 올까 걱정인 것인데…. 그래도 헤메라의 신전과는 달리 헤카테가 대놓고 모습을 드러낸 적은 없는 모양이다. 물론 창밖을 보면 피탈 사제가 왜 여유로운지 알만도 했다.

광막한 설원에는 생명이 스쳐 지나간 흔적조차 없었다. 잔잔한 바람을 따라 겨우 목을 내민 야생화 몇 송이만 덜렁거릴 뿐이다. 이토록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에서 한 때 이카로스 이성을 잃고 날뛰었었단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하룻밤 묵으실 곳을 찾고 계시다면, 좁지만 방을 내어드리겠습니다.”

“아, 호의는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해가 지기 전에 길을 떠나야 해서요.”

“그렇군요….”

그리고 이토록 친절한 사제 무리가 이카로스를 죽일 기세로 쫓았다는 것도. 증오는 쉽게 대물림되고 악한 유습을 끊기란 어렵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진실에 한걸음 가까워진 지금, 이따금씩 생각한다.

만약 유피테르가 아스레인의 뿔을 자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이카로스가 신전을 습격하지 않았을 거고, 닉스는 타르타로스에 갇혀 어깨를 찔릴 일도 없었으며, 누르의 일가족도 행복하게 살았을 테지. 그 하나의 사건이 불러 온 재앙이 얼마나 큰지,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충동마저 든다.

“…이만 기도실로 갈 수 있을까요?”

하지만 이런 망상을 해 봤자 뭐하나. 현실은 바벨탑이 지어지기 직전인데. 하늘에 닿는 탑을 쌓아도 성경에서처럼 그를 혼낸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내려놓자 피탈 사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쪽으로 오시죠.”

앞서 걸어가는 피탈을 따라 신전 복도를 거닐었다. 기도실로 가는 길에 몇몇 사제들과 마주쳤지만, 피탈이 있어서 그런지 크게 이목을 끌지는 않았다. 이윽고 두 짝으로 된 문 앞에 도착했다. 문 위에는 정갈한 글씨가 새겨진 문패가 있었다.

‘그릇된 껍데기를 벗고 진실을 마주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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