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4 (224/305)

#224

부질없는 안부를 주고받는 동안에도 긴장감은 계속 숨통을 조여 왔다. 끝내 황제가 먼저 자리를 뜨면서 살벌한 눈치싸움의 막을 내렸다. 제 눈에 거슬리는 즉시 어떤 방법을 써서든 앞에서 치워 버리는 작자가 웬일로 신중하다. 아직 아스레인과 나를 쳐 낼 마땅한 증거를 찾지 못한 듯했다.

게다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지지를 받았다. 레톤의 사제, 카르가 우리를 순수하게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에게서 온 편지에서는 혹시 곤란한 일에 연루되지 않도록 자신이 성심성의껏 변호하겠다는 말과 함께 살려줘서 고맙다는 인사가 쓰여 있었다.

아스레인이 지금껏 쌓아올린 가문의 명성과 사건 현장에 있던 이의 증언. 이대로라면 황제는 당분간 우리를 직접적으로 방해하진 못할 것이다. 클라우스도, 시지프로도 실패했으니 사실상 의심받지 않도록 잠시 몸을 사릴 때가 됐다.

“그래도 황제는 계속 유피테르의 명령대로 움직이겠죠?”

“그렇겠지. 자신과 제국의 운명이 걸린 일이니까.”

아스레인의 말대로 미노스 황제는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 자신이 죽거나, 유피테르에게 버림받거나. 오직 비참한 최후만이 그의 눈을 뜨게 할 것이다. 그러니 미노스 황제를 갱생하길 포기하고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만했다.

문득 유피테르가 미노스 황제에게 남긴 말이 떠올랐다.

‘다시 마물의 그림자로 황폐해지기 전에, 그의 수하를 죽이고 뿔을 찾아 그 마물의 심장을 찔러라. 머지않았다. 진정으로 인간을 위한 나라가 완성되기까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뒤늦게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는 바로 아스레인에게 물었다.

“아스레인의 뿔을 자른 장본인이 유피테르 아니에요?”

“내 흐릿한 기억 속에서도 그것만은 확실하네.”

역사적 기록도, 아스레인에게서 엿본 기억도 모두 유피테르가 범인이라고 꼽았다. 그러니 가장 마지막까지 뿔을 갖고 있었을 사람이 뿔이 어디로 갔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미노스 황제에게 대륙 어딘가에 있을 뿔을 찾도록 종용했다. 어디 있는지 알고도 바로 알려 주지는 않고 도리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게 한다고…?

“유피테르가 뿔을 숨겨 놓고 까먹었을 리가 없어요. 그러니까 만약 황제가 뿔을 손에 넣어서 그 마물을… 처단하는 게 목표라면, 진즉 위치를 알려 줬을 거예요.”

아스레인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 갔다. 그 또한 유피테르의 언행에 앞뒤가 맞지 않음을 알아챈 듯했다. 잠시 고민하던 아스레인은 이내 한 가지 물음을 던졌다.

“그럼 뿔을 찾는 것보다… 그걸 찾기까지의 과정이 중요한 건가?”

“그럴 지도요. 아니면, 혜안으로 내다본 미래가 그 시점이었을지도 모르죠.”

유피테르는 벽돌을 조심스럽게 하나씩 쌓아 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완성된 탑이 어떤 모양일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도록 신중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최후에 쌓아올릴 벽돌이 무엇인지 아는 지금, 탑이 완성되기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일단 저희도 뿔을 찾는데 전념하죠.”

아스레인의 뿔을 황제보다 우리가 먼저 찾아야 한다. 그게 유피테르의 혜안이 내다본 미래를 바꾸는 실마리가 될 것이다. 아스레인의 서재에 꽂혀있는 지도를 꺼내어 테이블에 넓게 펼쳐 보았다.

“전에 그랬죠? 아스레인이 된 후에 뿔을 찾아서 대륙을 돌아다녔었다고.”

“그래. 하지만 신력으로 봉인해 둔 것인지, 끝내 찾을 수 없었네.”

“그럼 아직 찾아보지 못한 장소는 신전…이려나요.”

물끄러미 지도를 바라보다가 신전이 있는 위치를 하나씩 표시했다. 열두 신의 신전은 워낙 넓게 흩어져 있어서 무작위로 하나씩 들르기엔 비효율적이다. 최대한 후보군을 줄이기 위해 레톤의 신전에서 찾은 지도대로 황제가 조사를 마친 곳을 엑스 표했다.

그러다 불현듯 지도에 적혀있던 유의미한 메모가 떠올랐다.

“라비린토스 설원 근처에 신전이 있었죠? 오래 전에 이카로스를 공격했던….”

“풍요의 신, 다르곤의 신전일세.”

라비린토스 설원에 쓰인 ‘재조사 요망’이란 메모. 그 다섯 글자가 발목을 붙잡았다.

“그쪽으로 가 보는 게 어떨까요? 예전에 시지프가 이카로스의 흔적을 찾는데 실패했으니, 황제는 또 다시 라비린토스 설원으로 조사대를 보낼 거예요.”

아스레인은 내 말에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그 말엔 일리가 있지만, 신전에 들어가기 꽤 어려울지도 모르네.”

“무슨 이유라도 있나요?”

“험준한 오지의 민심은 원래 흉흉한 법이지. 제아무리 신전이라고 크게 다를 거 없네.”

가지런한 손가락이 다르곤 신전을 훑고 넘어가 라비린토스 설원을 짚었다.

“설원에 인접한 다르곤 신전은 예로부터 타지인에 대한 경계가 심했네. 얼굴을 아는 신도가 아닌 이상 기도실에도 들이지 않았지. 그나마 처음 오는 손님을 반기는 경우라곤, 순례 차에 들른 사제뿐이라든가….”

아스레인의 말대로라면 화로에 다가가기는커녕 기도실에도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대사제가 습격당한 이후라서 경계는 한층 더 심해졌겠지. 불행히도 레톤의 신전과 달리 다르곤의 신전에는 아무런 인연이 없다. 그나마 수행 사제로 일했던 테세스마저 이제는 헤메라의 사제가 되었으니 소용없었다.

그래도 하나, 순례 차에 들른 사제를 들여보내 준다니 다행이었다.

“그런 역할을 잘해 줄 사람이 있긴 해요.”

***

혹독한 설원에 맞닿은 풍요를 부르는 신전이라. 제법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하지만 식량 보급에 허덕이는 오지이기에 더욱이 풍요를 바란다는 말을 듣곤 납득했다. 전쟁이 많은 국경에서 평화를 빌고, 혹한의 겨울에 따스한 봄이 찾아오길 기다리는 것이 본능이니까.

북쪽, 그 높은 언덕배기로 눈이 흩뿌려진 듯 새하얀 지붕이 언뜻 보였다.

“거의 다 왔나 봐요.”

봄이 되었는데도 북쪽은 다름없이 추웠다. 그나마 전에 라비린토스에 왔을 때보다는 살인적인 바람이 누그러들어서 다행이었다. 몇 겹을 겹쳐 입으니 숨이 쉽게 차올라 입과 코를 막은 천을 살짝 내렸다. 천천히 숨을 들이쉬자 깊은 폐 속까지 서리가 박히는 듯했다.

“으으….”

살짝 몸을 부르르 떨자 아스레인이 다가와 온기를 나누어 주었다. 마석 귀걸이에 보온 마법을 재차 걸어 주는데, 뒤에서 못마땅한 한숨이 들렸다.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니 나를 책망하는 녹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아니, 데려올 거면 이런 곳이라고 미리 귀띔 좀 해 주지 그랬어요.”

“부탁할 때 말하지 않았어요?”

“신전에 함께 가서 순례자 연기를 해 달라고만 하셨는데요.”

“그거… 미안하게 됐네요.”

순순히 사과를 건네자 휘브가 한쪽 눈썹을 올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타지인을 경계하는 다르곤의 신전에 들어가는 방법은 간단했다. 휘브리스를 순례 길에 나선 사제로 만드는 것. 그리고 우리는 적당히 설원에서 그를 만난 모험가나 수행 사제쯤이면 충분했다. 휘브를 내세워 경계를 풀고 다르곤의 신전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다시 신전으로 올라가려니 휘브가 짜증이 묻어나는 어조로 투덜거렸다.

“옷이 치렁치렁해서 불편하단 말입니다.”

“으음, 잘 어울려요. 나름.”

늘 편안한 복장만 고수하던 휘브가 정갈한 의복을 갖추니 불편한 건 당연했다. 게다가 사제들은 순례를 할 때조차도 발목까지 내려오는 로브를 입는다는 소리에 어쩔 수 없었다. 사정을 전부 들은 후에도 선뜻 도와주겠다고 나선 휘브에게 내심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되게 사제 같아요. 휘브.”

“그걸 칭찬이라고 하는 형님도 참, …예. 너무 고맙네요.”

휘브는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며 눈짓으로 정면을 가리켰다.

그렇게 딱딱하게 얼어붙은 땅을 밟고 얼마나 올랐을까. 지붕을 떠받친 기둥의 크기가 제대로 가늠될 즈음, 아스레인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옆을 돌아보았다. 날렵한 눈빛 끝에는 가시나무와 침엽수가 얽힌 숲이 있었다.

“왜 그래요?”

작은 목소리로 물었으나 아스레인은 미동도 없이 숲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아스레인은 여기 있으라는 손짓과 함께 수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뭐라도 있는 건가? 싶은 순간, 아스레인의 손에 찬란한 빛을 띠는 검이 생겨났다. 살의를 가득 담은 칼날을 보자마자 확신했다.

저곳에 적이 있다고.

“…헤카테…?”

말하기 무섭게 수풀이 부스럭거렸다. 이내 겹겹이 얽힌 가시나무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네발로 기는 도마뱀이었다. 바닥에 납작 엎드린 놈에게는 하얀 털이 두툼한 꼬리까지 수북하게 나 있었다. 어째 점점 진짜 생물처럼 느껴지지만, 저것은 분명 헤카테였다.

피 대신 흐르는 신력을 보자마자 아스레인은 검을 들어올렸다. 찬기를 타고 흐르는 살의에 헤카테는 다시 가시나무로 몸을 숨겼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콱-! 망설임 없이 내리 꽂히는 검에 가시나무가 파스스 잘려 나갔다. 이윽고 예리한 검 끝은 헤카테의 코어를 정확히 반으로 쪼개었다.

군더더기 없는 검술을 가만히 지켜보던 휘브는 나직하게 탄성을 흘렸다.

“오, 제법이십니다~ 요즘 교수님들은 검술도 배우시나?”

흉터 있는 입가가 씰룩이는 게 꼭 놀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저러다 한 대 맞으면 어쩌려고…. 불안감에 슬쩍 분위기를 살폈지만, 아스레인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 사이에 파괴된 판도라는 하얀 연기가 되어 눈 녹듯 사라졌다. 더 이상 헤카테가 없는 걸 확인하곤 아스레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이번엔 먼저 공격하진 않았네요.”

“숨어서 관찰하려고 한 것 같았네.”

“그에게 명령을 받은 걸까요?”

“감시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텐데….”

가시나무에 숨어있던 헤카테를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수북했던 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돌무더기만 남았다. 살아 움직이던 흔적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러니 증거를 잡으려야 잡을 수가 없지.

아쉬운 대로 다시 신전으로 발길을 돌리려는데,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십니까?”

곧바로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천을 끌어올려 코와 입을 막았다. 신분을 숨길 만반의 준비를 하고 뒤를 돌아보니, 누가 봐도 신전에 소속된 사제가 서있었다. 퍽 당황스러워 보이는 눈빛이 우리와 가시나무 너머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아까 그 네발로 기는 짐승은 무엇이고….”

전부 봤나? 짐승이라고 말한 걸 보면, 헤카테가 결정적으로 죽는 모습은 보지 못한 것 같기도 했다. 여기서 말을 잘 해야 의심을 덜 살 텐데…. 아스레인과 조용히 시선을 주고받는데, 휘브가 자연스럽게 사이로 끼어들며 말했다.

“도망쳤습니다.”

“예?”

“단단히 겁을 먹은 것 같으니 다시 신전 근처에 오진 않을 겁니다.”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어조가 꼭 버시스 부사제를 닮아 있었다. 혹시 사제 연기의 모티브를 버시스로 삼은 건가. 다행히 의도대로 올곧은 사제처럼 보이긴 했지만, 진짜 사제의 의심을 누르기엔 부족했다.

“아… 예. 감사합니다.”

휘브가 안심하란 의미로 한 손을 내밀었지만, 사제는 오히려 뒤로 주춤 물러섰다. 경계심이 잔뜩 도사린 검은색 눈동자가 연신 휘브와 우리를 훑어보았다. 결국 휘브는 준비해 온 메디스 신전의 증표를 내밀며 말했다.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순례중인 사제입니다.”

차가운 손 안에 금속 패가 예리하게 빛났다. 둥그렇게 말린 올리브 가지를 보자마자 사제의 안색이 부쩍 밝아졌다.

“이런, 메디스의 사제셨군요.”

이후 사제는 두툼한 옷 안에서 비슷한 금속 패를 꺼내어 내밀었다. 휘브는 금속 패에 그려진 토끼를 보자마자 한눈에 알아채고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새하얀 눈토끼… 다르곤 신을 따르는 분이시군요.”

“예. 미천한 몸이지만, 바로 위에 있는 신전에서 다르곤 신을 따르고 있습니다.”

찬바람처럼 싸늘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몽글몽글해졌다. 서로의 금속 패를 내미는 모습은 마치 거래처를 만난 영업직원끼리 명함을 주고받는 것 같았다. 다른 신전의 사제를 보는 게 신기한지, 환하게 웃는 사제의 볼에 보조개가 선명하게 파였다.

“이런 곳까지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십니다.”

“아뇨. 경치가 워낙 아름다워서 마음이 정갈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연기… 잘하네. 부드러운 눈빛에 엷은 미소까지- 휘브는 그림으로 그려 낸 듯 완벽한 사제로 보였다. 자칫 험악해 보일 수 있는 입가의 흉터나 위협적인 덩치 따위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나 같아도 메디스의 사제라고 감쪽같이 속을 것 같다. 뭐, 아예 거짓말은 아니지만.

사제가 쌓아올린 마음의 벽이 허물어진 후, 휘브는 자연스럽게 우리를 소개했다.

“이쪽은 제가 설원을 지나다가 도움을 받은 모험가분들이십니다.”

“모험가…요?”

“여행 중에 다르곤 신께 기도를 드리고 싶다고 하셔서 제가 직접 모시고 왔습니다.”

누군가는 뜬금없다 느껴질지 모르는 이유도, 휘브의 뻔뻔한 웃음 앞에서 무색했다. 배우 뺨치는 연기 덕분일까. 다르곤의 사제는 처음 경계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호의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아아,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사제는 두 손을 기도하듯 가지런히 모으며 말했다.

“바람이 쌀쌀하니 어서 들어오십쇼. 따뜻한 차를 내어 드리겠습니다.”

손님을 맞이할 생각에 사제는 서둘러 다르곤의 신전으로 향했다. 일사천리로 풀리는 사건이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냉큼 사제를 따라가는 와중에 휘브가 슬쩍 걸음을 늦춰 옆으로 다가왔다. 그러곤 아스레인을 지그시 바라보며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쯤이면 나한테 할 말 있지 않아요?”

“…수고했네.”

아스레인이 선뜻 원하는 말을 들려주니 휘브의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장난기가 가득 묻어나는 연녹색 눈동자가 이번엔 나를 향했다. 그래서 제대로 감사한 마음을 담아 진심을 전했다.

“휘브가 없었으면 못 들어갔을 거예요. 고마워요.”

그러자 휘브는 사제로서의 탈은 집어치우고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에이, 뭘요~”

나른하게 휘어진 입매는 꼭 칭찬 받아 기쁜 어린아이 같았다. 그것도 잠시, 다르곤의 신전에 가까워지자마자 휘브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절제되고 부드러운 얼굴로 돌아가는 걸 보며 새삼 느꼈다. 역시 휘브리스는 정직함이 제1원칙인 사제와는 거리가 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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