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3 (223/305)

#223

참 잘도 먹는다, 싶었다. 불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신전 일대를 휘감은 불은 마치 거대한 입을 벌려 먹이를 사냥하는 혹등고래 같았다. 뭐든 탈 만한 것이라면 사양 않고 태워 버리기에 참으로 레톤답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내 힘이었다니…. 적잖이 당황해 버려서 뻐쩍 얼어 있다가 더듬거리며 말을 꺼냈다.

“이, 이게 다 저 때문에 이런 거예요?”

“아니. 이곳을 어지럽힌 건, 아까도 말했다시피 헤카테일세.”

“그럼….”

“그저 힘을 흡수했으니 자네에게 제어를 부탁한 것뿐이네.”

아. 난 또, 내가 결계로 들어간 사이에 폭주한 줄로만 알았다. 그보다 어느 사이에 힘을 흡수한 거지? 살아있는 뱀을 삼키는 것처럼 고통스럽던 지난번과는 확연히 달랐다. 빗방울이 땅에 스며들 듯 자연스러워서 흡수하는 과정도 느끼지 못했다. 뭐,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살며시 눈을 감고 사방으로 흩어진 기운에 집중했다. 잔뜩 성난 불길을 잠재우는 것은 꼭 쏟아지는 폭포의 물길을 억지로 바꾸는 느낌이었다. 제방을 조금만 대충 쌓아도 자그마한 틈으로 새어나가기 일쑤였다. 한 곳으로 몰리지 않게, 또 너무 빠르지도 않게 불을 조금씩 제압해 나갔다.

“후우…!”

마침내 신의 불을 화로에 되돌려 놓은 후에야 한숨 돌렸다. 조심스레 눈을 떠보니 한바탕 비가 쏟아진 후의 화재 현장처럼 연기만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 연기는 새까맣게 타고 남은 재와 달리 하얘서 마치 새벽녘 물안개를 보는 듯했다. 신력을 모은 조각, 판도라가 연기로 승화되고 있었다.

신비로운 광경을 잠시 멍하니 쳐다보다가 아스레인에게 말했다.

“미노스 황제는 레톤 신전이 무너졌다는 걸 알까요?”

“음. 결계가 깨진 순간 소식을 들었을 걸세.”

이윽고 아스레인은 돌무더기 위에 서서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판도라가 사라져 평범한 돌기둥이 된 헤카테는 여전히 신을 동경하듯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었다. 휙- 날렵한 바람 소리와 함께 금빛 칼날이 허공을 갈랐다. 단숨에 반으로 갈라진 돌기둥의 잔해가 동료의 사체 위로 추락했다. 마침내 아스레인은 한때 신의 숨결을 받아 살아 움직이던 물체를 짓밟으며 읊조렸다.

“그러니 그쪽에서 움직이기 전에 우리가 먼저 수를 놓도록 하지.”

과연 당황하려나. 아니면, 그 전능하신 혜안이 예상한 바일까. 홀연히 떠오르는 생각에 바닥으로 시선을 내려 깔았다. 우연히 마주친 헤카테의 눈엔 희미한 생명의 빛도 감돌지 않았다. 사명을 다하지 못한 도구의 최후였다.

무사히 레톤의 신전을 차지하고 안겔루스로 돌아왔다. 익숙한 장소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지체 없이 결계에서 본 기억을 아스레인에게 전했다. 유피테르와 미노스 황제의 결탁, 그리고 유피테르의 계획에 대해서. 그 이야길 들은 아스레인이 곧 황제에게 서신을 썼다.

그 사이 나도 존재하지 않는 친구에게 선물을 보냈다. ‘대륙 여행자를 위한 안내서’ 단 한 번도 펼쳐 본 적 없는 책과 함께 지도를 동봉했다. 수신인은 리온. 치즈 조각을 훔쳐 가는 쥐를 끔찍이도 싫어하는 자의 이름이었다.

일부러 낡은 종이를 골라 쉽게 번지는 싸구려 잉크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전에 여행을 가고 싶다고 말했죠? 여행 서적이랑 들고 다니기 편한 지도를 함께 보내요. 개인적으로 꼭 갔으면 하는 곳을 따로 표시해 두었어요. 아, 야생 마물이 종종 나타나는 오지라서 마력을 못 쓰면 위험하답니다. 그러니 마법사를 동행하는 게 좋을 거예요. 아니면, 길눈이 밝은 약초꾼이라든가. 모쪼록 즐거운 여행이 되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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