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
이 세계에서 신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이 얼마나 될까. 당장 불신자라고 스스로를 칭하는 휘브리스만 해도 대사제에게 세례를 받았고, 칼리온 태자도 결국 신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신도가 아닌 자들도 이런데, 메디스의 충직한 신도인 미노스 황제는 오죽할까. 황명부터 관념까지 전부 유피테르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 리 없다.
결국 상대는 황제가 아니라 유피테르가 다루는 수많은 체스 기물 중 하나였다.
지도를 사이에 두고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굳게 입을 닫은 아스레인이 걱정되었다. 만약 누군가 내 신체 일부를 차지하기 위해 남을 가감 없이 해쳤다면 어떤 기분일까. 심지어 그가 한때 왕으로 모셨던 자라면…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아니,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짧게 숨을 들이쉬며 지도 위를 탁! 하고 내리쳤다. 꼭 빨려 들어갈 것처럼 지도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던 아스레인이 그제야 나를 돌아보았다. 괜스레 코를 찡긋거리며 웃어주고는 지도를 둘둘 말았다.
“아스레인 덕분에 유용한 단서를 발견했네요. 이걸 가져가는 게 좋겠죠?”
분위기를 환기하기엔 터무니없었지만, 내겐 그게 최선이었다. 둥그렇게 만 지도에 끈을 묶으면서도 내심 마음을 졸였다. 다행히 화제를 돌린 효과는 있는지, 아스레인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증거로 쓰려면 가져가는 게 좋겠지만, 지도가 사라지면 의심을 살 걸세.”
“으음. 그렇다고 증언만 하기에는 너무 약한데….”
지도만 쏙 가져가면 언젠가 다시 이곳에 돌아올 이들이 의심할 거고, 그렇다고 지도의 내용을 줄줄이 읊자니 황제를 몰아세울 증거로는 부족했다. 어느 쪽을 골라도 곤란해져서 머리만 아파졌다.
결국 지도를 일단 원탁에 내려놓고 화로부터 가리켰다.
“그럼 일단 저거부터 정리하게 도와줄래요?”
그 말에 아스레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화로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가지런한 손길을 따라 그의 마력이 촘촘한 그물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신력으로 가로막힌 성역에서도 그 마력은 찬란한 금빛을 잃지 않았다.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 오자 신의 불을 마치 포획 틀에 걸린 짐승처럼 맹렬하게 날뛰었다. 호전적인 전쟁의 신이란 이름에 걸맞은 신력이었다. 이제부터 저걸 흡수해야 한다니, 긴장되지 않으면 거짓말이었다.
“…후우….”
살며시 눈을 감으며 긴 숨을 내쉬었다. 이번엔 요령을 알고 있으니 괜찮을 것이다. 횡포한 맹수조차도 도망칠 수 없을 만큼 단단한 상자를 머릿속으로 그렸다. 바닥에서부터 차차 벽을 끌어올리던 그때, 등 뒤에서 뭔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스스슥. 무언가가 은밀하게 바닥을 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집중을 흩뜨리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신경이 그쪽으로 흘러갔다. 결국 불안감을 참지 못하고 뒤를 휙 돌아보았다.
“…어?”
푸른 뱀이다. 결계를 지키고 있던 기도문이 슬금슬금 이쪽으로 기어 오고 있었다. 내가 돌아보자 잠시 멈칫한 뱀은 갑자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아스레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위험해요!”
반사적으로 아스레인을 지키려고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채 상자에 가두지 못한 신력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도망칠 새도 없었다. 아스레인에게 닿기 직전, 강렬한 빛이 순식간에 나를 삼켰다.
“으윽….”
눈앞이 어질어질해서 정신을 차리는 데만 한참이 걸렸다. 희끄무레한 시야가 서서히 돌아오니 웬 흰 바닥이 보였다. 아니, 바닥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분명 두 다리로 지탱하고 서있는데 발 옆에는 그림자가 없었다. 공간감이 사라진 비현실적인 장소는 불행히도 익숙한 곳이었다.
“…유피테르의 결계인가.”
또 다시 들어와 버렸다. 심지어 이번엔 혼자다. 문득 아스레인은 괜찮을지 걱정이 되었다가 내 처지를 떠올리곤 한숨을 내쉬었다. 그라면 기도문으로 만들어진 뱀 따윈 손쉽게 제압했을 것이다. 당장 문제는 나였다. 아스레인도 없이 혼자 유피테르의 결계에 갇혀 버렸다.
“아그누스.”
혹시 몰라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예상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유피테르가 만들어 낸 공간에서 한낱 내가 마력을 쓸 수 있을 리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처음 왔을 때보다 움직이기 수월해졌다는 점이었다. 신력을 흡수한 덕분에 유피테르의 힘에 영향을 덜 받게 된 모양이다.
하여간 이곳에서 나가야만 했다. 그때처럼 걸어가다 보면 뭔가가 나오겠지 싶어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발끝에 무언가가 걸렸다. 팅! 데구루루. 맑은 소리에 고개를 숙여 보니 성배가 볼품없이 굴러가다 멈췄다.
“뭐야. 이게… 왜 여기 있어?”
성배도 같이 신력 폭발에 휘말린 건가. 옅게 혀를 차며 허리를 숙여 성배를 주웠다. 아무리 내가 믿지 않는 신이라지만, 성유물 씩이나 되는 물건을 대충 발로 차고 무시할 순 없었다. 어쩌면 성유물이 판도라처럼 길잡이가 되어 주지 않으려나? 나름 희망을 품으며 상체를 드는 그때였다.
“……!!”
이쪽을 향한 하늘빛 눈동자와 마주쳐 일순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고개를 숙일 때만해도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웬 뱀이 나타났다. 번득이는 회색비늘, 서리서리 감은 매끈한 몸- 그것은 결계에서 도망쳐 나오다가 본 뱀이었다.
본능적으로 성배를 꽉 쥐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달려들려나?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그런데 회색 뱀은 이를 드러내기는커녕 멀찍이서 나를 응시하기만 했다. 세로로 찢어진 동공에선 그 흔한 경계심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당신, 유피테르예요?”
속는 셈치고 말을 걸어 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유피테르의 결계 속에 있는 생물이 본인 말고 누가 있겠나. 하지만 대뜸 말을 건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뱀은 아무 반응도 없었다. 뭘까. 정체 말고도 이상한 점이 한 둘이 아니었다. 유피테르가 만들어 낸 것임은 확실한데….
“왜 나를 공격하지 않는 거예요?”
결계에 함부로 들어온 침입자인데도 가만 두고 봤다. 왜지? 내가 성배를 들고 있어서? 아니면, 내게서 유피테르와 비슷한 기운이 느껴져서? 이유는 모르지만, 뱀은 나를 적대하지 않았다.
“…내 말을 알아듣긴 하는 건가.”
답답한 마음에 입속말로 중얼거리자 뱀이 머리를 살짝 틀었다. 뭔가 반응이 있어서 기대하기도 잠시, 뱀은 차갑게 등을 돌리고 어디론가 기어갔다. 처음엔 느릿느릿 기어가던 그는 어느새 호수를 만난 물뱀처럼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잠깐만!”
왠지 놓치면 안 될 것 같아 다급히 뱀을 향해 뜀박질했다. 얼마나 빠르던지, 여기가 평지가 아니었다면 진즉 놓쳤을 것이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던 즈음 드디어 뱀이 멈춰 섰다. 거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자 눈에 익은 광경이 펼쳐졌다.
“전에 거기잖아…?”
뱀이 유유히 들어간 곳은 열두 개의 화톳불이 쌍으로 늘어져 있는 제단이었다. 처음 아스레인과 함께 결계로 들어왔던 때와 똑같았다. 나를 일부러 이곳으로 이끈 건가. 성배를 쥐고 가운데에 놓인 물그릇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자 같은 신력에 반응한 성유물이 부르르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내 성배를 물그릇 안에 넣으니 세월이 묻어나는 목소리가 들렸다.
- 아아…! 메디스 신이시여. 제게 끝을 고하러 오셨나이까.
얼핏 쇳소리가 섞인 음성은 독실한 메디스 신도의 기도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그 나긋한 음성이 묘하게 익숙해서 미심쩍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어지는 말을 듣고는 확신했다.
- 송구합니다. 미천한 저는 사명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이건 미노스 황제의 목소리였다.
- 당신께서 제게 미래를 알려 주셨는데도, 저는 너무 늙고 노쇠했습니다.
- 고개 들 거라. 인간의 수명이란 본디 덧없는 것 아니겠나.
- 전능하신 메디스시여….
미노스 황제가 언제 유피테르와 접선했던 거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피테르는 대사제 카인의 신분에 묶여있었을 텐데. 설마 분신을 보내어 미노스에게 직접 신탁을 내린 건가. 그럼 어느 시점이지? 초조하게 숨을 죽이고 기다리니 엄숙한 음성이 들렸다.
- 내 기꺼이 그대에게 힘을 나눠 주겠다.
- …저, 정말이십니까?
- 사명을 위해서라면 어려운 일도 아니지.
무슨 사명? 불길한 낌새가 느껴져 눈살을 찌푸렸다. 이내 유피테르는 그 자신이 내다본 미래를 신탁으로써 전했다.
- 앞으로 다가올 축도의 날에 ‘그 마물’의 봉인이 풀릴 것이다. 하지만 아직 제국을 지킬 방법은 남아 있다. 그대가 아니면, 누가 이 나라를 지키겠는가.
- 그리 말씀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 그러니 이 제국이 다시 마물의 그림자로 황폐해지기 전에, 그의 수하를 죽이고 뿔을 찾아 그 마물의 심장을 찔러라. 머지않았다. 진정으로 인간을 위한 나라가 완성되기까지….
- 예! 메디스 님.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에서 벅차오른 감격이 물씬 풍겼다.
- 제가…. 충실한 종인 제가 반드시 당신의 꿈을 이뤄 드리겠나이다.
짧지만 묵직한 기억의 파편은 그렇게 끝이 났다. 한차례 폭풍에 휘말린 것처럼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윽고 거센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번민의 흔적과 씁쓸함 한 덩이뿐이었다.
병상에만 누워 있다던 황제가 어떻게 갑자기 상태가 호전되어 공식 석상에 나올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유피테르의 신력이라니. 자신에게서 죽음의 그림자를 지워 준 신이라면 나라도 기꺼이 따르겠다. 하지만 그 대가로 남의 목숨을 빼앗아야 한다면 하지 않는 것이 정상적인 발상 아니던가.
이미 미노스 황제는 이성을 잃었다. 자신이 믿는 신을 위해. 아니, 죽음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신에게 나라를 팔았다. 그도 결국엔 이용당하는 존재였다. 클라우스를 버리고, 시지프를 사형시키며 쓸모를 다한 도구는 가차 없이 정리하던 미노스 황제도- 뱀의 꼬리에 불과했다.
치가 떨렸다.
“진정으로 인간을 위한 나라….”
그 정의를 내린 게 대체 누구란 말인가. 오랫동안 이어져 온 인간과 마물의 갈등. 그리고 갈등을 부추기는 신. 더러는 공통의 적이 있어야 화합이 된다고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아니어도 너무 아니었다. 유일신인 유피테르가 다스리는 인간만 남은 세계가 이상향일 리가 없다.
- 부디 미천한 저희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이 와중에도 화톳불에서 들려오는 아무개의 기도 소리에 눈을 질끈 감았다.
“나한테 왜 이런 기억을 보여 주는 거예요?”
당신이 진심으로 인간을 위하는 신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었던 건가요? 아스레인이 마물을 지키듯, 당신도 인간을 지키는 거라고? 그걸로 나를 설득하고 싶었나요? 하지만 내 앞에 놓인 건 극단적인 현실뿐이에요. 결국 이 오랜 갈등의 끝은 아스레인이 죽거나, 유피테르가 죽거나… 둘 중 하나라고.
순간 힘이 빠져 제자리에 주저앉으니 뱀이 곁으로 다가왔다. 원망이 섞인 눈초리로 흘겨보아도 뱀은 내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뾰족한 주둥이로 내 팔을 툭, 툭 느릿하게 건드렸다. 그 모습이 꼭 나를 위로해주던 누르와 겹쳐보여서 어이없게도 웃음이 나왔다.
“왜?”
“…….”
“넌, 내 편이 아니잖아.”
뱀은 말이 없었다. 계속 말이 없었다. 나를 향한 하늘색 눈동자가 꼭 호수의 수면처럼 투명하게 보였다. 그래서 나도 묵묵히 뱀을 바라보았다. 그가 내게 무엇을 바라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그리워 마지않았던 목소리가 들렸다.
“태오!”
이름이 들리자마자 퍼뜩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아스레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아스레인….”
부름에 대답하듯 일순 금빛 섬광이 번쩍하고 스쳐 지나갔다. 번개가 흐른 자리에 금이 가자마자 결계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가려다가 불현듯 회색 뱀이 마음에 걸렸다. 우뚝 멈춰 서서 여전히 나를 바라보는 뱀에게 말했다.
“나 이만 가볼 게. 아무래도 또 오게 될 것 같지만.”
지진이 난 것처럼 지반이 흔들리는데도 뱀은 요지부동이었다. 현실에서 살아있는 생물이 아니라 그런가. 그래도 내 이야기는 들어주는 눈치였기에 나지막이 말을 덧붙였다.
“혹시 유피테르를 만난다면 전해 줄래?”
“…….”
“당신이 무엇을 보여 주든, 난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할 말을 마치곤 서둘러 결계의 틈으로 몸을 날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떠보니 웬 폐허가 나를 반겼다. 벽으로 막혀 있던 천장은 시원하게 뚫렸고, 사방에는 돌무더기가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으며, 신의 불을 받치던 원탁은 장작이 되어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게 다… 뭐야?”
내가 결계로 빨려 들어간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거지? 멍하니 사위를 둘러보다가 뒤늦게 폐허 한가운데 서있는 아스레인을 발견했다. 방금 막 무언가를 베었는지, 그의 손에 들린 금빛 검이 거센 마력으로 휘감겨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려다가 연기를 들이마시곤 작게 기침했다. 콜록! 그 소리에 놀란 아스레인이 곧장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괜찮나?”
구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려다가 말문이 콱 막혔다. 아스레인의 재킷에 핏자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지러움도 무릅쓰고 벌떡 일어나 아스레인에게 달려들 듯 안겼다.
“그건 제가 할 말이에요! 뭐예요? 그 피는.”
“진정하게.”
“어떻게 진정해요?!”
“내 피가 아니네.”
“…네?”
아스레인은 내가 멀쩡하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상황에 대해서 차차 설명해 주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이해하기 어려워 내 입으로 되물어야만 했다.
“그러니까 제가 유피테르의 결계로 들어간 후, 갑자기 성역을 이룬 기도문이 아스레인을 공격했다고요?”
“정확히는 기도문으로 된 헤카테였지. 뱀처럼 바닥을 기어 다니는 걸 보지 않았나.”
“아, 그게 헤카테였어요?”
“판도라로 된 코어는 없었지만, 기도문 자체에 있는 신력으로 움직이고 있었네.”
신의 불을 건드린 탓에 우리를 침입자라고 간주한 건가. 조용히 아스레인만 처리하려고 했으나, 그게 통하지 않자 주변에 숨어 있던 헤카테들까지 신전으로 달려들었단다. 그들이 한 번에 공격을 감행하니 허름한 신전이 천장까지 시원하게 개방한 폐허가 되어 버린 거였다.
“그럼 피는 뭐예요?”
“신전의 일부가 무너지면서 카르 신관이 다쳤네.”
“네?! 아이리스는요?”
“다행히 무사하네. …기절했지만.”
아스레인은 눈짓으로 신전 앞 정원을 가리켰다. 흙바닥 위에 카르 신관과 아이리스가 나란히 누워 있었다. 가벼운 타박상 말고는 크게 다친 곳이 없어 보여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리스까지 멀쩡한 걸 알고 난 후에야 다시금 엉망이 된 성역을 살펴보았다.
“잘도 타네요.”
헤카테들이 날뛰다가 신의 불을 넘어뜨려 불씨가 고해소와 기도실까지 옮겨 붙은 모양이다. 심드렁하게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다가 뒤늦게 중요한 것이 떠올랐다. 저 성역 안에서 유일하게 타면 안 되는 증거가 있지 않았나.
“아스레인. 지도는요?”
유난히 크게 뜬 눈을 끔뻑거리며 묻자 아스레인은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갖고 있네.”
“허… 다행이다.”
역시 아스레인이야. 놀란 마음을 도닥이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차라리 잘됐다. 어떻게 지도를 빼갈까 고민이었는데, 헤카테의 공격으로 인해 전부 소실되었다고 둘러대야겠다.
내 허리를 감싸 안고 바닥으로 무사히 내려온 아스레인이 물었다.
“결계 안에서는 아무 일 없었나?”
“그게….”
많지. 그것도 아주 많았지. 하지만 지금 여기서 말하기엔 적합하지 않았다. 바닥에 누워 있는 두 사람, 폐허가 된 신전, 헤카테의 몸을 이루었던 잔해, 그리고 활활 타오르는 의자와 원탁. 흡사 아포칼립스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이곳을 정리하는 게 우선이었다.
“일단 불부터 끄죠.”
부탁한다는 의미로 아스레인을 올려다보았다. 당연히 그가 마법으로 단숨에 정리해 줄 줄 알았다. 하지만 아스레인은 오히려 사방에 흩뿌린 마력을 말끔하게 거두며 말했다.
“그래. 부탁하지.”
“…네?”
뜻밖의 말에 고개를 기울이자 아스레인이 곤란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전부 헤메라의 불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