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1 (221/305)

#221

푸른 글자 하나하나가 꼭 살아있는 뱀의 비늘처럼 꿈틀거렸다. 함부로 건드렸다간 글씨가 손발을 옭아맬 족쇄가 될 것 같았다. 기괴한 광경에 얼어붙은 나와 달리 아스레인은 차분히 벽에 새겨진 결계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이쪽에 공간이 있네.”

“벽 너머에요?”

아스레인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신전 규모에 비해 고해소가 작다 싶었는데, 방으로 둘러싸인 중심에 비밀 공간을 만들어 둔 모양이다. 게다가 결계를 숨겨 둔 솜씨가 얼마나 정교하던지, 아스레인이 벽을 건드리기 전까지만 해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웬만한 사람은 이곳에 밥 먹듯 드나들어도 평생 결계를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야말로 완벽한 밀실이었다.

“신력으로 만들어진 결계인가요?”

“그래. …결계를 넘어서부터는 전부 성역인 것 같군.”

성역이란 말에 확신했다. 저곳에 우리가 찾는 신의 불이 있음을.

“어떻게 하면 들어갈 수 있죠?”

결계를 열 방법을 묻자 아스레인의 동공이 세로로 길게 찢어졌다. 마력을 담아 찬란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결계를 뜯어보듯 샅샅이 훑었다. 금세 답을 찾은 그는 혼잣말하듯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정제된 신력과 결계를 만든 기도문이 필요하네.”

신력은 있다고 쳐도, 기도문이라고? 세상에 신탁과 주문이 얼마나 많은데, 당시에 어떤 기도문을 썼는지 어찌 알까.

혹시 단서가 있나 싶어 다시금 푸른 글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띄어쓰기 없이 줄줄이 이어진 문장은 마치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 끊임없이 꿈틀거렸다. 서서히 속까지 울렁거려서 시선을 돌리려던 차, 번뜩 한 단어를 알아보았다.

“그림자…?”

이건 신의 언어라고 불리는 고대 이아페어였다. 성역을 숨길 당시에 읊은 기도문이 결계 그 자체가 된 것 같다. 그런데 어째서 눈을 한 번 더 속이지 않고 기도문을 그대로 내버려 둔 거지? 설마 고위사제들 말고는 고대 언어를 아는 이가 없으리라고 확신한 건가. 뭐, 나야 그 안일함에 감사할 뿐이다.

정답을 확신하며 옆을 돌아보니 아스레인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손에 신력을 응집시켜 조심스럽게 결계에 대었다. 우웅- 신력에 반응하듯 벽이 진동하더니 글씨마저 심하게 요동쳤다. 당장이라도 나를 잡아먹을 듯 꿈틀거렸지만, 침착하게 바깥에서부터 안으로 문장을 읽어 나갔다.

“피 맺힌 서리가 하늘을 뒤덮어 눈앞에 어둠이 드리운다. 오직 구름을 뚫고 뻗은 손만이 태양에 닿을 수 있을지니. 그대. 설령 그림자가 집어삼킬 듯 쫓아와도 두려워하지 말라.”

읽으면 읽을수록 왠지 귀에 익은 문장이었다. 마침내 둥그런 결계의 중심부에 놓인 글자를 읊는 순간이었다.

“불을 얻는 자, …세상을 얻으리라.”

끼긱, 끼긱. 낡은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에 놀라 결계에서 손을 뗐다. 그러자 똬리를 튼 뱀처럼 말려 있던 문장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곡선을 그린 글자의 행렬은 곧 문고리도 없는 각진 문으로 변했다.

들어가도 되는 거겠지. 망설임 없이 결계를 풀어 놓고 이제 와 걱정이 되었다. 긴장감에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아스레인에게 아코니툼의 정화석을 건넸다.

“힘들면 말해요.”

“웬만한 신력엔 반응하지 않으니 걱정 말게.”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이 앞은 성역이었기에 걱정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아스레인에게 딱 붙어서 벽으로 손을 뻗었다. 앞으로 밀리리란 예상과 달리 손은 벽을 통과하고 안으로 쑥 들어갔다. 마치 누군가 잡아당기는 것 같은 느낌에 우앗! 소리를 지르며 비밀 공간에 발을 들였다.

“아야….”

마치 마법진으로 이동한 것처럼 머리가 지끈거렸다. 설상가상 어지럽기까지 해서 눈을 질끈 감고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다행히 아스레인은 아무렇지 않은지, 내 어깨를 감싸며 허리를 숙여 안색을 살폈다.

“괜찮나? 다친 곳은?”

“별 거 아니에요. 살짝 어지럽기만 하고….”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아스레인을 돌아보았다가 일순 멍해졌다. 이곳, 성역이라는 이름치고는 너무 어두웠다. 그나마 열기가 느껴지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화로에서 불꽃이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신의 불이었다. 헤메라 신전에 있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위력을 품고 있었다.

마침내 원하는 것을 찾았는데,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이 장소는… 대체 뭐죠?”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창문 없는 벽으로 둘러싸여 꼭 지하실 같았다. 게다가 화로 주변을 다시 보니 신의 불은 제단이 아니라 원탁 위에 놓여 있었다. 족히 열 명은 둘러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한가운데 있으니 퍽 뜬금없게 느껴졌다. 이곳에서 사제끼리 회의라도 하는 건가?

의아하게 주변을 둘러보던 그때, 아스레인이 맞은편 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태오. 저길 보게.”

시선이 향한 곳엔 웬 문양이 새겨진 패가 걸려 있었다. 풍성한 갈기와 날카로운 송곳니- 의심할 여지없이 포효하는 수사자였다. 예전에 비브린트 숲에서 사이누르 밀렵 사건을 조사하다가 사자 문장을 본 적 있다.

“저건 시오 왕조의 상징이잖아요.”

“…보란 듯이 걸어 두었군.”

“역시 레톤의 신도들은 시오 왕조가 돌아오길 바라는 걸까요?”

생각해 보면 누르 일가를 사냥한 밀렵꾼들도, 클라우스 자작도, 닉스의 어깨에 창을 꽂은 사제도 전부 레톤과 관련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늘 암구호처럼 같은 문장을 썼다.

‘불을 얻는 자, 세상을 얻으리라.’

곱씹어 보면 이상한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신탁은 시오 왕조에게 치명적인 독이 됐기 때문이다. 과거 에브게니아 공작이 시오 왕조를 끌어내기 위해 전쟁할 때, 병력의 차이로 질 위기에 처했었다. 그때 이 신탁을 통해 대승을 거두고 끝내 왕좌까지 차지했다. 그런 신탁을 시오 왕조를 따르는 이들이 암구호로 쓴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심쩍었다.

“이곳을 더 찾아봐야겠어요. 여기 원탁이 있는 이유가 분명 있을 거예요.”

황제의 눈을 피해 밀회라도 가졌을지 모른다. 있는 거라곤 화로와 문장, 원탁뿐인 이곳에서 반드시 증거를 잡아내야 했다.

아스레인이 나무패 주변을 살펴보는 사이, 고해소에서 가져온 성유물을 화로 가까이에 대었다. 성배에서 흘러나온 신력이 벽으로 이어진 것처럼 또 다시 단서가 있는 곳을 알려 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성유물은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바닷물에 흐르는 모래알처럼 희미한 빛이 원탁 아래로 향했다. 곧장 성배를 내려놓고 홀린 듯 원탁 아래를 이리저리 더듬었다.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 않아 한참을 헤매던 그때였다.

손가락 끝에 살짝 튀어나온 무언가 걸렸다. 이거다. 함정이라기엔 너무도 깊게 숨겨진 틈을 건드리자 달칵, 맑은 소리가 들렸다. 이내 원탁 아래 숨겨져 있던 서랍이 열렸다.

“아, 아스레인.”

예상치 못한 발견에 저절로 목소리가 떨렸다. 곧장 다가온 아스레인이 서랍 안에 있던 물건을 꺼내었다. 누르스름한 가죽이 두루마리처럼 둘둘 말려 끈으로 묶여 있었다. 설마 지령이나 편지 같은 건가? 한가득 기대를 품고 원탁에 가죽을 넓게 펼쳤다.

“이건….”

원하는 글씨는 보이지 않고 대륙 지형만 보였다. 섬세하게 표현된 것이 대학 도서관에서만 볼 수 있는 지도였다. 물끄러미 지도를 바라보던 아스레인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지도인가.”

“딱히 특이할 건 없어 보이네요.”

민망할 정도로 지극히 평범한 지도였다. 허탕인가. 드디어 꼬리를 잡았다는 원대한 희망이 초라해지는 순간이었다. 다른 곳을 찾아보려는데, 한참동안 지도를 바라보던 아스레인이 불쑥 말했다.

“이 지도에도 숨겨진 글자가 있을지도 모르네.”

“글자요?”

“아까도 벽에 마력이 닿으니 신력으로 쓰인 글자가 드러나지 않았나.”

“아…!”

번개가 치듯 그의 말이 번뜩 뇌리에 꽂혔다. 이내 아스레인이 손바닥에 마력을 집중시키고 천천히 가죽 표면을 쓸었다. 그러자 지도 위로 푸른 표식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흡! 나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쉰 채로 푸른색을 좇아 눈을 돌렸다.

지도 상단에는 엄격하다 못해 섬뜩한 행동 지침이 적혀 있었다.

1. 의심되는 구역 발견 시엔 즉시 상부에 보고할 것.

2. 방해되는 인자는 황금사과를 이용하여 제거할 것.

3. 만약 붙잡히거든 스스로를 반역자라 칭하고 자결할 것.

4.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광스러워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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