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0 (220/305)

#220

헤카테를 이용해 밖으로 유인하거나, 겁을 줘서 내쫓을 심산인가. 물론 유일한 감시망인 카르 신관이 자리를 비우면 그만큼 일을 속행하기 쉬워지겠지. 하지만 헤카테를 마주한 카르 신관은 우리의 기대와는 다르게 움직일 것이다.

“카르 신관은 신력이 마력을 밀어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 헤카테든 마물이든 위협이 될 만한 생물을 본다면 신전 안으로 피할 거예요.”

“…신의 곁이 제일 안전한 곳이라, 이건가.”

마석을 쓴 헤카테든 마물이든 신전 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 여러모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 먼저 고안해 낸 방법이 막히자 아이리스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한참을 궁리한 끝에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불쑥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럼 마법으로 재우는 건 어때?”

“저도 그 방법을 생각했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고위 사제예요. 다른 마법은 몰라도 특히나 정신 계열 마법엔 쉽게 걸리지 않을 거예요.”

“아이씨, 망할 놈의 신력.”

아이리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옅게 혀를 찼다. 신력을 가진 사제를 욕하는 모습이 퍽 마물 같았다. 함께 고민해 주는 그가 고맙다가도, 둘이 생각해도 묘안이 나오지 않으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왕래가 잦은 다른 신전과는 달리 레톤의 신전은 카르 신관이 혼자 지키고 있기에 침입하기 쉬울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오산이었다. 도리어 사람이 없으니 시선을 끌기 어려워졌다. 이아페처럼 신도들 사이에 몸을 숨기기도 어렵고, 은밀하게 인파에 섞여 손을 쓸 수도 없다.

도무지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아 애꿎은 입술만 뜯던 그때, 아이리스가 중얼거렸다.

“마력이건 신력이건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공평한 방법이 있긴 한데.”

“그게 뭔데요?”

아이리스는 눈 하나 꿈쩍대지 않고 말했다.

“수면제.”

“네?”

“카르 신관한테 수면제만 먹이면 돼. 간단하지?”

간단하지. 간단은 한데…. 경계심이 많은 카르 신관에게 수면제를 탄 음식을 먹이기란 힘들어 보였다. 그런데도 아이리스는 마치 떠다니는 날파리 잡듯 쉽게 말했다. 나는 알지 못하는 노하우가 있나 싶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먹이게요?”

“상대가 나라면 티타임이라도 가져 줄 거야. 어차피 신전을 찾아오는 신도도 없으니까.”

“만약 차에 입도 대지 않으면 어떡하려고요?”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경계심이 심한 사람은 상대를 믿지 않으면 입에 물도 대지 않는다. 설령 자신이 손수 내린 차라고 할지라도 의심하고, 또 의심한다. 태자 칼리온처럼. 그런데 아이리스는 손쉬운 일인 양 가볍게 말했다.

“아무리 대단한 놈이라 해도, 목이 타면 차를 마시게 되어 있어.”

“목이 타다뇨?”

“궁지에 몰린다는 소리지.”

뭔가 알 것 같으면서도 여전히 모르겠다.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이자 아이리스는 설명하기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적거리며 말했다.

“그래서 어때?”

“가능하기만 하다면 좋은데… 괜찮겠어요?”

재차 의사를 묻자 아이리스는 농담하는 기색 없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불가능한 일이라면 애초에 말 안 했어.”

***

아스레인은 생각보다 시원스레 아이리스의 제안을 승낙했다. 상대가 고위 사제인 만큼 직접적으로 마법을 쓰는 일은 피하는 게 좋다는 의견이었다. 마법은 아이리스가 실패했을 경우를 대비한 최후의 보루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당일, 우리는 마차를 타고 레톤 신전이 있는 숲에 도착했다. 저 멀리 수풀 사이로 뾰족한 지붕이 보이자 아이리스는 영혼 없는 탄성을 흘렸다.

“이야, 폐허 다 됐네.”

그의 말대로 레톤 신전은 전에 봤을 때보다 한층 더 허름해져 있었다. 멀리서도 벽과 기둥에 난 균열이 가뭄 난 땅처럼 확실하게 드러났다. 그나마 신전 앞을 늠름하게 지키던 병사의 석상은 칼이 반쯤 부러져 있었고, 신전 앞뜰에 놓인 사자 상은 말할 것도 없었다. 클라우스 사건에 연루되어서 안 그래도 적었던 신도와 지원이 거의 바닥난 모양이다.

하지만 더 이상 사람들에게 버림 받은 신이 안쓰럽진 않았다. 동정조차 아까웠다. 이대로 레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도 유피테르는 영원할 테니까. 씁쓸한 기분을 한숨으로 흘려보내며 아이리스에게 물었다.

“준비는 다 됐어요?”

“응.”

선뜻 고개를 끄덕인 아이리스는 주머니에서 손가락만한 병을 꺼내어 보여 주었다. 마치 물처럼 아무 색도 없는 액체가 반 정도 담겨 있었다. 수면제라고는 조금도 의심되지 않아 유심히 관찰하니, 아이리스가 병을 살짝 흔들며 말했다.

“최대한 천천히 잠에 빠지도록 약초의 양을 조절했으니, 웬만해서 약을 의심하진 못할 거야.”

“직접 만들었어요?”

“…이 정도는 배웠으니까.”

아이리스는 병을 주머니에 넣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배웠다니, 누구에게? 안겔루스 대학에서 자연스럽게 잠드는 수면제 만드는 법을 알려 주지는 않을 텐데. 그럼 설마 클라우스 자작한테?

“안 들킬 수 있겠나?”

“민폐는 안 끼칠 테니 괜한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그 말을 끝으로 아이리스는 곧장 걸음을 돌렸다. 멍하니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채 몇 걸음 가지 않은 그를 붙잡고 말았다. 왠지 내가 그를 사지로 몰아넣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난데없이 팔을 덥석 잡으니 아이리스는 당황한 듯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리스. 역시 그냥 마법을 쓸까요?”

“괜찮다니까.”

“그래도….”

말끝을 맺지 못하자 아이리스는 손을 떼어놓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 내 출신을 잊은 거 아니냐?”

“안 잊었어요.”

“그럼 알겠네. 자랑은 아니지만, 널 만나기 전까지 이따위 짓거리하면서 입에 풀칠하고 살았어.”

“그…….”

“네가 너무 나를 온실 속 화초처럼 여겨 줘서 나도 깜빡 잊을 뻔했지만 말이야.”

슬쩍 올라가는 입꼬리가 퍽 장난스러웠다. 아무래도 내 걱정이 너무 과했던 것 같다

 “못 믿는 건 아니에요.”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팔을 놓자 아이리스는 내 머리를 가볍게 토닥였다.

“그건 다행이네. …아무튼 걱정하지 마.”

그 후 신전을 향해 가는 뒷모습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윽고 아이리스가 레톤의 신전에 도착하자 나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그가 문을 두드리니 다행히 카르 신관이 나와서 맞이했다. 무슨 말을 주고받는지는 모르지만, 아이리스는 무사히 카르 신관과 함께 신전으로 들어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긴장만 남은 기다림 끝에 신전 문이 열렸다. 그런데 나온 사람은 아이리스뿐이었다. 이쪽으로 터벅터벅 걸어온 아이리스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됐어요?”

“피곤하다고 날 내쫓았어.”

“네? 그럼 차는요?”

“마셨으니까 피곤하다고 하지.”

카르 신관이 수면제를 마셨다는 소식에 참았던 숨을 한 번에 몰아쉬었다. 크게 안도하는 나와 달리 아이리스는 꽤나 차분한 태도로 말했다.

“조금만 지나면 아무 소리도 못 들을 거야.”

“어떻게 알아요?”

단순한 질문에 아이리스는 대답 대신 신전의 어느 부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커튼이 쳐진 방에 실루엣이 느릿느릿 지나갔다. 저긴 고해소와는 정반대에 있는 사제의 방이었다. 슬슬 약효가 돌아서 자려는 건가.

잠시 후, 아이리스는 신전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가 보자.”

카르 신관이 잠들었으리라고 확신한 목소리에 아스레인이 미심쩍은 투로 물었다.

“벌써?”

“그럼 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혼자 오시든가요.”

“…말 한번 곱게 하는군.”

“교수님도요.”

짧은 언쟁 끝에 아이리스는 우리와 함께 신전으로 걸어갔다

 “신관님!

 문 앞에 선 아이리스는 낡은 문이 흔들릴 정도로 덜컹거리며 노크했다.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는지, 아이리스는 이번에 신전 안에까지 들릴 정도로 크게 소리쳤다.

“신관님! 여기 위급한 환자가 있어요!”

여전히 조용했다. 신전 주변에 인기척이 없는 걸 확인한 아이리스는 대번에 신전의 문을 땄다. 마법을 쓴 건지, 기술을 쓴 건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정확하고 빠른 손놀림이었다. 잠금장치 하나 망가뜨리지 않고 문을 연 솜씨를 보니 저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대단하네요. 아이리스.”

“…이런 일로 인정받고 싶었던 건 아닌데.”

아이리스는 썩 달갑지는 않은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며 신전에 들어갔다. 이후 마치 제 집을 드나들 듯 익숙하게 사제의 방으로 안내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보니 정말로 카르 신관이 몸을 뉘이고 잠들어 있었다. 미처 모포를 덮지 못할 정도로 잠이 쏟아졌던 모양이다.

벽에 살짝 기댄 아이리스가 팔짱을 끼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러면 된 거지?”

“설마… 이 방법이 먹힐 줄은 몰랐어요.”

“이런 얕은 수가 더 잘 먹힐 때도 있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는 아이리스에게 슬쩍 물었다.

“근데 무슨 얘기를 했는지 물어봐도 돼요?”

말해주지 않을 줄 알고 눈치를 살폈건만, 아이리스는 예상 외로 흔쾌히 대답했다.

“클라우스의 죽음에 관해 물었어.”

“…네?!”

“아는 거 있냐고 캐물으니까 아무 말 못하고 차만 마시던데?”

목이 탄다는 게, 그 얘기였구나. 저절로 숨이 턱 막히는 화제에 나도 마른침을 삼켰다. 설마 불안한 심리를 이용해서 경계심이 만들어 낸 벽을 뚫을 줄은 몰랐다. 한 수 배웠다는 듯 머리를 주억거리자 아이리스가 피식 웃었다.

“뭐, 아무튼 혹시 모르니까 내가 여기 있을게.”

“그럼 부탁할게요.”

아이리스에게 카르 신관을 감시하길 부탁하고 아스레인과 함께 발길을 옮겼다. 레톤의 신전은 사람들 사이에서 잊힌 만큼 쥐죽은 듯 조용했다. 산새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 이곳은 마치 세상에서 뚝 떨어져 나온 것만 같았다.

방해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미묘한 불안감을 떨쳐 내지 못했다. 한때 무자비한 전쟁신이라 불렸던 레톤의 신전을 이렇게 쉽게 들어갈 수 있다고? 그럴 리 없다. 분명 우리가 쉽게 발견하지 못한 것이 숨어 있을 테다.

“이아페의 불꽃이 어디 있었는지 기억하나?”

아스레인의 물음에 자연스럽게 과거를 회상했다. 그 당시, 검은 그림자의 정체를 알기 위해 고해소를 샅샅이 뒤졌었다. 열다섯 평 남짓 되는 방 안에는 불이라곤 아예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해소는 대낮처럼 환할 수 있었던 이유를 똑똑히 기억한다.

“제 기억으로는 고해소엔 성유물밖에 없었어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단상에 잔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카르 신관은 그것이 과거 대신관이 신탁을 받을 때 성수를 담았던 성배라고 설명했다. 그날 보고 들은 기억을 세세하게 설명하자 아스레인이 턱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신탁을 받는 곳에 불꽃을 둔 건가….”

“아직 모르지만, 따로 장소를 마련해서 신의 불을 안치해 둔 것 같아요.”

“그럼 일단 고해소로 가 보지. 성유물이 불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르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긴 복도를 지나 기도실로 향했다. 부디 헤카테에서 찾아낸 판도라가 길을 열어 준 것처럼 성유물도 우리를 진실로 안내해 주길 바랐다.

끼이익- 녹슨 경첩 소리가 귓등을 기분 나쁘게 긁었다. 오랜만에 들어오는 기도실에는 여전히 신도를 기다리는 의자가 줄줄이 놓여 있었다. 사람 냄새는커녕 먼지만 떠다녀서 왠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그리고 저 멀리 두 짝으로 된 나무문과 문틀에 새겨진 글자가 보였다.

‘그릇된 껍데기를 벗고 진실을 마주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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