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
‘누군가 금기를 거스르는 이유는 여럿이지만, 대개 신의 권능과 엮여 있죠.’
‘신의 권능…?’
‘삶과 죽음 말입니다.’
시스템에게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그가 죽고 싶지 않아서 신이 되고자 하는 줄 알았다. 대개 이승을 떠나기 싫다는 욕심과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영생을 바라니까. 하지만 노인과의 대화 속에서 나타난 유피테르의 태도는 사뭇 달랐다.
‘그거라면 과연… 내게 주어진 사명을 이룰 수도 있겠구나.’
그는 단지 인간을 위해서 신이 되려는 것 같았다. 어지러운 세상을 정리하기 위해 황제가 되고, 믿을 곳 없어 불안해하는 인간을 위해 마침내 신이 된다. 그건 마치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내려온 사도 같지 않은가. …설마 정말로 유피테르가 ‘신의 아이’라도 되는 걸까.
결계 안에서 들은 대화에서 의문점은 그뿐이 아니었다. 당시엔 대화 내용에 집중하느라 눈치채진 못했지만, 그들은 제국어로 대화하지 않았다. 성스러운 언어라고 알려진 고대 이아페의 언어로 이야기했다. 그 말은 즉, 유피테르는 카르사 제국을 건국하기 전에 고대 이아페에서 지냈다는 뜻이었다.
문제는 고대 이아페를 멸망시키고, 문명을 역사에서마저 지워 버린 것이 카르사 제국이라는 사실이다. 자신의 고향을 스스로 멸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듣자하니 ‘인간이 진정 원하는 것’을 알아내기 위해 몇 번의 기적을 행했던 것 같은데…. 아무도 자신의 과거를 알지 못하도록 묻은 건가? 생각할수록 머리만 아파졌다.
결국 유피테르의 과거를 알기 위해서도, 헤카테를 무력화하기 위해서도- 온 대륙에 퍼진 신전의 불꽃을 제거해야 했다.
신전 주변 상황이 정리되고 나서 그들과 함께 신전 접견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번거롭게 언덕 아래 집까지 내려갈 필요는 없었다. 더 이상 우리를 감시할 불꽃이 사그라졌기 때문이었다. 먼저 접견실로 들어간 테세스는 내 눈치를 흘끔 살피며 말했다.
“차를… 내어 드릴까요?”
“곧 다시 돌아갈 거라 괜찮아요. 그보다 지도를 볼 수 있을까요?”
“아, 예예.”
나름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여도 테세스는 움츠러든 어깨를 펴지 못했다. 방금 전, 내가 헤카테를 다루는 모습을 보곤 다소 긴장한 듯했다. 이내 테세스는 덩달아 안절부절못하는 시시포스를 데리고 지도를 가지러 나갔다.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길 기다렸다가 이카로스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아스레인의 뿔을 잘라 간 장본인을 찾았어요.”
갑작스러운 소식에 이카로스의 눈이 부엉이처럼 커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카로스는 오로지 아스레인을 위해 죽음을 불사하고 신전을 침입했었다. 다른 누구보다 아스레인을 위한 복수를 꿈꿔 왔던 그이기에 매우 조심스럽게 진실을 전했다.
“이 제국을 건국한 황제, 유피테르가 아스레인의 뿔을 잘라서 봉인시켰어요. 그리고 놀랍게도 여전히 살아있어요. …이아페의 대사제 카인이라는 이름으로요.”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는지, 지금껏 어떤 정보를 얻었는지 차근차근 설명했다. 걱정과 달리 이카로스는 차분하게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러나 고요하게 이글거리는 다홍색 눈동자가 마치 대지 아래 흐르는 마그마처럼 보였다. 툭, 하고 충돌하면 두터운 대지를 뚫고 폭발할 것 같은 고요한 분노였다.
“…지금 그자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아뇨. 기척을 완전히 지우고 대륙 어딘가에 숨어 버렸어요.”
지금까진 사건이 벌어지면 찾아가서 꼬리를 붙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 방법으로는 모든 계획을 완벽하게 짜 둔 유피테르의 손에 놀아날 뿐이었다. 그러니 조금은 무모해 보여도 다른 수를 써야만 했다.
“신전에 있는 불꽃이 그의 감시망이자 근처에 있는 헤카테를 조종하는 코어예요. 그러니 이제부터 불꽃을 하나씩 없애나갈 작정이에요. 그럼 그도 가만히 있진 못하겠죠.”
유피테르가 어디에 있든 상관없다. 우리가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아챘을 테니까. 이젠 넘어가는 도미노의 뒤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맞은편에서 블록을 무너뜨려 버리길 선택했다. 그 언젠가 가운데서 부딪치길 바라면서.
“물론 쉽지 않을 거예요. 헤메라의 신전은 비교적 신도수가 적고, 사제가 우리와 친했으니 접근하기 수월했지만… 다른 신전은 우릴 경계하겠죠. 그러니 가능한 은밀하게 움직여야 돼요.”
“불꽃을 마력으로 꺼뜨리려는 겁니까?”
“아뇨. …흡수할 거예요.”
이미 결심을 끝낸 일이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이카로스와 달리 아스레인은 곧장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그걸 또 하겠다는 건가?”
“네. 처음은 방법을 몰라서 힘들었지만, 다음부턴 괜찮을 거예요.”
“…태오.”
“아스레인이 도와주면 아무 문제없어요. 정말이에요.”
굳은 결심을 드러내자 아스레인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설득됐다기보다는 포기에 가까웠다. 나 때문에 마음 고생하는 그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번만큼은 다른 방법을 쓰고 싶지 않았다.
“단지 신력을 제거하는 것만으로는 안 돼요. 그렇게나 빼앗겼는데… 우리도 그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아야 하지 않겠어요?”
처음 헤메라의 신전이 생겨 신도를 빼앗은 것은 단순한 우연이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신도, 신력, 그리고 헤카테까지- 좀먹듯 조금씩 가져갈 것이다. 자신이 정말로 신이라 생각하는 그 오만한 자를 끌어내리기 위해서.
“그러니 이카로스. 그 자를 찾는 일은 우리에게 맡겨 줄래요?”
잠시 고뇌에 빠진 이카로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이카로스가 없으면 이곳은 너무도 위험하다. 신전의 불꽃을 빼앗긴 탓에 언제 유피테르나 그의 수하가 찾아올지 모른다.
이카로스 또한 그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지, 기나긴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생기면 바로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에요. 이카로스만큼 든든한 동료는 또 없을 테니까요.”
똑똑-
때마침 테세스와 시시포스가 지도를 가지고 접견실로 들어왔다. 두루마기처럼 둘둘 말려 가죽 끈으로 묶인 지도는 누가 쓰던 것인지 손때가 많이 묻어 있었다. 쭈뼛거리며 걸어온 테세스는 테이블에 지도를 펼치며 멋쩍게 말했다.
“그… 죄송합니다. 신전에 들른 모험가가 두고 간 지도라 조금 낡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해요.”
소라 모양처럼 생긴 대륙 지도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드넓은 제국에서 유피테르의 손길이 닿은 곳은 얼마나 될까. 아니, 차라리 그의 감시망 안에 없는 지역을 찾는 게 빠를지도 모르겠다. 가느다란 한숨을 흘리며 테세스에게 물었다.
“혹시 신전이 어디 있는지 표시해 줄 수 있어요?”
“어떤 신전 말씀이십니까?”
“모든 신전이요. 아는 대로 전부 표시해 주세요.”
테세스는 영문 모를 표정으로 창가 화분에 있는 하얀 자갈을 가져왔다. 그러곤 가죽으로 된 장기판에 말을 두듯 하나씩 올려놓았다. 지도에 올라간 자갈은 총 열세 개. 헤메라와 열두 신을 합친 수와 똑같았다.
“생각보다 적네요?”
“원래부터 각 신은 하나의 신전만을 가집니다. 마을에 순례를 온 사제가 만들어 낸 기도실도 편의상 신전이라고 부르기는 합니다만, 사실상 신탁을 받는 신전은 각각 하나뿐이죠.”
유피테르를 방해하려거든 이아페의 불꽃이 있는 곳을 가야 하니 목표는 확실히 좁아졌다. 그중 신도의 왕래가 많은 곳은 후발로 미루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지도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다시 테세스에게 물었다.
“비교적 신도가 드문 신전이 있을까요?”
“역시 이곳이죠.”
테세스가 도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신전을 가리켰다. 한때는 찬란했으나, 이제는 따르는 자가 거의 없는 레톤의 신전이었다. 예전에 아이리스와 연루된 사건을 조사하면서 들른 적이 있었는데….
“어때요?”
넌지시 말을 던지자 아스레인이 한숨이 섞인 투로 대답했다.
“다른 곳에 비해 조용하니 나쁘지 않겠지.”
“그럼 여기로 하죠.”
이로서 다음 목적지가 정해졌다. 카르 신관이라고 했었나. 아무도 레톤을 따르지 않는 시기에도 믿음이 굳건한 그에게 미안하지만, 신의 불을 빼앗아 가야겠다. 더 이상 헤메라 신전에 용건은 없었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시는 겁니까?”
“달리 일이 있어서요.”
이곳은 당분간 괜찮을 것이다. 헤카테가 더는 유피테르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뿐더러, 이카로스가 든든하게 지키고 있으니 걱정할 바 없었다. 도리어 걱정되는 것은 마을과 신전이 아니라 이카로스였다.
신전을 떠나기 전, 이카로스를 붙잡고 속삭이듯 말했다.
“저, 부탁이 있어요.”
“말씀하십쇼.”
실은 축도의 날에 내려온 신탁이 계속 신경 쓰였었다. 정말로 유피테르에게 미래를 내다보는 눈이 있다면, 그날의 신탁 또한 예언서였다. 그리고 신탁에는 제국의 망조보다도 불길한 내용이 담겨있었다.
“가능하다면 이카로스의 분신으로 그들에게 소식을 전해 주세요.”
“그들이 누굽니까?”
“이카로스의 형제라고 하면, 이해하려나요?”
하늘과 대지를 지탱하던 다섯 개의 별이 무너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스레인이 균형을 위해 만들어 낸 마물을 뜻하는 것 같았다. 괜한 기우일지도 모르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신의 불로 만들어진 마물을 조심하라고…. 혹시 신력을 가진 자가 오거든 섣불리 대치하지 말라고 꼭 말해 주세요.”
간곡한 부탁에 이카로스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짧다면 짧고, 기다면 긴 만남이었다. 느긋하게 찻잔을 기울이며 그간의 안부를 물으면 좋겠지만 이제 여유를 가질 시간은 없었다. 언젠가 이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마음 편하게 웃을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럼 잘 부탁해요.”
“모쪼록… 조심하시길.”
그렇게 헤메라 신전을 지키는 그들을 뒤로하고 마을로 내려갔다. 마을을 위협하는 헤카테가 사라져서 그런가. 처음 왔을 때보다 길목에 돌아다니는 사람이 여럿 보였다.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가 오래 지속되길 빌며 지나가는데, 저 멀리서 익숙한 집이 보였다.
비스듬한 산자락에 뿌리내린 자작나무 집. 타르타로스 사건이 마무리 될 무렵, 동굴에서 사망한 유족을 만나러 갔던 곳이었다. 혹시 사람이 있나 싶어 근처로 다가가니 낮은 담장 너머로 동그란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천사님?”
그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 이윽고 팔꿈치로 툭, 아스레인을 건드리자 그도 따라서 후드를 썼다. 다행히 소녀는 집 밖으로 달려 나오느라 우리의 모습을 제대로 보진 못한 듯했다.
“진짜 천사님이다!”
“안녕. 오랜만이네.”
아이들은 정말 빨리 크는구나. 그날부로 시간이 그리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키가 한 뼘이나 자라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부쩍 활발해진 모습을 보니 왠지 마음이 뭉클해졌다. 잠시 안부라도 물을까 싶어 바닥에 쪼그려 앉자 소녀가 사랑스럽게 웃었다.
동그랗고 작은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다가 뒤늦게 소녀가 안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건 뭐야?”
“아, 이건….”
마치 아기를 포대에 싸매듯 둘둘 말린 천을 들고 있기에 애착이불이나 솜 인형쯤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소녀의 품 안에서 나온 것은 완전히 예상 밖의 물건. …아니, 생명이었다.
“제 친구예요.”
캬오! 포근한 천 밖으로 고개를 내민 털뭉치가 반갑게 울었다. 조랭이 떡처럼 둥글둥글한 몸매에 박쥐를 닮은 날개, 이마에 박힌 보석은 물구나무서서 봐도 마물이었다. 얼마나 어린지 털이 마치 민들레 홀씨처럼 포슬포슬했다. 보기엔 무척 귀엽지만, 이래 봬도 2급 위험 마물이나 되는 ‘레트네’의 새끼였다.
“귀엽죠?!”
“어, 어어….”
“이름은 미스트예요. 엄청 뿌연 날에 만났거든요!”
소녀는 내게 레트네를 자랑하듯 불쑥 내밀며 해맑게 웃었다. 레트네도 그런 소녀가 싫지 않은 듯 날개를 파닥거리며 손에 얼굴을 비볐다. 보드라운 털이 간지러운지, 소녀는 꺄르르 웃으며 말했다.
“펴엉생 함께 있을 거예요.”
“캬오오!”
어린 아이와 새끼 마물이라니. 너무 사랑스러운 한 쌍이지만, 혹시 레트네가 성체가 된 후로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일이 생길까 봐 걱정됐다. 아스레인이라면 해답을 알려줄까 흘끔 옆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웬일로 아스레인도 별 말 없이 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말리지 않는 거라면 괜찮은 거겠지.
“응. 미스트도 네가 함께 있으면 기쁠 거야.”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레트네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때 레트네의 뒷목에 붙어있는 거즈를 발견했다. 왠지 좋지 못한 사연이 있는 것 같아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만난 거야?”
“엄마랑 산길을 산책하는데, 미스트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어요.”
“…뭐? 나뭇가지?”
“네에.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요, 열심히 날다가 힘이 약해서 떨어진 것 같다고 했어요.”
약한 개체라 둥지를 옮기다가 무리에서 떨어져나간 건가. 만약 모녀가 발견해서 구해 주지 않았더라면, 하늘을 제대로 날아보기도 전에 그대로 굶어서 죽었을 것이다. 이윽고 소녀는 레트네를 품에 소중하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근데 지금은 괜찮아요.”
“미스트는 네 덕분에 살았구나.”
“어… 아뇨!”
소녀는 머리를 휘휘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 아저씨가 우리 집에 와서 치료해 주셨어요.”
“아저씨?”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이자 소녀가 내게 다가와 귓속말했다.
“마물 아저씨 말이에요.”
잠깐. 마물 아저씨라면, 닉스가… 여길 왔었다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등장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굳어버렸다. 그러자 소녀는 해맑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잘 지내고 있는지 보려고 왔대요.”
자세히 보니 레트네의 상처를 감싼 것은 거즈가 아니라 거미줄이었다. 언제 이곳을 다녀간 거지? 이카로스와는 마주치기 싫어하면서 굳이 캄페 산을 다녀갔다니. 정말로 소녀가 잘 지내고 있는지가 궁금했던 거라면, 닉스는 역시….
“오늘은 그 아저씨랑 같이 안 왔어요?”
닉스를 보길 기대하는 듯 소녀가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어린 아이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 미안해서 슬쩍 아스레인을 올려다보았다. 이번엔 다른 아저씨가 왔어. 이 아저씨도 꽤 대단한 마물인데…라고 말하려다가 겨우 참았다.
“아…. 그게… 아저씨가 다른 일이 많아서 바쁘신가 봐.”
열심히 에둘러 말하자 소녀는 의외로 순순히 수긍했다.
“그렇구나~ 역시 미스트 같은 마물을 구해 주려면 뼈 빠져라 돌아다녀도 하루가 부족하겠죠.”
“하하, 그런 표현은 어디서 배웠니?”
“우리 엄마가 맨날 그래요. 천사님도, 헤메라 신님도, 마물 아저씨도 전부 우리를 위해서 고생하고 있다고요.”
그리 말한 소녀는 아스레인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아저씨도 그런 거죠?”
설마 자신에게 말을 걸 줄 몰랐는지, 아스레인은 한동안 소녀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이내 아스레인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그간 쌓인 피로가 말끔하게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너와 미스트를 보니 고생하는 보람이 있는 것 같아.”
“우와…! 정말요?”
소녀가 방방 뛰며 기뻐하니, 레트네도 날개를 퍼덕이며 기쁜 울음소리를 냈다. 벌써부터 그들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된 듯했다. 소중한 친구가 된 그들의 머리를 한 번씩 찬찬히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그러니 앞으로 잘 부탁해. 서로가 서로를 지키는 거야.”
“네. 미스트는 제가 지킬게요!”
인연은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내고, 선의는 또 다른 선의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세계의 균형을 맞춰진다. 누군가 주춧돌을 빼내려고 해도, 기둥을 무너뜨리려 해도 힘겹게 쌓아올린 균형은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