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
귀를 의심했다.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카인이 자기 자신을 다른 누구도 아닌 유피테르라고 칭했다. 카르사 제국에서는 제아무리 대단한 출신이라 한들 피휘(避諱)로 인해 함부로 황제의 이름은 쓸 수 없다. 그런데 카인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황제의 이름을, 심지어 건국 이래 가장 위대한 선황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 당당함으로 인해 머릿속에 합리적인 생각이 움텄다.
카인은 곧 유피테르라고.
“그럴 리가….”
설상가상 노인과 카인의 대화소리마저 끊겼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곧장 물그릇으로 달려갔다. 뭐라도 남아 있길 빌었지만 투명한 수면에 황망한 내 얼굴만 비쳤다.
카르사 유피테르. 이 세계에 온 후로 그 이름에서 벗어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나? 생각해 보면 그는 소설 속 누구에게도 대체될 수 없는 등장인물이다. 소설의 배경인 카르사 제국을 건국한 자이자, 두 종족간의 갈등을 만든 원흉, 그리고 아스레인을 봉인시킨 존재. 모든 시작과 끝에는 늘 유피테르가 있었다.
그리고 그가 아직도 살아있다. 심지어 카르사 제국을 수호하는 열두 신이자, 신의 뜻을 전하는 대사제 카인의 정체가 유피테르였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여태 카인이 유피테르이기에 말이 되는 일들만 가득했다. 누군가 내 뺨을 후려쳐서라도 꿈이라고 해 줬으면 좋겠다.
“…대체….”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정말로 유피테르가 카인과 동일 인물이라면, 그는 카르사가 건국된 후부터 지금껏 살아있는 것이다. 거의 영생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면서도 젊음을 유지한 것은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진즉 죽었어야할 터.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흙으로 돌아가지 않은 방법은 지금으로선 하나뿐이었다.
신력. 그것이 그의 생을 붙잡고 있다.
그럼 카인. …아니, 유피테르는 지금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 걸까. 수면 위로 떠오르는 기포처럼 의구심이 쉴 새 없이 고개를 들었다. 평소라면 진즉 아스레인과 대화하며 의심을 하나씩 풀어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물어볼 수 있겠나. 자신의 뿔을 잘라 봉인시킨 장본인이 살아있다는데. 아마도 지금 그보다 혼란스러운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스레인.”
이름을 불러도 반응이 없었다. 흘끔 올려다보니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옆얼굴이 보였다. 반대의 상황에서 그라면 어떻게 할까. 눈앞의 진실보다도 나를 진정시키려 애쓰겠지. 하지만 나는 그만큼 든든하지 못한 데다가 대단한 말주변도 없으니, 그저 얼음장같이 차가워진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그제야 아스레인이 고개를 돌려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무 말을 하지 않는 그의 눈빛엔 우수의 그림자도 없었다. 원수를 향한 증오나 허무 같은 감정이 들 만도 한데, 아스레인은 도리어 불안해하는 나를 안심시켰다.
“미안하네.”
“네? 왜 저한테 사과를….”
“잠깐 생각을 정리한다는 게, 원치 않게 걱정을 끼쳤나 보군.”
“아, 아니에요.”
당황한 나머지 고개를 빠르게 휘젓자 아스레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세상에 절대 일어나지 않는 일이란 없다는 걸 알지만,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네.”
지금 제국을 어지럽히는 자가 유피테르라 한다면, 어느 누가 믿어 줄까. 당연히 아무도 믿지 않겠지. 도리어 미쳤다고 매도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선황의 위대한 명성에 먹칠했다며 불경죄로 형장의 이슬이 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럴수록 냉정해져야 한다. 쉽게 무너져서는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유피테르가 원하는 일일지도 모르니까. 아스레인의 팔에 머리를 기대곤 솔직한 속내를 내비쳤다.
“저 실은, 조금 무서워요.”
허공에 떠다니는 먼지처럼 정처 없이 눈을 굴리며 한 자 한 자 신중하게 내뱉었다.
“어떻게든 진실을 찾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는데, 솔직히 말해서 버거워요. 지금이 제일 그래요. …아스레인은 저보다 훨씬 혼란스럽겠죠. 지금 어떤 마음인지 상상도 안 돼요.”
나라면 어떨까. 나의 신체 일부를 잘라 간 것도 모자라 절벽에 봉인시킨 원수가 살아있다고 한다면. 그리고 그 작자가 나를 닮은 복제품을 만들어 내 여론을 자신에게 유리한 식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면.
가히 절망적이다. 복수에 눈이 멀어 어떻게든 무너뜨리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스레인은 아무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화내는 방법을 잊어서가 아니었다. 당신을 걱정할 나를 위해서 내린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아스레인과 함께 여기까지 온 걸 후회하진 않아요. 여기서 멈출 생각도 없고요.”
그러니 나도 버젓이 버텨야지. 상대가 대사제든, 선황이든, 설령 신이라고 할지라도 꿋꿋하게 이겨내야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로 결심했으니, 벌써부터 흔들릴 수는 없다.
“아스레인은…후회해요?”
나지막이 물어보자 아스레인은 조용히 내 손을 꽉 잡았다. 백 마디의 말보다 확실한 대답이었다. 그래서 나도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다. 힘겨운 진실을 맞이한 순간 함께 있을 수 있어서. 그리고 서로를 사랑할 수 있어서.
발목을 붙잡는 우울을 기꺼이 떨쳐내며 말했다.
“그만 나가죠. 카인. …아니, 유피테르가 우리가 여기 있는 걸 알지도 몰라요.”
그러고 보니 유피테르는 우리에게 왜 이런 기억을 보여 주는 걸까? 막말로 침입자나 다름없는데. 아니면, 정말로 유피테르도 우리가 이곳에서 과거를 들여다보고 있음을 모르는 걸까. 그렇다면 유피테르가 알아채기 전에 결계를 벗어나야만 했다.
“여기서 나가는 방법을 알아요?”
“그때처럼 결계에 틈을 내는 수밖에.”
아스레인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금색으로 빛나는 검을 만들어 냈다. 불꽃에 담긴 신력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순도 높은 마력이 그의 손에서 끊임없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이윽고 아스레인은 군더더기 없는 자세로 금빛 검을 휘둘렀다.
휙! 단숨에 허공을 가르자 검이 지나간 자리로 얇은 선이 그어졌다. 마침내 만들어낸 결계의 틈 너머로 헤메라의 고해소가 보였다. 아스레인은 앞서 밖으로 나가서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쪽이네.”
그를 따라 나가려는 순간, 등 뒤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훅- 훅- 바람소리가 마치 나를 부르는 것 같아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물그릇 앞에 회색 비늘을 가진 뱀이 똬리를 트고 있었다.
마치 폭풍우가 다가오는 하늘을 보는 듯 암울한 회색빛이 꼭 유피테르를 닮아 있었다. 날카롭게 찢어진 파충류의 눈동자를 홀린 듯 바라보고 있으니, 아스레인이 내 팔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그 덕분에 늦지 않게 결계에서 현실로 억지로 끌려나왔다. 살았다. 두 발 아래 느껴지는 단단한 땅에 안도하던 그때였다.
“크윽…!”
갑자기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것 같은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뱃속에서 수백 마리의 벌레가 기어 다니면 이렇게 될까. 아니, 억지로 삼킨 구렁이가 좁디좁은 위장에서 몸부림쳐도 이토록 아프진 않을 것이다. 극심한 통증에 결국 저릿한 배를 부여잡고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태오!”
눈앞이 어지럽다. 지진이라도 난 줄 알았건만, 거칠게 흔들리는 건 세상이 아니라 나였다. 이마를 바닥에 대었는데도 귓가에서 꽹과리를 치는 듯 머리가 댕댕 울렸다. 감히 결계에 발을 들인 대가인가? 서서히 심장으로까지 번지는 통증의 원인이라도 알고 싶던 차였다. 내 상태를 다급히 확인하던 아스레인이 절망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째서 불꽃에 있던 신력이 이쪽으로….”
그 말에 눈을 퍼뜩 떴다. 판도라는 물론이고, 제단에 깃든 신력까지 전부 내게 흘러 들어왔던 것이다. 그러니 이건 일종의 기회였다. 유피테르가 가진 힘의 일부를 흡수할 기회. 당장 쓰러질 것 같은 고통에도 겨우 정신을 붙잡고 버텼다.
이 사실을 모르는 아스레인은 곧장 나를 품에 끌어안으며 말했다.
“조금만 참아 보게. 내가 당장….”
“그러지 마요.”
“…뭐?”
내게 다가온 손을 밀어내며 힘겹게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흡수…할 수 있어요.”
뜬금없는 소리에 아스레인은 당황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계획인지 이해하지 못했겠지. 역시나 그는 다시 마력을 주입하려고 시도했다. 결국 그의 손을 거칠게 붙잡으며 재차 말했다.
“저를, 윽… 믿어 주세요.”
자꾸만 감겨 오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자 그의 눈동자 안에 창백하기 그지없는 얼굴이 보였다.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 안다. 하지만 성공할 자신이 있었다. 나는 그리 나약한 인간이 아니니까.
오로지 신력에 집중하려 눈을 감으니 차분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 아까 그가 한 것을 봤으니 비교적 쉽게 따라할 수 있을 겁니다.
시스템이었다. 신력을 통제할 수 있도록 나를 도와주려는 것인가. 시스템은 마치 걷는 법을 가르쳐 주는 선생님처럼 차근차근 설명했다.
- 머릿속으로 작은 상자를 상상하십시오. 그리고 그 안에 가두는 겁니다. 뱃속에 움튼, 난폭한 뱀을….
상자. 작은 상자. 뱀이 들어가도 괜찮을 만큼 견고한 상자를 만들자. 조금만 방심하면 곧바로 송곳니를 드러낼 테니,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상자 안에 가두자. 분명 가능할 것이다.
상자. 작은 상자. 뱀이 온전히 쉴 수 있을 만큼 아늑한 상자를 만들자. 난폭한 뱀이 다시는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나갈 생각이 들지 않도록 온전히 품에 안자. 분명 성공할 것이다. 레톤의 잔재가 내게 흡수되었듯 같은 결을 가진 유피테르의 신력도 금세 융화될 테니.
- 당신이라면 가능합니다. 그 어떤 마물도 기꺼이 안을 수 있는 당신이라면….
시스템의 말대로 몇 번이고 상자를 만들어 냈다. 그것이 깨지면 다시 만들고, 그 위에 새로운 상자를 덮어 몸부림치는 뱀을 길들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손끝마저 저릿하게 만들던 통증이 점차 사라지고 메스꺼운 속도 편안해졌다.
겨우 진정이 된 후에 눈을 뜨니 아스레인이 내 이마에 손을 얹고 있었다. 마치 세례를 내리듯 성스럽고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어쩐지 중간에서부터 상자를 만들기 수월해졌나 했더니, 아스레인이 내게 희미하게나마 마력을 불어 넣고 있었나 보다.
“…이제 괜찮아요.”
힘겹게 손을 올려 아스레인의 팔을 툭툭 건드렸다. 아직 힘이 제대로 실리지 않아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지만, 몸이 말을 듣는 게 어디인가. 물론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도 아스레인의 미간에 서린 주름은 지워지지 않았다.
“정말인가?”
“네. 덕분에 숨 쉬기도 편해졌어요.”
“대체 왜. …왜 이렇게 무모한 짓을 하는 건가.”
카인의 정체를 알았을 때도 평정을 지키던 아스레인이 얼굴을 심히 일그러뜨렸다. 나보다 더 사색이 된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한발 늦게 제단의 불꽃을 발견했다. 방금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광경에 눈짓으로 제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보세요. …제단의 불꽃색이 변했어요.”
불길한 푸른색으로 빛나던 불꽃이 어느새 새하얗게 타오르고 있었다. 성공이다. 그 증거로 제단에선 더 이상 카인의 신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순백의 불꽃은 전보다 누그러들었으나 그 열기는 따스하고 다정했다. 지금 나를 끌어안은 아스레인의 손길처럼.
“믿어 줘서 고마워요.”
해사하게 웃자 아스레인은 눈을 지르감으며 나를 품에 끌어안았다.
“부디 멀리 가 려하지 말아 주게.”
“…응. 여기 있어요.”
한 손을 들어 아스레인의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 결계 안에서도 위압적인 힘을 자랑하던 그가 유독 작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아스레인의 품 안에서 편히 쉬다가 문득 바깥에서 기다리는 이들이 걱정되었다.
“이카로스가 걱정할 거……우왓!”
별 생각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렸다. 곧장 아스레인이 허리를 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바닥과 원치 않게 입을 맞출 뻔했다. 험상궂게 얼굴을 찌푸린 아스레인을 흘끔 쳐다보며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하하… 이상하네.”
“이상하긴. 이렇게 살아있는 게 기적이네.”
“에이, 그 정돈 아니었는데….”
막 아스레인의 잔소리가 날아오려는 그때였다. 갑자기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어렴풋이 테세스의 비명이 들린 걸 보면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다. 장난을 칠 새도 없이 아스레인의 부축을 받으며 신전 밖으로 나갔다.
“무슨 일이에요?”
문을 열자마자 기둥 옆에 숨어서 몸을 떨고 있던 시시포스가 말했다.
“태, 태오 님.”
시시포스는 새파랗게 질린 입술을 파르르 떨며 수풀을 가리켰다.
“저기… 헤카테 무리가 몰려왔습니다.”
그 말에 곧바로 신전 기둥 너머를 바라보았다. 이카로스가 헤카테 무리와 대치하고 있었다. 눈대중으로만 새도 족히 열댓 마리는 넘어 보였다. 이카로스는 혹여 다른 인간이 다칠까 경계만 하고 있었고, 헤카테 무리도 이카로스의 위압감에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얼마 전이었다면 당장 손을 썼겠지만, 지금으로선 전부 불필요한 힘 싸움이었다.
“걱정하지 마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니 시시포스가 “네?” 하고 되물었다. 설명하기에 앞서 당장이라도 뛰어들 것 같은 이카로스부터 말렸다.
“그럴 필요 없어요. 이카로스.”
제단의 불꽃은 이 일대의 헤카테를 다루는 코어. 그게 내게 함락된 이상-
“저들은 더 이상 우리의 적이 아니에요.”
저 헤카테의 주인은 나다.
아스레인의 부축을 마다하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자 헤카테가 일제히 나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한쪽 앞발을 뒤로 하고 상체를 숙이는 모습은 꼭 예를 갖추는 인간 같았다. 마침내 새하얀 불꽃과 함께 다시 태어난 헤카테들을 향해 명령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신전과 마을을 지켜라.”
평화를 어지럽히는 자에겐 벌을, 균형을 깨뜨리는 자에겐 응징을.
어딘가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을 놈을 향한 선전포고였다. 분명 헤메라의 신전에 있는 신력이 사라졌음을 알아챘을 것이다. 그러니 어서 우리 앞에 나타나라. 여전히 그 계획을 멈출 생각이 없다면- 당신이 쌓아올린 걸 하나씩 빼앗는 수밖에.